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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겜의 시체줍는 천재전사-287화 (287/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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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환(3)

쩌정─!

시가지에 울려퍼지는 굉음. 붉게 물든 하늘 아래 번뜩이는 백광.

골목 안에서 숨을 가다듬던 시에나는 문득 눈길을 돌렸다.

백금 거리 저편 악마와의 격전지 상공, 벼락처럼 내리꽂히는 백색 섬광이 보였다.

“···루시아.”

[악마 살해자는···아직까지 버텨내고 있구나.]

쩍쩍 갈라진 전성이 들려온다. 시에나는 고개를 다시 내렸다.

목소리의 주인은 그녀의 바텐더였다.

한때 용신의 첫 포효라 불리던 고룡이자, 까마귀 둥지에서 십 년이 넘도록 동업해온 벙어리 바텐더.

“버번.”

[그녀에게 가거라, 어린 마녀야. 내 곁에서는 너마저 위험해질 뿐이다.]

“버번, 좀 닥쳐. 부상자가 뭐 이리 말이 많아?”

[부상자가 아니다. 마침내 영면에 들 자리를 찾은 노룡이지.]

나직하게 다독이는 듯한 음색. 시에나는 말없이 이를 악물었다.

그녀의 앞에 뉘여있는 건 평소에 마주하던 큰 키의 무덤덤한 바텐더가 아니었다.

좁지 않은 골목을 꽉 채울 크기의 육신은, 까마귀 둥지의 건물보다도 거대한 고룡의 진체.

꼬릿짓 한 번으로 건물 몇 채를 내려 앉힐 수 있는 그 육신은, 그야말로 만신창이나 다름없었다.

“···영면이라니 재수 없는 소리 하지 마. 그럴 힘 있으면 기척이나 좀 줄여보라고.”

갈기갈기 찢겨나간 날개. 피투성이가 된 황동색 몸체.

에메랄드를 깎아 만든 것 같은 두 뿔은 처참하게 부러졌고, 잘린 뒷다리를 포함해 몸 곳곳에는 뜯겨 먹힌 듯한 흔적이 선명하다.

한 마디 언령으로 작은 도시 하나를 날려버릴 수 있는 위대한 진룡이라도, 보름간의 치열한 전투에서 무사하기란 힘들었던 것.

더군다나 인간 측에 붙은 단 둘뿐인 진룡이라는 이유로, 적군에게 가장 최우선적인 공격 목표가 되었던 탓이다.

[어린 마녀야.]

“······.”

[나를 숨기려 하는 네 행동은 이해한다. 아닌 척하지만 너는 고운 마음씨를 가지고 있지. 그 심성을 행동으로 옮길 만큼 강하기도 하고. 허나···쿨럭!]

용이 잠시 말을 멈췄다. 그가 주둥이를 움찔거렸다.

[쿨럭! 크헉!]

이빨 사이로 왈칵 하고 흘러나오는 검붉은 피.

본디 진룡의 용혈은 돌도 녹일 맹독성의 액체이건만, 판석 위로 흐르는 혈류는 한 줌의 마력조차 품고 있지 않았다.

“버번···.”

용에게 치명상을 입힌 존재의 능력 때문이었다.

놈은 카일버르쿠스 자신이 수천 년간 봉인해왔던, 대악마 이상으로 위험한 고대의 짐승.

놈이 품은 포식의 저주는 용혈의 권능마저도 사정없이 갉아먹는 강력한 힘이었다.

본래라면 날개에 뒷다리 하나쯤 잘린 부상이야 순식간에 회복할 진룡의 재생력이, 아예 작동조차 하지 못하고 있는 이유였다.

[포식자는 수천 년간 나의 봉인 안에 함께 갇혀있던 놈이다. 아무리 네가 마녀의 힘을 써서 숨긴다 해도, 놈이 냄새를 맡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것이야.]

“······.”

[그러니 이만 마력을 거두고 악마 살해자에게로 가거라. 그것이 조금이라도 더 효율적인 방도다, 어린 마녀야.]

녹갈색 눈이 시에나를 지긋하게 바라봤다. 언제나 총명하던 그 눈은 점점 생기를 잃어가고 있었다.

카일버르쿠스의 말이 옳았다. 이대로 몸을 숨긴다 해도 용이 죽는 건 정해진 결말.

하지만 일대를 위장한 마녀의 주문은 거두어지지 않았다. 어깨 아래로 스르르 떨어지는 흑발 사이, 그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헛소리하지 마. 애초에 지금 그쪽을 버리고 간다 해서 어디로 더 도망칠 수 있는데?”

[악마 살해자가 건재하잖느냐. 금강궁의 초월자들 중에도 생존자가 몇 명 정도는 있을 테고. 지금처럼 내 곁에 머무는 것보다는, 희박한 확률이라도 그들과 함께···.]

“댈런이라면 그러지 않았을 거야.”

용이 입을 다물었다.

“댈런은 승산을 조금 높이기 위해 소중한 사람들을 떠나지 않아. 버티기 힘들다고 해서 죽어가는 동료들을 전장에 버려두지도 않고.”

마녀의 목소리는 물기를 머금고 있었다.

“댈런은 돌아올 거야. 약속했으니까.”

시에나는 기억했다.

미궁 3층, 바닥 없는 늪에서 댈런과 나눴던 대화를.

모닥불 앞에서 그녀는 버번과 새롭게 맺은 계약에 대해 이야기했다.

용신과의 싸움에서 버번이 댈런의 편을 들어주는 대가로 내건 조건. 몽왕의 지하궁전에 잠들어있을 초대 깃털의 마녀의 유해를 되찾아와주겠다는 약속.

‘몽왕의 지하궁전. 함께 가줄 거야?’

언젠가 그 계약을 지키기 위해 몽왕의 지하궁전에 내려갈 때, 같이 내려가줄 수 있는지를 물었다.

대답은 바로 돌아오지 않았다.

이따금씩 삭정이가 터지며 화려하게 흩뿌리는 불티들 사이, 축축하게 젖어드는 늪지대의 습기가 유독 답답하게 느껴지던 시간이었다.

‘나는···.’

하지만 천막 안으로 들어가 자리에 누웠을 때, 스르르 감겨오는 눈꺼풀 저편에서 들려오던 목소리는 여전히 선명했다.

곧바로 대답하지 않았기에 더 깊게 고민한 흔적이 남은 대답.

듣는 이 없는 허공에 뱉은 말이기에, 도리어 결코 어기지 않을 약속.

“댈런이 돌아왔을 때 설령 웃으며 반겨주지는 못할지언정···적어도 그 사람이 그랬듯, 소중한 이를 지키기 위해 노력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어.”

[······.]

“버번 당신은 내 가족이잖아. 은인이고. 친구이기도 하고. 동업자이기도 하니까.”

[···그래, 뭐. 이런 결말을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나쁘지는 않을지도 모르겠구나.]

용이 낮게 웃었다. 이빨 사이로 피가 줄줄 흘러내리는 웃음은 이상하게도 유쾌했다.

시에나도 마주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녀는 몸을 돌려 용의 머리에 등을 기댔다.

“···후우.”

눈을 감고 정신을 집중하자 도시 곳곳에 흩뿌려둔 권속들이 감지됐다. 까마귀와 비둘기 등 크고 작은 조류의 형상으로 빚어낸 마녀의 권속들.

대부분은 악마의 공세 속에서 연결이 끊겼지만, 여전히 살아서 정보를 전달해주고 있는 아이들도 있었다.

“루시아는 아까 확인했고, 펠버도 아직까지 버티고 있어. 안타깝게도 제자를 잃은 것 같긴 하지만.”

[엘가이아 마탑주 말이구나. 시간을 직접 다루는 비전을 이어받는 건 쉬운 일이 아니거늘. 아쉽게 되었어.]

“펠버가 전개하는 술식, 저거 처음 보는 건데. 대상은···파른? 아직 살아있었구나.”

[외눈 외팔의 성기사 소년 말이냐?]

“맞아. 마력의 밀도를 보니 6위계의 고유 술식인 것 같은데···이런, 연결이 끊겼어. 다른 쪽을 보자면···금강궁 정문이 뚫렸네. 버번 당신이 지원해줬으면 좀 더 버텼을 텐데. 왜 벌써 쓰러진 거야?”

탁탁.

황동색 비늘을 가볍게 때리는 손짓.

[이거 참 억울하구나. 내 한창 때라면 포식자 정도야 한입거리일 뿐인데 말이다. 비겁하게 방패와 익갑에게 힘을 빼고 난 뒤에야 나타나다니. 그놈 참 상도덕도 없지.]

그 장난스런 타박에 고룡 역시 클클 웃으며 농담을 흘렸다.

용과 마녀가 몸을 숨긴 골목 위로, 거대한 짐승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었다.

***

마물 군세가 휩쓸고 지나간 청동 구역은 고요했다.

인기척 하나 없는 반파된 여관 건물 안쪽, 난데없이 마력이 소용돌이치며 포탈이 열리기 전까지만 해도.

파앗!

포탈에서 튀어나온 형체가 반쯤 타버린 2층 복도에 내던져졌다.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지는 바닥.

우지끈!

서까래가 내려앉으며 잿바람이 훅 피어올랐다. 졸지에 와르르 무너지는 천장과 기둥들. 포탈에서 나온 인영 역시 함께 1층으로 떨어졌다.

“쿨럭! 시발. 멀쩡한 거리에다 텔레포트시켜주면 어디 덧나나?”

댈런은 반쯤 잿더미가 된 잔해 사이에서 손을 휘휘 저으며 걸어나왔다. 그는 밖으로 나가기 위해 삐걱이는 건물 문을 밀었다.

조금 열리던 문이 쿵 떨어지며 영원히 개방됐다. 여관 문짝을 부순 것이었다.

“···시발.”

댈런은 한 번 더 욕을 뱉었다. 떨어진 문짝 너머에서 보이는 광경 때문이었다.

[···지옥이구나.]

심상 너머 고룡이 나직이 속삭였다.

청동 구역의 거리는 폐허라는 말로도 한참 모자랐다.

새까맣게 탄 판석. 그 사이로 자라난 가시투성이 덩굴. 끈적한 진액으로 뒤덮인 집들. 무너진 벽에서 끔뻑이는 붉은 눈동자.

으어어어······.

매캐한 바람이 망자들의 신음소리를 실어 날랐다. 무너진 건물들의 잔해에는 인간의 손발이 돋아난 채였다.

잘린 손가락 대신 뿔이 돋아난 손. 숭숭 뚫린 구멍 사이로 촉수가 휘적이는 발바닥.

끈적한 용암의 호수가 살아있는 생물처럼 건물들을 녹이며 제 몸을 불리고 있었다. 산 것들을 향한 악의 덩어리라고밖에 느껴지지 않는 정경.

“그래. 지옥이군.”

댈런은 제자리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곧장 발걸음을 뗀 그가 향한 곳은 청동 구역 최대의 대장간 중 하나였다.

걸음을 옮기며 그는 설산에서의 대화를 되새겼다. 이곳으로 향하는 포탈을 타기 직전, 생전에 하다쉬라 불리던 사내와 나눈 대화였다.

‘아, 그리고 검 한 자루가 필요하오.’

‘검?’

‘댈라인과 싸우다 성검이 부러졌소. 그쪽 신성력이 담긴 토르타니스 말이오.’

‘이미 네 안에 신성이 깃들지 않았느냐. 성검 없이도 싸우는 데는 전혀 지장이 없을 거다.’

‘맨주먹으로 싸우는 건 별로라서. 그 검이라도 주겠소?’

‘이거 수천 년 먹은 고물이다.’

그다지 생산성 없는 대화 끝에 사내가 건넨 건 정보였다.

대충 ‘검이 필요하면 네가 직접 운명을 비튼 대장장이의 처소를 찾아가면 될 거다’라는 정보.

“쯧. 신쯤 되는 양반이 그냥 좋은 검 한 자루 주면 뭐 큰일이라도 나는지.”

지옥도가 된 거리를 궁시렁거리며 이동한 끝에, 댈런은 머지않아 대장간에 도착할 수 있었다.

정확히는 대장간이었던 폐허였다. 목적지에 맞게 도착했다는 건 삐걱이는 간판에 새겨진 ‘미스릴 제련소’라는 이름뿐.

[···댈런.]

“알고 있소.”

걱정 어린 적창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대장간으로 들어간다.

건물이 반파된 와중에도 위태롭게나마 매달려있던 간판처럼, 가게의 주인 역시 무너지는 대장간 안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대장장이 영감.”

부패가 한창 진행 중인 시체. 숨은 이미 끊어진 지 오래로 보였다.

그의 발치로부터 길게 말라붙은 핏자국은 대장장이의 생전 마지막 행동을 이야기해주고 있었다.

부상당한 몸을 이끌고 대장간 구석으로 숨어들어간 뒤, 자신의 몸으로 길쭉한 상자 하나를 절묘하게 감춰둔 미스릴의 제련자.

“···잘 쓰겠소.”

상자 안에는 검 한 자루와 도끼가 들어있었다.

둘 다 제각기 몇 가지 용골을 뒤섞어 만든 무구들이었다.

본단에서 미궁도시로 피난 가던 성기사단 편에 들려보낸 용들의 부산물을, 댈루카힘에게서 전해받은 용골 제련술로 가공한 결과물일 터.

자연스러운 동작으로 도끼를 허리춤에 걸고 검을 가죽끈으로 묶어 맸다. 한숨 한 번 쉰 그는 고개를 조금 돌리고 말했다.

“나와. 거기 있는 거 알고 있으니까.”

“···단장님 말씀이 맞았군요. 정말로 이곳에 오실 줄이야.”

댈런은 몸을 돌렸다. 무너진 기둥 뒤에서 걸어나온 건 젊은 청년이었다.

성기사단의 문양이 새겨진 갑옷. 목덜미와 얼굴에 새겨진 신성 문신.

그 안에 깃든 신성력을 보아 성기사는 맞았다. 댈런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내가 널 아나?”

“예. 댈런 님. 당연히 아시지요.”

반쯤 몸을 돌리고 있던 청년이 정면으로 바로 섰다. 청년의 왼소매는 내용물 없이 펄럭이고 있었다.

감고 있던 눈 역시 의안이었다. 외눈과 외팔을 보자 무의식적으로 이름 하나가 튀어나왔다.

“파른?”

“예. 성기사 파른입니다. 어릴 적 댈런 님께서 구해주신 덕에, 장성한 지금은 부족한 실력으로나마 검성이라 불리고 있죠.”

댈런은 미간을 좁혔다. 한창 성장기던 꼬맹이가 서른 줄에 가까워 보이는 청년이 됐다고?

미궁 속 시간의 뒤틀림이니 뭐니 하는 생각이 저절로 떠오르는 광경. 침묵하는 그를 향해 청년 파른이 다가섰다.

“댈런 님, 여러 가지로 혼란스러우실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한시가 급한 상황인지라, 송구하게도 바로 움직여야 합니다.”

“간략하게 설명해봐라.”

“금강궁이 무너졌습니다. 댈런 님의 동료들도 대부분 쓰러졌고요.”

쿠르르···.

때마침 무너지는 천장의 한 귀퉁이.

뻥 뚫린 구멍 너머에 비치는 핏빛 하늘을 바라보며, 청년 파른이 말을 이었다.

“댈런 님, 도시는 악마들의 사냥터가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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