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
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
- 1권 10화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고 했던가.
내가 저지른 일은 순식간에 궁 내부에 퍼졌다.
대놓고 소문내듯 에이미가 근위 기사들에게 도움을 요청했으니 더 볼 것도 없었다.
짜악!!
시원하게 올려붙인 따귀에 내 고개가 돌아갔다.
말없이 시선을 드니 험악한 표정으로 서 있는 여자가 보였다.
리네스 왕비.
내가 죽인 하급 사제를 부리고 있고 현재 이 왕궁의 권력 대부분을 틀어쥐고 있는 여자이기도 했다.
"네가 정녕 미쳤구나!"
"미쳤다라......."
"감히 다른 이도 아니고 성국에서 파견되어 온 사제를 죽이다니!"
그녀의 외침에 내가 피식 웃어 보였다.
"보르트 신관은 제 욕심을 위해 내 목숨을 위협했습니다. 그렇기에 법도에 따라 처벌했습니다만, 문제라도 있습니까?"
"이놈이 그래도!"
평소의 우아한 척은 어디에다 버렸는지 그녀가 다시 한 번 팔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그보다 내가 입을 여는 게 빨랐다.
"웃기지 않습니까?"
"뭐?"
"내가 혼수상태에 빠지기 전만 해도 이만큼 왕궁의 법도가 개막장으로 흘러가진 않았는데 말입니다."
내 말에 그녀가 침묵했다.
"이 사달을 냈는데 국왕 폐하께서는 침묵하고 계시지요. 그런 상황에 왕족을 모독한 역적을 베어버렸는데 오히려 내가 혼이 나고 있다니. 퍽 상황이 재밌네요. 왕족의 지위가 고작 하급 사제만도 못하다라......."
빙그레 웃으며 그녀와 눈을 마주쳤다.
괜히 부담스러워서 시선까지 피하던 예전의 내가 아니었다.
보통이라면 몸을 사렸겠으나 석 달 동안 남들의 눈을 피해 몸을 회복시키고 수련한 게 엿 바꿔 먹으려고 한 행동은 아니었다.
내 몸 하나 지킬 힘은 필요하니 한 것일 뿐.
"감히 폐하와 왕족의 권위를 들먹이다니...... 네가 정말 미친 게로구나."
"글쎄요. 내가 미친 건지. 이 왕실이 미쳐 돌아가고 있는 건지."
빙그레 웃는 얼굴 그대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증거가 없다. 네 녀석이 무슨 이유로 그를 베어버렸건 이 일은 네 알량하고 멍청한 머리통으로 생각해서 판단해도 될 만큼 가벼운 일이 아니다. 당장 성국에서 항의가 들어올 테지!"
"......."
"뭐...... 제 어미를 닮아 멍청한 건 알고 있었다만 이리 경솔할 줄이야."
그녀의 말에 내 웃음이 짙어졌다.
"제가 제 어머니를 닮는 거야 당연하지요."
"천박한 것. 아주 어미와 쌍으로 천박하기 그지없어."
"자식 앞에서 부모를 욕하는 행동은 좋지 않습니다. 왕비 저하."
"흡!"
순간적으로 살기가 터져나갔다. 형상화되지 않은 살기는 조절이 불가능하지만 마나가 미약하게 섞이면 투기와 살기는 그것으로도 충분한 무기가 되게 마련이다.
순식간에 창백해진 얼굴로 나를 보던 그녀가 주춤주춤 물러난다.
동시에 리네스 왕비의 행동에 이상을 느낀 시녀들이 움찔거렸다.
하나같이 손이 보이지 않는 것이, 살기를 눈치채고 검을 빼 들려다 멈춘 모양새다. 절대 기본적인 시녀가 보일 행동 또한 아니었다.
개중에 한 시녀는 유별날 정도로 어두운 느낌을 풍겼다.
'호오.......'
"충성심은 보기 좋네요. 조금만 더 뽑았으면 재밌었을 텐데......."
나는 언제 그랬냐는 듯 살기를 지우고 싱글싱글 웃어 보였다.
"무리수는 명을 재촉하지요. 그게 왕비 저하가 아니라 다른 이라도 말입니다. 같은 왕족을 시해하는 행위도 그냥 넘어가진 못할 겁니다."
"네놈......."
"선택은 신중하게 하시길 바랍니다. 예전처럼 마냥 당해줄 상대가 없어져 버렸거든요."
나는 미련 없이 자리에서 일어나 지팡이를 짚었다.
그리고는 쩔뚝거리며 그녀를 지나쳤다.
"제가 피곤하여 그러니 돌아가 주시겠습니까? 보시다시피 궁 자체가 관리가 안 돼서요, 이 귀한 곳에 누추한 분이 오시다니."
"이놈이!!"
"그리고 제 궁에선 정숙을 부탁드립니다. 보시다시피 누구 덕분에 궁 상태가 좀 그렇습니다."
더 말할 것도 없다는 듯 돌아서자 그녀가 혼란스러운 얼굴로 나를 보는 게 느껴졌다.
내가 전하고자 한 의도는 뻔히 전해졌다.
입에 칼을 물고 그 위에 천을 덮어 보이지 않는 칼부림을 하는 건 적성에 맞지 않는다.
본래의 힘 그대로 있었다면 일어난 그 날 엎어버렸을 만큼 나는 저돌적이고 행동주의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으니까.
내가 한 말의 의미를 모를 만큼 멍청한 여자가 아니었기에 한참이고 나를 노려보던 그녀가 독기어린 눈동자로 나를 노려보더니 이내 몸을 돌렸다.
내가 쓸 수 있는 카드는 유통기한이 분명 존재한다. 쓸 수 있을 때 쓰지 않고 참아뒀다간 언젠가는 쓰지 못할 버림패가 될 터.
그렇기에 과감하게 나는 그녀에게 한 가지를 암시해주었다.
빌어먹을 2 왕자 칼루스가 6년 전 사냥대회에서 내게 화살을 쏜 것을 보았다고 말이다.
내가 그 사실을 알고 있는지 모르는지 긴가민가하던 그녀는 이로써 내가 전말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파악했을 것이다.
조만간 내 입을 막으려 들 것이다.
"아 참. 궁에서 일해야 하는 사용인들이 하나같이 내빼버렸더군요. 쓸데없는 장난은 좋지 않습니다."
"......."
"왕비 저하께서는 왕성의 안살림을 맡고 계시지요. 가급적 빠른 시일 내에 모두 잡아들여 주셨으면 합니다. 계속 이런 식이면 조금 기괴한 소문이 돌지도 모르지요."
내 말에 그녀의 눈동자에 표독스러움이 어렸다.
분명히 말했다.
입에 칼을 물고 천을 덮어 싸우는 고상한척하는 짓거린 내 취향이 아니다.
"감히 왕실의 자금을 횡령한 자들이니 그 죄가 가볍진 않지요. 제가 알기론......."
나는 말끝을 흐리고 고민하듯 중얼거리다 빙그레 웃었다.
"참수형이었을 텐데. 하하, 설마 멍청하게 그걸 모르진 않겠지요."
내 말에 그녀가 코웃음을 치고는 성큼성큼 걸어가 버렸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만족스러운 듯 침대에 드러누워 버린 후 마나를 끌어올리자 몸 안을 회전하는 4개의 서클이 보였다.
심장이 아니라 혈도를 따라 움직이는 마법이다.
'서치아이.'
은밀함을 상징하는 사령 마나답게 남들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검은 기류가 뻗어 나가 리네스 왕비의 몸에 달라붙었다.
지속시간이 그리 길진 않겠지만, 눈도 붙여뒀겠다 이정도면 뺨 한 대 맞은 것치고는 꽤 만족스러운 결과였다.
* * *
"......."
말없이 방으로 돌아온 리네스 왕비가 표독스러운 얼굴로 침묵했다.
"왕비 저하."
짜악!!
그 모습에 시녀들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가 그대로 그녀에게 뺨을 얻어맞았다.
"성급하게 움직이다니. 네 년들이 정말로 죽고 싶은 게냐!"
그녀의 독한 외침에 시녀들은 입을 다문 채 고개만을 숙여 보였다.
"죄송합니다."
인간인가 의심스러울 만큼 무표정이었다.
"꺄악!!"
그 모습에 더욱 화가 났는지 리네스 왕비는 곧 손에 닿는 모든 것을 집어 던지며 히스테리를 부리기 시작했다.
그녀의 성격이 그리 좋지 않은 건 왕비궁에 있는 사람 대부분이 아는 사실이었다.
유리 제품이 깨지고 나무 탁자가 박살이 나도 아무도 그녀를 말리는 이는 없었다.
그저 그녀가 이 히스테리를 빨리 끝내기를 기다릴 뿐.
"하아...... 하아......."
한참 동안 난동을 부리던 그녀가 험악한 얼굴로 박살 난 테이블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는 피가 날 듯 주먹을 꽉 쥐며 으르렁거렸다.
"제 분수도 모르는 천것이!"
과거엔 그러지 않았다.
천박한 제 어미와 닮아 멍청하기 이를 데 없던 놈이었다.
당장 치우려고 하면 치울 수도 있는 그런 놈이었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혼수상태에서 깨어난 그는 달랐다.
마치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처럼 말이다.
"오냐. 그리 죽고 싶다면 못 해줄 것도 없지."
숨을 거칠게 쉬며 그녀가 낮게 중얼거렸다.
"계속 그리하거라. 천지 분간 못 하고 날뛰는 네 행동들이 네 숨통을 조여줄 테니."
그녀의 그런 히스테릭한 외침을 데이비가 들으며 콧노래를 부르고 있다는 사실을 그녀는 몰랐다.
* * *
결과는 예상대로 흘러갔다.
왕궁 내부에 소문이 퍼지기 시작한 것이다.
1 왕자 데이비 올 라운이 미쳤다.
광기에 휩싸여 근처에 있는 이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죽였고 왕족으로서의 체통도 잃어버렸다고 말이다.
왕궁 내부의 인간들 반 이상이 그녀의 사람인 만큼 소문이 퍼지면서 내 이미지가 폭락하는 건 한순간이었다.
그래도 과거엔 유약하고 왕이 될 제목은 아니지만 정이 많고 착한 왕자 정도로 인식이 굳어져 있었는데 이제는 빼도 박도 못하게 광인 취급이다.
"저하! 오늘도 약재가 도착했어요!"
고요하게 책을 읽고 있던 도중 시녀 에이미가 조심스레 들어와 호들갑을 부려댔다.
그녀도 내가 검을 휘두른 모습에서 꽤 충격을 받은 듯하지만 다른 이도 아니고 자신을 구하려고 했다는 점과 평소엔 멀쩡한, 아니 오히려 다정한 사람이라는 것을 잘 눈치챈 듯 곧잘 웃어 보이곤 했다.
귀여운 동생을 보는 듯한 느낌이라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회랑에서 나보다 젊은 이는 없었으니까 못해도 누나나 형. 아저씨 할아버지 정도로 불렸지 동생취급을 했던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지금 이곳에서의 나이는 열여섯. 그녀는 나보다 조금 어린 편이다.
그런 점에서 동생이라면 동생이 맞긴 했다.
드러난 신분의 차이는 어마어마하지만 말이다.
내 사람은 내가 지키는 게 맞지 않는가.
"누가 가져다 놓는 거야."
처음엔 식재료만 가져다 놓더니 사제 보르트를 베어버린 이후로 약재까지 도착하고 있다.
은밀하게 도착하는 터라 크게 소문이 나거나 하진 않았지만 내게는 꽤 도움이 되고 있다.
물론 약재까진 필요 없어서 잘 보관만 하고 있을 뿐이다.
명백히 말해서 내 몸은 회복을 마쳤다.
5달이라는 시간 동안 회복과 수련에 전념한 결과 그 여파가 크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회복에 속도가 붙으니 몰라볼 만큼 건강해지는 것도 순식간이었다.
누군가가 밤에 왔다가 간 것을 알면서도 모른 척 묻자 그녀가 배시시 웃어 보였다.
"글쎄요. 데이비 저하의 성품을 아는 이가 몰래 돕고 있을지요."
"네가 보기에 내가 성품이 좋아 보이냐?"
"예!"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이며 해맑게 웃는 모습에 피식 웃음이 나왔다.
눈앞에서 사람을 베어버렸는데도 저렇게 나오는 걸 보면 참 여러 의미로 대단한 녀석이다.
"약재는 적당히 잘 관리해서 넣어놔."
"약을 달여드리는......."
"내 몸은 내가 잘 알아. 지금 먹고 있는 약으로 충분해."
한사코 거절하자 그녀가 울상을 지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한다면 하는 놈이거든.
"데이비 저하, 계십니까."
에이미를 놀리듯 담소를 나누던 도중 누군가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가자 정갈한 복장을 한 노집사 하나가 내게 고개를 숙였다.
"왕국의 작은 태양을 뵙습니다."
"겉치레는 됐어. 무슨 일이야?"
눈앞의 노인이 누구인지는 알고 있다. 시종장 베스퍼스.
왕의 시중을 드는 시종장이자 왕실 내부 시종들의 우두머리이기도 했다.
내가 태어날 때부터 이곳에서 일해온 잔뼈가 굵은 노인이다.
"리네스 왕비 저하의 명으로 1 왕자 궁의 예산을 횡령하고 직무를 피해 도망쳤던 자들이옵니다."
그의 단호한 말에 내가 눈을 가늘게 뜨고 작게 탄성을 흘렸다.
시선을 돌려보니 10명이 조금 넘는 인물들이 하나같이 겁에 질린 얼굴로 포박되어 바닥에 무릎을 꿇고 있는 게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