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2
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
- 2권 17화
이건 인간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다.
그동안 사제들과 마법사, 그리고 연금술사들이 찾아와 연구라는 명목으로 영지를 들쑤시고 나서도 모두가 고개를 저으며 이곳은 그저 풀 수 없는 지독한 저주를 받았다고 하며 떠났다.
영지가 다시 예전의 모습을 되찾을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는 영지민은 아마 없을 것이다.
"하하. 그래도 모를 일이지, 영주님을 보고 감복한 하늘이 비라도 뿌려줄지?
"아저씨."
장난스레, 절대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며 자조하는 그를 향해 고든이 문득 경직된 목소리로 불렀다.
"아저씨!!!"
"아 이놈아! 귀청 떨어지겠다!"
"방금...... 빗방울 떨어진 거 아니에요?"
그 말에 프리먼이 눈을 찌푸렸다.
"이놈이 무슨 망령 씨나락 까먹는 소릴......."
뻐근한 몸을 일으킨 그가 나무로 만들어진 망루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을 때였다.
툭.......
동시에 하늘에서 떨어진 차가운 무언가가 그의 이마를 시원하게 때리고 흩어졌다.
"어럽쇼?"
두 사람은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굳어버렸다.
"......."
"......."
한참 동안 계속되는 침묵.
투둑.
다시 한 번 하늘에서 떨어진 차가운 물방울에 눈을 비빈 고든이 눈을 부릅떴다.
동시에 두 사람은 누가 시키지 않았음에도 그대로 무릎 꿇고 머리를 숙이며 신에게 경배하듯 격하게 양손을 번쩍 들며 소리쳤다.
"성자님을 믿지 못한 이 우매한 놈들을 용서하소서!"
"오오...... 영주님, 믿습니다. 아멘......."
그들의 외침과 동시에 하늘에서는 마치 지금을 기다려왔다는 듯 물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영지를 죽어가게 하던 지독한 가뭄의 끝을 알리듯.
툭...... 투두둑...... 쏴아아아아아!!!
지금껏 쌓여온 모든 울분을 푸는 듯한 벼락을 동반한 강렬한 폭우였다.
18. 일단 갈아! 그리고! 심어!
"시국이 흉흉합니다."
"최악의 상황입니다. 다른 이도 아니고 그 정보들이 페일트리스 후작의 손에 들어갔어요. 조처하지 않으면 끈끈하게 묶여있던 귀족파의 결속이 공중분해 되는 건 시간문제입니다."
라운 왕국의 재상이자 왕국의 실권자로 유명한 바리에타 공작가의 응접실엔 네다섯 명의 남자가 고심하는 표정을 한 채 인상을 찡그리고 있었다.
"허어...... 하필 다른 이도 아니고 페일트리스 후작이라니......."
페일트리스 후작은 그들도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이였다.
단신으로 귀족파와 정적의 위치에 있으면서도 한 치의 물러섬 없이 버티고 있는 그가 아니던가.
왕국에 남은 몇 안 되는 충신.
다만, 표면적으론 중립을 유지하고 있는 그였기에 귀족파도 건드리지 않고 있었을 뿐이다.
제대로 싸운다면 둘 중 하나는 분명 사라질 터.
다만 남은 쪽도 엄청난 손해를 감수할 수밖에 없다.
그게 현 실정이었다.
그런데 그에게 귀족파의 목숨을 틀어쥘 수 있는 카드가 쥐어졌다면?
"그 증거들이 쓰이지 못하게 하는 수단은 없겠는지요."
바리에타 공작의 측근인 포룸 백작이 근심 어린 표정으로 묻자 그 옆에 있던 수염이 긴 귀족이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없다고 보는 게 맞겠지요."
"마치 지금을 기다려왔다는 듯이 압박하고 있습니다. 벌써 그가 본보기로 숙청하기 시작한 하위귀족들이 나오고 있어요."
"그 때문에 숨어있던 정적들이 고개를 들이밀기 시작했습니다."
겉으로 드러난 명분이 없기에 그 행보를 말릴 수가 없었다.
그렇기에 미치고 펄쩍 뛸 노릇이었다.
귀족파를 지지하는 하급 귀족들은 귀족파의 중요한 자금줄이고 전력이었다.
어떤 뛰어난 이도 혼자서 모든 것을 할 수 없다.
"누구인지 모르겠지만 우리들의 비밀을 모조리 빼앗아간 건 사실이지요."
끝내 침묵하던 바리에타 공작을 향해 모두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정보 길드이기에 가장 안전했다.
그들의 은폐능력은 실로 엄청난 수준이기에 일정 개인의 저택이나 비밀공간에 보관할 만한 게 아니었다.
가장 뛰어난 정보 길드인 검은 달부터 다른 모든 정보 길드가 하루아침에 소리 없이 털려버렸다.
당장 운신이 힘들 만큼 크게 무너진 정보 길드도 있었고 겨우 버티고 있는 곳도 있었다.
그뿐일까. 더미 정보까지 섞어서 어지간해선 절대 들키지 않을 거라 생각했던 정보들이 명확하게 정리되고 퍼즐처럼 맞춰져 그의 손에 들어갔다.
페일트리스 후작의 수작일까. 아니었다.
바리에타 공작이 아는 페일트리스 후작은 뛰어난 소드마스터지만 정보 길드를 그렇게 소리 없이 하루아침에 털어버리는 것은 그의 수준으론 어림도 없었다.
그렇기에 안심하고 있었건만.
"정보 길드를 공격한 그 발칙한 놈을 찾아야 합니다. 찾아서 응징해야지요."
"허어...... 그게 안 되니 이러고 있는 게 아닙니까, 답답합니다!"
"정보 길드들은 이 일에서 완전히 손을 떼겠다고 연락을 보내왔습니다. 제대로 길드의 구실도 하지 못하게 망가진 자들을 다그친다고 페일트리스 후작이 눈 하나 깜짝하겠습니까. 오히려 덜미를 잡힐 명분만 주게 되겠지요."
서로의 의견을 내놓던 중 한 귀족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런데, 왕비 저하께서는 어찌하신답니까."
"왕비 저하요?"
"예, 솔직히 저는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데이비 왕자가 성흔을 발현했다고요? 그렇다고 해도 제대로 신성력을 다루지도 못하는 애송이가 아닙니까. 성흔의 형태도 여타 손목에 드러나는 성흔과 다르게 불안정하다고 하니 그야말로 불량품입니다."
"랄티스 후작."
"설사 그가 성흔을 발현했으면 어떻습니까. 이미 성국은 저희와 한 배를 탄 자들입니다. 그들이 그를 인정하려 들까요? 아니지요. 세력도 없습니다. 그런 반편이 왕자를 상대로 왕비 저하께선 너무 신경을 쓰셨습니다."
"우리가 신경 써야 할 이들은 폐하와 페일트리스 후작이었어요."
랄티스 후작의 말에 다른 이들이 묵묵히 공감했다.
겉으로 드러내지만 않았을 뿐 데이비라는 인물에게 과하게 신경 쓰는 리네스 왕비의 행동에 다들 못마땅해하던 참이었다.
수년간 다져진 그들의 결속이 한 명의 왕자 때문에 흔들리기 시작한 것이다.
그들의 시선으로 본 데이비 왕자는 국왕마저 포기한, 세력 하나 없는 유약한 왕자였다.
"말을 가려서 하시지요. 랄티스 후작."
"말이 그렇다는 겁니다. 말이. 허어......."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쿵쿵 치는 사내를 향해 바리에타 공작이 짧게 숨을 들이켰다.
"제아무리 페일트리스 후작이라도 하루아침에 우리의 결속을 깨진 못할 겁니다. 다소 출혈을 감수하더라도 맞서 싸워야겠지요."
"옳습니다. 다만, 극비 정보들은 다시 회수할 방안을 모색해야 할 겁니다."
페일트리스 후작은 속된말로 지금 귀족파의 킬각을 재고 있다.
섣부른 움직임은 너무도 위험했다.
"최악의 경우."
결국 내릴 수 있는 수단은 한 가지.
귀족파 전원을 안전하게 만들어주었던 비밀들이 이제는 숨통을 쥐고 있다.
"내전도 불사해야지요. 랄티스 후작."
"예, 공작 각하."
"준비는 어찌 되어갑니까."
"말씀만 하시면 곧바로 준비할 수 있습니다."
"은밀하게 준비하세요. 완벽해지기 전까진 절대로 빌미를 주어선 안 될 겁니다."
그의 말에 랄티스 후작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들은 그 왕자를 너무 쉽게 보고 있다.'
조용히 의기투합하는 귀족들을 보며 바리에타 공작이 눈살을 찌푸렸다.
데이비 왕자는 깨어난 직후 그도 놀랄 만큼 많이 변했다.
무엇이 변했는가 콕 찍긴 뭣하지만 수십 년간 재상 노릇 해온 감이 부르짖는다. 뭔가 있다고.
게다가 그를 암살하기 위해 보낸 검은 달의 암살자들이 소리 없이 사라지지 않았는가. 도망보단 소리 없이 제거당했다고 보는 게 더 옳았다.
예전이라면 몰랐겠다만, 만약 제 생각이 맞는다면 데이비 왕자는 세력이나 기반이 생기는 순간 거침없이 이빨을 드러낼 것이다.
'다만, 하인스 영지라면 그도 별수는 없을 테지.'
거긴 대륙의 수많은 마법사, 연금술사, 신관들조차 원인파악을 못 한 전무후무한 죽음의 땅이 되어가고 있었다.
제아무리 알 수 없는 무언가를 가진 그라도 어떻게 하진 못할 테지.
'비도 오지 않는 그런 오지에서 뭘 어찌하겠다고,
직접 사람을 보낼 여건이 되지 않았기에 데이비가 하인스 영지에서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를 모르는 그였다.
* * *
비가 오기 시작했다.
그것이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아는 영지민들은 하나같이 하던 일도 멈추고 거리로 나와 현실을 믿지 못하는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자신들이 맞고 있는 물방울의 정체가 비라는 것을 깨달은 그들은 곧 약속이라도 한 듯 환호하며 기뻐했다.
젊은이들 대부분이 빠져나가 남은 거라곤 아이와 극소수의 젊은 계층. 그리고 노인들이 대부분이었지만 몇 년 만에 내린 비는 모두가 똑같이 아이처럼 기뻐하게 만들었다.
그들에게 비는 그저 물의 공급수단이 아닌 죽어가는 영지가 다시 살아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었을 것이다.
실제로 오랜 가뭄으로 인해 땅이 죽어가고 있던 것 또한 사실이었으니까.
며칠간 계속되던 비는 마를 대로 마른 땅을 모조리 적시고 난 후에야 사라졌다.
축제 분위기에 빠져 있는 영지민들과는 다르게 내게는 다른 지역을 해결할 과제가 남아 있었기에 굉장히 바쁘게 일주일이 흘러가 버린 꼴이었다.
쏴아아아아아!!
마지막 지역인 북서쪽의 유적까지 모조리 코드를 바꾸고 난 후에야 비가 쏟아지는 모습에 만족감이 찾아왔다.
-결국, 다 해결했음이야.
잔뜩 졸린 얼굴로 늘어진 그녀의 말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며 하늘에서 떨어지는 빗방울을 말없이 맞았다.
청승맞게 무슨 비를 그렇게 맞고 있냐고 물어도 할 말이 없는 모습이긴 하지만 잔뜩 건조해져 있는 바람을 맞고 있다 보니 이런 시원한 비가 그리워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며칠이라는 시간이 지나면서 상업도시 헬리움으로 떠났던 베르닐 시종장과 자경단장 몬미더가 돌아왔다.
베르닐이야 늘 표정이 한결같으니 지금 이 영지의 상황에 큰 감흥이 없는 표정이었지만 몬미더는 달랐다.
그는 죽어가던 영지에 비가 내렸다는 사실.
그리고 자신들이 떠난 직후 내가 소수의 자경단원을 이끌고 일대 고블린들을 죄다 토벌했다는 소식을 듣고 경악스런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는 비가 내렸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돌아온 거겠지.
마냥 영지의 상태가 안 좋았기에 토벌도 놀라운 결과지만 단 한 명의 사상자도 없이 납치된 영지민까지 부상 없이 구출했다는 게 더 놀라운 듯 보였다.
물론, 아직도 나를 쉬이 신뢰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지만, 오랜 시간 영지를 힘겹게 유지해온 인물이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이리라.
사실 마이너스에서 시작한 호감도를 고작 일주일 가까운 시간에 맥스로 찍는 게 쉬울 리가 없다.
그래도, 내가 무슨 짓을 했는지를 들으면 더 놀라겠네.
마지막 지역의 기후까지 정상화하는 데 성공한 이후 나는 근 일주일 가까이 침묵했다.
늘어져서 쉬고 있었냐 하면 실상 그건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