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
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
- 3권 1화
22. 검을 회수하다.(2)
모든 일은 인과 관계가 있어야 하고 시시비비가 확실해진 상황에서 이루어진다.
다만, 현장에서 그대로 적발된 범죄라면?
그것은 더 볼 것도 없는 즉결 처형감.
물론, 그 처분의 권한을 가진 이에게 해당하는 일이다.
이곳의 위병들은 대부분이 바리에타 공작가의 사병이라 봐도 무방하기에 그들의 처벌권은 내가 아니라 바리에타 공작에게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내가 이들을 베면 안 되는 위치에 있는 건 아니었다.
"헉......."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주변이 고요한 침묵에 잠겼다.
툭.......
검고 둥근 무언가가 허공을 갈랐다가 떨어지자 이윽고 모두의 시선이 천천히 그 둥근 것을 향해 날아들었다.
아니 정확히는 둥근 것이 아니었다.
"어...... 어어? 으아아아아악!!!!!"
이윽고 그것의 정체를 깨달은 위병이 비명을 지르며 바닥을 뒹굴기 시작했다.
동시에 뜨겁고 시뻘건 혈액이 사방으로 피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이...... 이 미친놈이!"
"놈을 포위해라!!"
"예상은 했다만."
작게 중얼거린 내가 피가 묻은 검을 가볍게 털어냈다.
이놈의 세상은 언뜻 보면 정말 사람 목숨이 파리목숨만도 못한 세계라는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지구에서는, 아니 한국에서는 겉으로 드러난 세상은 살인이 정말 극악무도한 죄로 치부되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곳에선 그저 귀족의 심기를 거슬렸다는 이유만으로 누군가가 죽기도 했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대륙 전체에 전쟁의 불씨가 꺼지지 않고 일어나기도 했다.
최근 50년 내로 들어서서야 대륙연합이라는 단체가 생겨나면서 전쟁이 어느 정도 근절이 되긴 했지만 말이다.
그게 얼마나 갈지는 사실 뻔한 내용이기도 했다.
"감히 여기가 어디라고!!"
급기야 그들이 내게 무기를 겨누고 덤벼들기 시작하자 사태는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기 시작했다.
저들은 알고 있을까.
자신들이 무기를 겨누고 있는 게 이 나라의 왕족이라는 사실, 그리고 자신들이 하고 있는 행동이 삼족을 멸할 중죄인 반역에 해당한다는 것을.
물론 내가 제대로 된 신분증을 내어주지 않았기에 일어난 일이긴 하지만 제 치부를 숨기기 위해 반항하는 이를 죽이려 든 시점부터 이미 죄는 입증이 된 꼴이다.
'어차피 바리에타 공작은 이런 작은 영지는 신경도 안 쓸 거다.'
발하라샤드 영지는 정확히 말해서 바리에타 공작가의 영지 중 하나일 뿐.
페일트리스 후작과 정치싸움이 시작된 시점에서 이런 작은 해프닝까지 신경 쓸 인간군상은 아니었다.
순식간에 날아드는 검날을 슬쩍 피해내자 집요하게 놈들은 집요하게 나를 쫓아 무기를 내질렀다.
갑작스런 칼부림과 소란에 기겁한 이들이 헐레벌떡 도망치기 시작하자 남은 것은 나를 향해 적의를 보이고 있는 위병들과 내가 전부였다.
"왕국의 귀족이 익혀야 할 가장 첫 번째 덕목은 왕국민의 보호다."
날카롭게 파고드는 검의 끝을 가볍게 쳐내며 묵묵히 말했다.
"뭔 개소리를!"
"죽어라!!"
급기야 내 말을 끊고 달려든 위병 하나가 내게 할버드를 휘둘러 들어왔다.
하지만 그의 할버드는 내게 다가오기도 전에 허공으로 날아오를 수밖에 없었다.
서걱!
굳게 그립을 쥐고 있던 위병의 손목이 언제 있었냐는 듯 깔끔하게 잘려나가 버렸기 때문이었다.
제 손이 잘려나간 줄도 모른 채 무기를 휘두르던 위병은 뭔가 허전하다는 느낌이 들었는지 움찔거렸고, 곧 제 손목이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을 깨닫고 파랗게 질려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으...... 으아아아아악!!!"
처절하게 바닥을 뒹구는 위병들.
제 신체 일부가 사라져 패닉이 온 위병을 짓밟은 채 검을 목에 겨누고는 가볍게 살기를 피워 올렸다.
"다음엔 목이 날아갈 거다. 재차 말하게 하지 마라, 관리인 불러와."
내 말에 모두가 침묵한 채 움찔 떨었다.
당장 제압하기 위해 덤벼들어야 할 것 같은데 그랬다간 바닥에 쓰러져 밟혀있는 위병처럼 신체 일부가 잘려나가 버릴 것만 같은 공포를 주었을 것이다.
일부는 내 모습에 뭔가 이상함을 느낀 듯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도저히 내가 조금 전 보인 일격이 F급 신출내기 용병의 검술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훈련을 받았고 방어구까지 가진 병사가 공격하는 것을 무시한 채 육안으로 따라오지 못할 속도로 발검, 손목만을 깔끔하게 잘라낸다?
그것도 신출내기의 상징인 F급 용병이?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그들의 얼굴이 빠르게 굳기 시작했다.
"이봐."
"히익!!"
이윽고 남은 위병 하나에게 검을 겨누며 묻자 그가 기겁하며 한발 물러났다.
"두 번 말하게 할래?"
"그...... 그것이......."
"이리 소란을 피우는 게 누구냐!"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는 말이 있다.
지금 상황이 딱 그 꼴이다.
잔뜩 살이 찐 몸집에 기괴하게 꼬아놓은 수염을 자랑스레 쓸어내던 사내의 모습에 위병들이 일제히 그에게 고개를 돌리고는 꾸뻑 고개를 숙여 보였다.
바닥에 쓰러져 비명을 지르는 이들을 제외하고 말이다.
"게...... 게르타 자작님!"
"이게 무슨 소란이냐."
내 존재는 관심도 없다는 듯 그가 거만한 얼굴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바닥에 쓰러진 위병들. 그리고 피가 묻은 검을 들고 있는 내 모습.
말없이 나를 훑어보던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그대가 저지른 짓인가?"
그의 질문에 나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그래...... 그랬단 말이지......."
고민하듯 중얼거린 그가 귀찮다는 듯 고개를 휙 휘저었다.
"뭣들 하느냐. 상대는 미친놈이다, 죽여라."
"하...... 하지만 자작님! 놈은 위험합......."
"어허. 감히 내 말을 듣지 않겠다는 게냐?"
그의 말에 위병들이 이도 저도 못하는 표정을 짓다 이내 내게 무기를 다시 겨누었다.
이대로 두면 한참 귀찮아질 모양새였다.
결국 신분빨이지.
이에 나는 곧장 품 안에 든 것을 그대로 꺼내 그에게 가볍게 던졌다.
"음? 이건 무......."
말을 잇던 그의 말이 끊어지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였다.
순간 자신이 뭔가를 잘못 보았나 하는 표정을 짓던 그의 얼굴에 서서히 경악이 어리기 시작했다.......
상위 귀족, 혹은 왕족을 나타내는 미스릴 신분패.
제아무리 골방 왕자였더라도 내가 이 나라의 왕자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 진실 중 하나였다.
"좀 전에도 말했지만 귀족의 의무는 왕국민을 보호하는 데에 있다."
내 말에 그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내게 시선을 돌렸다.
확실히 왕족이 오기엔 조금 외곽의 영지이긴 하지.
"이, 이것은......."
"그런 귀족이라는 자가 책임을 회피한 채 위법을 저지르고 특권만을 누리려 들어?"
무언가 한참 생각하는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무엇을 염두에 두고 있는지도 뻔히 보일 정도.
"판단 잘해. 당장 호위기사 안 보인다고 엄한 생각 품지 말고."
"흡!"
내 말에 정곡을 찔린 듯 그가 눈을 크게 뜨고 부르르 떨었다.
어지간한 고위귀족이나 감찰관이 잘 오지 않는 곳이다.
다른 곳도 아니고 바리에타 공작가의 산하 영지가 아닌가.
그런 영지였으니 이런 말도 안 되는 위법도 당당하게 저지른 것이겠지.
내 말에 고민하듯 시선을 돌리던 그가 내게 다가와 무릎을 꿇고 소리쳤다.
"시...... 신 게르타 자작! 데, 데이비 왕자님을 뵙습니다!"
"그래, 알아봐 주니 다행이네."
내 말에 그가 부들부들 떨며 머리를 조아렸다.
"부...... 부디 선처를...... 영지의 사정이 너무 어려웠던 탓에......."
씨알도 안 먹힐 거짓말을 변명이랍시고 늘어놓았지만 알 만한 이들은 다 아는 사실이었다.
관광명소이자 천일야장의 유적지는 대륙연합에서 국보로 지정되어있는 곳이라는 것을 말이다.
그 때문에 대륙연합은 일정 기간마다 관리비라는 명목하에 상당한 돈을 이 영지로 보내고 있다.
"그런데 돈이 없다고?"
내 말에 그가 부들부들 떨었다.
자신이 생각해도 어처구니가 없었겠지.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던 그는 급기야 내게 바락바락 소리치기 시작했다.
"이...... 이건 불합리합니다! 잠행이라니요! 세상 어느 왕국도 왕족이 이리 무분별하게 영지로 찾아와 처벌을 할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그의 외침에 내가 검을 늘어뜨린 채 물었다.
"이건 뭔 개소리야. 왕족이 왕국 내에서 못 가는 곳이 어디 있어."
"제대로 된 공식 문서도 없으니 이건 횡포입니다!!"
"그러니까. 제대로 된 공문을 가져오라?"
"그...... 그렇습니다. 이, 이 일은 절대 바리에타 공작 각하께서 좌시하지 않으실 겁니다!!"
그는 자신의 뒤를 봐주는 공작가의 힘을 믿는 듯 이제는 막무가내로 들이밀기 시작했다.
뭐, 확실히 어지간한 감찰관이라면 후환이 두려워서라도 묵과할 일이긴 하다.
실제로 이곳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영지가 이딴 위법을 공공연하게 저지르고 있을 테니까.
실제로 내가 침묵하고 있으니 게르타 자작은 내가 바리에타 공작가의 이름에 주춤한 것이라 착각한 듯 승리의 미소까지 지어 보였다.
"그...... 그러지 말고 드시지요. 제가 섭섭지 않게......."
"그런데 말이야, 자작."
"예?"
"공문이 없다고 있던 죄가 사라지나?"
"그건 무슨......."
서걱!
게르타 자작의 말은 그것이 마지막이었다.
-유언 참 간결하군.
가급적 생명을 사랑하는 게 좋지 않겠냐 말하던 페르세르크도 이번엔 별말을 할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
이 나라의 실세인 바리에타 공작이 뒤를 봐줄 거라고? 제 앞가림하기도 바쁜 양반이 잘도 신경 쓰겠네.
순식간에 목을 잃어버린 육체는 힘을 잃고 바닥에 쓰러져 버렸다.
"지랄을 하네 지랄을."
절로 욕설이 터져 나오자 주변에서 숨을 삼키는 소리가 크게 들려왔다.
"뭐해. 죄인의 시신이다. 치워."
"흡!"
효수라는 좋은 방법도 있다.
지금껏 게르타 자작에게 수탈당하던 영지의 시민들도 좋아할 법한 일이지만 애석하게도 이곳은 관광 영지.
자국의 치부를 타국의 인간들에게까지 보일 생각은 없었다.
위병들은 한참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한 채 핼쑥해진 얼굴로 내 뒷모습만을 바라보았다.
* * *
-게르타 자작의 죄는 명확하나 그 아래의 인간들조차 죄가 없진 않음이지.
"이 이상은 오지랖이야."
괜한 참견은 오히려 힘든 상황을 유출한다.
"그리고 나머지 암 덩어리는 바리에타 공작이 알아서 치울 테니까."
그는 지금 티끌만큼의 문제소지도 남겨놓아선 안 되는 상황일 것이다.
그러니 내가 이곳에서 와서 이런 일을 저질렀다는 걸 깨달은 이상 증거 은폐를 위해 관련인들을 모조리 색출해 목을 날려버릴 터.
멍한 얼굴로 나를 보던 위병들도 결국은 자작과 한통속이니 그대로 줄줄이 굴비 엮듯 형장으로 끌려갈 것이다.
이 이상 손에 피를 묻힐 이유는 없었다.
영지 내부는 바깥에서 있었던 일 따윈 모른다는 듯 평화롭게 흘러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