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1
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
- 2권 6화
-객관적으로는 도움이 되기도 하고 도움이 안 되기도 하지. 작정했다면 차라리 전부 정리하는 것도 방법인 게야.
'그게 좋아?'
-가급적 살생은 자제하시게.
저게 마왕의 입에서 나올 소리인가.
-마족이 피를 좋아한다는 말은 도대체 어디서 나온 말인 건지 원.......
애초에 목청이 터지라 전쟁반대를 외치던 소녀였으니 새삼스러울 것도 없었다.
"뭐, 좋아. 이정도면 되겠어."
"하...... 하면......."
"난 무분별한 살생은 그리 좋아하지 않아."
담담하게 말하며 일어서자 그의 얼굴에 의문이 어렸다.
"오늘 본 건 모두 잊어. 그리고 이후에 있을 일들에 대해 쥐죽은 듯 침묵하는 게 좋을 거야. 휘말려서 죽기 싫으면."
내 말에 그가 벌벌 떨면서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됐어."
따악!
동시에 가볍게 손가락을 튕기자 그가 그대로 풀썩 쓰러져 버렸다.
-다만, 후에 저들이 그대에게 앙심을 품을 수도 있다는 건 알아야지.
'언제는 죽이지 말라며?'
-그래도 그대의 목숨이 중하지 않겠는가.
꺄르륵 웃어 보이는 은발의 소녀를 향해 피식 웃어준 내가 품 안에 손을 넣었다.
"때로는 죽이는 것보다 무서운 게 있는 거니까."
안에 든 서류들을 다시 꺼내 펼치자 옅은 빛과 함께 빛으로 된 글귀가 빠르게 종이 위로 출력되어 나타났다.
암호가 걸려있던 비밀 정보다.
마법 아티펙트를 썼다고 해도 이상하진 않겠지. 길드장의 권한으로 해금된 정보는 생각보다 방대하고 자세했다.
괜히 왕국 최고 길드가 아니라는 거겠지.
하지만 여기서 멈추는 건 안 한 것만 못했다.
-그대의 말대로 토끼는 한쪽 굴만 파놓진 않았겠지.
"가짜정보에 누락된 정보가 있을 거다. 아마 다른 정보 길드에 숨겨놨겠지."
라운 왕국의 가장 큰 정보 길드는 실상 검은 달 길드라 봐도 무방했다.
하지만, 제아무리 거대한 정보 길드라 해도 위험성은 존재하는 법.
한곳에 모든 정보를 넣어두면 그것이 자칫 족쇄가 될 확률이 높았다.
바리에타 공작도 바보는 아니니 여러 수를 준비해두었겠지.
원하는 건 그들이 스스로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하게 몰아넣는 것뿐.
정보 속에는 단편적이지만 바리에타 공작이 칼루스를 내세워 국왕의 자리를 노리려는 움직임에 관한 내용도 있었다.
생각해 보면 이 나라.
라운 왕국은 아직 차기 국왕인 왕태자조차 선발되지 않았다.
-그대가 직접 싸울 것인가?
"뭐하러 직접 나서. 힘을 빼줄 사람은 따로 있는데,"
-대신 싸워줄 이라.......
"아무리 위세 높은 귀족파라도 정적은 있는 법이니까."
-하지만, 그들이 그대의 뜻대로 움직이겠는가.
"굶주릴 대로 굶주린 맹수는 원래 고기를 그냥 두고 못 지나치는 법이야. 그중에서도 아주 물불 안 가리고 덤벼들 자가 딱 한 명 있어."
그리고, 그는 내가 원하는 상황을 만들어 줄 것이다.
담담하게 말하며 다시 비 가시화 마법을 몸에 두른다.
"오늘 컨셉은 밤손님인가? 들키지 않고 잠입하자고."
-그러다 들키면?
"잠입 액션이라는 말이 왜 나왔겠냐. 보는 사람이 사라지면 완벽한 잠입인 거지."
암살이나 잠입이나.......
애초에 가장 난도가 높은 검은 달까지 털어먹은 마당에 다른 곳이 무에 걱정일까.
"남은 길드는 6곳. 부지런히 움직이자."
-그대가 원하는 대로.
15. 영지요? 이 황무지가?
"폐하. 데이비 왕자의 성흔 발현은 나라의 자랑이자 흥복입니다. 그 공로가 지대한바. 상을 내리시는 건 어떠하신지요."
"상이라."
"듣자 하니 데이비 왕자에게는 이미 영지가 하사되어있다고 하였지요. 하인스 지방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렇지."
왕족들은 각각 고유의 영지를 지니고 있다. 그 기준은 성년이 된 왕족에게 주어진다는 소리였다.
당연히 성년이 된 데이비에게도 국가에서 하사한 영지는 존재했다.
왕국의 동쪽, 성국과 마주하고 있는 지방인 하인스 영지였다.
다만 이곳은 땅덩어리가 굉장히 넓은 데에 비해 굉장히 척박하기 그지없는 땅덩어리이기도 했다.
버리기엔 아깝고 개발하기엔 너무 자원이나 특산물이 적은 그런 계륵(鷄肋)이라는 말이었다.
이 땅을 데이비에게 내려지도록 한 것도 어찌 보면 그녀의 노림수였다.
"이제 데이비 왕자도 거의 쾌차한 듯하니 영지로 내려가 제 영지를 발전시켜 왕국에 보탬에 되게 하는 건 어떨까 하옵니다만."
리네스 왕비가 곱게 웃으며 제안했다. 단번에 성공할 거라곤 생각지 않았다.
녀석은 자신의 의도를 계속해서 벗어나고 있었다.
혼수상태일 적에 죽었다면 좋았을 것을 질긴 목숨 연명하더니 깨어나고 나서부터 계속해서 눈에 밟히기 시작했다.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암살이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실패했다.
게다가 제 최고의 비밀수단 중 하나인 샤리까지 행방불명이 되어버렸다.
누군가가 그를 지키고 있다.
국왕일까, 아니면 다른 누군가일까.
예상 범위라면 역시 페일트리스 후작 쪽이 의심되지만 그가 직접 움직이지 않고서야 이런 사태는 해명할 수 없었다.
복잡한 생각이 드는 그녀였다.
결국 암살로는 그를 해칠 수 없고, 녀석이 성흔을 발현한 사실 때문에 녀석을 광인으로 몰아 폐왕자로 유폐시키는 것도 어렵게 되어버렸다.
이렇게 된 이상 할 수 있는 수단은 한 가지.
합법적인 방법으로 왕궁에서 치워버린다.
정략결혼이 되었건 독립이 되었건 방법은 여러 가지였다.
그런 결정을 내린 이유는 더 이상 그를 신경 쓸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기 때문이기도 했다.
전날 누군가가 자신들의 밑천을 숨겨놓은 정보 길드를 모조리 털었다.
한두 곳도 아니고 이 나라에 존재하는 7곳이나 되는 정보 길드가 하루아침에 단 한 명에게 털려버렸다.
정체를 파악하진 못했지만, 오랫동안 도움이 되어온 감은 동일인물이라 부르짖었다.
도저히 이길 수단이 없다고 여길 만큼 무시무시한 살기를 두르고 있었다고.
협박을 동원해 윽박질러보아도 그런 괴물과는 싸우고 싶지 않다는 답변만 돌아왔다.
만약 정보 길드에 보관하고 있던 정보들이 귀족파의 정적으로 유명한 페일트리스 후작에게 들어가기라도 한다면,.......
그로 인해 생길 여파는 굳건하게 버티던 바리에타 공작가를 필두로 한 귀족파가 단번에 흔들릴 수도 있을 정도였다.
그만큼 상대는 조심스럽게 상대해야 하는 자였고 정보는 그만큼 고 가치의 정보였다.
자칫 최후의 수단으로 생각해둔 반란까지도 고려해야 할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라는 소리였다.
그렇게 생각해서 한 제안이었다.
지금은 데이비에게 신경을 쓸 상황이 아니니 문제가 되는 녀석은 잠시 보류하듯 치우는 수밖에.
국왕 크리아네스가 그것을 용납할지는 알 길이 없지만 일단 찔러는 봐야 했다.
마치 자신을 탐색하듯 바라보는 그를 향해 곱게 웃어 보였다.
"그것도 그렇군, 왕태자도 아닌 성년이 된 왕자가 계속해서 왕궁에 머무는 것은 교육에 좋지 않지."
담담하게 말하는 그의 대답에 리네스 왕비가 짐짓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렇게 단번에?
생각지도 못한 그의 결정에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남자가 도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그동안 데이비의 숨통을 조이기 위해 내세운 전략들은 그의 손에서 전부 차단당했다.
그런데 이렇게 흔쾌히 승낙한다고?
이해할 수가 없었다, 다만 나쁘지도 않았다.
그놈을 치워버릴 수 있다면 당장 신경 써야 할 문제는 해결될 테니까.
하인스 영지가 발전해버린다면 그에게 엄청난 힘이 될 테지만 그녀는 절대 그럴 리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말이 영지지 하인스 영지는 말 그대로 저주받은 땅이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황무지였다.
"말 나온 김에 준비하도록 하지, 시종장!"
"예 폐하."
"데이비를 불러오라."
과감하게 말하는 그를 보며 리네스 왕비가 웃어야 할지 인상을 찌푸려야 할지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 * *
"왕자 저하, 폐하께서 찾으십니다."
"폐하께서?"
"예, 속히 의복을 환복하시고 폐하께서 계신 궁으로 입궁하시지요."
"음...... 알겠어."
개운하게 일어나기가 무섭게 나를 찾아온 시종장 베스퍼스의 말에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무슨 일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어 자리에서 일어나자 침대에 누워 고롱고롱 잠들어있는 페르세르크가 보였다.
'일어나.'
-으음...... 본녀는 조금만 더 잘 것이야아.......
웅얼거리며 제 몸보다 수십 배는 큰 시트를 말아 덮어버리는 그녀였다.
남들의 눈에 보이진 않지만 실체는 존재하기에 누가 보면 시트가 홀로 움직이는 폴터가이스트 현상 같은 모양새였다.
'나중에 푹 재워 줄 테니까 일어나.'
물론, 이 앙큼한 마왕님의 투정을 받아줄 생각은 없었다.
-크으...... 그대는 피도 눈물도 없음이로고, 그대 때문에 숙면을 거의 취하지도 못했음이니. 수면 보장은 확실해야 할 터.
'나이 차이가 몇인데, 남들이 들으면 오해할 소리 하지 맙시다.'
-끄응...... 그대는 립서비스가 엉망이로군.
울상을 지으며 천천히 떠오른 그녀가 하품을 쩍쩍하며 내 머리 위에 달라붙었다.
"환복을 도와드릴게요. 저하."
"부탁할게."
내 말에 에이미는 기분이 좋은지 헤실헤실 웃어 보였다.
* * *
예상은 했다.
나라는 존재가 기묘한 폭탄과도 같다는 사실을 인지했으니 더는 이곳에 둘 수 없다고 판단한 거겠지.
"가거라, 가서 하사된 하인스 영지를 개간해 네 존재를 더욱더 빛내 보라."
마치 아들에게 시련을 던져주고 성장시키는 아버지처럼 말하고 있다.
하지만 그 속에 숨겨진 의미가 다르다는 건 페르세르크의 조잘거림 때문에 이미 눈치채버렸다.
-호오...... 아들이 무리수를 둘까 봐 겁을 먹은 게로고, 다른 곳으로 빼돌리겠다니.
'괜히 상기시키지 마.'
-어차피 그대도 눈치채지 않았는가.
페르세르크가 흥미롭다는 듯 어깨를 으쓱여 보였다.
-그대의 아비는 아무래도 그대의 능력을 아직 완전히 믿지는 못하는 듯하네만.
'이렇게 하지 않았으면 내 발로 나갔을 거야. 이제 여기서 할 일은 끝이야. 있어 봐야 의미는 없어.'
광산도 발견된 바 없고, 황무지라 농지 개간도 쉽지 않다. 몬스터의 서식지도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는 편이다.
게다가 이렇다 할 특산물도 없으니 말이 영지지 말 그대로 버려진 땅에 새워진 작은 마을이라 봐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다.
유일한 장점이라고 찾아낸 거라면 잘만 길을 닦아놓는다면 교통의 요충지가 될 수 있다는 점일까.
아, 또 한 가지가 있다.
내 어머니의 본가였던 알리샤드 남작가의 영지가 바로 그곳에 있었다.
지금은 알리샤드 남작가의 사람이 단 한 명도 남지 않아 조용히 분해된 하급 귀족이지만 말이다.
어머니의 부모님, 즉 내 외조부와 외조모께서는 이미 타계하신 몸.
유일한 피붙이인 어머니의 남동생이 하나 있긴 했지만 그의 행방은 묘연하다고 알고 있다.
내 표정이 찡그려질 줄 알았는데 의외로 담담하자 국왕 크리아네스의 눈에 약간 의문이 어렸다.
리네스 왕비나, 국왕 크리아네스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