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
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
- 2권 26화
"하지만 저하, 이건 정말 우연에 가까운 성공이지 않았을까요? 그렇게 번거로운 자연 변화에 사계절이 뚜렷한 이 대륙에서 1년 내내 따뜻할 수는......."
"그런 건 걱정 말고 계속 진행해. 그리고 규모는 당분간 늘리지 않는다. 다른 방향의 땅을 개간해서 농지를 분양해줄게."
"네? 아...... 넵!"
내 말에 더는 토를 달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는 에이미와 다른 이들이었다.
욕심이 과하면 안 좋은 법이다.
공급과 수요의 밸런스는 중요한 법이니까.
"몬미더는 베르닐 시종장과 의논해서 영지 내의 시설을 손보도록 해. 일단은 못쓰게 된 곳만 살짝 손봐주는 쪽으로. 대대적인 개편은 내가 돌아온 후에 한다."
"받잡겠습니다."
"왕실의 소환장을 무시할 순 없으니 다녀오도록 하자고."
미련 없이 책상에서 일어난 내가 가볍게 싸둔 여장을 둘러맸다.
"저하. 수행 인원은 어떻게 할까요."
"혼자 간다."
"예?"
내 황당한 말에 베르닐 시종장이 더 무어라 말하려다 침묵했다.
확실히 정상적인 상황은 아니지만 나로서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 * *
천일야장이라 불리던 수르트가 남겨놓은 기억을 되짚어보면 하인스 영지와 수도의 사이 어딘가에 그의 던전이 있는 건 확실했다.
하지만 명확하게 짚을 순 없다.
적어도 그는 수 천 년 전의 사람이었으니까.
10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했던가.
수 천 년이 지난 지금까지 사실 그의 유산이 그 자리에 남아 있을지는 솔직히 알 길은 없다.
말마따나 누군가가 먼저 유적을 털어먹고 수르트의 유산을 챙겨갔어도 이상하지 않을 시간이었다.
제아무리 뛰어난 봉인도 결국 시간 앞에서는 약해지는 법이다.
그 좋은 예시가 바로 눈앞에 있지 않던가.
-그대, 본녀를 보는 눈매가 이상함이야.
"별거 아니야."
-흐응.......
뭔가 묘하게 불쾌한 듯 그녀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노려보았다.
-본녀를 두고 이상한 생각을 한 건 아닐 테지?
그 봉인이 풀린 산증인으로 보고 있지.
"그래그래."
-.......
끝끝내 불신 어린 표정을 지어 보이는 그녀를 둔 채 내가 피식 웃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도착했다."
-여긴 발하라샤드가 아닌가?
"그렇지."
왕궁으로 가기 전 내가 도착한 곳은 나름대로 대륙에서도 유명한 곳이었다.
라운 왕국에서 몇 안 되는 관광지 중 하나이며 대륙연합에서 발 벗고 나서서 보존과 연구에 힘을 쓰고 있는 영지이기도 했다.
그리고.......
내 적이나 다름없는 리네스 왕비의 본가.
바리에타 공작가의 관할 영지 중 한 곳이기도 했다.
-별로 그대에게 좋은 장소는 아니겠군.
"그래도 귀족파가 어지간히 흔들렸나 보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네."
왕자나 영주라는 신분보다는 자유 용병 같은 차림새와 신분으로 온 탓에 나를 알아보는 이는 없었다.
내 얼굴을 아는 귀족들이 나를 본다면야 이야기가 달라지겠다만,
결과적으로 영지 전체가 입구에서 들어갈 때부터 삼엄하기 그지없는 분위기를 띠고 있었다.
"신분증."
"여기 있습니다."
"으음...... 데이비라."
F급 자유 용병 데이비.
이곳에 오기 위해 나름대로 야심 차게 준비한 위장 신분이기도 했다.
이름이 같다고?
세상에 널린 게 동명이인인데 무슨 상관일까.
말없이 내 얼굴을 노려보듯 바라보던 근위병의 시선이 문득 내 등급으로 향했다.
F급. 완전히 신출내기 용병을 의미하는 등급이었다.
"하."
동시에 그의 입가에 미묘한 비웃음이 어렸다.
"안 돼, 돌아가."
"뭐라고요?"
"너도 이번에 발견된 새로운 미궁을 탐사하러 온 모양인데, 엄한 데서 큰일 치를 생각하지 말고 썩 꺼져!"
내 몸을 밀치며 말하는 그의 행동은 거칠기 짝이 없었다.
놀라운 것은 그런 근위병의 행동에도 아무도 이상하게 여기는 이가 없다는 점이었다.
마치 익숙하다는 듯 말이다.
"하, 이건 무슨 상황이냐?"
어처구니가 없어서 헛웃음을 흘리고 있자 그는 재수 없다는 듯 내 발치를 흘끗 보고는 소리쳤다.
"다음!"
더 이상 나를 신경 쓸 생각이 전혀 없는 듯한 행동거지였다.
"......."
제아무리 귀족파. 그것도 바리에타 공작가의 앞마당 같은 곳이라지만.
귀족들의 유세가 심해질 대로 심해져 한번 갈아엎어야 한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나라가 휘청거리고 있지만, 실상을 확인해 본 결과 상황은 더 심각해 보였다.
"이보게."
멍하니 성문을 바라보고 있는 내게 한 노인이 다가왔다.
"멀리서 왔는가?"
"뭐, 그렇게 되었습니다만."
"쯧쯧. 아직 잘 모르는구먼."
"영지에 무슨 일이 있습니까?"
"아니지, 별일은 없네."
내 물음에 노인이 한숨을 포옥 내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저길 보게."
그의 말에 시선을 돌리자.......
-썩었군.
마치 통행세를 내듯 위병들을 향해 문을 통과하는 사람들이 돈을 찔러넣어 주는 것이다.
그 금액의 크기는 크지 않지만 이건 엄연히 국법에 어긋나는 행동거지였다.
통행세.
그 법이 개정된 지는 벌써 오래되지 않았던가.
말없이 내가 위병들을 바라보고 있자 노인이 내 어깨를 두드려 주며 주머니에서 작은 무언가를 꺼내 손에 쥐여주었다.
"허...... 그놈 참, 눈에 무서울 정도로 감정이 없구먼."
노인이 혀를 쯧쯧 차며 말했다.
"별수 없는 게지. 이걸 주고 들어가게나."
"어르신?"
"이정도면 조금 부족하더라도 들여보내 줄 테지. 괜히 드잡이질하다가 몰매 맞지 말고 받게."
일단은 위장 신분이니 나도 평민이었다. 왕자의 신분으로 들어가면 당연히 바리에타 공작가에 시선이 갈 수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조용히 처리하고 넘어가려 했더니 이건 무슨 개수작이란 말인가.
"어째서 돈을......."
"허허, 고향에 있는 내 젊은 손자놈이 생각나서 그랴. 괜히 큰일 치르지 말고 어여 받어."
노인의 마음에 거짓은 없었다.
거의 반사적으로 사용한 정보확인에서도 그의 진정성이 느껴졌으니 말이다.
고마운 만큼 피가 차갑게 식는 기분이 들었다.
'와 이거.......'
-그대가 하고 싶은 대로 해.
페르세르크의 악마와 같은 속삭임이 들려왔다.
뭐 마족이니 틀린 말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그녀의 속삭임은 굉장히 환영할 만한 부류의 것이었다.
-그렇지, 내 계약자는 길이 막히면 돌아가는 복잡한 짓을 할 위인이 아닌 게지.
그녀의 중얼거림을 무시한 채 나는 내 손에 쥐어진 돈주머니를 다시 노인의 손에 쥐여주었다.
"말씀은 고맙지만 이 돈은 아껴두었다가 그 손자분에게 줄 선물이라도 사세요."
내 말에 노인의 얼굴에 의문이 어렸다.
"자네......?"
"저는 필요 없을 거 같습니다."
그리 말하며 내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몸에 묻은 흙을 툴툴 털어낸 뒤 성큼성큼 걸어갔다.
"음? 뭐야, 아직도 안 꺼졌나?"
내가 돌아가지 않고 다시금 그의 앞에 서자 위병이 귀찮다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내놔."
더 볼 것도 없이 통행세를 내놓으라는 소리였다.
굉장히 익숙한 행동거지였다.
"타국민, 혹은 교역을 위해 이동하는 대규모 행렬이 아닌 이상 통행세는 받지 않는다."
"뭐?"
내 말에 그의 눈이 살짝 찌푸려졌다. 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고 말을 이어나갔다.
"일개 개인에게 받는 통행세는 위법으로 국법으로 지엄하게 통제하고 있다."
"하...... 이 새끼가 무슨 소릴 하는 건지."
내 말에 그가 낄낄 웃기 시작했다.
그러자 주변에 있던 위병들도 하나같이 낄낄거리며 나를 보고 웃기 시작했다.
그들의 딴에는 그럴 만도 했다.
갑자기 찾아온 신출내기 용병 같은 놈이 갑자기 되지도 않은 무게를 잡으면서 헛소리를 늘어놓고 있으니 말이다.
"그래서."
이윽고 내 앞에 서 있던 위병이 위협하듯 내게 물어왔다.
"어쩌라는 거야. 당장 여기서 송장 치우......."
"국법대로 처리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경고하는데. 지금까지 받은 돈 전부를 반환하고 죄를 인정해라. 정상참작 정도는 해줄 테니."
고압적인 말투.
조금 연극체 같은 말투였지만 상관없었다. 이딴 게 무슨 상관일까.
그저 [미란다의 원칙] 같은 과정일 뿐인데.
그 유명한 당신은 변호사를 선임할 수 있고, 묵비권을 행사할 수 있으며 라는 그 형사들의 대사.
"푸하하하하!!"
"이놈 보게 껄껄!"
내 말에 결국 위병들이 박장대소하며 낄낄거리기 시작했다.
동시에 분위기가 심상찮지 않다는 것을 깨달은 이들의 얼굴에 곤혹스러움이 어리기 시작했다.
그중에서도 나를 도우려던 노인의 얼굴은 파랗게 질려있었다.
당장 내가 이들의 검에 맞아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스르릉!!
그리고, 그런 그들의 예상대로 위병 하나가 내게 검을 빼 들고 목에 검을 겨누었다.
"어이, 신출내기 용병 애송이. 여기가 어디라고 깝쳐."
"너 하나 죽는다고 뭐가 달라질 것 같아?"
"법을 지킬 생각은 없으시다?"
"하. 여기선 우리가 법이다! 그리고 이 영지에선 바리에타 공작님이 법이다!"
내 물음에 그들이 뻔뻔하게 소리쳤다.
그 정도면 충분했다.
"그래, 그럴 거 같긴 하더라."
"뭐?"
"이 새끼가!"
기분이 팍 상하기라도 했는지 위병들의 목소리가 커지자 순식간에 주변이 소란스러워 지기 시작했다.
급히 나서서 상황을 무마시켜보려 하는 노인이 보여 먼저 손을 내뻗었다.
나서게 해서 괜히 일을 복잡하게 할 생각은 없으니까.
팍!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움직인 내 손이 검을 들고 있던 위병의 손등을 강하게 내리쳤다.
동시에 그의 손이 강제로 풀리며 검을 놓쳐버렸고 나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그대로 검을 낚아챘다.
무게중심 최악, 검의 재질도 최악.
어지간한 기술이나 근력이 없으면 불가능한 행동이지만 내 근력은 맨손으로 사람의 머리 정도는 뽑아버릴 수 있다는 게 문제였다.
소드마스터가 괜히 탈 인간이라 불리는 줄 아는가.
"엇?"
서걱!!!
그리고 손에 그립감 최악의 롱소드가 쥐어지기가 무섭게 백색의 섬광이 번뜩이더니 둥근 무언가가 허공을 갈랐다.
오러, 혹은 오러 블레이드를 뽑아낼 것도 없이 묵직한 검날 그대로 휘두른 탓에 그 속도가 그리 빠르진 않았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이미 보통 이들의 눈에는 보이지도 않을 만큼 빠른 검격이었으리라.
순간적인 상황에 모두가 침묵했고 나는 바닥에 떨어지는 동그란 것을 응시하다 다른 위병들을 향해 시선을 돌리고는 선언하듯 말했다.
"왕국민의 혈세를 강제, 공갈 징수한 죄는 국가 공금 횡령과 직통 되어 즉결 참형, 그 책임은 이곳에서 상황을 묵인하던 자와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전원에게 해당한다."
정확히 저들의 재판권은 이 영지의 영주인 바리에타 공작에게 있겠지만.
왕족 모독죄부터 이미 불합리하게 성립한 후였고 그게 아니더라도 그걸 신경 쓸 내가 아니었다.
오히려 이곳에는 현재 없을 바리에타 공작을 대신해 영지를 관리하고 있는 공작가 산하 귀족의 면상이나 보고 싶을 뿐.
"안 그래도 퍽퍽하게 살기 어려운 평민을 상대로 녹을 먹는 놈들이 이딴 짓을 해?"
내 말에 발하라샤드의 성문은 마치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싸하게 변해버렸다.
"관리인 불러와. 개만도 못한 x끼들아."
내 말이 다시금 차갑게 내리꽂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