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2
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
- 1권 22화
"형님......."
"괜찮아. 잘했다."
"쿨럭! 보, 보셨어요? 저 기막을 만들었어요 형님."
힘없이 웃으면서 말하는 녀석에게서는 조금이라도 걱정시키고 싶지 않다는 의도가 엿보였다.
고작 열네 살 어린 소년이다.
아프다고 엉엉 울 아이 같은 나이에 저렇게 깊은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기분이 땅속 끝까지 처박히는 느낌이 들었다.
내가 손을 써두지 않았으면 바리스는 이 경기에서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다른 이도 아니고, 그 삭막한 궁에서 유일하게 내 편이 되어주었던 동생 녀석이 죽을 뻔한 것이다.
"들어가서 쉬어."
"윽......."
"발르티앙."
바리스를 들것에 실어 보낸 내가 연무장 위로 올라갔다.
내 꿈은 어디까지나 남들처럼 평범하게 조용히 잘 먹고 잘사는 것.
전생 현생 합쳐서 오래 살아본 경험이 없는 내가 가질 수 있는 소박한 꿈이다.
회랑에서의 삶은 제대로 살아있는 형태가 아니었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너무 심하게 두각을 드러낼 순 없었다.
제아무리 뛰어난 인간도 모두를 적으로 돌리고 살아남을 순 없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했던가. 냉정하게 판단했을 때 현재의 나는 평균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범위의 다양성을 지니고 있다.
가능성만 따졌을 때 위험분자로 판단되기에 십상이라는 소리다.
지금처럼 라운 왕국 내에서도 내 적이 득시글한 상황이라면 말이다.
차가운 살기를 피워 올리며 녀석에게 다가가자 기사들이 급히 내 앞을 막아섰다.
기괴하게 변해버린 발르티앙의 모습은 아무리 봐도 사람이 아니라 괴물 그 자체였으니까.
급히 거리를 벌린 채 검을 뽑아 든 기사들은 당연히 나를 그에게 가까이 가도록 두지 않았다.
"이 이상 가까이하시면 위험합니다. 부디 물러나 주십시오!"
나를 향해 단호하게 말하고는 몸을 돌리는 기사들을 무시한 채 녀석을 바라보았다.
이성을 잃어버린 녀석에게 이런 말이 무슨 소용일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거슬렸다.
어떻게 처리해버릴까.
볼티즈와 전쟁을 치르는 한이 있어도 놈의 사지를 다 뽑아버려야 할까.
아니면 다른 방법을 취해야 할까.
그리 고민하고 있던 찰나.
가만히 있던 녀석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까드드득!! 까드득!!"
나를 바라보는 놈의 시뻘건 안광에서 피눈물이 흘러내리기 시작하더니 곧 나를 향해 덤벼든 것이다.
"막아라!"
"발르티앙 왕자가 접근하게 두지 마라!"
그의 그런 돌진력은.......
"커헉?!"
제법 실력 있는 기사들이 막기에도 부족할 만큼 강력했다.
서걱!
제 앞을 막아서는 기사들을 붉은 검기로 베어 갈라버린 녀석이 내게 덤벼들었다.
"오라버니!!!"
나를 뒤따라온 윈리가 비명을 지르듯 소리쳤다.
갑작스런 그의 그런 행동에 모두가 늦었다고 생각하던 찰나.
"비켜."
금발을 휘날리는 한 소녀가 연무장 위로 난입, 그대로 내 어깨를 잡아 뒤로 당긴 채 발르티앙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중검. 태산 가르기.]
고작 150 중반 정도 되는 작은 키에 제 키만 한 거검을 든 소녀는 처음 보았던 차가운 얼굴은 어디에다 버렸는지 반쯤 이성을 놓아버린 듯 놈을 향해 검을 내리찍었다.
쿠웅!!!
굉장한 진동이 울려 퍼지며 마법으로 보호된 석재 바닥이 크게 뒤흔들리고 옅게 갈라져 나갔다.
고작 일 검이었다.
압도적인 중량으로 내리찍어버린 소녀의 일격에 놈은 그대로 한쪽 무릎을 꿇으며 지면에 처박혀버렸다.
"까드드득!! 까득!"
이번엔 제법 타격이 있었는지 녀석이 크게 비명을 지르며 괴성을 터뜨렸다.
전신에 푸른 기류를 일렁거리며 나타난 소녀, 검의 공주라 불리는 일리나 데 팔란은 잔뜩 수축한 동공으로 싸늘하게 그를 노려보았다.
"뱀파이어......."
뱀파이어에게 무슨 원한이라도 있는 것처럼.
이성을 반쯤 놓은 채 그녀가 놈을 걷어차 날려버렸다.
워낙에 빠르고 강렬하게 파고드는 그녀였던 터라 놈의 공격을 반격하기 위해 거리를 벌리던 기사들조차 그녀를 말리지 못했다.
오히려 여기 있는 기사들 대부분을 압도하는 실력을 지닌 그녀이니 그녀를 말리기보단 차라리 그녀를 도와 놈을 토벌하는 게 더 실용적일 것이다.
"까드드드득!!"
괴성을 내지르며 반격을 가하지만 일리나 황녀는 그야말로 한 마리의 야수마냥 놈을 몰아붙였다.
"화...... 황녀님이 우세하다! 가세해서 그를 제압해!"
더 이상 왕자라고 부를 수도 없는 괴물이 된 녀석이 마구 날뛰기 시작하자 정신을 차린 기사들이 그녀를 따라 검을 들어 올렸다.
대련장을 관리하던 마법사들은 재빨리 공격 마법을 캐스팅했고 부상자를 위해 대기 중이던 신관들이 신성력을 쥐어짜 그를 압박하기 위해 기세를 끌어올렸다.
아무리 봐도 괴물이 된 녀석이 이 이상 날뛸 수는 없으리라.
전부 그렇게 생각했다.
"까드득."
연무장의 반대편 끝까지 밀려난 놈이 심장 부근에서 기괴한 보석을 뽑아 들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블러드 폴리스?'
뱀파이어의 성역화.
그것이 무엇인지, 뭐 하는 것인지 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내 몸이 먼저 움직였다.
들것에 실려 경기장 바깥으로 나간 바리스와 다르게 윈리는 이곳에 있다.
반사적으로 윈리를 감싸듯 끌어안은 내가 기운을 끌어올리기가 무섭게 그의 심장에서 뽑혀 나온 무서우리만치 붉은 보석이 거대한 빛을 내뿜었다.
그 빛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안개로 변했고, 곧 모두를 잠식하듯 주변을 완전히 집어삼켜 버렸다.
* * *
거대한 핏빛 안개가 경기장 전역을 감싸는 데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폭발한 화산에서 화산재가 날아들 듯 잠깐 엇! 하는 사이에 모조리 덮어쓰듯 사방이 시뻘건 안개로 들어찼다.
한 치 앞도 볼 수 없는 공간 속에서 유일하게 빛나는 것은 단 두 개.
몸에서 옅은 빛을 흩뿌리며 주저앉아있는 일리나 황녀, 그리고 윈리를 감싼 채 의지로 기막을 발현시켜 안개의 접근을 차단한 나.
깨어있는 건 고작 셋뿐이라는 소리였다.
소드마스터가 있었다면 그들도 멀쩡히 서 있었을지 모를 일이지만 펠리스티 공국은 소드마스터의 보유가 없는 편이다.
그렇다면 다른 국가의 소드마스터는?
국가 연합의 협약에 의해 인간 병기나 다름없는 소드마스터는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자국을 벗어나지 못하는 조약에 따라 이곳에 있는 이들은 높게 쳐줘 봐야 일리나 황녀보다 아래 수준의 기사들이 전부였다.
애초에 소드마스터가 대륙에 그리 많지 않은 만큼 그들까지 행차할 확률은 낮았다.
"쿨럭, 오라...... 버니?"
숨 쉬는 것조차 고통스러운 듯 기침하는 윈리는 며칠간 이어진 철야로 잠을 못 잔 사람처럼 잔뜩 피곤한 얼굴이었다.
"괜찮아, 윈리. 다 괜찮다."
"오라...... 버니."
저 스스로 판단조차 할 수 없는 상황까지 내몰린 그녀는 결국 눈을 감았다.
"푹 쉬어, 좋은 꿈을 꾸고 나면 전부 괜찮아져 있을 거다."
담담하게 말하며 그녀를 안아 들고는 한쪽 구석에 조심스레 뉘었다.
그리고는 손을 뻗은 채 인상을 팍 찡그렸다.
'얼른 움직여라. 게으름피우면 사령 마나와 뒤섞어 버릴 테니까,'
우우우웅!!!
비명을 지르듯 옅은 백색의 빛이 내 손끝을 타고 움직였다.
내가 가진 세 가지의 기운.
마나와 사령 마나, 그리고 신성력은 각기 성질을 지니고 있다.
일정 경지에까지 올라 마나와 교감을 하는 깨달음을 얻은 자만이 가지는 변화.
마냥 나쁜 점만 있는 건 아니었다. 그로 인해 효율이 높아지는 건 물론이오, 반동을 없애버리거나 내가 가진 총량 이상의 힘을 끌어내기도 한다.
마스터에 이르고 그 위의 한참 높은 깨달음의 경지.
다만 현재 내 육체는 약간 비정상적인 벨런스를 유지하고 있다.
예전부터 나의 마나는 조금 많이 특이했다.
사령 마나의 경우는 단연 싸이코라는 말이 어울릴 만큼의 성질을 지니고 있다.
당장 날 사용해! 그러지 않으면 소리를 지르겠다!!
이런 마인드를 가진 기운은 사령 마나.
그렇기에 회복력도 가장 빠르고 가장 효율이 높기도 하다.
이 외의 마나는 어떤 의미로는 새침데기 같은 느낌이 강한 힘이었다.
굉장히 까칠하지만 내가 의지를 발현하면 마지못해서 세밀하게 움직여주는 케이스.
그리고, 최악의 둔함을 보여주는 신성력.
이놈의 신성력은 도무지 말을 들어 처먹지 않는 게을러터진 성질을 지니고 있었다.
지금도 이렇게 압박을 주지 않으면 쉬이 움직이지 않고 있다.
특별한 매개체가 있으면 움직이긴 하지만 먹을 것으로 개를 달래는 것과 이것이 무엇이 다를까.
4급 신성 마법. 광휘의 가호.
당분간은 이 망할 블러드 폴리스의 영향이 그녀에겐 닿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으로 만족 못 하고 추가로 신성 마법을 연거푸 시전했다.
"쓰읍......."
다량의 신성력이 빠져나가며 강렬한 빛이 윈리를 감싸고 나서야 절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잔뜩 고통스러워 하던 녀석의 표정은 이내 괜찮아진 듯 혈색이 돌기 시작했다.
이 경기장엔 이미 수많은 사람들이 있고, 그들 모두가 블러드 폴리스의 영향을 받아 쇠약 상태에 빠져들어 있지만 그들까지 신경 써줘야 할 이유는 찾지 못했다.
애초에 지금 신성력으론 하나하나 찾아 보호마법을 거는 정신 나간 시도를 할 수도 없고 말이다.
현재 가용 가능한 신성 마법으로 사용할 수 있는 신성 마법은 고작 4급.
1급부터 2급 3급 순으로 올라가는 편이니 4급이면 낮은 경지는 아니다. 경지로 치면 4 서클 마법과 비슷한 수준.
두 녀석의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던 내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한편에서 검을 지지대 삼아 헐떡거리고 있는 금발의 소녀를 바라보았다.
꿀을 머금은 것처럼 화사했던 그녀의 금발은 힘없이 가닥가닥 흩어져있었고 시선을 빼앗을 만큼 아름답던 그녀의 얼굴은 창백하기 그지없었다.
그럼에도 원천적인 아름다움은 그대로라는 게 놀라울 따름이었다.
역시 사람의 완성은 첫인상, 즉 얼굴이라더니.......
더러운 외모 지상주의.
"하아...... 하아......."
제 몸에서 흘러나오는 기류만으로 겨우 버티는 게 한계.
이 이상 그녀에게 제대로 된 전력을 기대하는 건 어려우리라.
물론, 그녀의 도움은 필요 없었다.
말없이 그녀에게 다가가 등에 손을 얹자 그녀가 크게 움찔거렸다.
반쯤 부러진 거검으로 겨우 버티고 있던 그녀는 내 손을 타고 마나가 서서히 흘러들어 가자 그제야 헐떡거리던 숨을 천천히 고르게 쉬기 시작했다.
"괜찮아지면 물러나세요."
"자...... 잠깐......! 당신?!"
그제야 내 존재를 깨달은 그녀가 화들짝 놀라 나를 올려다보았다.
숨을 헐떡거리면서도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당신...... 어, 어떻게 멀쩡한 거죠!?"
주변의 구분이 거의 되지 않는 핏빛의 안개는 들이킨 모두를 쇠약하게 만들고 쓰러지게 했다.
당연히 그 범위에는 마나를 일정 발현하는 뛰어난 실력의 기사들도 마찬가지로 속해 있었다.
그런데 내가 멀쩡하다.
그녀도 바보는 아니니 나에 대한 사정은 들어서 알고 있을 것이다.
사고로 인해 혼수상태에 빠지고 6년간 깨어나지 못했다는 비운의 왕자에 대해서 말이다.
물론, 그걸 들은 건 이곳에 와서 처음이었겠지만 적어도 전날 연회에서 그런 일이 있었으니 그녀는 내가 아무런 힘도 없는 유약한 왕자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는 꼴이었다.
"글쎄요."
"쿨럭! 어떻게 된 건진 모르겠지만 물러나세요. 이건 당신이 나선다고 해결될 일이 아닙니다."
"내가 나선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다?"
"지금은 연회에서 있었던 대련처럼 운으로 해결되지 않아요!"
그녀가 다급하게 소리쳤다.
"놈들은 밤의 귀족의 권속이라는 놈들이에요, 고서에 남아 있던 밤의 악마들이죠, 당신도 뱀파이어에 대해 들어는 보았을 겁니다."
보았다마다, 일정 수준의 뱀파이어를 구현해서 직접 싸워본 경험만 수백 수천이다.
잠시간 말없이 그녀가 하는 말을 듣고 있으니 그녀는 제 몸 하나 가누지 못하면서도 억지로 검을 들어 올려 내 앞을 막아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