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32화 (32/1,559)

# 32

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

- 2권 7화

저마다의 생각이 있어서 나를 궁 밖으로 보내는 모양이다만 이미 내 손 위에서 놀아나고 있다.

'죄송하지만 폐하. 이미 제가 떠나도 저를 대신할 이가 있습니다.'

지금이야 그저 귀족파의 동향을 주시하는 정도에서 견제만 하고 있겠지만.

내가 준비한 선물을 그가 보는 순간 이 왕궁은 숙청에 숙청으로 피바다가 될 것이다.

명분을 중시하는 귀족이니 그 기세는 아마 쉽게 꺼뜨리지 못할 테지.

휘말릴 확률이 높은 바리스나 윈리는 곧 다시 원래 지방 영지로 돌아갈 테니 휘말릴 걱정은 없었다.

"명을 받들겠습니다."

"그래, 언제 떠나는 게 좋겠느냐."

"길게 말할 필요 있나요. 준비가 되는 대로 바로 떠나겠습니다."

결정은 빠를수록 좋았다.

당장에라도 떠나겠습니다 라고 말하는 게 좋을 수도 있지만 그곳에 가는 일에도 준비는 필요했다.

-그대, 심지가 꼬였군. 그대가 저지른 일 때문에 수많은 사람이 죽을지도 모르네만?

'바리스가 왕이 되고 나서도 이딴 식으로 유지될 왕국이면 차라리 없는 게 나아. 그러니까 그전에 개혁을 시켜두는 거야.'

동생에게 더러운 현실을 넘겨줄 생각은 없다.

덤으로 적을 치워버릴 상황이 온다면 더 좋은 것이고.

이번 싸움으로 리네스 왕비나 바리에타 공작가가 단번에 몰락하진 못할 것이다.

다만 준비물이 워낙에 확실하다 보니 서서히 힘을 잃어갈 게 뻔하다.

그뿐일까.

꽁꽁 묶여있던 그들의 관계가 단번에 무너져 내릴 테니 순식간에 분란이 일어날 것이다.

그 결과는?

내전.

복잡한 정치판엔 끼어들고 싶은 생각 없었다.

내가 이곳에 있다면 나까지 휘말릴 가능성이 있다.

그러니 리네스 왕비의 수작질이 아니더라도 이곳을 뜰 생각을 품고 있던 찰나였다.

이후 내가 나서는 건 그들이 돌이킬 수 없는 선택을 골랐을 때.

직접 그들의 목을 치리라.

"왕자의 의지가 그러하다면 그리하도록 하지. 기대를 품고 있으니 이번에도 꼭 왕국에 흥복을 가져다주도록."

"명심하겠습니다. 폐하."

그리 말하며 나는 속으로 흘러나오는 웃음을 가볍게 삼켰다.

* * *

알현실을 떠나 1 왕자궁으로 돌아오자 말끔한 벽면이 나를 반기는 게 보였다.

처음엔 거의 반쯤 흉가로 보이던 1 왕자궁이 이정도면 용 된 꼴이다.

이제는 떠날 곳이긴 하지만 말이다.

"에이미, 재무부와 토지부에 가서 하인스 영지에 대한 서류들 전부 받아와."

"정보요? 어떤 것들 위주로 요청할까요?"

"한 개도 빠짐없이 전부. 내가 보냈다고 하면 얼씨구나 하면서 싹 내어줄 거야."

그 양이 많아서 짧은 기간 안에 모두 파악하긴 힘들지도 모른다만 상관없었다.

서류 몇백 장이건 읽고 머릿속에 때려 박는 건 자신 있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전백승이다. 제법 흥미로운 구절이로고. 그대의 전생의 삶에서 나온 말인 겐가.

'이곳에도 비슷한 구절이 있지?

-본녀가 살던 당시에도 있었다네.

속담은 역시 그 근원이 어디인지 궁금해질 지경이다.

재밌다는 듯 꺄르륵 대는 페르세르크는 그저 마냥 상황이 재밌는지 흥미 가득한 얼굴이었다.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가.

"뭐가?"

조용히 고개 숙인 후 떠난 에이미가 사라지니 이 이상 의지로 대화를 나눌 필요가 사라졌다.

내 질문에 그녀가 내 다리 위로 쪼르르 날아올라 왔다.

그리고는 양다리를 바깥으로 접은 채 주저앉아 올려다보았다.

-본녀도 화끈한 걸 좋아함이지, 그대는 상당한 힘과 실력을 지니지 않았는가.

"흠."

-그러면서도 스스로가 정한 오만함의 선은 절대 넘지 않으려 하지. 참으로 재미있음이로고.

그녀의 취향은 이해할 수가 없다.

"대리만족? 뭐 그런 건가?"

-본녀의 삶은 이런 삶과는 달리 소극적인 삶이었으니, 어쩌면 그대를 통해 대리만족을 느끼고 있는 것인지도 모를 일이지.

"나 참 살다 살다 내가 대리만족의 표본이 될 줄은 몰랐네."

-자랑스러워 해도 좋음이야, 무려 전(前) 마왕님이 그대의 팬이 되기 일보 직전이니.

꺄르륵 웃어 보인 그녀가 허리를 숙였다.

그리고는 내 허벅지에 뺨을 붙이며 잠들 듯 눈을 감았다.

-조금...... 졸리는군.......

나와 공생 관계가 된 이후 알아낸 사실이지만 미녀는 잠꾸러기라는 말이 그토록 잘 어울리는 여성은 그녀가 처음이었다.

압도적인 미모를 지닌 대신 수많은 수면 시간을 대가로 내놓는 것 같은 모양새가 아닌가.

좋게 말하면 수면을 많이 취하며 자신을 관리하고 있는 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나쁘게 말하면?

그냥 여유가 생기니까 게을러터졌다.

-뭔가...... 묘하게 기분이 나쁜 생각을 품은 것 같네만,

쓸데없이 감이 좋은 여자 같으니.

간파의 힘을 쓰지도 않고 상대를 파악하는 건 수많은 사람을 파악해온 그녀의 삶 때문이었을 것이다.

-본녀는...... 조금 잘 것이야...... 움직이지 말아.......

"내 허벅지는 비싼데."

-그대의...... 음냐...... 다리는 꽤 단단하면서 푹신해서 잠들기 아주 좋음이니.......

그 말을 끝으로 잠들어버린 그녀였다.

전처럼 사라지진 않았지만 괜히 깨우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들어 가만히 두었다.

"저하! 말씀하신 것들을 가져왔어요!"

그때였다.

생각보다 오래 걸릴 줄 알았건만,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이게 전부야?"

"네, 남아 있는 영지의 정보는 이것이 전부라고 해요 저하."

"역시 벽골 오지의 영지 답네......."

생각지도 못한 정보의 양에 헛웃음이 나와버렸다.

얼마나 많을까 생각했지 설마하니 이렇게 적을 거라곤 예상치 못했으니까.

"대단하구만."

서류를 받아들고 빠르게 눈동자를 굴리자마자 내 입에서 숨길 수 없는 탄식이 흘러나왔다.

"저주받은 땅이라고? 이런 땅을 용케도 붙잡고 있었네."

한 치의 가감 없는 평가였다.

* * *

저주받은 땅.

불모의 황무지.

가뭄이 멈추지 않는 영지.

죽어가는 땅.

뭐 여러 표현방법이 있지만 일단 내가 갈 하인스 영지에 대한 평가를 간단하게 하면 저 정도가 적당했다.

처음엔 내가 갈 영지에 대한 정보를 차단하기 위해서 리네스 왕비가 수작을 부렸다고 생각했건만, 실상은 그게 아니었다.

숨길 가치도 없을 정도로 영지의 상태는 참혹 그 자체였다.

"영지의 10퍼센트를 제외하면 죄다 가뭄으로 땅이 말라버렸고."

-흠...... 광산의 여부도 참혹하기 그지없어. 다만, 이 항목은 조금 조사가 필요함이야. 이외에 인접한 바다도 없어서 해산물 사업이나 해상무역도 불가능해 보이고.

새삼 모른 채 내 다리 위에 늘어져 잠들어있던 페르세르크가 하품을 쩍쩍하며 중얼거렸다.

페르세르크는 제법 머리가 좋은 마왕이었다.

아니 한 종을 아우르던 왕이 되었던 그녀였고 봉인되었다 해도 수천 년을 살아온 그녀였다.

식견을 따지면 내가 그녀를 평가할 수준은 못되겠지.

"5년 전부터는 영지가 세금을 낼 여력도 되지 않아 국가에서 감면을 해주고 있는 정도라니."

가난한 영지의 세금을 감면해주는 정책은 내 아버지, 크리아네스 국왕이 젊은 시절 추진했던 법안이었다.

세금을 낼 여력이 없을 만큼 가난한 영지에 과한 세금을 부여해 봤자 돌아오는 것은 민심의 혼란뿐이라는 이유였다.

현재의 하인스 영지가 딱 그러했다.

10년 전까지만 해도 그래도 영지 구실을 하던 땅이었다.

다만, 현재는 성국과의 길목에 위치한 상당히 중요한 교통적 이점을 지닌 것만 제외하면 도저히 내세울 만한 요소가 보이지 않았다.

"차라리 사막 한가운데 던져놓는 게 나을지도 모르겠네."

정말 그 정도까진 아니겠지만 말이다.

-맨땅에 헤딩해본들 나오는 건 없을 게지. 왕국에서 해줄 수 있는 지원은 어느 정도라고 하는가.

"보아하니, 소수의 노예와 물적 자원 정도가 전부인 듯한데. 건수 잡힐 수 있으니까 전부 거절했지."

-그 정도론 어림도 없겠군. 재조사로 완벽하게 상황을 파악하기 전엔 답이 보이지 않음이야.

"네가 보기엔 어떻게 하는 게 좋아 보여?"

-여기 보이는가, 저주받았다는 항목.

영지에 비가 내리지 않게 된 건 5년 전이다.

그 원흉은 아직 알려진 바가 없지만 소문대로라면 이 땅에 정체 모를 저주가 내려졌다는 모양이었다.

그 원흉은 숲에 사는 이종족들의 짓이라고 하는데 솔직히 가능성은 작았다.

-일단 그 저주라는 것이 지독한 가뭄에 한정된 것이라면 예전처럼 비만 제때에 내려준다면 상당한 부지를 농지로 다시 써먹을 수 있을 테지.

"지기는 이미 죽었을 텐데?"

-그대는 본인의 잠재력을 너무 과소평가하는군. 정령술이나 연금술은 국 끓여 먹을 겐가.

"그러네, 조언 고마워."

페르세르크는 제법 좋은 말 상대고 의논 상대였다.

그녀는 적어도 내가 무엇을 가지고 있는지 알고 있으니 말이다.

내가 회랑에서 많은 것을 배웠다곤 하지만 적어도 지리학 같은 것까지 공부해 본 적은 없다.

나 혼자서 살아남는 것과 세상을 바꾸는 지식은 다른 법이다.

내가 미처 알지 못하는 방면에 관해서도 그녀는 꽤 해박한 지식을 지니고 있었다.

그런 것도 있지만 제법 말이 잘 통하는 사이라는 것도 한몫하는 편이었다.

-뭐가 되었건 직접 가보지 않는 이상 멋대로 판단하는 건 힘이 듦이지. 뭐, 부족하나마 본녀와 공생 관계가 된 만큼 어리석은 지혜 정도는 빌려줄 수 있음이야.

"그 대가는 내 다리고?"

-그대의 다리만큼 자기 편한 침대는 잘 없음이지, 암.

꺄르륵 거리며 그녀가 귀엽게 웃어 보였다.

* * *

며칠이 흘렀다.

그동안 머리를 마주 대고 시작한 정보 분류는 이제는 더는 확인할 것도 없을 정도로 빠삭해진 상황이었다.

영지의 발전에 대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페르세르크와 밤을 지새워버리는 경우가 허다 해 진 탓에 녀석은 이제 깨어나지 않는 잠에 빠져버린 것처럼 잠들어버렸다.

아마 영체의 힘으로 실체화를 오래 지속하면 할수록 빠르게 지쳐가는 게 원인이리라.

날이 밝기가 무섭게 왕성은 하인스 영지로 떠나는 행렬 때문에 북적거렸다.

떠나는 이들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았다.

영주로서 취임할 나와 나를 보좌할 전속 시녀 에이미, 그리고 몇몇 시종과 시녀들이 따라붙었다.

이 외에 나를 따라 잠시 체류하게 될 기사들 몇몇.

나는 가난한 탁발승이오.......

-쓸데없는 생각 하는 걸 보면 여유가 넘치는군.

'크흠.'

내게는 충성을 맹세한 기사도, 귀족도 없다.

그렇기에 이런 조촐한 행렬은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이기도 했다.

내가 떠난다는 사실을 들은 바리스와 윈리는 곧장 나를 찾아와 분기탱천하며 씩씩거렸었다.

녀석들도 하인스 영지가 어떤 곳인지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당장에라도 '폐하에게 가서 다시 청원드리겠습니다!' 라며 소리치던 녀석은 형을 믿어보라는 내 말에 울컥했는지 그대로 자리를 떠버렸다.

이후 손수건으로 눈물을 찍어내던 윈리가 가만히 나를 안아주며 조용히 말했다.

-오라버니, 조금이라도 힘이 든다면 꼭 연락해주셔야 해요. 저희가 무슨 일이 있어도 오라버니를 모시러 갈 테니.

고작 열네 살 꼬맹이들이 누굴 챙긴다는 건지.

그래도 녀석들의 마음 씀씀이가 고마워 그저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울컥하기라도 했는지 엉엉 울음을 터뜨리더라.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