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9
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
- 2권 14화
* * *
날이 새도록 페르세르크와 머리를 마주 대고 고민한 보람은 있었던 모양이다.
날이 밝기가 무섭게 나는 성채를 떠나 근처에 버려진 넓은 평야에 왔다.
나오는 길에 나를 본 자경단원들의 광신도와 같은 그 시선과 기대감을 본 탓에 조금 부담스러워져 있던 찰나였건만.
메마르긴 했어도 탁 트이는 평야를 보고 있으니 마음이 차분해지는 느낌도 들었다.
쌀쌀한 공기가 온몸을 때려온다.
환골탈태를 겪지 못해서 냉기나 화기 저항은 거의 올라가지 않았지만 가볍게 신성력을 끌어올리면 그것도 문제 될 건 없었다.
신성력 난로라고 들어나 봤는가.
"예전엔 그래도 이곳 전부가 농지였다는 거잖아."
지금은 쩍쩍 갈라진 평지다. 얼마나 땅이 쓸모가 없어졌는지 본래의 주인들도 죄다 소유권을 포기하고 영지를 떠났다는 모양이었다.
무슨 뜻이냐고?
이곳 전부가 주인 없는 땅이라는 소리지.
"아, 내가 옛날부터 건물주는 돼보고 싶었는데. 완전히 대지주가 되게 생겼네."
허허롭게 웃고 있으니 페르세르크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그대는 욕심의 방향이 특이하군, 그렇게 편하게 먹고 사는 게 목적이라면 수탈이라는 좋은 방법이 있네만.
"그런 건 싫어서. 사람이 양심 있게 살아야지."
적어도 나를 가르쳤던 영웅들의 이름을 드높이진 못해도 욕먹게는 하지 말아야 할 것 아닌가.
좋든 싫든 언젠가는 그들의 기술을 물려받은 것을 많은 사람이 알게 될 것이다.
티오니스 대륙 출신이 아닌 영웅들의 기술이야 별로 상관없는 일이지만 나를 가르쳤던 영웅 중 몇몇은 이 대륙 출신이니까.
실제로 검신 하레스 폰 팔란이 아주 좋은 예시가 아니던가.
무엇보다.
"내 목적은 사람답게 오래 사는 거야."
그 말뜻을 이해한 듯 그녀가 침묵했다.
-그대는.......
뭔가 말끝을 흐린 그녀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대의 전생은 짧은 삶이었는가.
"뭘 해보기도 전에 죽었으니까."
-얄궂은 생이로군.
"틀린 말은 아니네. 반대로 회랑에선 굉장히 오래 살았지만."
-살아있으면서도 살아있다는 느낌은 들지 않았겠지. 본녀가 보는 그대가 원하는 삶은 사람들과 부대끼며 정을 나누고 사람답게 살아가는 것.
생각보다 정곡을 찔러 들어온다.
-본녀도 그런 것을 원했을진대 어찌 모를까.
출신으로 인해 전쟁의 핵이 되어야 했던 그녀의 삶도 그리 좋은 삶은 아니었으리라. 그녀가 원했던 건 그저 제 양아버지였던 하레스와 오래 같이 사는 게 아니었을까.
쓸데없이 감상에 젖어드는 기분이라 절로 고개를 저었다.
"일반적인 방법으론 매개체를 찾는데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알 수 없다."
괜히 방치되고 있는 땅이 아니다.
저주에 관해선 상당한 지식을 보유하고 있지만, 그 지식 때문에 이런 계통의 저주가 지금의 나로선 얼마나 해주하기 번거로운지 잘 알고 있다.
"성역을 다시 발현할 정도면 이런 고민도 필요 없다만......."
9 위계 신의 성역까진 아니더라도 최소 8 위계의 정화마법은 필요하다.
저주의 수준이 상당한지 5급 6급 정도로는 쉽게 해주될 것 같지가 않았으니 말이다.
문제는 내가 끌어올릴 수 있는 신성 마법의 수준은 아직 8급은 힘들다는 점.
신성력만 많으면야 상관없지만, 솔직히 칼디라스 급의 신성력을 가진 신성력 저장고가 또 있을 리는 없었다.
'그냥 일리나 황녀에게 요청을 해볼까.'
어쩌면 미끼를 물지도 모른다. 하레스의 검술에 굉장한 자부심이 있는 것 같은데, 조금 손봐주는 거로 칼디라스를 빌리면.......
-그리 추천하진 않음이야.
내 생각을 눈치챘는지 페르세르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 보였다.
-하면, 무엇하러 이곳을 보러 온 게지?
"일단 저주에 대한 자세한 정보를 봐야 할 거 아냐."
지면에 대고 정보확인을 써본들 현재 그녀의 힘으로 확인할 수 있는 정보는 저주가 걸려있다는 정보뿐.
그렇다면 그녀의 힘이 아닌 내 힘으로 그것을 파악하는 수밖에 없다.
"안 그래도 요즘 왜 안 써주냐고 징징대고 있던 찰나였는데."
-징징 댄다라?
"있어, 자기를 안 쓰면 빽빽 소리 지르겠다고 악을 쓰는 어린애 같은 녀석이."
담담하게 말하며 한쪽 무릎을 꿇고 자세를 숙인 뒤 메마른 땅에 손을 얹었다.
그리고는 조용히 눈을 감은 채 의지를 발현했다.
'기회 있을 때 신나게 날뛰어보라고.'
혈도를 회전하는 서클 덕분에 영창파기의 힘을 얻은 내게 딱히 입 밖으로 주문이나 영창을 내뱉어 이형화된 힘을 형상화할 필요는 없었다.
[리픽스 커스 (Re Fix Curse)]
저주 재배열.
-오호? 생전 처음 보는 마법이로고.
당연한 일이다.
이 마법의 창시자인 내 흑마법의 스승 [로 아이아스]는 이 대륙 출신이 아니니까.
통칭. 저주계의 C언어!
저주는 수많은 수식과 마나 배열로 만들어진 고도의 마법이다.
그렇기에 흑마법사들도 저주를 걸 때만큼은 여러 아티펙트의 힘을 빌리거나 상당한 시간을 들이기 마련이라는 소리였다.
그렇다면 그 마나 배열을 내가 해독하고 간섭하여 재배치할 수 있다면?
-저주의 조건을 알아내거나 잘하면 저주의 매개체를 찾을 수도 있음이겠지.
이정도 수준급의 저주는 현재 이 대륙에 있는 흑마법의 지식으론 불가능할 터.
예상되는 부분이라면 과거 초대 성녀라 불렸던 다프네와 아폴론이 살아있던 시절의 흔적이 아닐까.
듣기로는 그때 흑마법사들이 대륙 전복을 꾀해 큰 싸움이 벌어졌다고 했으니까.
아마 하인스 영지에 퍼져있는 이 저주는 지뢰형식으로 발동하는 저주일 가능성이 컸다.
애초에 로 아이아스도 악질적인 저주를 해독하고 풀기 위해 만들어낸 마법이니 용도가 완전히 틀렸다고 하기도 뭣하다.
순식간에 내 주변으로 사령 마나가 넘실거리며 제힘을 방출하기 시작하자 거대한 힘의 울림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것 때문에 이곳에 오고 나서도 사용하길 꺼렸었다.
5 서클 흑마법 정도의 수준이다.
내가 가진 사령 마나는 저 자신을 뽐내는데 굉장한 자부심을 가진 약간 또라이 같은 마나.
조금이라도 마나를 활용하거나 느낄 줄 아는 사람이라면 리픽스 커스를 사용함과 동시에 이 차갑고 어두운 마나를 금방 눈치챌 것이다.
실제로 내가 사람 하나 없는 이 평야에 홀로 온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사실상 내가 배운 것 중 가장 써먹기 힘든 힘이 바로 고위 흑마법이니까.
우웅.......
이윽고 내 손을 타고 검은빛과 흰빛의 마법진이 넓게 퍼지기 시작했다.
저주의 구조는 동일할 테니 다른 시료를 찾을 필요는 없어 보였다.
넓게 퍼진 마법진의 크기는 대략 3~4m 정도.
이윽고 그 모습이 변화하며 마치 거대한 석판에 새겨진 문자처럼 빽빽하게 기괴한 문자를 출력해내기 시작했다.
마치 컴퓨터의 C언어가 출력되듯 말이다.
암호와도 같은 그 내용문은 그 누가 봐도 이해할 수 없는 문양들이었지만 내게는 익숙한 문자일 뿐이었다.
"음?"
이윽고, 저주의 배열을 해독하던 내 눈에 의문이 어렸다.
"페르세르크."
-무언가 찾았나 보군.
"이거 저주가 맞긴 해?"
내 말에 그녀의 눈에 의문이 어렸다.
"이건 저주라기보단 전자동 온실 같은데?"
그것만큼 정확한 표현이 있을까 싶은 느낌이 들었다.
* * *
흑마법 중에서도 굉장히 복잡하다고 정평이 나 있는 저주계통의 마법은 마치 한 개의 정교한 프로그램과 같다.
복잡한 사령 마나의 배열을 정교하게 짜올려 유지되는 마법.
그렇기에 리픽스 커스 마법이 통하는 유일한 흑마법이기도 했다.
비록 [로 아이아스]가 이곳, 티오니스 대륙 출신의 흑마법사는 아니지만 사령 마나를 사용하는 흑마법이라는 근간은 똑같으니 충분히 마법의 효율은 볼 수 있다.
일단은 저주라고 이름 붙은 정체 모를 현상을 조사하기 위해 리픽스 커스 마법을 선택한 건 꽤 좋은 판단이었다.
비록 흑마법의 흔적이 심하게 남아서 어지간해선 사용하지 못하겠지만, 지금처럼 죽은 땅에 아무도 없으면 내가 시체를 되살리건 마왕을 불러내건 무슨 상관일까.
"......."
고민하듯 침묵하는 내 모습에 페르세르크가 답답한 듯 내 머리칼을 잡아당겼다.
"그러지 말고 본녀에게도 알려주는 게 어떠한가. 본녀는 저 암호를 해독할 수 없음이야."
이 암호 해독법을 배우고 응용하는 데 30년이 걸렸다.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나는 보는 대로 금방 내용을 해독할 수 있는 수준에 이르렀지만, 페르세르크는 아니었다.
아무리 천재라도 대번에 정체 모를 문자를 보고 눈치채긴 쉽지 않겠지.
쉽게 말하자면 내 눈앞에 있는 이 암호문은 컴퓨터 언어와 비슷했다.
-저주가 아니라는 뜻인가?
"엄밀히 따져서 저주가 맞긴 해. 실제로 목적도 굉장히 악랄하기 그지없고. 그런데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이게 또 애매하단 말이지."
그리 말하며 내가 지면을 짚은 손바닥을 가볍게 비틀었다.
우웅!
동시에 검은색과 흰색으로 섞인 출력창이 사라지며 남은 빛들이 커다란 화살표로 변하기 시작했다.
"마침 가까이에 하나 있는 것 같으니까 매개체를 직접 확인해 보자고."
영주성이 있는 내성은 넓디넓은 하인스 영지의 동쪽 부근에 자리 잡고 있다.
그렇기에 내가 선택한 것은 당연히 내게서 가장 가까운 동쪽에 배치된 것으로 추정되는 매개체였다.
'어쩐지 영지의 바깥 경계가 너무 확실하더라니. 하인스 영지만 딱 둘러싸이도록 매개체를 배치했구나.'
검색에 성공한 매개체가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장소는 총 일곱.
각각 동서남북과 남서쪽 북서쪽 남동쪽.
모두가 영지의 경계선에 아슬아슬하게 자리하고 있다.
일단 이정도로 거대한 지역에 펼쳐진 저주라면 매개체가 7개가 넘어도 이상하진 않았다.
오히려 지형의 조건을 잘 고려해 꽤 정교하고 효율 높게 배치된 꼴이다.
다른 곳은 어떠할까.
자경단원을 동원해 각각 확인해 보는 건 어떨까 싶기도 했지만 매개체를 보호하기 위해 무슨 수작질을 부려놨을지도 모르는 이 상황에 함부로 사람을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자칫 큰 사고가 터지면 버프고 나발이고 그대로 참사가 벌어질 수 있으니까.
'그건 절대 안 될 말이지.'
불가능할지도 모를 일이지만, 만약에. 아주 작은 확률이라도 내가 회랑의 영웅들을 다시 만났을 때.
당신네 제자가 이렇게 살고 왔다고 말할 수 있도록.
영웅들을 상대로 술잔을 내밀면서 내가 했던 일들을 자랑스레 말할 수 있는 삶.
목적을 위해 나를 따르는 이를 희생시킬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무슨 방비가 있을지 모를 일이지, 좀 더 대비를 하고 가는 걸 추천함이야.
"별문제 없을 거야,"
만약 일이 꼬인다면 숨겨둔 한 수를 꺼내는 수밖에.
* * *
내비게이션처럼 나를 안내하는 화살표를 따라 내가 향한 곳은 영지 동쪽의 암석지대였다.
바짝 마른 바위들은 직접 캐서 채석장을 만들기엔 묘하게 부적절한 구조를 지니고 있었다.
유일하게 볼 것이라면 꽤 절경이라 부를 만큼 그 모습이 아름답다는 점이었다.
당장 높은 곳에 자리 펴놓고 절경을 감상하면서 피크닉을 즐겨도 좋을 법한 모습이다.
하지만 정말로 놀러 온 것은 아니었기에 나는 미련 없이 암석지대의 내부로 뛰어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