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
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
- 3권 2화
-한데 이곳이 수르트의 흔적이 있는 유적이라는 건 알겠지만...... 이미 밝혀질 대로 밝혀지지 않았는가.
"겉보기엔 다 캐낸 것처럼 보이지."
그는 내가 분명히 알 수 있는 무언가를 남겨놓았다고 했다.
그건 아마 그가 나를 가르칠 때 알려주었던 무언가가 그가 만든 비밀 던전의 열쇠이고 탐지기이기 때문이리라.
문제는 아무리 봐도 그 흔적이랄게 없다는 것이었다.
-음...... 그대, 본녀가 이런 말 하긴 뭣하지만.......
이미 누군가가 찾아낸 게 아니냐.
그런 물음이었다.
하지만 나는 끝까지 침묵한 채 유적을 하나하나 돌아보았다.
그리고, 높은 곳까지 올라가 유적 전체를 내려다보며 눈을 가늘게 떴다.
-관광지치고는 상당히 한적해서 좋군.
제법 유명한 관광지이지만 이 세계에는 관광사업이 크게 발달하지 못한 탓에 그렇게 인구수는 많지 않았다.
실제로 그가 남겨놓은 힘의 흔적이라거나 그런 건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마치 수수께끼처럼 고요하게 자신의 자태만을 뽐내고 있는 유적의 모습이라 절로 눈이 가늘게 뜨여졌다.
-천일야장의 유적지는 대부분 석재와 특수금속으로 원형이 이루어져 있다고 했음이야. 그 덕에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그 형태만큼은 유지하고 있는 것일 테고.
나름대로 알고 있는 깨알 지식을 선사해주는 그 모습에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허공에 무언가를 쓰듯 중얼거렸다.
어지간해선 확신하지 않는 그가 확신하며 말할 정도라면 숨겨놓은 난이도가 미쳤다고밖에 볼 길이 없다.
그리고 내가 아는 그라면 이런 경우 딱 한 가지를 이용해서 숨겼을 터.
"1번에 7번 양식...... 23번에 11번 양식......."
-그건 무엇인가?
"암호."
짧게 중얼거린 내가 피식 웃어 보였다.
"찾았다."
확신에 찬 내 목소리에 의아한 기분이 든 것인지 페르세르크가 고개를 갸웃거려왔다.
확실히, 이렇게 숨겨놓은 것이라면 나 이외에 그 누구도 이곳에서 무언가를 찾을 순 없을 것이다.
미련 없이 높은 곳에서 내려와 유적의 내부로 들어간 나는 유적의 공방으로 보이는 위치에 올라선 후에서야 바닥과 일체형으로 붙은 모루 위에 손을 올렸다.
유적의 전체적인 형태는 수르트의 고향이자 생전의 그의 작업실이다.
그 넓이가 보통 공방과는 확연히 차이가 있을 만큼 크다는 게 문제지만 결과적으로 대부분 그의 손길이 닿았던 공간이기도 했다.
이제야 기둥도, 천장도 남지 않은 돌무더기일 뿐이지만.
그럼에도 그의 던전은 아직 멀쩡히 남아 있었다.
어떻게 확신하냐고?
이 방법으로만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라면 죽어도 못 찾는 게 당연할 것이다.
주변 파악이 끝나기가 무섭게 나는 모루의 위로 올려두었던 손을 거둔 뒤 마나를 끌어올렸다.
그리고는 손가락 끝에 마나를 모아 모루의 면을 톡톡 두드리기 시작했다.
마치 모스부호를 치듯 말이다.
-그대 뭘 보고 알아냈다는 게야?
"유적 전체가 암호문자로 되어 있어. 높은 곳에서 보면 몇 가지 문자로 되어 있거든."
내 말뜻을 깨달은 그녀가 허! 하며 숨을 내뱉었다.
유적의 암호는 간단하게 한 가지를 가리키고 있었다.
중앙의 모루에 입구가 있다는 것.
그리고, 입장하기 위해선 특정 암호가 필요하다는 점.
이딴 암호로 문을 숨겨놓고 찾으면 모두 주겠다고?
내 무의미해 보이는 행동이 이어진 지 한참.
그저 묵묵히 내 행동을 구경하고 있던 페르세르크가 곧 벌어진 변화에 눈을 살짝 크게 떴다.
[그르르릉.......]
동시에 아주 잠깐, 어떤 짐승의 낮은 울음소리가 들려온 것 같은 소리를 시작으로 나와 페르세르크의 몸이 일순간 빛으로 변해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내가 사라진 것을 발견한 이는 아무도 없다는 듯 유적지는 다시 고요함에 휩싸였다.
* * *
지하의 공간.
마냥 지하라고 해서 바로 아래의 공간이라고 생각하면 사실상 오판이다.
-지하 던전이로군. 세상에, 출입방법이 너무 악랄하지 않은가.
"그러니 들어올 수만 있으면 다 가져가도 좋다고 말한 거겠지. 듣기로는 죽기 전에 유언으로 그런 말을 남겼다는 모양이더라. 이제 와서는 거의 잊힌 모양이지만."
당시엔 수르트의 유산을 차지하기 위해 수많은 이들이 골머리를 싸맸을 것이다.
결과?
성공했으면 이곳이 이리 멀쩡하게 있을 리가 없지.
이 지하가 과연 몇 미터 아래에 존재하는 공간일까.
-수르트, 그가 제법 공을 들이지 않았는가. 지하의 압력을 차단하는 마법진, 거기에 공기까지 공급이 되도록 만들어놓았음이니. 당시에 마법사들이 꽤나 머리 썩혔겠군.
"대충 어느 정도 아래일까."
-그거야 모를 일이지. 본녀가 기억하는 천일야장의 행동거지를 생각하면 1~200미터 아래라 해도 이상하지 않을 텐데.
이러니 수천 년간 발견이 안 되고 있었지.
들어오는 조건은 누구든 가능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냥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공간이 아니었다.
출입을 위해선 수르트가 만들어낸 부호가 필요했다.
과거엔 알고 있는 이가 몇몇 있었지만 이제 와서 알고 있는 이는 내가 유일하다.
수르트가 죽을 때쯤엔 그 이외엔 아무도 몰랐을 테니, 내가 그와 만나지 않았다면 아마 지금쯤 이 던전은 영원히 누구의 손도 타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던전...... 이라기보단...... 그저 생활공간 같군.
그 말대로였다.
지하 던전의 구조는 누군가가 은거하며 생활한 것 같은 형태를 띠고 있었다.
공동은 한 사람이 살기엔 상당히 넓었다.
하지만 그만큼 필요한 물건들로 가득 차 있었다.
비록, 시간이 오래 지나 제대로 형태를 보존하고 있는 것은 은은하게 마나의 향이 남아 있는 몇 가지 물건들뿐이긴 했지만 말이다.
투박한 모루와 이미 불씨가 꺼져버린 화로.
그리고 그가 생전에 쓰던 공구와 연구일지나 수기.
회랑에서는 그러지 않았지만 그는 생전에 대장장이라는 일에 일생을 쏟아부은 미치광이였다.
스스로가 그리 판단했으니 더 말해 무엇할까.
마지막 검인 신검 칼디라스를 끝으로 그는 하레스의 죽음 이후 이곳에 들어와 남은 평생을 한 가지 작업에 쏟아부은 뒤 사망했다.
그의 시신은 비록 땅 위에서 죽었지만 그가 죽기 전까지의 모든 것이 이곳에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천천히 걸음을 옮겨 방에 들어서자 그가 쓴 것으로 보이는 책들이 가득 담겨있었다.
대륙 어느 대장장이도 흉내 내지 못했던 그만의 기술이 담긴 일지들.
그의 별명은 천일야장.
하지만 장인의 일족인 드워프들 사이에선 그리 불렸다.
악마의 대장장이.
조금 오글거리지만 그들의 입장에선 어쩌면 맞는 표현일지도 몰랐다.
수르트는 일반적인 검을 만드는 실력도 대단했지만 마나를 섞어 무언가를 만드는 기술이 실로 어마어마했으니 말이다.
보통 장인들은 순수하게 금속을 두드려 무언가를 만드는 것에 자부심을 품는다.
하지만 한계는 존재하는 법.
수르트는 그 한계를 깨기 위해 마나를 건드리기 시작했고 종래엔 마나를 이용해 무기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끝에 만들어진 것이 대륙 모든 장인이 한 번만이라도 보고 싶어 한다는 신검 칼디라스였다.
정도를 벗어나 사도까지 지배한 위대한 대장장이.
그렇기에 악마의 대장장이라 불리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영혼을 팔아서라도 그와 같은 무구를 만들어내고 싶어 하는 이들도 많았다는 이야기는 들었다.
최초로 신검이라 불리는 위대한 무구를 만든 인간.
신이 만든 검은 아니지만 인간이 만들어낸 역사적으로도 위대한 검이 바로 그것이 아니던가.
9급 신성력을 보유하고, 스스로 자아를 가진 검이 신검이 아니면 무엇을 신검이라 부르리오.
인간들에겐 천 일 동안 쉬지 않고 망치를 두드려 칼디라스를 만들었기에 천일야장이라 불리지만 드워프들에겐 마나의 힘까지 섞은 사도 대장장이.
그러면서도 존경할 수밖에 없는 전설의 야장.
그게 수르트라는 인간 대장장이의 모습이었다.
-온통 수르트의 흔적들이군.......
뭔가 아련한 기억이 떠올랐는지 페르세르크가 짧게 신음했다.
그리움인지, 아니면 슬픔인지.
아련한 표정을 짓는 그녀를 둔 채 말없이 책 한 권을 뽑아 펼치자 마나의 잔향이 서서히 흩어지며 낡은 페이지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 시대에 사용하지 않는 고대의 언어였다.
하지만 그만큼 내게는 익숙한 문자이기도 했다.
묵묵히 책장을 넘겼을까.
그가 처음 망치를 쥐었을 때부터의 삶이 고스란히 담긴 책은 새삼 중요하게 여겨졌다.
[보존]
말없이 손을 뻗어 책에 흩어져가는 보존 마법을 다시금 건 나는 책장에 수기를 다시 꽂아놓고 걸음을 옮겼다.
-다 챙기지 않는 게야?
"수르트의 흔적은 여기 있는 게 맞아. 나중에 필요하면 다시 찾아오면 되겠지."
기왕이면 이동용 마법진을 하나 만들어두는 것도 나쁘진 않을 테지.
침묵으로 일관한 채 말없이 그의 공방을 둘러보며 공구들을 만져보던 나는 곧 그가 생전에 사용하던 투박한 망치만 골라 챙긴 뒤 커다란 공동안으로 들어갔다.
-이곳은...... 마치 제단 같군.
공동에 있는 방은 여러 가지였다.
책장이 가득한 서재. 침실. 식사를 위해 만들어놓은 주방. 식량 창고.
그리고 그 마지막은 거대한 제단과도 같은 곳이었다.
"하여튼 이 사이비 신자 같으니......."
존재하지도 않는 대장장이의 신을 모시는 제단이라도 되는 것일까.
말없이 들어서자 제단의 위로 커다란 금고가 굳게 닫힌 채 제 위용을 자랑하고 있는 게 보였다.
정확히는 신이 아닌 저 금고를 모셔놓은 듯한 모양새였다.
쿠웅!!
동시에 내 발걸음을 느끼기라도 한 듯 다시금 사념과도 같은 낮은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그르르릉.......]
-누군가 있군.
그 소리는 내게만 들려온 게 아닌 모양이었다.
잔뜩 기대 어린 표정으로 주변을 휙휙 둘러보는 그녀를 둔 채 나는 금고에 시선을 고정했다.
이곳에 들어오기 전 느꼈던 낮은 울음소리와 흡사한 소리였다.
사념이라고 해야 할까, 소리라고 해야 할까.
어찌 되었건 그 소리는 금고 속에서 들려오는 소리였다.
-사념이 이렇게 짙게 실체화되는 건 처음인데.
생명체는 분명 없었다.
하지만 사념은 마치 정말로 살아있는 무언가가 의지를 보내는 듯한 울음소리를 내고 있었다.
낮은 울음소리에 담긴 의지는 간단했다.
경계.
금고가 살아있기라도 한 것 같은 모양새지만 바보가 아닌 이상 사념을 보내고 있는 것의 정체가 금고 안의 무언가라는 것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금고 안에 든 것은 더 볼 것도 없이 수르트가 만들어낸 마지막 유작.
끝끝내 완성하지 못하고 죽은 두 자루의 쌍둥이 검이 있을 것이다.
애초에 그것 때문에 이곳까지 온 게 아니던가.
더는 다가오지 말라는 듯 낮게 우는 듯한 소리였지만 나는 망설임 없이 금속의 잠금장치를 해제했다.
사념은 다가오지 못하게 위협을 하긴 해도 직접적으로 내 행동을 막진 못했다.
이윽고, 기다렸다는 듯 문이 스스로 열리며 그 내부가 보이기 시작했다.
천일야장 수르트가 제 생에 완성한 검 중 가장 최고였다고 단언한 검은 신검 칼디라스.
하지만.
이 두 자루의 검이 완성되었다면 그 수식어가 어떻게 변했을까.
최고의 검 중 하나?
아니면, 두 번째로 뛰어난 검?
무엇이든 의무를 지고 만든 검과 즐기며 만든 검의 수준 차이가 조금이라도 날 수밖에 없는 건 당연한 일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