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4
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
- 1권 24화
'협조 좀 해라. 넌 힘만 빌려줘. 나머지는 내가 한다.'
-너...... 도대체가.......
[신검합일]
[초중검 벼락치기]
쩌억!!
깨달음이라는 것은 이렇듯 편리한 시스템이다.
근력은 육체에 쌓이지만 무언가에 대한 경지를 개척하고 깨닫는 건 내 영혼에 새겨진다.
이미 한번 깨달음을 겪은 내게 새로운 변화라고 해봐야 굳어있던 마나가 원래대로 돌아오는 것뿐이다.
최근 들어서 그 회복량이 상당히 더뎌지긴 했지만 깨달음의 부족이라기보다는 갑자기 대량의 마나가 풀리는 터라 그 텀이 생긴 것뿐이었다.
내가 사용하던 태산 압정의 원판이라 봐도 무방한 하레스의 검술인 중검이 거대한 힘을 머금고 허공을 찢어발겼다.
마나가 턱없이 부족한 일격이었지만 신검은 괜히 신검이 아니라는 듯 녀석의 본체를 통해 막대한 신성력이 흘러나와 모자란 마나들을 보조했다.
순백의 섬광이 허공을 지나치자 붉은 연기가 일순간 걷히며 그대로 참혹한 검상을 남겼다.
"언제까지 숨어있을 거야, 그만 나와."
내 말에 대답은 없었다.
하지만 무언가가 뭉쳐진다는 느낌은 분명히 들었다.
"뱀파이어라는 건 예상했다만, 설마 고위 뱀파이어라곤 생각 못 했지."
검은 박쥐들이 일제히 뭉쳐지며 찢어진 허공의 곁에서 서서히 뭉쳐지기 시작했다.
동시에 검은 박쥐들이 하나의 덩어리가 되어 한 명의 인영을 만들어냈다.
"우리 구면이지? 시녀 아가씨."
놀리듯 말하는 내 목소리에 여성의 형상을 띤 인영이 색채를 되찾으며 무섭도록 시린 붉은 눈동자를 천천히 떴다.
* * *
뱀파이어라는 종족에 대해서 들은 기억을 되짚어보면 한 가지는 확실했다.
콧대가 하늘 높이 솟아 대기권을 뚫는 자존심의 종족.
스스로 귀족이라 칭하는 이들은 그들 간의 계급을 나누는 것부터가 귀족의 계급을 형성한다.
물론, 그만큼 대단한 힘을 지닌 건 사실이지만 말이다.
혈마법을 유일하게 사용하는 종족이 바로 이들이었다.
용언과 같이 용족 고유의 능력처럼 뱀파이어는 본능적으로 피에 대한 지배력이 강했다.......
블러드 폴리스, 즉 뱀파이어 성역화 또한 그런 부류의 힘 중 하나였다.
"부하들이 누군가에게 당했을 땐 뒤에 누군가가 있는 줄 알았건만, 설마 본인이었을 줄이야."
고압적인 말투였다.
묵묵히 나를 내려다보는 그녀는 그리 놀라지도 않았다는 표정이었다.
"내가 좀 잘나긴 해서."
당연히 그녀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발언으로 응수해줄 뿐이었다.
"그보다 좀 내려와 주지 않을래? 계속 위를 보려니까 목이 좀 아파."
"흥, 감히......."
"거기다가 그런 드레스를 입고 떠 있으면 속옷 보인다. 성격답게 검은색이네."
담담하게 말한 내가 미소를 지웠다.
"그러니까, 당장 내려오라고."
쩌억!!
동시에 다시 한 번 섬광이 그어지며 그녀가 있던 공간이 찢어졌다.
물론, 공간을 벨 정도의 역량까지 가기엔 내가 회복한 마나의 양이 너무 적다.
내가 베어버린 건 이 붉은 안개의 일부분.
그렇지만 상관없었다.
신검 칼디라스는 거대한 신성력을 보유한 자아를 가진 검.
애석하게도 언데드 계통에 속하는 뱀파이어나 뱀파이어에게 감염된 자들은 신성력에 굉장히 취약한 힘을 지니고 있었다.
재차 이어진 내 일격이 전보다 훨씬 강하게 내리꽂히자 그녀가 인상을 찌푸린 채 천천히 연무장의 반대편으로 내려섰다.
"이렇게 대형참사를 내면 나나 바리스, 윈리를 처리해도 리네스 왕비가 죄를 덮어쓸 일은 없지. 볼티즈 국가와 사이가 극도로 나빠지겠지만 수많은 국가의 원성을 살 볼티즈 국가가 라운 왕국과 전쟁을 벌일 리도 만무하고."
"......."
자존심에 금이 간 듯 나를 노려보는 그녀를 향해 빙그레 웃어 보였다.
"내 눈앞에 튀어나온 건 나를 죽일 자신이 있어서라고 봐도 되겠지? 제법 머리 잘 굴리긴 했는데 어쩌나. 폐장 시간입니다 호갱님."
"의미 모를 저급한 말투를......."
싸늘하게 말한 그녀가 팔을 펼치자 그 한 손으로 핏방울들이 모여들었다.
동시에 그녀의 손에 붉은 채찍이 쥐어졌고 그녀는 그것을 가차 없이 내게 휘둘러왔다.
휘리리릭! 짜아아악!!
찢어지는 듯한 파공음과 함께 나와 더불어 바닥의 지면까지 내리친 채찍은 마법적 처리로 단단해진 바닥까지 완전히 박살을 내버렸다.
어이쿠야. 많이도 빡치셨네.
게다가 거기서 끝이 아니라는 듯 채찍이 닿았던 부분이 시뻘겋게 변하며 날카로운 가시가 내 몸을 노리고 엄청난 속도로 쇄도해 들어왔다.
쩌엉!!
물론, 계속 당해줄 생각은 없기에 검을 가볍게 휘두르자 날카롭게 쇄도하던 가시들이 일제히 잘려 흩어졌다.
"예상과는 다르지만 그래 봐야 하등한 인간일 뿐이지."
"지금은 그쪽 아가씨도 인간의 수하 아니었던가?"
"같잖은 혀 놀림!!"
강하게 휘둘러진 채찍이 다시 허공을 찢어발겼다. 어지간히도 화가 난 듯한데 별수 없다.
뱀파이어의 가장 효율 높은 공략법은 혓바닥인 것을.
-뱀파이어 로드? 강하지, 진짜 더럽게 강했지. 일단은 한 종의 가장 강한 존재잖아. 태생부터가 미친 연놈들인데 그중에서도 특출난 하나가 계승식을 이어받고 로드가 된다고. 태생부터 천적인 하이 엘프가 없으면 어지간해선 잘 죽지도 않아.
-그럼 어떻게 잡았냐고? 세 치 혓바닥으로 미쳐 환장할 만큼 열 받게 만들어주고 때려잡았어. 무슨 생물이건 과하게 빡치면 행동이 단순해지거든. 특히 뱀파이어는 자존심이 강하기 때문에 상위 귀족 녀석들에겐 태생이나 외관을 집요하게 지적하면 혼자서 분통 터뜨리는 애송이들이 많아.
게을러터진 탓에 나무로 된 단상에 드러누워 있던 검신이라던 양반이 해준 말이다.
그러고 보니 팔란 제국은 꽤 검신을 신봉하는 것 같던데. 그의 실체를 알면 어찌 될까 궁금하기도 했다.
짜아악!! 짜악!!
재차 이어지는 채찍은 소닉붐까지 일으키며 나를 집요하게 노려왔다.
한 대라도 제대로 맞았다간 어지간히 몸을 단련해놔도 버티기 힘들 정도.
특히 채찍이라는 무기는 막는다고 해서 쉽게 막히는 무기가 아니었다.
핏빛 가시가 돋아난 채찍이 재차 내 퇴로를 차단하듯 파고들어 왔다.
슬슬 피하는 것도 한계. 그렇다고 더 물러났다간 쓰러져 있는 인간들에게까지 영향이 끼칠 기세였다.
"네게 남겨진 결과는 죽음뿐."
내가 휘두르는 검을 피해낸 그녀가 차갑게 읊조렸다.
"신검의 힘이 있다고 해도 말이야. 검신의 검술을 이어받았다는 저 여자도 결국은 쓰러졌지."
오만한 그 말투에 재차 검을 휘둘러보지만 그녀의 몸을 감싸는 붉은 핏방울이 검기를 그대로 튕겨내듯 막아버렸다.
"혈막이라......."
-백작급 이상의 뱀파이어! 젊은 계층이지만 혈통만 따지면 로드에도 도전할 수 있는 순수 혈통이야.
혈막을 본 칼디라스의 말에 조용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지금 처리해둬야겠네.'
-가능해?
'그럼, 불가능하리?'
나를 둘러싸고 마무리를 짓듯 파고드는 채찍의 거대한 기세에도 불구하고 침착하게 검을 들어 올리며 가볍게 몸을 뒤틀었다.
거친 파공음과 함께 종이 한 장 차이로 빗나가듯 붉은 채찍이 내 주변을 강하게 때려왔다.
변칙적인 공격은 피하기가 쉽지 않지만 한번 피하는 요령만 터득하면 얼마든지 반격도 넣을 수 있으리라.
적중할 줄 알았던 제 공격이 미묘한 차이로 빗나가 버리자 샤리의 표정이 순간적으로 경직되었다.
그리고, 그 짧은 틈을 놓치지 않고 그대로 파고들며 추적해오는 붉은 가시를 그대로 부숴버리듯 짓밟으며 파고들었다.
아주 짧은 틈.
다만, 그 정도만으로도 공격의 기회는 충분했다.
전혀 효율적이지 않은 너무 뻔한 검의 궤적이지만 오히려 가해지는 힘을 한 층 더 강렬하게 심어 넣었다.
내가 노린 건 그녀, 그리고 이 엿 같은 붉은 연기를 방출하고 있는 허공에 뜬 거대한 보석 두 가지 모두였으니 말이다.
"검신의 검술을 이어받았다고? 수박 겉핥기 한 아가씨만 보고 뭘 착각하는 거야."
-이...... 이 검술은?!
수련이라는 명목하에 수만, 수십만 번 휘둘렀던 가벼운 종 베기.
내게 맞추기 위해 조금 변색하긴 했지만 정확히 일리나 황녀가 발르티앙에게 사용했던 태산 가르기와 일치하는 일검이었다.
[초 중검 태산 쪼개기]
다만, 그 위력은 그녀가 보여주었던 것과는 확연히 달랐다.
"무슨?!"
내가 순간적으로 방출한 기세에 경악한 그녀가 눈을 부릅뜨며 반사적으로 다시 혈막을 만들어냈지만.......
막아도 늦었어.
쩌적!
"무슨?!"
손속에 사정을 두지 않은 거대한 힘이 응축된 일섬이 거대한 순백의 섬광을 만들어내며 그녀의 몸째로 공간을 찢어발겼다.
* * *
거대한 일격의 여파는 실로 어마어마했다.
그녀의 공격에도 일정 형태를 유지하고 있던 연무장이 거대한 진동과 함께 그대로 박살 나듯 무너져 내렸기 때문이었다.
튼튼한 마법 처리가 된 석재를 쌓아 올린 후 부서지지 않도록 수십 겹의 보호마법을 걸어둔 바닥이다.
어지간한 폭격을 맞아도 멀쩡할 바닥이 무기 하나 제대로 쥐었다고 완전히 가루가 되어버린 모습에는 실로 놀랍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칭 생존왕이라 불렸던 영웅 헤라클래스는 그렇게 말했다.
-뭐? 부족한 건 더 좋은 물건 써서 채우면 되는 거 아니냐고? 위험은 언제고 의도하지 않게 찾아오는 법이다! 그때에도 네가 정말 좋은 아티펙트나 물건을 지니고 있을까?
게을러터진 검신 하레스와 술고래 천마 독고준은 그렇게 말했었다.
-이 자식이 아직 철이 덜 들었네.
-간단하게 생각하라고, 끅! 넌 말이야. 기본적으로 드럽게 강한 놈이 명검을 드는 게 강하겠냐 쥐뿔도 없는 놈이...... 끅! 어이구 취한다. 뭐라고 이야기했더라...... 아 그래. 쥐뿔도 없는 놈이 명검을 드는 게 더 강하겠냐. 끅...... 아, 내가 어디까지 말했더라.
마법사 오딘은 그렇게 말했다.
-그럴 거면 마법 왜 배워? 그냥 뛰어난 마법이 저장된 스태프를 들고 마냥 휘두르면 되지. 그나저나 이 자식이 지금 나보고 절벽 땅꼬마라고 해놓고 말을 돌려?!
내가 언제?
마지막으로 신의(神醫) 히포크리아는 내 볼을 살짝 꼬집으며 빙그레 웃어주었다.
-내게 그런 질문을 하는 건 이미 다른 녀석들에게 한소리를 듣고 왔기 때문이겠지? 나는 전투기술을 익힌 이가 아니기에 큰 조언을 해줄 순 없어. 다만, 빌려온 것은 언제고 돌려줘야 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 네가 쌓아 올린 것과 이미 쌓아 올려진 것을 빌려오는 것의 차이는 큰 법이니까.
결과적으로 제각각의 인간군상이 모인 회랑이었지만 모두가 같은 소리를 했다.
아이템빨을 너무 맹신하지 말라고.
하지만.
그놈의 템빨이 가져다주는 시너지에 한번 취해보면 그런 말, 쉽게 안 나온다.
"이야...... 기가 막히네, 이래서 템빨 템빨 하는구만."
-도대체 무슨 소린지 모르겠어. 나 때는 말이야! 어?!
"어이구 그놈의 주둥아리."
신검 칼디라스는 굉장히 개운하다는 듯한 목소리를 냈다.
수천 년간 주인 없이 고고하게 보관만 되던 녀석이다.
주인을 찾았지만 그 주인의 실력이 아직 미흡한 탓에 본체를 실체화하지도 못하고 브로치 형태로 있었으니 어지간히도 갑갑했던 모양이었다.
-그런데 말이야. 너 도대체 정체가 뭐야? 어떻게 내 힘을 멋대로 끌어내는 거야? 그리고 나에 대해서 어떻게 알고 있는 거지? 검술도 그래! 방금, 네가 보인 건 분명 그 녀석의 검술인 태산 가르기였어.
"그렇긴 하지."
-게다가 넌 마치 예전부터 나를 알고 있었던 것처럼.......
"우리 계약한 대로만 가자고. 서로 불필요한 사실을 캐낼 필요 있나?"
-그게 뭐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