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
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
- 1권 2화
[500년째]
정신 차리고 보니 벌써 500년이라는 말도 안 되는 시간이 흘렀다.
신기한 점은 전생과 현생의 기억이 너무 또렷하게 남아 있다는 점.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는 시간이 늘었다.
영웅의 회랑은 밤은 어둡지만 낮의 하늘이 참 예쁜 세계니까.
문득 이곳에서 어차피 나가지도 못하는데 뭐하러 이런 것들을 배운다고 구르고 고생하고 두들겨 맞았는지 모르게 되어가기 시작했다.
영웅들끼리는 자신들의 지식을 이용해 새로운 무언가를 만들어낼 순 있어도 기존의 지식을 전수하는 게 불가능하다는 것 같은데 나는 그런 제한이 없다는 모양이다.
그 탓일까.
아주 자리를 펴고 사람을 굴려대고 있다!
[700년째]
시간이 약이라던 말. 조금씩 실감이 가긴 한다.
중2병 걸린 것마냥 세월아 네월아 하는 시간이 늘다 보니 자연스레 처음 이곳에 왔을 적 내 모습으로 돌아가는 느낌이 든다.
괜한 무게를 잡는 건 역시 나와 맞지 않는 모양이다.
아무래도 수천 년을 영체로 살아온 작자들 사이에 있었던 탓에 그들에게 물이 든 것도 있지 않을까.
모두가 나이 지긋한 양반들인데 지나치게 경박한 인간들은 왜 그런가 했더니, 시간이 범인이렷다.
신성 마법과 저주계통에 대해 알려준답시고 수백의 저주를 걸고 풀어주기를 반복하던 성녀 다프네가 찾아왔다.
치근덕대는 아폴론의 고간을 걷어차고 왔는지 묘하게 기분이 좋아 보였다.
좋은 술을 구했으니 같이 한잔하자는 모양이다. 그런데...... 이상하게 느낌이 이상하다.
마치 무언가를 숨기는 것처럼.
[950년째]
나를 가르쳤던 영웅 대부분이 내게로 왔다.
평소엔 귀찮다며 나타나지도 않는 천마 독고준 영감도 보이고 한 시대의 위대한 황제였다면서 술을 마실 때마다 자랑을 늘어놓던 정복왕 아재도 보인다.
대부분이 나와 엮였던 영웅들이고 하나같이 끔찍한 수련을 빙자한 고문을 했던 양반들이기도 했다.
어차피 나가지도 못하는데 죽어라 배워본들 무엇할까. 처음에 그런 말을 지껄이며 대들었다가 죽도록 맞은 횟수만 헤아리기도 힘들 만큼 많다.
괜스레 뚱한 얼굴로 그들을 맞이하니 제일 나를 많이 챙겨주었던 신의(神醫) 히포크리아가 떨떠름하게 웃어 보였다.
처음부터 내게 관심도 없던 이 누님은 언제부터인가 친누나마냥 나를 챙기곤 했다.
의도하지 않은 연회, 왁자지껄하게 떠들기를 몇 날 며칠. 담담하게 술을 홀짝이던 히포크리아가 조용히 말하면서 연회가 끝을 맺었다.
"우리 막둥이. 네가 돌아갈 방법을 찾았어."
그녀의 말에 한동안 나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이상한 기분이 든다.
[999년]
일단은 생일이라고 기억하고 있던 날이다.
나이는 헤아리다 보니 잊어먹은 지 오래지만 그래도 소소한 기념일이기도 하다.
그들이 단합을 시작했다.
이유는 말해주지 않았다. 어째서인지, 어떻게 인지 말해주지도 않았다. 그들은 더 이상 세상에 간섭할 수 없는 완전히 별개의 존재.
세상이 당장 멸망해도 움직이거나 단합하지 않을 그들이 두 번째로 입을 모아 한뜻을 보이기로 한 것이다.
그렇게 나를 닦달하고 혼내던 작자들이 갑자기 단체로 마약이라도 한 것마냥 덕담을 던지고 잘해주기 시작하더니 결국 이런 날이 오고 말았다.
평소에 하고 싶은 게 무엇이냐 묻던 그들에게 못다 한 인생 잘 먹고 잘살아보고 싶다고 했는데, 그 꿈을 이룰 첫발을 내디딘 꼴이다.
이곳은 힘만 있으면 안전한 곳이지만 살아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으니까.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없냐고 묻는다.
한쪽 구석에선 자연 친화력을 올리기 위해선 하나가 되는 게 최선이라며 심해에 처박고 마그마 풀장에 던져넣으려고 했던 마스터 정령사인 유리아나가 눈시울을 붉히고 있다.
쓰읍...... 괜히 마음 아프게.......
그들의 담담한 질문과 동시에 내 의사와는 관계없이 몸이 빛으로 둘러싸였다.
마지막이구나.
그런 생각이 들어 그들을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다시는 보지 맙시다! 그리고 나이 먹을 만큼 먹은 할머니들이 언제까지 누나 소리 듣고 살 겁니까?"
마지막으로 본 그들의 표정이 참 가관이라는 건 꽤 통쾌한 일이다.
그중에 가장 격분한 건 성녀 다프네.
"야이! 개 x발 잡놈......."
하지만 내 기분이 극도로 다운된 걸 몇몇이 눈치챈 듯 입을 다물어버렸다.
질질 짜면서 헤어지고 싶진 않았다.
끝끝내 손을 흔들어주는 이들을 향해 손을 들어주려다 조용히 웃어주었다.
그리고, 세상이 변했다.
* * *
펄럭!!!
"하아...... 하아......."
마치 오랜 꿈을 꾼 것처럼, 멍한 시야로 주변이 보이기 시작했다.
흐릿흐릿하던 눈동자는 오랫동안 빛을 못 봐서인지 찢어질 만큼 눈부시게 아파왔다.
흐릿한 시야 너머로 시선을 내리자 팔에 꽂힌 마석이 달린 링거 위로 기묘한 액체가 보였다.
[리스토어.]
짧게 중얼거린 목소리.
하지만 예상과는 다르게 손끝에선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았다.
그제야 실감이 되기 시작했다.
진짜로 영웅의 회랑에서 벗어나 원래의 육체인 데이비 왕자로서의 몸에 돌아왔다는 것을 말이다.
3. 돌아온 왕자.
무엇부터 설명을 해야 좋을지 떠오르는 게 없었다.
괜스레 씁쓸함이 몰려오자 미련 없이 전신에 힘을 빼고 다시 눈을 감아버렸다.
탈력감이 온몸을 잠식한 탓에 당분간은 이리 멍하게 있고 싶었다.
거칠지만 묘하게 포근한 느낌의 이불은 역시 밖으로 나돌기 싫게 만드는 유혹이 있다.
정확히는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도 없지만 말이다.
멍하니 누워 차분하게 기다리니 눈부시던 시야에 서서히 적응되기 시작했다.
아직 시력이 완전히 돌아온 건 아닌지 초점이 흐릿흐릿하기 짝이 없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생각했다.
"으음......."
힘겹게 목소리를 내어보니 잔뜩 갈라진 목소리가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흐릿하지만 형태는 분명히 보였다.
천 년이나 지난 후에야 돌아왔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리만치 기억이 또렷한 터라 괜스레 쓴웃음이 흘러나와버렸다.
"아...... 아아아. 아아아~"
마치 발성 연습이라도 하듯 목소리를 내기 시작하자 갈라진 목소리가 서서히 적응이라도 하듯 천천히 변하기 시작했다.
"아아."
그렇게 한참을 반복했을까.
이제야 제대로 된 발음을 내뱉을 수 있게 되자 익숙하지만 조금 다른 미성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그 양반들은 목소리가 꽤 감미롭다곤 했지만 솔직히 내 입장에선 그냥 듣기 나쁘지 않은 무난한 목소리일 뿐이다.
"리스토어."
다시 한 번의 시도.
이번에도 이렇다 할 변화는 없었다. 하지만 딱히 조급함은 들지 않았다.
천 년 동안 이어진 수련을 빙자한 굴림을 당하다 보니 별의별 경우를 다 겪어봤다.
당연히 이런 상황에 대한 경험도 없잖아 있다.
'히아 누님은 사람이 혼수상태에 빠지면 근육이 빠지듯이 마나와 신성력도 서서히 굳는다고 했었지.'
의술의 신이라 불렸던 히포크리아를 그리 부르는 건 나뿐이리라.
뭐 어떤가. 본인이 그리 불러달라 하였는데.
억울하면 친해지든가.
내게 의술을 가르쳐 주었던 신의(神醫) 히아 누님은 특유의 능력을 이용해 나에게 수많은 경우의 환자를 치료하게 했었다.
개중엔 현재 지금 같은 상황의 환자도 분명 있었다.
해결 방법은.......
'시간.'
영양부족과 오랜 운동부족으로 인해 망가진 근육을 단시간에 회복시키려 들면 좋지 않다.
급히 먹는 밥은 체하는 법.
운신이 가능해질 정도의 체력은 스스로 길러야 했다.
다행이라면 팔에 꽂힌 마석 링거가 영양을 어느 정도 보급해주고 있다는 점일까.
움직이지도 못하는데 사람도 안 오면 굶어 죽기 딱 좋다.
그런 상황은 나로서도 그리 반길만한 상황은 아니었다.
그런 생각이 드니 느긋함에 절로 미소가 흘러나왔다.
편안하게 누워 피식 웃어 보이고는 손가락을 까딱거리는 데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재활 훈련의 시작은 손가락부터라고 했던가.
지금은 그저 돌아왔다는 사실에 심취하고 싶은 기분이었다.
* * *
며칠간 이 고요한 방안에 들어온 인물은 없었다.
아니, 내가 있는 이 궁전에 들어온 인물이 극히 드물 것이다.
들어온다 해도 영양보충을 담당하는 시녀 하나둘 정도가 전부일 터.
내가 혼수상태에 빠져 영웅의 회랑에 가기 전에도 그랬으니 지금도 그렇지 않을까.
덜덜 떨리는 손을 뻗어 목제 달력을 바라보자 [발디스 력 278년]이라는 시간이 보였다.
내가 화살을 맞았던 사냥대회가 열렸던 건 분명 272년도.
그때 이후 곧바로 회랑에 도착했으니 이런 꼴이 된 지 6년 정도가 흘렀음이렷다.
그렇다면 현재 내 나이는 16살이라는 소리다.
이 대륙의 기준으로 이제 갓 성년이 되는 나이이기도 하다.
회랑에서 보낸 천 년의 시간은 이곳에서 고작 6년.
시간의 축이 달라서?
아니면 다른 모종의 이유로?
무엇이 되었건 시간이 뒤틀린 것쯤은 익숙한 현상일 뿐이다.
당장 지구만 해도 우주로 나가면 시간이 뒤죽박죽이지 않던가.
물론, 여긴 지구가 아니지만 말이다.
이곳은 티오니스 대륙이라는 지구와는 다른 차원, 그리고 내 두 번째 삶의 고향이기도 했다.
엿 같은 곳이긴 해도 사람 사는 곳이니까.
"누워서 지내는 것도 오래 할 짓은 못되네."
투덜투덜하면서도 익숙하게 눈을 감고 천천히 집중을 시작했다.
며칠간 재활 훈련을 제외하면 늘 하던 일이다.
처음엔 손가락 하나 까딱하기 힘들었던 몸이지만 며칠간 지속한 피나는 노력 덕분에 상체를 일으키는 정도까지는 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그 과정에 이르기까지의 고생은 이루 말할 수 없었지만 말이다.
고통에 익숙하다고 아무렇지도 않은 건 아니었다.
"리스토어."
눈을 감고 집중을 한 채 몸 안에 잠들어있는 백색의 기운을 끌어올렸다.
무려 신성력.
성녀 다프네의 말로 신성력의 총량은 타고난 놈들을 따라갈 순 없지만 숙련도만 따지면 자신을 제외한 그 누구도 나를 따라올 수 없을 거라 말했다.
그 고명한 법왕이나 성녀들조차도.
그렇다고 내 총량이 모자란다는 뜻은 아니었다.
다프네의 경우는 신을 받아들인 몸이라 불리던 역사에 길이 남을 영웅이니 그렇다 치고 그 아래로 바로 내가 있다는 건 그만큼 노력을 얼마나 했냐의 결과물이기도 했다.
물론, 무작정 기도만 하며 신성력을 천천히 쌓아 올리는 일반적인 케이스로썬 나 같은 알짜배기 성장케이스를 따라올 수 없는 게 당연했다.
신성력도 힘.
무작정 기도만 한다고 빠르게 쌓는 건 불가능하다.
실제로 그 성격 나쁜 여자는 나를 가르칠 땐 신을 거의 칭송하지도 않았으니까.
쯧쯧 배덕한 성녀로고.
.......
처음 신성력을 수련할 때 내가 했던 건 회랑 전체를 청소하는 짓거리였지 아마.
차분하게 신성력을 이리저리 찔러 건드려 보지만 여전히 누가 짖나? 라고 하듯 신성력은 움직이지 않았다.
"새끼 고집불통이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