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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자(1)
오물과 점액으로 가득한 골목. 내장 꿈틀대는 벽면 위로 두 체의 그림자가 스쳐 지나갔다.
“적어도 지금은 악마들에게 발각되지 않는 편이 낫습니다.”
청년 파른이 나직하게 이야기했다.
화살보다 배는 빠른 속도로 질주하면서도, 젊은 성기사의 목소리는 신기할 정도로 또렷하게 전해졌다.
반면 골목길을 내달리는 발걸음 자체는 쥐죽은 듯 고요했다.
모퉁이와 모퉁이를 소리 없이 돌아 내달리고, 잔해로 길이 막히면 물 흐르듯 벽을 타고 넘어가는 성기사의 신형.
‘에드거 라인하르트 단장을 뛰어넘었군. 그 양반이 초면부터 어린 검성이라 불렀던 이유가 있었어.’
청년이 된 파른의 뒤를 쫓으며 댈런은 생각했다.
어쨌거나 불행 중 다행히도 시간이 정말로 십수년씩 흐른 건 아니었다.
파른이 갑자기 나이를 먹은 건 엘가이아 마탑주, 펠버 발렌티노의 주문에 의한 현상이었다.
파른의 묘사에 따르면 십수 년 뒤 미래에 검성으로 성장한 자신을, 현재 시점의 자신에게 투영해서 덧씌운 주문이라나.
‘태엽을 앞서 감는 대지의 손···이라고 했지.’
그건 6위계에 오른 펠버가 완전개방한 영역의 비기였다.
본인의 심상을 통째로 갈아넣은 것도 모자라, 스스로의 생명마저 촉매 삼아 발동한 최후의 주문.
진룡의 피로 권속의 계약을 맺은 뒤, 반쯤 불멸자가 된 펠버의 수명은 인간일 때와는 비할 수 없을 정도로 길어졌다.
그런 의미에서 시간선을 미래로 감아버리는 행위는, 초월자의 위계에 닿으며 더욱 강해진 생명력을 통째로 바쳐야 할 수준의 기적이라는 이야기.
‘이상한 일은 아니지. 어떤 맥락에서는 알리아트의 역량마저 뛰어넘은 거니까.’
운명의 강물을 내다보고 미래를 점치며, 만신전의 화신체에게 할당된 시간선마저 휘어잡을 수 있는 백안의 선각자.
천 년도 넘게 살아오며 악신들의 움직임조차 예측하는 괴물인 그녀도, 아직 오지 않은 미래에 직접 손을 대는 것만큼은 할 수 없었다.
미래 시점의 결과물을 현재로 끌어들이는 펠버의 능력이 얼마나 상리를 초월한 것인지 알 수 있는 부분이었다.
물론 목숨을 대가로 한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기는 하지만.
후우우웅―
생각을 이어가면서도 댈런은 발을 멈추지 않았다.
두 사람이 지나간 골목길에는 희미한 바람소리만이 남아 멤돌았다.
기척 없는 그들의 움직임은 기이하다 못해 이질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만일 도시에 생존자가 있어 그 광경을 우연히 목격했다면, 유령을 봤다고 여겼으리라.
“금강궁을 무너뜨린 뒤, 에낙사구스는 하늘 저 위쪽으로 올라갔습니다.”
3층짜리 건물 하나를 뛰어넘으며, 파른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놈이 올라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붉은 소용돌이가 하늘에서 도시를 향해 내려왔죠.”
청년의 시선은 도시 저편을 향해 있었다.
금강궁이 있는 도시의 중심부 방향, 수십 킬로미터가 떨어진 거리임에도 보이는 거대한 핏빛 기둥을 향해서.
이만큼이나 멀리서도 보인다는 건, 저 소용돌이가 족히 건물 백수십 층 이상의 높이와 너비라는 이야기였다.
아마 밑부분은 금강궁 전체를 뒤덮었겠지. 귀족 가문들과 그들을 섬기던 시종들이 어떻게 되었을지야 확인하지 않아도 뻔했다.
쿵···. 쿵···.
소용돌이는 규칙적으로 불그르스름한 파동을 뿜어대고 있었다.
마치 심박과도 유사하게 울려퍼지는 파동. 파른은 도시를 지옥 같은 환경으로 오염시킨 근원이 저 파동이라고 설명했다.
“미궁도시 전역이 오염되기까지는 고작 사흘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사흘이라.”
“삼 년처럼 길게 느껴진 사흘이었죠.”
대화가 오고가는 중 두 사람의 발자취는 성벽을 넘어섰다.
순은 구역으로 접어든 댈런과 파른은 고층 건물들의 지붕 위를 내달렸다.
붉은 소용돌이에 더 가깝기 때문인지, 순은 구역의 오염은 청동 구역보다도 훨씬 심각했다.
댈런은 고개를 들어 중앙 광장을 바라봤다. 결계탑이 있던 자리에는 커다란 구멍이 뻥 뚫린 채, 미궁의 마물들을 끊임없이 쏟아내고 있었다.
“금강궁의 대결계가 무너지며 저렇게 되었습니다.”
댈런의 시선을 눈치챈 파른이 이야기했다.
“미궁의 범람을 억제하던 힘이 사라진 거죠.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저렇게나 많은 수의 마물들이 튀어나오는 게 결코 정상적인 상황은 아닙니다만.”
“빌어먹을 잡캐 새끼 때문이군.”
“무슨 말씀이신지···.”
“아무것도 아니다.”
어쨌든 저 마물들은 지금 당장 처리할 대상은 아니었다.
그보다는 지금 이 순간에도 도시를 이 잡듯이 뒤지고 있다는 악마 군세와, 놈들을 이끌고 있는 에낙사구스가 더 중요한 목표.
“제가 떠난 시점인 이틀 전까지만 해도, 마지막 항전은 백금 거리에서 이루어지고 있었습니다.”
“백금 구역이라. 수비하기에는 금강궁이 더 좋을 텐데.”
“맞는 말씀이긴 합니다만···전쟁이 계획대로만 진행되는 건 아니니까요. 백금 성벽이 함락되면서부터 싸움은 난전으로 변했습니다.”
대충 전선이 분리되었다는 이야기였다.
금강궁 쪽은 에낙사구스의 직접적인 공세를 버티고, 댈런의 동료들을 포함한 외부 전력들은 각자 거점을 잡은 채 악마들과 싸우게 됐다는 것.
백금 성벽이 너무 빠르게 함락되고, 악마 군세의 침투가 예상을 뛰어넘는 수준으로 전격적이었기에 벌어진 일이었다.
물론 이것도 플랜 C나 D쯤에 상정된 상황이긴 했던 모양이었다.
이상적인 전개대로라면 외부 전력이 악마와 마물들을 어느 정도 정리한 뒤, 에낙사구스의 뒤를 치는 식으로 전황이 흘러갔을 터.
“하지만 포식자가 나타나며 그 계획은 완전히 부서졌죠. 엘프들이 먼저 잡아먹혔고, 길드 연맹의 지원군과 오크들이 그 다음이었습니다.”
“포식자라. 버번이 봉인하고 있던 고대의 짐승?”
“···예. 에낙사구스가 놈을 길들이며 더 강력하게 만들었더군요. 카일버르쿠스는 물론 시에나 님이나 단장님께서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이제 놈은 새로운 악신이나 다름없어요.”
새로운 악신이라. 댈런은 잠시 생각했다.
“경험치 덩어리군.”
“예?”
“네가 떠날 때까지, 살아남은 이들이 누구였는지 말해봐라.”
***
“···우욱.”
비릿한 피냄새가 콧속을 적신다. 서있기만 해도 징 하고 울리는 머리.
아마 뇌에까지 충격이 간 탓일 테였다. 루시아는 속에서 치미는 무언가를 참지 않고 게워냈다.
[···어머니.]
그런 그녀를 걱정스레 바라보는 시선. 루시아는 입술을 짓씹었다.
옅은 지끈거림에 시야가 조금이나마 또렷해졌다. 그녀는 전성이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곁에 누워있는 건 집채만 한 청백색 비늘 진룡, 아카샤였다.
[괜찮으십니까?]
“너야말로 그런 소리를 할 처지가 아니잖아.”
[반대 처지였어도 똑같이 이야기하셨을 거 아닙니까.]
“···누굴 닮아서 말은 똑부러지게 잘하네.”
용이 낮게 웃었다. 그러면서 동시에 주둥이를 고통스레 움찔거렸다.
옆구리가 절반 가까이 뭉텅이로 뜯겨나갔으니, 웃는 건 물론이고 숨 쉬는 것마저도 고통스러울 게 당연했다.
루시아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 위로 거대한 짐승의 그림자가 서서히 드리우고 있었다.
“···포식자.”
카일버르쿠스 아르번이 수천 년간 봉인해왔다는 짐승. 그리고 봉인이 풀린 뒤 에낙사구스에게 길들여져, 악신과도 같은 힘을 얻게 된 재앙적인 존재.
놈은 거대한 코뿔소가 그림자를 뒤덮은 것 같은 형상이었다.
붉게 번뜩이는 세 쌍 눈동자만 제외하고는, 고층 건물 몇 채를 합쳐놓은 크기의 몸 전체가 일렁이는 그림자로 덮인 모습.
저 그림자는 형상화된 저주 그 자체였다.
이능과 권능을 가리지 않고 집어삼키고 소화시켜, 그 주인의 힘으로 삼아버리는 포식의 저주.
“···흐으.”
그녀의 옆구리에 길게 난 상처 역시 포식의 저주에 당한 부상이었다.
덕분에 신성 문신의 절반 가까이가 작동을 멈췄고, 영역의 힘마저도 꺼내 쓸 수 없는 지경이 됐다.
저 짐승을 한참이나 몰아붙이던 단장마저 결국 저주를 이기지 못했다.
보다 앞서 짐승에게 상처를 입혔던 시에나와 카일버르쿠스 역시 소식이 끊긴 지 오래였다.
비요른의 화약이 저주의 장막을 뚫고 치명타를 입히나 싶었지만, 저 거대한 덩치를 둘러싼 단단한 가죽보다 난쟁이의 육신이 먼저 찢겨나갔다.
그녀를 지키며 항전하던 청린용도 결국 옆구리를 뜯어먹힌 채 죽어가고 있었고.
[···어머니.]
하지만 이대로 주저앉을 수는 없었다.
검을 휘두를 최소한의 힘이 남아있는 이상, 악을 상대로 무릎 꿇지 않는 게 성기사의 정신.
후들거리는 다리로 일어선다. 떨리는 손으로 검끝을 겨눴다.
이미 몇 번이나 바닥을 드러냈던 신성력을 쥐어짠다. 팔과 다리에 드문드문 남은 신성 문신이 새하얀 빛을 흘린 순간이었다.
쐐─────
공기 찢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디선가 섬전처럼 나타난 빛의 원반이었다.
느닷없이 허공을 가르고 튀어나온 빛의 원반은, 핏빛 하늘 때문에 불그스름하게 보였다.
속도 자체는 그리 빠르지 않았기에 짐승 역시 이에 반응했다. 놈이 킁 하고 콧방귀를 뀌며 가죽이 가장 단단한 어깨 부분을 들이밀었다.
으지직!
[······!!]
붉은 원반이 저주를 흩고 가죽을 찢는다.
어깨를 뚫고 들어간 투사체는, 그대로 몸을 관통해 반대쪽 허리쯤을 찢으며 빠져나왔다.
패래랙― 쾅!
그제서야 힘을 다해 거리의 판석에 틀어박힌 도끼.
어떤 주문이나 권능이 아닌 그저 도끼가 자신의 몸을 관통했다는 사실에, 포식자의 세 쌍 눈이 휘둥그레진 순간이었다.
「회명(回冥)」
잿빛 음영이 허공에 일렁인다. 짐승의 머리 위 상공에 툭 튀어나온 건 반쯤 찢어진 갑옷을 걸친 사내였다.
「답보(踏步)」
마치 전문적인 곡예사처럼 손쉽게 허공에서 몸을 뒤집는 사내. 허공을 디딘 그가 큼직한 검을 양손으로 쥔 채 다리를 쭉 폈다.
━━━━━━━━!!
넓은 면이 그려졌다.
건물 십수 층 높이에서 바닥까지 내리꽂히는 검의 궤적.
마력 한 줌 실리지 않은 검격은 걸리는 모든 것을 둘로 나눴다.
어떤 소리도, 저항도 없었다.
이해할 수 없는 현상에 뒤로 물러서려던 짐승은, 문득 몸의 절반이 각기 따로따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르르······!]
그게 놈의 끝이었다. 반으로 나뉘어 무너지며 내용물을 우르르 쏟아내는 결말.
놈의 눈에서 생기가 떠나가는 것과 동시에, 거죽을 덮고 있던 저주의 마력 역시 폭발적으로 흩어졌다.
댈런은 검을 휙 털고 뒤로 돌았다.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버텨낸 성기사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댈런······.”
길게 늘어지는 말끝. 입술에서 뚝뚝 흘러내리는 핏줄기.
댈런은 검을 검집에 꽂아넣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는 손을 뻗어 루시아의 등을 감쌌다.
“다들···죽었습니다. 왜······.”
울음을 꾹꾹 참으며 뱉은 단어들. 어절과 어절 사이의 침묵이 품은 건 어떤 의미를 품었을까.
아마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이겠지. 댈런은 갑옷 위로 손을 토닥이며 짧게 대답해주었다.
“괜찮소.”
“댈···.”
“잠시 쉬시오. 걱정 말고.”
가볍게 안아든 몸은 이전보다 야위어 있었다. 해후를 오래 나누어서 좋을 상황은 아니었다.
댈런은 루시아를 잠시 앉혀두고 눈을 감은 용에게 발길을 돌렸다. 청린용은 그가 짐승을 쓰러뜨리기 직전에 숨이 끊어진 상태였다.
“고생 많았다.”
아카샤 리울라크.
다섯 번째 청린이자, 추방당한 용신의 좌완 갑주.
이 세계에서 아카샤는 댈런을 아버지라 부르며 따랐지만, 게임에서 그는 남부 일대를 서리지옥으로 만들곤 하는 재앙이었다.
‘용굴에서 어린 것이 자네를 따르게 될 걸세. 언젠가는 자네의 숙적이었을 테고, 그 원한을 잊으라 요구할 수는 없겠지.’
문득 오래 전 펠버가 남겼던 예언이 떠올랐다.
전대 청린을 상대로 영역을 한계까지 사용한 뒤, 그 반동으로 죽어가며 유언처럼 남겼던 이야기.
’그래도 부탁하겠네. 어린 것을 거두어주게나.’
거의 모든 회차에서 자연재해나 다름없던 보스몹이, 그를 기다리며 가장 최후까지 종말에 맞선 영웅 중 하나가 될 줄 예상이나 했을까.
결과적으로 펠버의 말을 따른 건 가장 성공적인 선택 중 하나였다.
댈런은 당시의 기억을 곱씹으며 푸른 비늘 위에 손을 얹었다.
[대륙 남서부의 투사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대전쟁에 참가한 마법사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암월의 귀족 사냥꾼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빛을 잃은 용사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올곧은 성자의 시체를 발견했습니다.]
균열에서부터 수 년이 흐른 지금까지, 오랫동안 청린용의 머리 위에 떠올라있던 문장들.
[올곧은 성자의 시체]
- 한평생 성기사단에서 몸을 담고 악에 맞서 싸우던 성자의 시체다. 생전 기사단장만큼이나 강력한 성기사라는 소문이 있을 만큼 강력했던 성기사는, 고대의 악을 쓰러뜨리기 위한 오랜 원정에서 돌아오자마자 청린용에게 함락된 본단을 마주했다. 스스로 평생 쌓아올린 모든 신성력을 불태우는 대가로 성기사는 죽은 이들을 전부 부활시키는 기적을 보였고, 분노한 청린의 이빨에 목숨을 잃은 이날 그는 성자라 일컬어졌다.
그 마지막을 장식하는 초월자, 모니터 너머에서 수많은 생명을 되살려낸 성자의 시체를 회수할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