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0
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
- 2권 25화
제국의 황제가 보자고 해도 쉽게 얼굴을 비치지 않는 거물이 바로 적탑의 마탑주이자 7 서클 대마법사인 헬리슨이었다.
대륙 최고의 마법사 중 하나인 탓에 사이가 별로 좋지 않은 다른 마탑에서도 그만큼은 인정하고 경의를 내비치는 그가 아니던가.
그런 그가 관심을 가지다니.
제아무리 일국의 왕자라도 이건 대단한 일이다.
"어쩌면 끝까지 우호 관계를 유지하는 게 앞으로 좋을 수도 있는 일이지."
"가보겠습니다!"
뭔가 흥분한 듯 상기된 얼굴로 율리스가 급히 일어났다. 그리고는 그에게 고개만 숙여 보인 뒤 후다닥 뛰어나가 버렸다.
그 모습에 헬리슨이 껄껄 웃어 보였다.
저 정도 급이 된다면 사람이 오만해지기 마련이건만, 그는 헬리슨이 가르친 제자 중에서도 유일하게 신중하고 마음씨가 온화한 사내였다.
그러더니 곧 미소를 지운 채 눈을 가늘게 떴다.
'현자님. 마나 한 줌 느껴지지 않는 20세 이하의 소년이 일 검에 고위 뱀파이어를 베어버리는 게 가능한가요? 계약조차 맺지 않은 칼디라스를 사용해서요.'
문득 얼마 전 자신을 찾아왔던 한 소녀의 질문이 떠올랐다.
자신을 자문 스승으로 두고 있는 맹랑한 아가씨이기도 했다.
그때 당시엔 그저 세상일이란 모르는 것이라 일축했지만 글쎄.
솔직히 그로서도 가능할 것 같진 않았다.
고위 뱀파이어.
보통 존재가 아닌 건 그가 가장 잘 알고 있다. 게다가 계약자도 아닌 이가 본래 계약자도 깨우지 못한 칼디라스의 본체를 아무렇지도 않게 깨웠다?
"사실 검신의 모든 것을 이어받은 제자나 본인이 아니고서야 불가능한 일이지."
뱀파이어에 관해 없는 말을 지어낼 만큼 애교가 많은 소녀는 아니었기에 진실로 여기고 있는 그이기도 했다.
실제로 검을 수련하는 이들에게 물어본다면 대부분이 불가능하다며 고개를 저을 만큼 대단한 일이었다.
"세상에 기인들이 하나둘 두각을 드러내고 있다는 게 이유가 없진 않을 터인데......."
착각이다.
* * *
"영주민이 살지 않는 주거지역 일부에 대한 토지 매각이 전부 처리 되었습니다."
영지는 넓은데 영지민이 없으니 주인 없이 비어버린 땅이 대부분이다.
소유권을 포기한 땅은 대부분 영주의 소속으로 돌아오는 탓에 남는 게 땅이 되어버렸다.
"얼마나 들어왔어?"
"정확히 계약을 맺은 후에 답이 나오겠지만 좋은 땅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이 붙은 탓에 그 금액이 수도의 번화가 수준으로 비싸게 낙찰되었습니다."
베르닐 시종장의 보고에 나는 만족스레 고개를 까딱였다.
"캬! 좋다 좋아."
킬킬거리며 웃자 베르닐 시종장의 표정이 짜게 식었다.
"저하. 아무리 왕궁 밖이라곤 하나......."
"알았어. 거 사람이 좀 웃을 수도 있지."
"이 늙은이의 간언을 너무 쉽게 여기십니다."
한숨을 쉬는 베르닐 시종장이었다.
왕궁 총괄 시종장인 베스퍼스 경과 같은 혈육답게 아주 깐깐하기 그지없는 성격을 가진 베르닐 시종장이었다.
물론, 그렇기에 내가 그를 신뢰하는 것이겠지만.
리네스 왕비가 붙여준 사용인들은 거의 남겨두고 온 탓에 이곳에 있는 가신들은 대부분 내게 호의적인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에이미의 교육은 어떻게 되고 있어?"
"정말 영특한 아이입니다. 아무리 귀족가라곤 해도 남작가의 여식이 그만한 재치와 깨어있는 생각을 가지고 있긴 드물지요."
여성의 인권이 마냥 조선 시대만큼 나쁜 세상은 아니었다.
하지만 어느 정도의 가부장제가 남아 있는 이 세계이기에 여성의 교육 빈도가 남성에 비해 적을 수밖에 없다.
여성들이 선호하는 공부는 사상, 혹은 사회학이나 정치학 같은 계통이 아닌 내조와 관련된 조신스러운 학문이 대부분이니까.
그런 마당에 에이미는 제대로 교육을 받은 귀족가의 영식들도 보이지 못하는 재치와 판단력을 지니고 있었다.
"솔직히 손녀를 가르치는 것 같아 제법 재미가 쏠쏠합니다."
나보고는 웃지 말라던 베르닐 시종장이 처음으로 피식 웃어 보였다.
내가 보기엔 가르친다기보단 이제는 손녀딸의 재롱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드는데.
"그 본인은 아주 과로에 치여 죽으려고 하던데."
"그거야 저하께서 너무 굴리셨으니 그러지요."
"농담도 늘었어?"
"크흠!"
내 말에 불편하게 헛기침을 한 그가 한걸음 물러났다.
"장난이야."
"저하의 앞에서는 사실 제가 무게를 잡을 자격이 없는 느낌이 듭니다."
"어째서?"
"감이지요."
무엇을 느낀 건지는 굳이 묻지 않았다.
그가 나를 보는 눈빛은 많은 것을 가르쳐줘야 할 아이를 보는 눈이 아니었으니까.
부작용이라면 부작용이다.
"달의 풀 잎사귀는 말씀하신 매뉴얼대로 경매를 진행할까요."
"직접 진행해줘, 베르닐이라면 문제없이 이득을 최대한 끌어낼 수 있을 거야. 그나저나. 왕실에서 편지를 보냈던데."
내 말에 베르닐 시종장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무슨 내용인지 벌써 눈치채신 듯하군요."
"모를 리가. 안 그래도 페일트리스 후작과 신나게 치고받고 싸우고 있으니 잠깐이라도 숨 돌릴 틈이 필요했을 거야."
무엇을 요구할지. 무슨 짓을 할지 눈에 훤히 보이긴 하는데 마땅히 거절할 명분은 없었다.
"별수 있나, 한번 들러보자고. 내가 돌아올 때까지 대부분의 경매와 매각작업의 통과를 부탁해. 에이미에게 넘기기엔 아직 일을 완전히 맡기기엔 불확실하니까."
"맡겨만 주시지요."
다른 이라면 맡기지 않을 일이지만 그에게는 맡기는데 큰 거리낌이 없었다.
말없이 편지 칼을 사용해 봉투를 잘라내자 고풍스러운 양피지 너머로 정갈하게 쓰인 글귀가 보이기 시작했다.
내용은 간단했다.
라운 왕국에서, 나아가 동대륙에서 일찍이 보지 못한 새로운 업적을 이뤄낸 것을 칭찬하는 내용. 그리고, 그 노고와 위업을 치하하고자 하니 왕궁으로 잠시 돌아오라는 소리였다.
그것도 칙서를 받는 즉시.
겉으로 드러난 목적은 그것이겠지만.
속 내용에는 여러 가지 생각이 있을 터다.
내용 자체도 예상 그대로의 내용에 실상 별로 새로울 것도 없었다.
"쫓아낼 땐 언제고 오라 가라야. 시한부 놈들이."
짜증스레 편지지를 벽난로 속으로 휙 던져 버리자 베르닐 시종장이 놀란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지만 곧 침착한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어 보였다.
"저하."
"알아."
담담한 내 말에 서린 노기를 느꼈기 때문일까.
그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웃기지? 왕도 아닌 게, 왕인 양 직인까지 당당하게 찍어서 보내고 말이야."
"그렇군요."
"가보자고."
나무책상을 검지 손끝으로 톡톡 치며 빙그레 웃었다.
'그러고 보니, 수르트가 말했던 던전이 이곳에서 왕도로 향하는 길 쪽에 있었던가.
생각해 보니 수르트의 고향이 바로 이 근처의 땅이라는 사실이 기억났다.
당시엔 라운 왕국이 아닌 다른 이름으로 불린 국가였겠지만 땅은 그대로였다.
-수르트? 설마 그를 말하는 게야?
내 생각을 읽은 페르세르크가 놀란 듯 나를 올려다보았다.
천일 야장 수르트는 검신 하레스의 친우이자 조력자였다.
그런 만큼 하레스의 수양딸이었던 페르세르크와도 어느 정도 접점이 있는 사내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그녀를 죽인 검을 만든 장인이 아니던가.
'그 영감의 유산이 이 근처에 아직 잠들어있거든, 부탁도 들어줄 겸, 이제 슬슬 내 무기도 하나 구해야지.'
-허어...... 신검을 만든 야장의 유작이라, 기대되는군.
그리 말하면서도 나쁜 기억이 떠올랐는지 그녀의 표정이 묘하게 씁쓸해 보였다.
"잠깐 다녀올 곳이 있어. 마구간 지기에게 오랫동안 잘 달릴 수 있는 녀석으로 준비해두라 일러."
내 말에 베르닐 시종장은 또 내가 무슨 짓을 하려는 건지 걱정이 어린 듯 보였다.
확실히 이곳에 오고부터 내가 하는 짓 하나하나가 상식과는 잘 맞지 않고 있으니까.
이번에 계획한 일도 사실 알려졌다 하면 난리가 날만 한 이야기라는 건 분명하다.
* * *
피 튀기는.......
음, 조금 순화해서 격렬한 경매 경쟁은 예상대로 흘러갔다.
"상품으로 내놓은 달의 풀 잎사귀 1만 장이 모두 매각되었습니다. 가장 높게 쳐준 곳은 알라우이 상단으로 한 케이스당 150골드에 사들이겠다는 의사를 보였습니다.
150골드.
서대륙에서 수입해오는 저급의 달의 풀 잎사귀의 가격은 4장당 100골드.
이쪽 하인스 영지에서 내놓은 물건은 4장당 150골드.
"그래서 팔린 양은?"
"알라우이 상단에서 150골드에 우선권으로 5천 장을 사들였습니다."
꽤 크다.
아무리 대륙을 돌아다니는 대상단이라 해도 이정도면 제법 뼈아픈 지출일 텐데.
아니면 말고.
"나머지는?"
"나머지는 말씀하신 대로 130골드에 500장에서 1,000장씩. 각 단체에 모든 물량을 매각하였습니다."
5천 장은 150골드에.
나머지 5천 장은 130골드에.
언뜻 보면 150골드에 산 알라우이 상단의 큰 손해 같지만 물량의 확보는 그만큼 중요하기에 모든 단체가 기를 쓰고 경매에 참여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판매는 성공적.
그냥 성공이 아니라 대성공이다.
얼마냐고?
총 35만 골드.
백금화 7천 개.
서대륙에서 수입해오는 저급의 잎사귀 시가로 계산했을 때보다 10만 골드가 더 들어온 꼴이다.
왕궁에서 연간 책정되는 융통 자금이 10만 골드 정도.
이 외의 금액까지 합치면 15만에서 20만 골드 정도가 모였다가 사라진다.
그렇다면 4개월 만에 35만 골드라면?
달의 풀 잎사귀의 재배 기간은 대략 3개월에서 4개월 정도로 지기가 무한정으로 순환하는 이 땅에서는 쉬지 않고 재배가 가능하다.
길게 처서 4개월이라 했을 때 하인스 영지가 얻은 수입은 연 105만 골드.
"흐...... 끄윽......."
"뭘 놀라고 그래."
총 합산된 이익을 확인한 에이미가 숨넘어갈 것 같은 표정을 지어 보였다.
갈수록 줄어들어 100만 골드 이하로 떨어진다 해도 사업이 대성공이라는 건 더 볼 것도 없는 사실이었다.
솔직한 말로 이 왕국의 기준으로 어지간한 영지에서도 절대 벌어들일 수 없는 금액이기도 했다.
"당장 자금융통이 어려운 단체에서는 어음을 발행해 넘겼습니다만."
"내가 체크해둔 곳만 허용해. 사람이 신용이 제일이지 그걸 악용하려 들면 곤란하거든."
물건이 없어서 두 배가 되는 가격을 주더라도 사들이고자 하는 이들이 대부분이다.
그만큼 중요한 물건인데 매물의 수가 적다는 소리였다.
앞으로 줄어들 수야 있겠지만 그 가격이 서대륙에서 수입해오는 것보다 비싸면 비쌌지 싸질 순 없을 것이다.
아무리 그래도 질의 차이가 있는데 헐값에 넘길까.
적어도 내가 준비 안 된 자선사업가가 아니라는 건 확실했다.
'후원제단도 결국은 돈이 있어야 하는 거지.'
-후원제단을 만들 의향은 있는 게야?
'약속이거든. 뭐, 하도 오래전 약속이라 반쯤은 잊고 있긴 했다만. 언젠가 여유가 생기면 나쁘지 않지.'
성녀 다프네에게 신성 마법과 해주 마법을 배운 조건이었다.
물론 언제부터 하라는 약속은 아니었기에 그저 염두만 해두고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