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
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
- 1권 21화
바리스의 경기는 다름 아닌 볼티즈 왕국의 왕자, 발르티앙과의 대련이었다.
대진표도 얄궂은 것이 어떻게 그렇게 바로 만나나 싶은 생각도 들지만 괜히 대진표가 꼬여서 만나지 못하는 것보다 낫다고 여기는 듯 보였다.
굳은 얼굴로 연무장에 올라선 녀석은 공포나 두려움 따위는 보이지 않는 결연한 표정이었다.
이미 전 경기로 인해 경기장 전체에 달아오를 대로 달아오른 기대감이 느껴졌다.
하나같이 출중한 녀석들이니 그들이 보인 무위가 보통의 난투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었을 것이다.
바리스는 제 몸집만 한 클레이모어를 가지고 있었는데 역시나 비살상 대련답게 검의 날은 상당히 무딘 편이었다.
마법사진과 실력이 출중한 사제들이 대기하고 있지만 날이 선 무기로 까딱 잘못 맞으면 회복도 하기 전에 죽기 십상이니 말이다.
"괜히 성난 망아지마냥 날뛰다가 다치는 건 아닐까 몰라요."
"바리스는 경험이 많으니까. 괜찮을 거다."
"그것도 그렇지만......."
윈리는 후방 보조였지만 바리스는 제 성격 탓인지 변방에서 화적떼를 소탕할 때도 선두에 서곤 했다.
그 때문에 녀석을 보호하려는 기사들이 얼마나 바쁘게 움직였는지는 몰라도 애도를 표할 수밖에.
이윽고 반대편에선 발르티앙이 롱소드를 든 채 천천히 올라왔다.
전날 연회에서 나에게 당한 창피 때문에 표정이 좋지 않을 줄 알았건만, 그의 표정은 무서우리만치 무표정 그 자체였다.
"검의 날이 무디다곤 하나 살초는 절대 금합니다! 무기에 직접 검기를 실어 공격하지 마십시오."
로브를 입은 마법사가 조용히 당부한 뒤 대련장 전에 배리어를 설치했다.
둘의 싸움 여파가 관객석까지 날아드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
적의가 한가득 담긴 시선이었지만 바리스는 끝내 아무 말 하지 않고 발르티앙을 노려보았다.
반대로 발르티앙은 그저 묵묵히 검을 뽑아 들 뿐이었다.
"시작!"
이윽고 시작 신호가 울리기가 무섭게 두 사람이 그대로 충돌했다.
힘을 이용한 파괴적인 검술을 주로 익힌 바리스.
그리고 롱소드로 상대를 농락하듯 요리하는 변칙적인 검을 구사하는 발르티앙.
경지나 검술이나, 상성으로 치면 바리스가 우위였다.
게다가 발르티앙이 보여준 추태 때문에 주변 분위기가 그에게 불리하도록 돌아가고 있었다.
실제로 연회에서 그를 보았던 이들은 발르티앙에게 어떤 기대도 하지 않는 듯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음?"
발르티앙은 모두의 예상과 다르게 바리스의 검을 상대로 정면으로 들어갔다.
그가 성장해서? 아니었다.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카앙!! 캉!!
둘 다 마나를 이용해 육체를 강화한 익스퍼트급 실력가.
어찌나 강하게 충돌하는지 날이 없는 검끼리 충돌할 때마다 불똥이 튀기는 게 보일 지경이었다.
카앙!! 캉!!
열광하던 사람들은 둘의 예상 못 한 접전에 놀란 듯 고요한 침묵에 휩싸였다.
소리를 지를 새도 없이 둘의 경기에 열중해 손을 꽉 쥐고 숨을 삼킨 것이다.
변칙적인 검술을 버리고 어디서 익혀왔는지 모를 특이한 강검술을 구사하는 발르티앙은 전날 내게 보여주었던 그의 육체 능력을 아득히 넘어서고 있었다.
단시간에 성장한 건 분명히 아니었다.
마치, 사람이 바뀐 것처럼 그의 검술은 이질적이기 그지없었다.
내가 전날 바리스의 마나를 깨워놓지 않았다면 큰 낭패를 보았을 만큼 말이다.
카앙!!
힘을 겨루듯 서로를 밀어붙이던 두 사람이 동시에 떨어지며 거리를 벌렸다.
"우와...... 저 녀석이 저렇게 날래게 움직이는 건 처음 봐......."
윈리의 말대로였다.
짧게 숨을 고르는 바리스는 자신의 육체 능력이 전날과는 확연히 다르게 늘었다는 점에서 한번 놀란 듯했고, 변칙적인 검을 구사하는 그가 자신과 같은 강검으로 치고 들어온 것에 또 한 번 놀란 듯했다.
"많이 성장했네."
목검을 마구잡이로 휘두르며 기사가 될 거라고 호언장담하던 녀석이 많이 성장했다.
발르티앙이 이상한 건 사실이지만 바리스에 대한 대견함도 언뜻 느껴졌다.
"이렇게 강검을 잘 쓸 거라곤 생각 못 했는데."
숨을 고르며 바리스가 조용히 발르티앙을 향해 물었다.
하지만 발르티앙은 처음의 무표정 그대로 아무런 말도 하지 않은 채 롱소드를 들어 올려 그를 향해 파고들 뿐이었다.
다시 한 번 기시감이 들었다.
"오라버니, 왜 그러세요?"
"아무것도 아니야."
담담하게 말하면서도 나는 곧장 사령 마나를 안구에 집중시켰다.
무영창의 마법이 발현되며 시야에 보이지 않던 것들이 서서히 보이기 시작했다.
상대의 내부를 꿰뚫어보는 흑마법이었다.
동시에.
발르티앙의 몸에 흐르는 기류를 본 내 표정이 찡그려졌다.
"이것 봐라?"
뭐가 이상한 건지를 깨달은 내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 충돌하던 두 사람의 대련이 결판나는 것도 동시였다.
결판을 짓듯 파고든 바리스의 검을 향해 발르티앙이 그대로 몸을 들이민 것이다.
마치 바리스의 틈을 억지로 만들려는 듯한 태도.
반사적으로 검의 궤도를 틀어 재차 공격을 가하려 했지만 그 짧은 틈을 발르티앙은 놓치지 않고 검을 휘둘렀다.
그리고, 그의 검에 순간적으로 붉은 기류가 어렸고 그대로 바리스의 심장을 향해 망설임 없이 검을 찔러넣어 버렸다.
쩌엉!!!!
동시에 그의 몸에서 푸른 기막이 발르티앙의 공격을 막아내고는 그대로 박살 나듯 사라져 버렸다.
11. 검 좀 빌립시다.
대륙 검술대회는 뛰어난 이들이 겨루는 대회지만 상대를 죽이지 않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스포츠에 가까운 대회.
하지만 발르티앙의 검은 살초를 쓰면 안 된다는 규칙과 검기를 무기에 두르면 안 된다는 가장 큰 규칙 두 개를 가차 없이 어겨버렸다.
경악으로 가득한 경기장 내부가 서서히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푸른 기막.
검을 어느 정도 익힌 이가 그걸 모를 리는 없었다.
익스퍼트 중급이상. 그러니까 상급 이상이 된 숙련가들이 사용하는 자체 배리어.
위험한 공격이 가해질 때 마나가 주인을 보호하기 위해 스스로 움직여 보호하는 현상이었다.
기막이 발현되는 시점부터 마법에 대한 강인한 내성을 지니게 되는 익스퍼트 상급 이상의 경지라 불리기도 했다.
대부분의 검을 수련하는 이들이 이 경지를 돌파하지 못해 좌절하는 경우가 많은데 바리스는 그것을 열넷의 나이에 개척해버린 것이다.
내가 해준 것은 녀석의 몸에 굳어있던 마나를 살짝 주물러 준 것뿐이지만 그것으로도 녀석의 경지는 이미 한 단계 오른 후였다.
물론, 발르티앙이 보인 검기가 보통의 검기가 아닌 불길한 붉은 색의 검기였고 그가 기막을 발현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상급에 갓 들어선 녀석이기에 충격을 모조리 완화할 순 없었다.
"쿨럭!"
소량의 피가 입을 통해서 흘러나오자 바리스가 창백해진 얼굴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대련은 중단이오! 발르티앙 왕자! 두 가지 규율을 모두 어겼으므로 실격을 선언하오!"
마법사의 화가 난 외침과 동시에 기사들이 빠르게 대련장 위로 올라와 그를 에워싸듯 제압했다.
하지만 이 상황이 벌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발르티앙은 무표정한 얼굴로 고개를 기괴한 각도까지 꺾을 뿐이었다.
그리고, 처음으로 입을 열려는 건지 입술을 뻐끔거렸다.
"끄득, 끄드득."
하지만, 그의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는 인간의 것이라고 보기엔 이상한 그런 목소리였다.
"볼티즈 국가의 발르티앙 드 볼티즈 왕자님! 국가 연합의 화합을 위해 개최된 대회에서 이 같은 무례한 행동은 곧 볼티즈 국가의 의도라고 밖에 표현할 길이 없습니다."
개최국인 펠리스티 공국의 관리들이 화가 난 듯 소리쳤다.
여기서 바리스가 죽임을 당하면 보통문제가 아닐 것이다.
그건 바리스뿐만 아니라 이곳에 참가한 모두에게 해당하는 소리이기도 했다.
하나같이 각 국가의 대표로 온 이들.
개중엔 왕족도 있었고 유명한 무가의 자제도 있었다.
비록 나이는 어리지만 이들을 귀히 여기는 국가라면 눈에 불을 켜고 항의를 해올 게 뻔했다.
그렇게 된다면 당연히 국가 연합의 목적인 화합은 얼어 죽을, 너 죽고 나 죽자 식으로 번지게 될 터.
작은 국가 두 곳이 전쟁을 벌여도 명분만 있으면 참가할 생각 만반인 근처의 국가 대부분이 뛰어들 거라는 사실을 모르는 이는 없었다.
그런데 펠리스티 공국 관리의 말에도 그는 그저 고개만 갸웃거릴 뿐 이렇다 할 변명을 늘어놓지 않았다.
"주최 측의 시선에선 왕자님께서 하신 행동은 앙갚음을 위한 악의적이고 고의적인 행동이었소! 이리 아무런 해명도 하지 않으신다면 국가 연합으로 주최된 대륙 검술대회의 현 주최국의 권리로써 볼티즈 국가에 정식적으로 항의하겠습니다!"
최후통첩을 던지듯 관리가 소리쳤다.
"잠깐!"
"기다려 보시오! 지금 왕자님이 하신 행동은 절대 불화를 일으키려 함이 아니오!"
정식 항의는 볼티즈 국가로서도 절대 바라는 것이 아닐 것이다.
헐레벌떡 대련장 위로 뛰어 올라오는 볼티즈 국가의 귀족들이 상황을 무마시키기 위해 진땀을 뻘뻘 흘렸다.
"왕자님! 왕자님께서도 부디 말씀을...... 컥!!"
그때였다.
침묵한 채 가만히 있던 발르티앙이 고개를 기괴한 각도까지 꺾더니 가까이 다가온 귀족의 머리를 틀어잡은 것이다.
퍼석!!!!
"까드드득! 까드드득!!"
귀족의 머리가 야구방망이에 맞은 수박마냥 터져버리는 건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동시에 경기장에서 상황을 지켜보던 모두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 * *
마치 웃는 것처럼.
입을 쩍 벌린 채 기괴한 소리를 흘리기 시작한 녀석은 검뿐만 아니라 검을 잡지 않은 손에서도 붉은 기류를 마구 흘려댔다.
마치 끈적끈적한 액체가 흘러내리듯 그의 몸 전체를 감싸는 붉은 기류의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절로 소름이 돋게 만들었다.
"꺄아아악!!!"
"으아악!!"
그리고, 짧은 침묵 끝에 경기장 곳곳에서 비명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다시 말하지만, 이 경기는 스포츠 개념이 강한 친선 대련이다.
지구의 올림픽 대회에서 경기 도중 선수가 사람의 머리를 잡아 터뜨려버린다면 그로 인해 생길 혼란이 따라오는 것과 같은 이치였다.
기괴하게 웃어 보이는 녀석의 눈동자가 정신없이 움직이기 시작하며 녀석의 흰자위가 시뻘겋게 변하기 시작했다.
동시에 놈의 피부 전체에 정체 모를 핏줄이 돋아나며 흉물스럽게 변하기 시작했고 쩍 벌린 입안으로 보이는 송곳니는 인간이 아닌 괴담 속에 나오는 뱀파이어마냥 길어지기 시작했다.
'감염.'
그것도 검기를 흘리는 감염체를 만들 정도라면 보통 뱀파이어가 아니다.
본능적으로 그것을 깨달은 내가 눈을 가늘게 떴다.
놈의 상태가 내가 알던 놈이 아닌 건 좀 전에 마나의 흐름만 보고 눈치챌 수 있었다.
생물체에게 있어야 할 마나의 흐름은 온데간데없고 기괴한 흐름만이 가득했으니 말이다.
기사들에게 제압당한 채 서 있는 발르티앙을 무시한 채 바리스에게 다가가자 녀석이 반쯤 창백해진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