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
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
- 3권 3화
술에 꽐라가 될 때면 그는 매번 같은 소리를 하곤 했다.
유작이 되어버린 두 자루의 검을 완성하지 못하고 죽은 게 한이라고.
-이미 완성된 검 같다만.......
"아니야."
담담하게 말하며 금고의 내부에 있는 물건을 향해 손을 뻗은 내가 눈을 가늘게 떴다.
고풍스러운 천으로 싸인 바닥, 그리고 그 위로 두 자루의 검이 놓여 있는 게 보였다.
좀 전까지 접근하지 말라던 사념은 이 녀석들이 보내던 게 틀림없었다.
실제로 검면에 손을 올리자 강력한 거부의 사념이 흘러나왔지만 오랜 시간이 문제였던 건지, 아니면 미완성이었기 때문인지 결국 사념은 내 손을 밀어내지 못하고 다시금 침묵해버렸다.
"마무리작업이 안 돼 있어."
그 말대로였다.
수르트는 이 두 자루의 검에 각각 하나씩 의지를 담았다.
스스로 의지를 담아 혼이 깃들게 만드는 대장장이라니.
자신의 실력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던 장인들이 들었다면 자괴감에 빠지고도 남을 법한 물건이 아닌가.
두 자루의 쌍둥이 검은 특이하게도 내가 사용하던 환두대도와 비슷한 디자인이었다.
필연적으로 거대한 사이즈, 그리고 긴 검을 선호하는 티오니스 대륙에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디자인의 검이기도 했다.
아직 그립조차 제대로 조립되지 않은 검은 그저 미완성된 쇠 날과 같았지만, 그 안에 담긴 힘과 그의 생전 의지는 분명히 엿보이는 느낌이 들었다.
생자(生者)를 베는 붉은 무명검.
사자(死者)를 베는 푸른 무명검.
두 자루의 쌍둥이 검을 그는 간단히 그렇게 부르곤 했다.
이름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는 작업 성격상 완성된 물건에 이름을 붙여주곤 했으니 말이다.
결국, 완성하지 못했기에 그는 이름을 붙여주지 못했고 이렇게 봉인되듯 보관되어 이름 없이 수천 년을 보냈을 것이다.
그의 생에서 칼디라스는 그가 만든 가장 뛰어난 검이었지만 주인인 하레스의 검술과 그의 체격에 맞게 제작된 검이라는 본인의 고백 또한 분명 존재했다.
하지만 이 두 녀석은 달랐다.
혼을 갈아 넣어 에고 무기를 만들 수 있는 천재 장인이 만들어낸 유일한 자신만의 작품.
사용자를 고려하지 않은.
검 스스로가 주인을 찾게끔 한 녀석들이다.
놀라운 것은 우연의 일치라면 일치라고 해도 좋을 만큼 두 자루의 검이 내게는 잘 맞는 최상의 검이라는 점.
그 어떤 다른 이의 의견도 없이 그저 자신의 손이 가는 대로 만들어낸 진정 최고의 물건.
회랑에서도 수많은 무구를 만들어냈던 그였지만 그는 매번 자신이 만든 칼디라스와 이 쌍둥이 검만 한 뛰어난 검을 만들어낸 적은 없다고 말하곤 했다.
비록 재료의 문제로 인해 기본적인 성능은 칼디라스보다 뛰어나다 할 수 없겠다만.
'그것만 가지고도 신검과 동급의 무기라는 건 분명하지.'
이 녀석들은 명백히 칼디라스와는 계열이 다른 놈들이다. 아마 난리가 날 테지.
소유한 것만으로도 강해진다는 신검.
그 신검 칼디라스를 얻기 위해 수많은 국가가 팔란 제국에 덤벼들었던 것처럼 말이다.
한 자루도 아니고 두 자루이니 더 할 수도 있겠지.
길이 80센티. 폭 6센티.
파괴적인 검술보다는 수려하고 부드러운 검술이 잘 맞을 법한 녀석들이다.
조용히 손을 뻗어 천으로 두 자루의 검을 감싸듯 잡아 꺼내 들었다.
좀 전까지 나를 경계하던 사념은 내 조심스런 손길을 느낀 것처럼 서서히 침묵하더니 이내 완전히 흩어져 버렸다.
하지만 예기만큼은 그대로였다.
그래도 무기는 무기라는 것일까.
조금이라도 실수했다간 베이는 걸 떠나서 자신도 모르는 새에 손가락이 잘려나가도 이상하지 않으리라.
마냥 날을 갈아서 생겨난 예기가 아닌 무기 자체가 품은 고유의 예리함이었다.
당장 무기로 써도 손색이 없을 정도.
하지만 장인의 시선으로 본 이 두 자루의 검은 분명히 미완성이라고 외치고 있었다.
천으로 집어 올린 검면을 바라보던 내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불을 구해야겠네."
-불?
"그래. 일반 화로 말고, 그보다 수배는 더 뜨겁게 달굴 수 있는 드워프식 화로."
-이미 날을 갈아낸 검을 불에 집어넣는 건.......
"말했잖아 미완성이라고."
나는 마치 보물을 보듯 부드럽게 검면을 쓸어내렸다.
약간은 투박한 검면의 표면이 절로 느껴져 왔다.
수르트는 때를 기다리다 먼저 수명이 다해 완성하지 못했다.
그가 마지막으로 했던 것은 검의 표면에 마나가 녹아들게끔 만드는 작업이었을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 점차 그 농도가 짙어지는.
그 마나가 어떤 속성인지는 이름만 들어선 알 길이 없지만 그의 사후 수천 년이 흐른 만큼 검면에 녹아든 마나는 최대치까지 짙게 뱄다고 봐도 무방했다.
이정도면 충분한 시간이 아닌가.
아니, 오래 시간을 들일수록 더 좋은 검이 나올 테니 어쩌면 그가 예상한 것보다 더 대단한 놈이 나올지도 모를 일이다.
다른 이도 아니고 천일야장의 마지막 미완성 유작이다.
보통 장인이라면 그 압박감을 견디지 못해 손을 댈 엄두도 못 냈을 물건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빨리 검을 두드리고 싶다는 생각만 강하게 들었다.
실패?
이정도 물건을 봤는데 실패할 수야 있나.
이쯤 되니 내가 말아먹으면 어쩌냐고 질문했을 때 절대 그럴 리 없다며 호언장담하던 그가 무슨 생각이었는지, 서서히 이해가 되기 시작했다.
23. 엿이나 먹어라.
"득템이구만."
정확히는 득템이라고 하기보단 회수에 가깝다.
실제로 수르트는 두 가지 쌍둥이 검의 소유권을 내게 넘겼으니까.
애초에 세상에 드러나지 않은 검이니 내가 이것을 가졌다고 누군가가 딴지를 걸어올 일도 없음이렷다.
곧장 수르트의 지하 공방을 빠져나온 나는 잔뜩 어수선해져 있는 영지로 돌아가 말 한 필을 빌린 채 곧장 왕궁으로 향하는 길에 올랐다.
비록 내 손에 게르타 자작이 죽긴 했지만 그의 죄는 명확했고 실제로 그 일로 내게 무어라 할 권한을 가진 이는 없었다.
이럴 때 보면 계급이라는 건 참 불합리할 정도로 편리하다.
그러니 귀족들이 계급이 가져다주는 달콤함에 취하는 것일 테고.
삐릭!
명칭 : 현재 없음
상태 : 미완성
완성도 : 90%
세부사항. :
제련에 마나를 사용한 위대한 대장장이가 꺼져가는 생명을 쏟아 넣어 혼신의 힘으로 만들어낸 마지막 유작 중 첫 번째 검.
미완성이라 권능이 발현되지 않음.
자아가 존재하나 현재 깨어나지 않음.
수르트가 표현했던 생자(生者)를 베는 붉은 무명검의 설명 문구였다.
10%의 미완성으로 인해 이름조차 붙지 못한 채로 수천 년을 봉인되어 온 검이다.
자아가 있다는 사실은 실상 놀라울 것도 없었다.
지하 공방에 들어가기 전에도 금고의 문을 열 때도 경계 가득한 짐승의 낮은 울음소리가 들리지 않았던가.
그것은 무의식중에 흘러나온 검 속에 깃든 자아의 일면이었을 것이다.
"나머지 녀석도 똑같고......."
지하 공방에서 챙겨나온 검은 총 두 자루.
그의 말마따나 쌍둥이 검인만큼 색만 다를 뿐 디자인은 같은 형태였다.
그리고.......
완성도나 현 상황까지 모두 똑같았다.
생자를 베는 검은 첫 번째.
사자를 베는 검은 두 번째.
쌍둥이라도 먼저 만들어진 녀석은 존재하는 법이니까.
칼디라스를 만들었을 때보다 더욱 공을 들여 만든 그만을 위한 무기였던 만큼 검의 공정 방식에는 그의 열정과 애정이 가득 담겨있었다.
"도착했습니다. 좋은 수도 구경 되시길."
여전히 평민 신분으로 위장한 덕분에 마나 게이트를 관리하는 하급 마법사는 나를 알아보지 못했다.
대중매체가 잘 발달하지 않은 세계이니 당연한 결과겠지만.
순식간에 근처 대도시에 도착한 나는 곧바로 마나 게이트에 올랐고 순식간에 수도에 당도할 수 있었다.
본래대로라면 마차나 수행원을 대동해 좀 더 늦게 도착해야 했지만 영지가 이제 슬슬 돌아가기 시작하는데 왕궁에서 오랜 시간을 빼앗길 이유는 없었다.
"네가 보기에 왜 왕실에서 날 불렀다고 생각해?"
-표면적으로 봐도 그대는 지대한 공을 세우지 않았는가. 아마 그에 따른 공훈을 내리기 위해서겠지.
"어차피 내가 번 돈이잖아."
-소득세는 허울이 아니지 않은가. 그대는 알면서 자꾸 묻는 나쁜 버릇이 있음이야.
그랬다.
일단은 공헌은 공헌이지.
라운 왕국도 그렇지만 어느 국가든 개인 혹은 집단의 소득이 생겼을 경우 일정 금액을 국가에 상납한다.
그것이 소득세였다.
현재 라운 왕국의 소득세는 기본적으로 5%에서 30%.
많다고?
지구는 무엇이 달랐는가.
물론, 대부분의 세도 귀족들은 이 소득세를 날름날름 탈세하면서 유유자적 잘살고 있다만.
그 덕분에 지금 덜미가 잡혀서 모가지가 뎅겅뎅겅 잘려나가고 있는 이들을 보면 그리 현명한 선택은 아니다.
-여기까지가 일반 예상이겠지.
"속뜻은?"
-뻔하지 않은가. 그대가 재배하고 있는 달의 풀 잎사귀는 그야말로 황금알 그 자체임이니, 고작 한 분기 만에 왕국 연 지출 금액의 배가 넘는 금액을 벌어들이지 않았던가.
라운 왕국의 연 지출 금액은 10만 골드에서 15만 골드.
확실히 많은 금액이긴 했다.
-사업을 국유화시키고 그대를 잘만 구슬리면 라운 왕국은 지금보다 수배는 부유한 국가가 될 게야.
정확히는 귀족들의 주머니가 부유해지겠지.
모르긴 해도 동대륙의 유일한 달의 풀 출하가 가능한 영지가 되어버렸으니까.
사실 이정도로 대륙의 시선을 받아버린 게 조금 떨떠름한 일이긴 했다.
그만큼 내가 벌인 일이 크다는 소리이기도 했다.
하고자 해도 불가능한 일.
그게 달의 풀의 재배였다.
수도의 거리를 돌며 몇 가지 정보만을 확인한 후 곧장 왕궁으로 들어서자 예전과는 다른 어수선한 분위기가 나를 반겼다.
정적들의 싸움이 대차게 시작되면서 여기저기 휩쓸린 사용인들이 대거 죽어 나가니 이 기회에 아주 그냥 새로이 물갈이를 했던 모양이었다.
그 덕분일까.
나를 깔보며 무시하던 사용인들의 얼굴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물론, 있다고 한들 그들이 더는 내게 함부로 대할 위치가 아니게 되어버리긴 했지만.
"어서 오십시오. 저하."
나를 맞이한 것은 다름 아닌 베스퍼스 시종장이었다.
현재 나를 따라 하인스 영지까지 온 베르닐 시종장의 형이자 귀족파조차 함부로 손을 뻗지 못하는 국왕의 수족 중 하나.
그렇기에 그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이기도 했다.
"오랜만이야. 베스퍼스 시종장."
"저하께서도 더욱 강건해지셨습니다."
"겉보기엔 아직도 비리비리하다만."
"해가 바뀌면서 농담이 느셨군요."
베르닐 시종장은 그래도 가끔 웃는 모습을 보이곤 하지만 베스퍼스 시종장은 무슨 터미네이터마냥 표정의 변화가 없다.
덕분에 어릴 적에 그를 두고 터미네이터니, 존 코너는 어디 있느니 헛소리를 늘어놓기도 했었던 것 같다.
"영지에서 큰 사업을 성공시키셨더군요."
시종장이 묻기엔 조금 어긋난 듯한 이야기였지만 그는 그러고도 남을 인물이었다.
"뭐...... 하늘이 감복했나 봐. 선물을 크게 좀 받았지 뭐."
우스갯소리로 떠넘기며 내가 빙그레 웃자 그는 그것으로 만족하는지 조용히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