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0
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
- 2권 15화
"암석지대 안에 숨겨놓은 건가? 제법 머리 잘 굴렸는데."
-그대는 본녀의 애간장을 태우는데 자질이 있음이야.
"말 그대로야. 이 영지 전체에 기후, 지기와 관련된 자연현상 대부분을 강제로 고정하도록 설계되어있었어."
-오호?
"솔직히 생각도 못 한 발상이긴 하지."
내 말에 페르세르크가 흥미롭다는 듯 턱을 어루만졌다.
-비가 오지 않거나 지기가 스스로 소모되고 있는 이 현상 모두가 저주의 힘인 겐가?
"비슷하지. 일단 내가 해독한 내용에서 찾은 저주의 효능은 딱 하나야, 특정 상황 유지."
상황유지라는 단어가 조금 이상하게 다가오긴 하지만, 이것이 일정 지역에 장시간 펼쳐지면 그것만으로도 상당히 무섭고 굉장히 위험한 저주가 된다.
그게 악의를 가지고 설정해놓은 특정 상황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고.
실제로 이 영지는 오랜 시간 기온을 제외한 모든 것들이 계속 일정하도록 유지된 덕분에 가뭄이 계속되었고 지기가 순환하지 못해 소모되었다.
저주의 기능이라면 이미 충분히 제 역할을 하고 있는 꼴이다.
이 저주를 만든 작자는 아마 이곳, 하인스 영지를 천천히 말려서 황폐화하려는 목적을 품고 있었으리라.
이제 와서 그 주인이 살아있을지는 의문이 들지만 말이다.
만약 이것을 제어하고 재배열, 수정할 수 있다면?
지기와 기후, 기온까지.
의지대로 기한을 잡아 조정할 수 있도록 바꿔버린다면?
이건 저주가 아니라 낙원 마법이라 불러도 이상하지 않을 것이다.
일정 지역에는 따스한 기온과 일정 강수량을 유지하면 그에 맞는 특이작물을 재배하는 건 일도 아니다.
주변을 제어하는 매개체 덕분에 지하 내부까지 휘저을 수 있으니 혹여 발견되지 않은 광산도 찾아낼 수 있을지 모를 일이다.
그뿐일까.
지금처럼 기온이 낮아 모두가 몸을 데우고자 꽁꽁 싸매야 할 겨울이 찾아와도 이 영지만큼은 봄이나 여름처럼 따스하고 한산한 기온을 유지할 수 있게 될 터.
관광 휴양지로서의 가능성도 충분하다.
공기에 묻어나는 습기도 멋대로 바꿔버릴 수 있을 테니 내 생각대로만 흘러간다면 이건 말 그대로 도약을 위해 준비된 최고급 플래티넘 발판이라 봐도 무방했다.
현재로썬 이 모든 것들이 그저 가설일 뿐이고 확정된 게 아니라지만 사람이 살다 보면 기대도 할 수 있는 법이다.
담담하게 말하며 걸음을 멈춘 내가 수십 미터는 되어 보이는 바위의 앞에 섰다.
나를 안내하던 화살표는 이 거대한 암석을 가리키고 있었다.
"으음...... 여긴가?"
완전히 막다른 길이지만 나는 실망하지 않고 그대로 암석의 표면에 손을 뻗었다.
그리고는 서서히 사령 마나를 특정 패턴대로 움직이듯 끌어올렸다.
우웅.......
동시에 내 손을 타고 뻗어져 나온 사령 마나가 열쇠가 된 것처럼 벽면과 공명하기 시작했고 단단하던 바위는 마치 블랙홀이 된 것처럼 나를 빨아들이기 시작했다.
모르고 이 문을 열었다면 제법 당황했겠지만, 비슷한 것들을 본 적이 있는 내게는 생각보다 익숙한 느낌이었다.
* * *
바위의 내부는 거대한 공간으로 이어져 있었다.
그 형태를 한마디로 표현하자면.
"유적?"
거대 바위 암석 바위산의 내부는 생각지도 못한 공간이 되어 있었다.
거대한 복도의 높이는 낮게 잡아도 5m는 되어 보였고 정교한 문양이 벽면에 새겨져 고풍스러운 느낌을 전해주었다.
게다가 빛 하나 들어오지 않아 어두워야 할 복도임에도 불구하고 천장에 붙은 푸른색의 발광석이 유적의 복도 내부를 은은하게 비춰주고 있었다.
거대한 바위산 안에 이정도의 거대한 공간이 있을 줄이야.
-건축 양식을 보면 대전쟁 이후에 나온 양식이 아니야.
현재 그녀는 내 손바닥만큼 작은 초라한 모습이지만, 본래의 정체는 수천 년 전 인간과 전쟁을 했던 마족 우두머리인 마왕의 자리에 있던 여자였다.
역사의 산증인이나 다름없는 삶을 살아온 그녀가 본적 없는 건축양식이라 말할 정도라면 최소 문자로 기록되기 이전의 과거 유적이라 봐도 무방했다.
연금술사나 마법사들이 들었다면 침을 질질 흘려대며 환장할법한 기록요소였다.
-이런 공간이 지금껏 발견되지 않았다니.
"나도 리픽스 커스를 사용하지 않았으면 이곳에 들어오는 방법도 몰랐을 테니까."
위치는 둘째 치고 이 방어형 환영마법을 뚫을 방법을 찾는 데만 몇 달이 걸렸을지도 모를 일이다.
작정하고 부쉈다간 무슨 부작용이 생길지도 모르니 어떤 의미로는 제법 철저하게 숨겨놓은 꼴이다.
-위험할지도 모를 터.
"그렇다고 계속 둘 순 없잖아, 일단 들어가 보자고."
대륙에선 문자로 기록되기 이전의 문명을 두고 고대시대라고 칭한다.
그 기간은 최소 만년 단위로 거슬러 올라가야 할 만큼 까마득한 과거의 문명이다.
애석하게도 회랑에는 그때 당시의 인물이 없기에 확인할 수 없었지만 그 존재가 있다는 건 이미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극소량 고대시대의 유물 때문에 익히 알려져 있다.
인기척이라곤 전혀 느껴지지 않지만, 주변에 충만한 마나는 여실히 느껴져 왔다.
저주가 발현된 곳이라 사령 마나가 가득할 줄 알았던 예상과는 조금 다르게 대부분의 대기에 녹아있는 힘은 엄연히 마나였다.
"어쩌면 흑마법사들의 소행이 아닐 수도 있겠는데."
-어쩌면 그들도 이곳의 존재를 깨닫진 못했을 수도 있음이야. 다만, 오랜 시간 방치되어온 저주가 왜 최근에 와서 활성화되었는지는 충분히 의심해볼 가치가 있음이지.
처음엔 그저 흑마법사들이 이곳 영지 전체를 부숴버리기 위해 설치해둔 지뢰형 저주일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상황만 본다면 이놈의 불발탄 저주는 고작 1~2천 년이 아니라 만년 단위로 땅속에 처박혀 있다가 이제야 태동한 거물급 지뢰라는 결론이 내려져 버린다.
"진짜 지독할 정도로 고요하네."
빛이 따로 필요하지 않아 라이트 마법도 발현하지 않은 채 걸어가던 중 페르세르크가 의아하게 중얼거렸다.
-보통 상식대로라면 이정도의 유적에 가디언이 하나도 없을.......
끼이익!!! 쿵!
-아이코, 입이 화근이지.
말끝을 흐린 그녀가 작은 손으로 제 입을 찰싹 때렸다.
동시에 조금 전까지만 해도 고요하던 복도가 일순간 시끄러워지기 시작했고 내가 움직이기도 전에 천장의 석벽이 뒤틀리며 거대한 무언가가 나를 향해 정확히 내리꽂혔다.
콰아앙!!!
거대한 폭음.
나를 내리찍은 것은 거대한 흑색의 석재로 만들어진 주먹이었다.
촤아악!!
그야말로 순식간이었다.
조금만 반응이 늦었어도, 내 실력이 조금만 부족했어도 좀 전의 공격에 큰 상처를 입었으리라.
절로 흘러나오는 안도의 한숨을 넘긴 채 인상을 찡그리며 나를 공격한 거대한 주먹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놈은 인간의 형체를 지닌 푸른 안광의 괴생물체였다.
키는 4m가량.
덩치는 그보다 크고 각진 검은 석재가 얼기설기 붙어있다.
푸른색 안광을 빛내는 놈의 이마에는 사람의 손바닥만 한 작은 푸른색의 보석이 핵처럼 박혀 있었는데 그 형태나 담긴 마나의 양만 봐도 그것이 무엇인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동일한 크기를 지녔을 때 한 개의 가치가 백금화에 맞먹는다는 마나석, 그 마나석 수백 개를 응집시켜서 만든 것이 바로 저것.
마정석이다.
"허?...... 저거 마정석 아니야? 미쳤네 완전."
놀라움에 절로 기함을 토하고 말았다.
-골렘...... 분명 마도 골렘인 게야. 게다가 마정석을 핵으로 쓰고 있다니 놀라워.
눈앞에 보이는 골렘의 수는 대충 십여 개체. 놈들 모두가 이마에 손바닥만 한 마정석을 핵으로 꽂아 사용하고 있다.
보통 마나석을 사용해서 움직이는 골렘과 다르게 이놈들은 그 원재료부터가 괴랄하기 짝이 없다.
"냄새가 난다."
그 모습에 절로 생각이 입 밖으로 흘러나왔다.
표정이 절로 찡그려졌다.
-연금술사 학회에서 자랑하듯 내놓은 양산형 골렘과 비교할 수도 없을 만큼 강하고 민첩하고 단단하겠지, 그뿐일까, 특이능력의 가능성도 충분하고, 절대 무리해선 안 돼.
긴장하라는 듯 페르세르크의 충고가 들려왔지만 나는 이미 푸른 안광을 빛내는 마정석 골렘 한 개체에 빠르게 파고든 후였다.
파직.
동시에 내가 말아 쥔 주먹으로 검은 스파크가 튀었다.......
육편이 아닌 단단한 바위로 만들어진 놈이라면 어정쩡한 공격은 오히려 위험요소였다.
게다가 마나석도 아니고 마정석이면 어떤 기능이 있을지 모른다.
침입자인 나를 향해 놈이 다시 엄청난 속도로 움직이며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지만 그 공격에 물러날 내가 아니었다.
오히려 나를 쥐포로 만들기 위해 파고드는 주먹을 아슬아슬하게 빗겨내듯 피하며 놈과의 거리를 최대한 좁혔다.
그리고는 빠르게 내달린 속도를 실어 강하게 진각을 밟으며 말아 쥐고 있던 주먹을 그대로 회전시키듯 내질렀다.
[천마공 마뢰폭신격]
콰지직!! 투쾅!!
강렬한 폭음과 검은 스파크가 사방으로 비산하며 나를 공격했던 거대 골렘을 부웅 띄웠다.
보통이라면 전신이 박살 나버렸을 법한 공격이었지만 놈들은 버텨냈다.
이에 망설임 없이 튕겨 나가는 골렘의 머리에 손을 뻗어 마정석을 강제로 낚아채 뽑아내듯 뜯어버렸다.
콰드득!!
무식한 소리와 함께 반쯤 부서진 마정석 하나가 내 손에 걸려 놈의 머리에서 뽑혀 나왔다.
"냄새가 나!"
-그대의 무력은 볼 때마다 신기하기 짝이 없군, 그나저나 도대체 무슨 냄새가 난다는 겐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는 그녀를 향해 내가 당당하게 소리쳤다.
"돈 냄새! 대박의 조짐이다!"
이 넓은 하인스 영지의 기상현상을 모두 조정할 수 있는 고대 유적의 존재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있는 현 상황.
거기에 한 개만 팔아도 벼락부자 확정인 마정석을 코어로 쓰는 골렘들이 다수.
모르긴 몰라도 여기 숨겨진 게 보통 큰 거물이 아닌 듯하다.
버려진 죽어가는 땅이 아니라 완전히 금 노다지가 따로 없다!
놈들이 돈 덩어리로 보이는 건 기분 탓이 아니리라.
* * *
콰드득!
시원시원한 파괴음과 함께 마지막 골렘의 머리에 박혀 있던 단단한 마정석이 내 손에 의해 분리되어 뜯겨 나왔다.
"후우...... 격렬했다."
속이 시원해지는 기분에 땀을 스윽 닦으며 중얼거리자 곁에 있던 페르세르크의 표정이 묘하게 식었다.
-격렬? 그대는 격렬이라는 단어를 새로 배울 필요가 있겠어.
"나름대로 격렬하지 않았나?"
찢어지고 검게 탄 소매 부분을 보여주며 씨익 웃자 그녀가 마주 웃어준다.
-그대가 뿜어낸 검은 뇌광에 타들어 가고 찢어진 소매를 누구 탓으로 돌리는 게야. 그대는 가만 보면 굉장히 얼굴이 두껍기 그지없음이야.
한마디도 안 지는 그녀의 행동에 절로 입맛을 다시고 말았다.
"그나저나 이거 얼마나 나오려나."
뽑아내는 족족 챙긴 마정석은 등에 메고 있는 가방에 고이 담겨있었다.
도저히 상대가 안 된다 여기고 재빠르게 이탈하려는 놈들까지 찾아내 깡그리 털어먹고 나니 양이 제법이다.
게다가 벽에 숨어있던 놈들까지 찾아내 마정석을 꼼꼼히 뜯어낸 덕분에 비어있던 가방은 두툼하기 짝이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