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8
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
- 2권 13화
처음에 비하면 굉장히 적어진 숫자지만 남은 인원들은 고블린과의 싸움으로 부서진 가옥이나 성체를 보수해야 하기에 데려갈 순 없었다.
"10명? 영주님이 미치지 않고서야!"
"제아무리 고블린들의 수가 줄었다지만......."
전날 내 모습을 보지 못한 자경단원들은 믿을 수 없다는 듯 불신을 보내왔었다.
실제로 듣기만 하면 이게 무슨 허무맹랑한 허풍이냐고 소리쳐도 이상하지 않을 전공이었으니까.
그랬던 그들이었다.
"전방에 고블린 부락 발견. 50여 마리 정도가 있는 것으로 파악됩니다."
정찰을 나갔던 기사의 말을 들은 뒤 뒤편에 서 있던 10명의 자경단원들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하나같이 불신, 불안이 가득한 표정들.
전날 나와 함께 대규모 부락을 쓸어버렸던 자경단원은 데려오지 않은 탓에 나를 쉬이 믿지 못하는 분위기다.
"겁이 나나?"
내 물음에 그들이 침묵했다.
믿기 힘들겠지. 솔직히 나 같아도 저 입장이었으면 그들이 단체로 약이라도 한 사발 들이키고 온 줄 알았을 거다.
"겁이 날 거야. 날 수밖에. 고작 10명이 고블린 부락을 죄다 정리하러 왔으니. 이 미친 새끼를 죽이고 도망치는 게 옳은 게 아닌가 생각도 들 거고."
내 말에 대답이 들려오진 않았지만 전부 같은 생각인 듯 보였다.
믿기 힘들면 직접 보여주는 수밖에.
"전에도 했던 말이지만 나는 한 명도 죽는 걸 허락한 적 없다."
내 말과 함께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내가 하려는 것을 깨달은 기사들과 다르게 영지민들의 얼굴에 놀라움이 어린다.
내 몸에서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그리고. 버프 마법이 그들에게 안착한 후 그들의 불신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사라져 버렸다.
* * *
"와하하하하! 죽어라 이놈들!"
"영주님이 함께하신다!"
"좀 전까지만 해도 못 믿겠다는 표정이던 놈들이......."
황당하다는 느낌은 들었지만 이미 한 번은 봤던 광경이니 애써 평정을 유지할 순 있었다.
"이놈들! 썩 목을 내밀어라!"
"성자님이 함께 하신다!!!"
그래, 성자 코스프레 제대로 했으니 이해는 하리라.
"신께서 함께하신다!"
"우오오오오!! 신의 철퇴를 받아라!"
"야이 미친놈들아!"
누가 들으면 당장 신성모독으로 잡혀가도 이상하지 않을 발언까지 내뱉는 그들의 모습에 절로 황당한 표정이 지어졌다.
듣고도 믿지 못해서 나를 불신 어린 얼굴로 바라보던 놈들이 맞단 말인가.
광신도들이나 보일 법한 광기 어린 눈동자로 광소를 흘리며 고블린들을 쓸어담고 있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겁에 질려 도망치거나 벌벌 떠는 고블린들이 더 불쌍해질 지경이었다.
훈련조차 체계적으로 받지 못한 자경단원 10명이, 그것도 제대로 된 무구도 보급받지 못한 이들이.
50마리가 넘는 고블린들을 학살하는데 걸린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무기를 휘두르다 무기가 부서지면 맨손으로 놈들의 골통을 쥐어 부숴버린다.
마치 한 명 한 명이 극도로 강화된 광전사마냥 용맹하기 그지없다!
이번엔 내가 활을 들지 않았기에 모조리 척살하는 건 힘들었지만 대부분이 죽었으니 도망간 놈이 어떻게 할 수단은 없을 것이다.
오히려 인간이 얼마나 위험한 존재가 되어 있는지를 절실히 깨달았을 테니 저들끼리 혼동이 와준다면 더 좋을 일이다.
순식간에 정리를 끝마친 그들이 일제히 내게 모여드는 그 모습에 아주 잠깐, 공포심이 느껴질 지경이었다.
이정도면 전보다 더 심한 수준이 아닌가.
"영주님! 몇 놈이 꽁지 빠지게 도망치고 있습니다요!"
"하하! 그놈들 다시는 하인스 영지를 넘보지 못할 겁니다!"
"캬하하하하! 그놈들 골통이 아주 그냥!"
시키지 않아도 만세삼창을 불러대는 그 모습에 절로 어색한 웃음이 흘러나왔다.
거 참, 얕기도 얕은 불신이었구나.
"그...... 그래 고생 많았다."
그래, 영지를 지켜야 하는 자경단원이면 충성심이 커서 나쁠 건 없지.
적어도 내가 하려는 일에 불만이 생기진 않을 테니까.
조금 떨떠름하긴 하지만 나쁘진 않다!
그렇게 생각했다.
이미지 관리도 적당히 하면 나쁘진 않은 것이니까. 그렇게 생각했던 내 생각은 정확히 이틀 후,
영지의 상태를 직접 시찰하기 위해 돌아다니다가 본 광경 때문에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바뀌어버렸다.
"오오...... 성자님!"
"성자님이 오셨다! 길을 터라 이놈들아!"
발 없는 말이 천 리를 간다고.
이들이 자경단원들인지, 포교활동을 하러 다니는 사제들인지.......
처음으로 내가 했던 결정이 후회되기 시작했다.
* * *
영주로서 영지민에게 신임을 얻은 건 성공적이라 봐도 무방했다.
어차피 내 영지인데, 또는 어차피 내가 최고 상급자인데 무슨 상관이냐.
뭐 그런 의문이 들 법도 하지만 보르드 대륙, 팔라디아 제국의 정복왕 아스트레아가 내게 매번 하던 말이 있었다.
[작은 영지를 관리하더라도 잊지 마라, 네가 이끌어나가는 건 가축이 아니라 자유의지를 지닌 사람이다. 그들이 스스로 너를 따르게 해야지 네 독단으로 처리하는 건 오래가지 못해.]
그는 내게 창술을 가르쳤지 정치를 가르치진 않았기에 심도 있는 왕으로서의 정치는 배우지 않았지만 적어도 그가 간간이 던지는 말에는 공감하는 편이었다.
고작 200여 명이 살고 있는 소규모 영지라곤 하지만 무엇이든 시작은 빈곤한 법이다.
"근처 상업도시에서 베르닐 시종장이 전서구를 보내왔어요. 자경단장님이 제법 선방하는 바람에 많은 물자를 구비했다고 해요. 그 때문에 복귀 일자가 조금 늦춰질 수도 있다고......."
처음엔 내 생활의 전반을 시중들던 에이미는 제법 총명한 머리를 지닌 탓에 내 비서로서의 활동도 하고 있다.
여성이 이만한 위치에 있는 건 라운 왕국으로써도 이례적인 일이지만 나는 재능이 있는 이라면 남자든 여자든, 어린아이든 노인이든 가리지 않고 채용하는 편이다.
에이미는 자신의 가치를 알아주는 내게 감동한 듯 보였지만 말이다.
"나머지 영지 관련 서류는 여기 준비되어있어요. 또 필요하신 건......."
"시간도 늦었잖아. 난 클린한 기업을 원한다고. 퇴근해."
"퇴...... 퇴근이요?"
내 말에 그녀가 놀란 듯 나를 바라보았다.
"그럼, 언제까지 내 시중든다고 잠도 못 자고 그럴래."
"그럴 수가......."
마치 주인에게 버림받은 강아지처럼 추욱 늘어지는 모습에 내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퇴근 싫어?"
-그대는 많은 것을 알지, 하지만 여심은 너무 몰라.
'쟤가 나한테 연심을 품었다고?'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짓자 페르세르크가 한숨을 푸욱 내쉰다.
-연심은 아니지, 설명은 어렵지만 강아지가 주인을 따르는 것과 무에 다를까, 조금이라도 그대를 돕고 싶어 하는 아이의 마음을 그리 매몰차게 내치는 건 옳지 않음이야.
페르세르크는 경험이 많고 지혜가 풍부하다. 그녀가 그리 말하고 난 후라 에이미의 시선에 괜히 신경이 쓰였다.
"저...... 데이비 님...... 저 정말 잘할 수 있어요! 그러니까......."
말끝을 흐리는 녀석을 보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름대로 챙겨주는데도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지.
"그래, 그럼 어쩔 수 없지. 대신, 빡세게 굴릴 거니까 각오 단단히 해두라고."
"네!"
"그럼 됐어. 오늘은 일단 퇴근해."
내 말에 기분이 승천했다가 추락하는 모습을 보였지만 그녀가 있으면 여러모로 곤란하니 어쩔 수 없었다.
"내일도 잘 부탁하자고."
"네!"
이후 내 말에 기운을 되찾은 녀석이 종종걸음으로 집무실을 나가자마자 한숨이 푸욱 나왔다.
"그렇게 챙겨준 적도 없는데."
-글쎄, 본녀가 보기엔 저 여아는 그대가 자신을 구해준 것에 상당히 큰 책임감을 느끼고 있는 모양이지.
아, 그 부패할 대로 부패했던 하급 사제의 일.
분명 구해준 것은 사실이지만 반쯤은 내 의도였다는 사실을 잊을 순 없다. 그렇게 생각하니 괜스레 죄책감까지 든다.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 내 앞으로 온 페르세르크가 낡은 책상에 가볍게 내려앉았다.
그리고는 그녀의 엉덩이 밑에 깔린 서류들을 스윽 훑으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런데, 수천 년 전의 사람인데 글은 잘 아네?"
-그동안 놀고먹진 않았으니, 대륙 공용언어 정도야.
그리 말하며 제 몸보다 훨씬 큰 서류에 손을 뻗어 쓸어내린 그녀였다.
"네가 보기엔 어때."
-냉정한 평가를 원하는 게야?
"일단은."
-그대가 당장 저주를 해제하고 제대로 굴린다면 최소 5년 안에 정상적인 영지의 모습을 되찾겠지. 그리고 그대가 원하는 영지로 만들기까진 20년 정도를 예상해 봄이야.
그녀의 판단은 꽤 정확했다.
당장 죽어가던 땅에 저주를 지운다고 땅이 멀쩡해지진 않을 테니까.
"그건 어디까지나 내 힘으로만 판단했을 때지?"
-그럴 리가. 본녀가 판단하는 이 영지에 대한 생각을 들어볼 텐가?
"경청하지."
싱긋 웃자 그녀가 만족스러운 듯 꺄르륵거렸다.
주저앉은 자세 그대로 그녀가 작은 손을 뻗어 한쪽에 놓인 서류를 가리켰다.
그러자 옅은 바람과 함께 작은 서류 하나가 가볍게 떠올라 내 앞으로 날아왔다.
"물리력을 다룰 수 있게 된 건가?"
-아주 작은 힘 정도는 가능한 일인 게지. 그래 봐야 이런 가벼운 물체를 조금 드는 정도이네만.
그럼에도 만족스럽다는 표정이었다.
-이 영지는 지하수로도 존재하지 않아서 수도공급도 엉망이지. 그뿐일까, 흉작으로 비축된 식량도 간당간당한데 축산업도 몇 년 사이에 급속도로 줄어들었다는 사실이 분명히 보이고 있음이지.
그녀의 말을 말없이 듣고 있자니 계속해서 말을 이어나간다.
-그대가 수도의 정보 길드를 탈탈 털면서 얻은 다량의 백금화 덕분에 당분간은 견딜 수 있겠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임시방편. 가장 심각한 건 역시 자금문제임이야.
그녀의 말대로였다.
"실제로 이놈의 영지는 수익이 거의 전무하다시피 하니까."
다른 영지에 비해 극도로 낙후되어 보인다는 느낌이 드는 건 별수 없는 노릇이다.
"방법은 많은데."
-그대가 생각하는 방법이 뭔지 본녀에게도 말해주게.
곱게 웃으며 물어오는 그녀의 눈동자엔 기대감이 가득해 보였다.
그녀 또한 의지대로 내 속마음을 보지 않고 있다는 소리이리라. 수천 년간 살아온 그녀라면 이제 삶이 무료해질 대로 무료해졌겠지.
그럴 만도 하다.
"다행인 건 젊은이들이 대부분 빠졌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과 다르게 꽤 인력들이 많다는 점. 몬스터나 수렵을 이용해서 근근이 버티는 게 첫 번째고."
-사실상 최하책의 선택인 게지.
당장 내일부터 영지 개혁을 외치며 추진해도 따를 만큼 영지민들의 맹신은 대단하다.
그들을 이용해 수렵과 몬스터 사냥에 나선다면 당장 버틸 순 있지만 거기서 성장은 끝이다.
"두 번째 수단은 특산물을 만들어내는 것, 다만 이건 영지 상태를 해결하지 않으면 힘들어."
-그럴 만도 하지.
"마지막으로, 교역이지. 옥수수로 다이아몬드를 가져오는 방법."
내 말에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딱히 타 도시에서 굳이 이곳까지 와서 교역을 할 이유는 없음이지, 게다가 내세울 교역품도 없고.
"사람하고 교역할 수 없으면 다른 쪽하고 하면 되지. 그래도 혹시 모르니 일단 영지 상황부터 조사해 보자고."
무엇이든 일단 써먹어야 하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