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0
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
- 2권 5화
역시 아버지는 어머니를 완전히 잊으신 건 아니신가 봅니다. 다만, 상처를 너무 오래 붙잡고 계셨습니다.
제가 왜 이 빌어먹을 왕국을 안 부숴버리고 그냥 두는지 아시는지요.
속으로 그리 생각하며 빙그레 웃어 보였다.
"폐하."
"......."
"이미 늦었습니다. 바보가 아닌 이상 바리에타 공작을 필두로 한 귀족파의 기세가 강한 건 알고 있지요. 다만 사람은 목숨이 급해지면 제 살길을 위해 스스로 동아줄을 자르기도 합니다."
"데이비......."
"자식은 부모를 닮는다 했습니다. 다만, 저는 달라질 겁니다. 국가를 위해 가족을 버리는 게 왕이고 아버지라면, 기꺼이 다른 길을 걷도록 하지요."
내 단호한 대답에 그가 입을 다문 채 침묵했다.
"왕이라 하셨지요. 수많은 이들이 오르고 싶어 하는 그 휘황찬란한 자리."
내 말에 그의 눈동자가 조용히 가라앉았다.
"닦고 광내서 바리스에게나 주십시오, 저는 줘도 안 가집니다."
* * *
-그대, 조금 모진 경향이 있군.
'이렇게라도 해둘 필요는 꼭 있었어.'
-쯧쯔, 가족이 아니라고 할 땐 언제고, 쓸데없이 정이 많은 사내로고.
씁쓸하게 중얼거리며 궁으로 돌아온 나는 페르세르크를 바라보았다.
-본녀의 간파의 힘이면 그대도 보았을 것을.......
'무엇을 보았건 결정이 변함없는 건 사실이잖아? 게다가 전부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도 그러하지.
"에이미."
"옙! 저하!"
활발한 얼굴로 내 부름에 대답한 그녀가 고개를 들어 보였다.
"나는 수면을 취할 테니 아무도 들이지 마."
"네."
의문이 들 법도 하지만 에이미는 처음을 제외하면 그러했다. 내 말은 그저 조용히 따라줄 뿐, 그에 따른 의문은 품지 않았다.
나를 믿는 것인지, 아니면 성정이 순종적인 것인지.
-어디를 가려는 겐가?
'토끼는 도망갈 길을 여러 군데 파놓잖아.'
-그러하지.
'검은 달이라고 했나? 바리에타 공작가는 제 수족들이 배신할 경우를 대비해서 여러 정보를 숨겨놨을 거다.'
그곳의 정보를 모조리 털어오면 귀족파의 손발부터 댕강댕강 잘라내는 게 가능하다.
-피바람이 불겠지.
'말했잖아, 마냥 다 죽이는 게 능사는 아니라고. 최소한 내가 떳떳해야지.'
-그 말은...... 아, 그대.
내 말뜻을 깨달은 그녀가 피식 웃어 보였다.
'사람은 살고자 하면 제 동아줄을 자르기도 하니까.'
바리에타 공작가는 제 손으로 부리던 수족들에게 목이 졸려 몰락할 것이다.
애초에 뱀파이어와 결탁한 증거는 내가 쥐고 있으니 당장 무너뜨린다 해도 문제 될 건 없었다.
'그럼 가볼까.'
가볍게 환영마법으로 침대 위에 누워 자는 내 모습을 투영시킨 뒤 조용히 창문을 열었다.
[인비져빌리티]
5 서클 비 가시화 마법.
4 서클에 멈춰있던 마나가 성장하면서 5 서클에 돌입했고 그로 인해 사용이 가능해진 마법이다.
서서히 주변과 동화되어 사라지는 육체를 보며 나는 망설임 없이 창밖을 나섰다.
* * *
비밀 정보 길드. 검은 달.
라운 왕국에 자리 잡은 수많은 암살자 길드, 혹은 정보 길드에서도 절대 함부로 건드려선 안 되는 압도적인 힘과 덩치를 지닌 정보 길드가 바로 이곳이었다.
다른 정보 길드와 다르게 검은 달의 범위는 라운 왕국뿐만 아니라 수많은 국가에 심겨 있으니 말이다.
정보 길드의 길드장은 제 앞에 놓인 보고서에 눈을 꿈틀거렸다.
"샤리가 행방불명이라고?"
"예, 흔적도 없이 사라졌습니다."
"이전에도 샤리의 휘하 암살자들이 대거 사라졌었지."
"예, 정보에 따르면 데이비 왕자와 바리스 왕자, 그리고 윈리 왕녀를 암살하려다 실패했다는 모양입니다."
무표정한 얼굴로 답한 뒤 물러나는 심복을 뒤로 한 채 그가 눈을 감았다.
리네스 왕비의 시녀로 잠입해있던 샤리는 A급 정보원이었다.
표면상으론 말이다.
다만 그녀는 검은 달의 본부에서 파견되어나온 여자였다.
정체불명. 신원불명.
하지만 그녀는 고혹적인 미모와 정체 모를 위화감을 지닌 여자이기도 했다.
검은 달 길드는 거대한 길드라 할 수 있다.
그 뿌리가 정확히 어디인지는 라운 왕국 지부의 길드장조차 가늠할 수 없을 만큼 깊었으니 말이다.
그렇기에 샤리가 정말 A급인지는 그로서도 알 길이 없었다.
그저 A급으로 위장하고 있는 본부의 단원인지조차 말이다.
그런 그녀가 당했다?
그가 아는 그녀의 실력은 말이 A급이지 언뜻 보여주는 실력만 봐도 S급이라 봐도 이상하지 않을 실력이었다.
그런 그녀가 암살에 실패했고 행방불명이 되었다.
힘도, 세력도 없다고 알려진 유약한 왕자에게 말이다.
'아무래도 심상치 않게 돌아가는군. 필요 정보만 제외하고 모조리 소각한 뒤에 이곳을 벗어나야겠어.'
선택은 과감해야 했다. 조금이라도 이상한 느낌이 들면 잽싸게 빠져야 살아남을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한 그는 조용히 책상 밑에 달린 버튼을 눌렀다.
심복을 부르기 위함이었다.
딸깍...... 딸깍딸깍.
하지만, 몇 차례를 눌러도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자 그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누르는 순간 제 앞에 나타나 부복해야 할 단원이 나타나지 않는다.
이것이 의미하는바.
오랜 시간 정보 길드의 길드장을 해온 그의 본능에 경종이 울렸다.
'이런 젠장!?'
"동작 그만, 일어나면 안 되지."
동시에 어디서 들려오는지 모를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드러운 미성이었지만, 지독하게 섬뜩한 느낌이 드는 목소리이기도 했다.
"큭?!"
쾅!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벌떡 일어난 그가 검을 뽑아 들려던 찰나.
검은 형체가 스르륵 나타나 그의 팔을 꺾고는 그대로 책상에 제압하듯 짓눌러버렸다.
"음...... 인간이네. 뱀파이어는 아니라는 건가?"
홀로 중얼거린 목소리는 소년의 목소리였다.
잘 쳐줘 봐야 십 대 중후반.
이제 성년을 치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소리 질러도 상관없는데, 아무도 안 온다에 내 손목을 걸어도 좋아."
그를 짓누른 채 빙글거리며 말한 소년이 어두운 공간 속에서 손가락을 뻗어 보였다. 동시에 굳게 닫혀있던 문이 끼이익! 하며 열렸고 그 밖으로 지독한 혈향이 그의 코를 찔러왔다.
'프리아 님 맙소사!'
그의 눈이 경악으로 뜨여졌다.
은밀함으론 둘째가라 하면 서러울 길드가 바로 이곳, 검은 달이다.
왕국 최고의 암살자들이 모인 곳이라 자부해도 좋을 만큼 뛰어난 이들이 수십 명 숨어있는 이곳이다.
그런데 단 한 명도 침입을 눈치채지 못한 채 죽었다?
한 명이라도 알아챘다면 제 앞으로 보고가 왔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아니었다.
마치 모두가 자신이 어떻게 죽었는지조차 모르는 것처럼 그들의 시신에는 저항의 흔적 하나 보이지 않았다.
'강하다! 이대로 가면 손도 쓰지 못하고 죽는다!'
반사적으로 자신을 제압한 이 소년의 손에 죽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어디서 왔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저 라운 왕국 최고의 정보 길드를 대놓고 습격해 들키지 않고 모조리 죽여 버릴 만한 실력가라는 게 중요할 뿐이었다.
그리고, 손속에 자비 없는 차가운 자라는 것도 말이다.
"큭...... 어디서 보낸 거지? 룩소 길드인가? 카르샤 길드? 그것도 아니면...... 본부에서 보냈나?"
비록 라운 왕국의 검은 달 길드 길드장이지만 그에겐 검은 달 길드의 본부도 실상 믿을 수 없는 단체였다.
그만큼 비밀이 엄수되고 위험한 곳이니 말이다.
정보 길드로써 경쟁을 하고 있는 카르샤 길드나 룩소 길드도 대단하긴 하지만 하루아침에 검은 달을 이렇게 몰락시킬 정도로 저력이 좋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역시 본부가 이곳을 정리하려는 것인가.
머릿속으로 오만가지 생각이 들었지만 그는 침묵했다.
"살고 싶나?"
검은 어둠 속에서 붉은 눈동자가 섬뜩하고 묘하게 휘었다.
"큭?!"
"살고 싶으면 정보를 좀 내어줬으면 하는데."
키득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와 더욱 소름이 돋았다.
"정보를...... 구하고 싶다면 정당한 절차를...... 거쳤으면 되었을 것을......."
"돈 준다고 마냥 내어놓을 만한 내용이 아니라서."
소년의 말에 그가 이를 악물고 차분하게 생각했다.
거스르면 죽음이 닥쳐온다.
자신이 뛰어난 암살실력을 지녔긴 하지만 소년은 제 이상 가는 실력가.
그렇다면 최대한 그의 비위에 거슬려선 안 되었다.
"마...... 말씀하시오. 원하는 정보를 내어드리지."
"그래? 뭐, 준다니까 받긴 할게."
'빌어먹을 놈! 먼저 침입해서 다 죽여놓고 강탈할 듯 이야기한 주제에!'
속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그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다.
입 한번 잘못 뻥끗하면 죽는다!
그게 그의 본능을 지배하고 있었다. 수틀리면 자결을 하는 게 암살자라고?
당장 길드장 정도 되면 제 목숨도 소중해지는 법이다.
팍!
이윽고 제 몸을 구속하던 힘이 일순간 사라지자 그는 숨을 크게 들이쉬며 그대로 주저앉아버렸다.
은밀함과 신속함이 생명인 그와 다르게 굉장히 거칠고 둔탁한 반응이었다.
"허억...... 허억......."
"많은 걸 바라진 않아. 이 나라를 흔들고 있는 바리에타 공작가의 수족이 되는 귀족들의 명단과 그들이 저지른 비리장부."
"뭐...... 뭣?"
"바리에타 공작가가 그들의 목숨을 틀어쥐기 위해서 은밀하게 모아온 정보들이 있을 거야. 그리고 그걸 여기 보관하고 있을 테고, 맞지?"
그 말에 길드장은 눈앞 소년의 정체를 확인하기 위해 시선을 급히 돌렸다.
"쓰읍......."
하지만 그의 행동은 금방 저지되고 말았다.
소년의 손이 가볍게 휘저어지자 섬뜩한 살기가 그의 온몸을 짓눌렀기 때문이다.
'마스터 어쌔신!'
그 검게 유형화된 살기가 무엇인지 깨달은 그가 기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마스터에 이르기가 극도로 어려운 어쌔신 중에서도 마스터에 오르는 이들이 있다.
기본적으로 암살자들은 은밀한 암습을 가하는 자.
그것으로 마스터를 이길 수 있을지는 몰라도 스스로 깨달음을 돌파하는 이는 극도로 적다.
그렇기에 눈앞의 소년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존재인지 깨닫는 데엔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마스터 어쌔신이 이런 소국에 있다고?! 말도 안 돼!'
6년간 혼수상태였던 왕자가. 깨어난 지 반년도 안된 왕자가 그만한 실력을 갖추고 있다는 건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가 없었다.
벌벌 떨고 있는 그를 향해 소년, 아니 데이비가 빙그레 웃었다.
"참고로 거짓말 파악하는 건 내 전문이니까, 블러핑 내세우지 말자고. 선택은 자유야."
지독한 살기에 길드장은 한참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벌벌 떨었다.
* * *
"여...... 여기 있소."
벌벌 떠는 사내가 내민 두루마리를 받아든 나는 곧장 그 안의 내용물을 확인한 뒤 조용히 품 안에 갈무리하듯 집어넣었다.
"워...... 원하는 건 전부 주었소. 그, 그러니 이제 물러가 주시오."
"음......."
고민하듯 침음성을 흘리자 그의 표정이 보기 좋게 구겨진다.
또 뭘 뜯어내려고!
그런 표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