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
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
- 1권 17화
"발르티앙 왕자님! 무례는 적당히 범하세요!"
"윈리 왕녀는 빠지십시오! 이 일은 제 기사로서의 명예를!......."
"명예를 찾으시는 분이라면 지금 왕자께서 보인 무례가 얼마나 큰지도 아실 텐데요!"
그녀의 반박에 그가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는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소리 질렀다.
"에잇! 시끄럽습니다!"
개 쪽을 당한 게 이판사판이라 여긴 건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짓는 윈리와 마찬가지로 이곳에서 연회를 즐기던 누군가는 이 상황이 퍽 우습게 보였던 모양이었다.
"윈리 왕녀님 말이 맞는다고 보는데요."
이렇게 직접 나설 정도라면 말이다.
분노한 채 소리 지르던 발르티앙의 말을 끊은 것은 윈리도, 나도, 그리고 이 모습을 보고 분노해 성큼성큼 걸어오던 바리스도 아니었다.
"이, 일리나 황녀......."
옥구슬이 굴러가는 듯한 소녀의 목소리에 발르티앙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발르티앙 드 볼티즈 왕자님."
"......."
"다시 묻겠어요. 지금 왕자께서 명예를 찾을 자격이 된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녀의 목소리는 청아하고 아름다웠다.
하지만 북풍의 한설처럼 차갑기 그지없었다.
손을 달달 떨며 물러나는 그에게서 시선을 돌리자 작은 키의 소녀가 싸늘하게 그를 노려보고 있는 게 보였다.
꿀을 녹인 것 같은 찬란한 색을 지닌 허리까지 오는 금발을 가진 소녀는 거짓 하나 보태지 않고 정말 눈이 부실 만큼 아름다웠다.
여신, 혹은 천사의 모습이 저렇지 않을까 싶을 만큼.
다만 소녀를 본 나는 다른 의미로 기묘함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하레스?"
검신 하레스.
내게 검을 가르쳤던 수천 년 전의 영웅과 그녀의 인상이 너무 닮아있었다.
저도 모르게 그녀를 본 내가 반사적으로 중얼거렸다.
동시에 내 말을 들었는지 소녀가 놀란 눈동자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뭔가 사고를 친듯한 느낌이 절실하게 들어왔다.
이놈의 주둥아리.......
* * *
검신 하레스.
패도적인 검술 [중검]의 창시자이자 검신에 이른 그의 검술은 일격이 태산이고 바다가 된다.
다만, 회랑에서 그를 부르는 별칭은 그런 대단한 것과는 달랐다.
게으름뱅이 노친네.
생긴 건 젊게 생긴 남자인데 나이가 회랑의 영웅들 사이에서도 많은 편이라 노인 취급을 많이 당하던 사내이기도 했다.
문제는 그는 분명 남자였다는 점이다.
꽤 미형의 남성이긴 하지만 여성은 아니었다.
그런 의미에서 눈앞의 소녀는 그와 닮았으면서도 미묘하게 달랐다.
마치 그가 여성이 되고 극도로 미화되면 이리되지 않을까 싶은 느낌이었다.
"방금...... 뭐라 하셨죠?"
내 말에 눈을 부릅뜬 소녀가 떨떠름하게 물어왔다.
꽤 놀란 듯한 얼굴에 영문 모를 기분이 들었지만 잽싸게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착각을 했나 보네요."
"......."
묘한 시선이 오고 간다.
한참 동안 의심스레 나를 쳐다보던 그녀는 곧 상념을 털어내듯 발르티앙을 향해 싸늘하게 말했다.
"상황은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다시 묻겠어요. 발르티앙 왕자님."
"크읏."
"당신에게 명예를 따질 자격이 현재 있다고 보시나요?"
그녀가 끼어듦으로 인해서 수많은 사람이 숨죽여 상황을 지켜보았다.
이곳에 모인 이들은 각 국가에서 대표 유망주로서 초대를 받은 이들이 대부분이다.
"당신은 파트너가 있는 레이디에게 무례를 가한 것도 모자라 이곳에 있는 모두를 모욕했습니다. 게다가 파트너가 있어서 거부하는 레이디에게 멋대로 손을 대려 했죠."
꽤 세심하게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나 보네.
그녀의 싸늘한 목소리에 발르티앙의 얼굴이 창백하게 일그러져 갔다.
그의 표정을 간단하게 확인하자면.......
낭패를 봤다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럴 만도 하지, 이곳에 모인 이들은 다들 하나같이 국가의 대표로 온 이들이다.
하지만 그들 중에서도 가장 심기를 거슬렸을 때 골치 아픈 건 다름 아닌 눈앞의 소녀, 바로 일리나 황녀일 것이다.
현재 대륙의 초강대국인 3 제국 중 하나인 팔란 제국.
그 황제의 금지옥엽.
그녀의 한마디에 궁을 밀어버리고 정원을 만들었다는 일설까지 나도는 팔불출의 딸이다.
그 외에도 그녀가 가지는 입지는 대단했기에 발르티앙의 표정은 펴질 줄을 몰랐다.
"흥, 정말 당신이 명예를 아는 기사라면 당장 두 분께 진심 어린 사과를 올리는 게 맞는다고 보는데요."
군중심리란 무서운 것이다.
그녀의 말에 동조하기 위해 고개를 끄덕이는 몇몇이 웅성웅성하자 나머지 이들도 하나같이 그 분위기에 편승하지 않는가.
시뻘겋게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얼굴을 한 채 부들부들 떠는 그는 당장에라도 도망칠 것 같은 분위기를 내비쳤다.
"결투라는 거, 받아들이지요."
하지만, 그냥 그렇게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이렇게 돌려보내면 그저 그것으로 끝일 테니까.
"지금 무슨......."
내 말에 윈리가 놀란 듯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일리나 황녀 또한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한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기껏 나섰더니 그녀의 공로를 모조리 흩어버리고 있지 않은가.
뭐, 그렇게 생각할 순 있지만 나는 나름대로 생각이 굳건한 편이었다.
"발르티앙 왕자, 결투를 신청한다고 했나?"
"......그...... 그렇다!"
"받아들이지."
"형님!"
"오라버니!"
쌍둥이 아니랄까 봐 바리스와 윈리가 동시에 기겁하며 소리쳤다.
"크윽...... 조, 좋다! 내가 이기면 당신은 모두가 보는 앞에서 내게 무릎 꿇고 사죄하라!"
"이봐 발르티앙 왕자!!"
격노한 바리스가 씩씩거리며 그의 멱살을 틀어잡았다.
"지금 하는 이 어처구니없는 행동이 국가적 문제로 번질 수 있다는 건 알고 있는 거겠지?"
살기등등한 얼굴로 당장에라도 베어버릴 듯 날카롭게 소리치는 바리스는 당장에라도 보는 눈이 없었다면 그를 메다꽂아버렸을 만큼 험악했다.
"하...... 정당한 대결이라면 두려울 게 뭐가 있지? 하! 그래! 들은 적이 있지, 데이비 왕자. 하늘이 내려준 재능이니 뭐니해도 결국은 검을 쥐지도 못하는 반병신이!"
"이 자식이!!"
격하게 분노한 바리스가 주먹을 들기가 무섭게 녀석을 말렸다.
"됐어, 바리스."
"형님!"
싱글싱글 웃어주며 녀석의 머리를 푹푹 눌러 쓰다듬어주자 이를 악물고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형님은 깨어난 지 얼마 되지도......."
"괜찮아."
담담하게 말하며 발르티앙 왕자를 바라보았다.
"말의 무게는 스스로 판단해야지."
"좋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내가 패배하면 모두가 보는 앞에서 무릎 꿇고 사죄하지!"
"좋아."
내 대답에 그의 음흉한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딴에는 절대 자신이 질 수 없을 것이라 여기고 있을 것이다.
당연한 반응이었다.
혈기왕성한 십 대 중반의 소년 소녀들이다.
이곳에 모인 이들은 저마다 국가의 대표 유망주로 선발되어 올 만큼 실력이 좋은 녀석들이기도 했다.
확실히 십 대 초중반에 익스퍼트에 들어가는 건 어지간한 재능이 아니고서야 힘들 테니까.
그를 따라 연회 홀의 중앙으로 걸어나가며 시선을 돌리자 걱정어린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두 동생이 보였다.
어떻게든 말리고 싶은데 내가 왜 이런 고집을 부리는 건지 모르겠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그 외에도 여러 표정이 보였다.
호기심, 혹은 괜한 사달이 나는 게 아닌가 걱정하는 부류도 보였다.
그리고, 단 한 명.
차갑게 쳐다보면서도 무언가 다른 생각에 빠져 있는 이도 한 명 있었다.
"검을 들어라! 오늘 이 자리에서 검술의 심도를 직접 새겨주겠다!"
자신만만하게 외친 발르티앙 왕자가 목검을 내게 겨누며 소리쳤다.
이에 나 역시 바닥에 놓인 목검을 집어 들고는 가볍게 늘어뜨린 채 여유로이 웃어 보였다.
"오랜만이네. 이런 것도."
* * *
친목, 화합을 위해 열린 연회장의 흐름은 순식간에 대련으로 번지는 듯 보였다.
서로가 국가를 대표하는 젊은 유망주들인 만큼 저들끼리의 자존심 싸움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상당히 일어나고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무슨 이유였는지 각 국가의 분쟁을 막아야 할 귀족들도 쉬쉬하며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괜히 나섰다가 골치 아파지는 상황을 피하고 싶었던 거겠지.
이외에 펠리스티 공국 측 또한 이렇다 할 제재를 가하지 않은 채 그저 멀찍이서 대련을 지켜만 보고 있었다.
연회를 즐기러 온 이들은 곧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대련을 위해 벌린 공간을 바라보며 침묵했다.
"고수는 하수에게 선공을 양보하는 법이다!"
철심이라도 박혀 있는 건지 목검을 이리저리 휘저어보는 내게 그가 거만하게 소리쳤다.
튼튼한 바스타드 소드 디자인의 목검을 든 그는 거만하게 선 채 내게 검 끝을 겨누고 까딱거렸다.
"저 무례한 자식!"
그 행동거지에 바리스가 화가 난 듯 소리쳤다.
그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도 티를 내진 않았지만 묘하게 거슬린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 이들이 많았다.
혈기가 왕성한 것과 무례한 것은 다르니 말이다.
게다가 상황을 보고 있었던 이들은 누가 무례를 넘어 뻔뻔하게 굴고 있는지도 이미 알고 있는 상황이었다.
개중에 가장 발르티앙을 싸늘하게 쳐다보는 건.
다름 아닌 팔란 제국 황제의 금지옥엽이라 불리는 일리나 황녀였다.
묘하게 짜증 어린 얼굴로 발르티앙을 노려보던 그녀는 곧 내게 시선을 돌린 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이거 배려에 몸 둘 바를 모르겠네."
우스갯소리를 하듯 중얼거린 뒤 얇은 목검을 이리저리 둘러보다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햇병아리.
환골탈태는 아직이지만 그동안 회복하면서 쌓아온 게 있다.
익스퍼트 중급이상부터 상급까지, 다양한 암살자 전원을 압살한 경험이 있는 내게 이제 갓 익스퍼트에 발을 들이민 녀석이 싸움을 걸었더라.
본래 성질대로라면 다시는 검을 잡지 못하게 철저하게 무너뜨려 버리고 싶지만 일단 나는 대외적으로 병상에서 일어난 지 1년도 안 된 유약한 왕자일 뿐이다.
좋은 방법이.......
있다. 딱 하나.
"오지 않는 건가? 하, 그렇겠지. 겁을 먹는 건 당연하다."
마치 자신이 벌써 이긴 것처럼.
발르티앙이 차갑게 조소했다.
"하지만, 이미 대련은 시작되었다! 뭐 하는 거지? 어서 들어와라!"
마치 아랫사람 대하듯 소리치는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볼티즈 국가와 라운 왕국의 사이가 참 안 좋기는 안 좋구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뭐, 배려해준다는데 거절할 수야 있나."
괜히 복잡한 생각이 들지만 가볍게 무시해버렸다.
딱 한 가지 존재한다.
내 실력을 완전히 숨기면서 상대를 이길 수 있는 방법.
게다가 상대의 멘탈을 효율적으로 아주 가루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방법이.
"오라버니......."
걱정스레 나를 바라보고 있는 윈리의 목소리가 옅게 들려왔다.
"그럼, 한번 들어가 보지."
가볍게 중얼거리며 그를 향해 묵직한 목검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천천히, 한발씩 내디뎠다.
그리고, 일정 거리에 다가왔을 즈음.
마치, 성난 황소마냥 빠르게 그를 향해 돌진했다.
쌔애애액!!
묵직한 파공음과 함께 내 목검이 그를 향해 파고들었다.
가벼운 종 베기.
하지만 발르티앙은 이미 그렇게 올 거라는 사실을 예상이라도 한 듯 가볍게 한발 빠지는 것만으로 내 검을 피해내 버렸다.
"어어어?"
텅!!
그렇게 되자 목표를 잃어버린 내 목검은 애꿎은 바닥을 때렸고 그대로 무게중심을 뒤틀며 내 몸까지 흔들어버렸다.
"멍청하......."
빠아악!!
그때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