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
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
- 1권 11화
"그래, 너희들이란 말이지."
정원사. 시녀. 하녀. 집사. 이외에 관련된 하급 귀족들까지.
하나같이 종류는 다양해 보인다.
직접 잡아내려 했다면 이중 반수는 도망쳤을 테니 상황극 잘 펼친 꼴이다.
시녀 에이미를 제외하고 이곳에서 원래 일하도록 되어있지만 내가 오랜 시간 혼수상태에 빠져 있자 기회다 싶어 도망친 작자들.
그 와중에도 봉급은 한 푼의 미납 없이 꼬박꼬박 챙겨 먹은 횡령범들이다.
안 그래도 미쳤다는 소문이 돌고 있는 찰나에 나와 시선을 마주하니 그들의 얼굴이 핼쑥하게 변했다.
"베스퍼스 시종장."
"예 저하."
"이 경우 처벌은?"
"극악무도한 자들입니다. 본래는 직계 가족까지 참수형이지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그가 대답하자 묶여있던 자들의 얼굴이 파랗게 질렸다.
"저...... 저하! 죽을죄를 지었습니다!"
"사...... 살려주십시오!"
벌벌 떨며 다가와 내 다리를 붙잡고 애걸하는 모습에, 대부분의 인간들이 용서를 빌고 머리를 숙였다.
미쳤다곤 해도 내가 정에 약한 인간 군상이라 혹시라도 봐주지 않을까 그리 여겼던 것이겠지.
아니면 살기 위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라 그랬을 수도 있고 말이다.
"최근에 왕궁 내부에 재밌는 소문이 도는데."
"소문이라 하심은?"
바짓자락을 붙잡고 애걸하는 이들을 무시한 채 내가 시종장 베스퍼스를 보며 말했다.
"내가 피에 미쳤다고."
"그런 소문이 돌긴 합니다."
절대 돌려 말하는 꼴을 보지 못하겠다는 듯 그가 단호하게 말했다.
확실히 내 궁에서 나를 치료하러 온 사제가 칼에 맞아 죽었으니 그런 소문이 돌아도 이상할 건 없다.
정황 조사도 없이 즉결 처분.
물론 그렇다고 당장 나를 어떻게 할 명분은 생기지 않는다.
리네스 왕비가 근신이라는 웃기지도 않은 처분만 내리고 조용히 지켜보는 것도 사실상 그 이유에 가까웠다.
입지가 좀 더 좁아지고 패악질이 심해지면 그때 가서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어디까지나 지금의 나는 법도를 어긴 자들을 처벌하는 것일 뿐이다.
"그럼 그 소문에 맞춰서 해줘야겠지."
"......."
내 말에 베스퍼스 시종장이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는 포박되어 무릎을 꿇고 있는 이들을 데려온 병사들에게 말했다.
"저하의 명을 들었느냐."
"예!"
"데려가라. 감히 라운 왕국의 귀중한 국고를 횡령한 흉악무도한 자들이다. 물 한 모금 주지 말고 가둬라. 나흘 후에 참수형에 처한다!"
"아이고 시종장 어르신!"
"살려주십시오!"
엉엉 울며 매달리는 이들을 가볍게 무시한 채 그가 엄하게 소리쳤다.
"왕국민의 혈세를 빨아 제 배를 채운 이들이다. 뭣들 하느냐! 끌고 가지 않고!"
그 말에 병사들이 울고불고 난리 치는 이들을 단단히 끌고 사라졌다.
"하면 신은 물러가 보겠나이다."
"왕비 저하의 명이라고 했나?"
"예. 감히 국고를 횡령한 자들을 그동안 찾아 잡아들이셨다고 하더군요."
"웃기고 자빠졌네."
내 말에 베스퍼스의 얼굴에 조금 경악이 어렸다.
하지만 금방 정신을 차린 듯 표정을 지웠다.
"저하, 위치를 생각하시어 조금 순화된 언어를 사용하시지요."
미안하지만 영감님, 이미 볼 거 다 봤습니다. 그래도 어릴 적엔 나를 보고 자주 웃어주고 간식도 주던 사람이었는데.
"새로이 일을 할 이를 뽑아 오후부터 배치하도록 하겠나이다."
"에이미는 내 전담 시녀로 붙여줘. 그동안 고생이 많았으니 수석 시녀로 직급을 올리고, 내가 내릴 수 있는 포상은 내궁의 예산에서 별개였던가?"
"그렇습니다."
"보너스 두둑하게 얹어줘."
"받잡겠습니다."
그리 말하고 그가 정중하게 고개를 숙였다.
"아 그리고."
물러가려던 그를 내가 붙잡았다.
"아바마마와의 알현 요청은 여전히 불가한가?"
내 말에 그가 침묵했다.
"죄송합니다."
"그건 아바마마의 명이야, 아니면 왕비의 명이야."
내가 이미 어느 정도의 정세를 파악했다는 사실에 그리 재밌는지 그가 허허롭게 웃어 보였다.
"신은 그저 명을 전달할 뿐입니다."
"그렇단 말이지. 고생했어 돌아가 봐."
내 말에 그가 묵묵히 돌아섰다.
그러더니 다시 멈추고는 조용히 말했다.
"저하, 인내하셔야 합니다. 왕궁은......."
"됐어, 그대가 무슨 말을 하려는지는 알고 있으니, 인내라...... 참고하긴 할게."
싱긋 웃어 보이자 그는 더 이상 미련 없다는 듯 물러났다.
리네스 왕비의 사람이 아닌 이 중 하나가 베스퍼스 시종장이다.
그가 하는 말이 그저 경고가 아니라 연륜에서 묻어나오는 충고라는 걸 모르진 않았다.
확실히 그가 보기에도 나는 위태위태한 상황이니 말이다.
아무것도 없는 왕자가 너무 겁이 없다고.
다만 그가 모르는 사실 한가지. 나는 아무것도 없는 게 아니다.
* * *
꼬리 자르기.
왕비 리네스는 괜히 치부가 될만한 것들을 하나둘씩 정리하고 있다.
나와의 거래를 명목으로 말이다.
이렇게 하나하나 증거가 될 만한 것들을 자르다 보면 언젠가는 무서울 게 없어질 터.
그녀는 그때를 노리고 있는 것일 터다.
본래라면 바로 치고 들어올 줄 알았는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 꽤 신중하다.
묵묵히 책을 보던 중 에이미가 조심스레 들어왔다.
"저하, 간식이옵니다."
"늘 고마워."
빙그레 웃어주자 그녀가 얼굴을 빨갛게 물들였다.
"저하. 4 왕자 저하와 2 왕녀 저하가 궁에 돌아왔다 합니다."
"바리스와 윈리 녀석이?"
뜻밖에 반가운 소식이었다.
그녀를 올려다보니 그녀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예, 저하께서 깨어나셨다는 소식을 듣고 곧바로 지방에서 올라온 모양입니다."
"꽤 반가운 소식이네."
"때마침 국왕 폐하의 알현을 마치고 곧바로 이곳으로 들른다고 하였습니다."
"그럼 그냥 넘길 수야 있나. 다과라도 준비해줘. 향이 좋은 차도."
내 말에 그녀가 헤실헤실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현왕 크리아네스 올 라운은 한 명의 부인과 두 명의 첩을 두고 있다.
첫째가 현 왕비 리네스.
그리고 1 후궁인 아니샤, 2 후궁인 엘리스.
본래라면 내 어머니가 왕비의 자리에 있어야 했지만 어머니는 내가 어릴 적에 돌아가셨다.
이후 무슨 정치적인 술수가 있었는지, 어머니에 대한 기록이 죄다 소실되어가고 있는 게 현 실정이다.
결국 어머니에 대한 기록은 내가 있는 이 1 왕자 궁에 남아 있는 게 전부였다.
말없이 사진을 들여다보니 작은 나를 안고 자애롭게 웃고 있는 흑발의 미녀가 보였다.
자뻑이긴 하지만 내 얼굴은 꽤 부드럽게 잘생긴 얼굴이니까.
내가 어머니의 유전자를 꽤 많이 받은 것처럼 어머니 또한 흑발이 정말 잘 어울리는 미녀였다.
"누구 유전자를 물려받았는지 아들내미 훤칠하게 잘생겨서 잘살고 있습니다."
말을 걸어보지만, 당연히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거긴 살만합니까?"
죽은 영혼은 본디 순례의 궤도를 타고 환생을 하게 된다.
어쩌면 돌아가신 어머니는 다시금 환생해 이 세계나 다른 세계 어딘가에서 살아가고 있지 않을까.
찾을 방법은 없기 때문에 어머니를 다시 본다는 선택은 없었다.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어머니를 죽인 작자들을 그냥 편하게 죽일 순 없지 않겠습니까."
"데이비 형님!"
"오라버니! 윈리에요! 제가 왔어요!"
묵묵히 쿠키와 차를 준비해 놓고 기다리자 다급한 두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 여기 있다 이놈들아, 들어와."
꽤 그리운 목소리라 유쾌하게 웃으며 허락하자 문이 벌컥 열리며 작은 소년 소녀 두 명이 뛰어들어왔다.
녹발이 잘 어울리는 귀여운 십 대 중반의 꼬맹이들이었다.
나이 14살.
4 왕자 바리스. 그리고 바리스와 쌍둥이인 2 왕녀 윈리다.
"오랜만이다."
"형님! 깨어나셨다는 소식을 듣고 겨우겨우 짬을 내서 곧바로 말을 달려 찾아왔습니다. 정말 다행입니다!"
귀엽게 소리치는 바리스의 머리를 푹푹 쓰다듬어주자 윈리가 자신도 해달라는 듯 다가왔다.
"둘 다 잘 지냈어?"
웃는 얼굴로 물어보자 녀석들이 세차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암요. 제가 누굽니까. 형님의 동생입니다. 그깟 지방생활이 무에 어렵습니까."
"헹! 그러는 넌 맨날 힘들다 힘들다 노래를 부른 주제에."
"뭐? 야! 오빠한데 너라니! 그리고 화적 놈들 때문에 투덜거리던 건 너도 마찬가지 아니냐!"
"웃기지 마! 5분 먼저 태어난 게 오빠냐?!"
"하!"
신나게 떠들어대는 모습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몇 안 되는 내 적이 아닌 이.
이 왕실에서 과거에도 그러했듯 내가 믿는 녀석들이었다.
7. 습격.
멍청하고 생각이 없는 2 왕자 칼루스나 음침하고 사상이 비틀린 베네디트와 다르게 눈앞에 있는 이 두 녀석은 왕족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만큼 꽤 유쾌한 녀석들이다.
그냥 잘 투덕거리는 쌍둥이 남매 정도가 더 잘 어울린다.
왈가닥 성질이 강한 두 녀석은 내가 눈에 보이지도 않는지 서로 아르릉거리기 바빴다.
이제야 정말 10대 초반의 꼬맹이들을 보는 기분이 들었다.
녀석들의 나이는 고작 14살.
아직 한창 어리광부리고 놀 때이기도 했다.
내 기준에서 말이다.
"잘 지냈다니 다행이네. 보자. 그 작은 녀석들이 이리 잘 컸냐."
"6년 만이지요. 형님이 쓰러지시고 저희는 곧바로 지방으로 향했습니다."
뭔가 분한 듯 바리스가 중얼거리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그래. 대충 상황은 들었어."
리네스 왕비가 차기 왕의 후보에 방해가 되는 그를 치웠다고 봐도 무방했다.
제 자식들의 위세를 위해 1 후궁의 첫 딸인 1 왕녀 타냐도 아무렇지 않게 타국에 팔아넘긴 여자가 리네스 왕비가 아니던가.
왈가닥 성질에 돌아다니길 좋아하는 바리스와 윈리를 적당히 치워버린 것도 이해는 되었다.
"아바마마는 뵈었고?"
"예."
"어찌 지내신다더냐."
"조금 피로해 보이셨습니다. 그리고......."
바리스가 말하다가 멈칫했다.
동시에 윈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데이비 오라버니, 아바마마를 뵙지 못하신 거예요?"
"어쩌다 보니 그리됐네."
그 말에 윈리의 표정이 마음에 안 든다는 듯 구겨졌다.
"세상에......."
아들이 혼수상태에서 6년 만에 깨어났다.
이후 다섯 달이 지났는데 아비의 얼굴을 한 번도 못 봤다니.
"아마 금방 뵐 수 있을 거다."
"형님......."
배다른 자식이지만 2 왕자 3 왕자인 칼루스나 베네디트와 다르게 두 녀석은 정말로 나를 잘 따라주었다.
나와 같이 정이 많은 성격인 탓이다. 다만 녀석은 그만큼 강단이 좋았고 끈기도 있는 녀석이었다.
그게 내가 녀석들을 좋아하고 믿어주는 이유이기도 했다.
차기 국왕이라면 바리스가 제격이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을 테니.
"정말 왕비 저하도 너무하시지......."
울상을 지으며 윈리가 내게 안겨오자 말없이 녀석의 등을 토닥여주었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오는 길에 봤습니다. 궁의 상태가......."
말을 잇지 못하는 바리스의 목소리에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동안 국고를 횡령한 놈들이 있었거든. 때마침 너희들이 오기 전에 모두 잡아서 압송했으니 곧 원래대로 돌아올 거다."
내 말에 바리스가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알면서 방치했다는 거 아닙니까! 형님이 병상에 누워계신 것을 이용해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