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
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
- 3권 12화
변화는 순식간에 일어났다.
붉은 화염이 가득하던 화로는 내 마나와 뒤섞이기 시작하더니 곧 찬란한 푸른색의 화염으로 바뀌기 시작한 것이다.
온도가 바뀐 건 아니었다. 근본적인 무언가가 뒤바뀐 것만 같은 분위기를 풍겼다.
"음...... 온도는 이정도면 되겠고."
드워프들의 얼굴에 의문, 경악이 어리건 말건 나는 화로의 온도가 적당히 오를 때까지 그저 침묵한 채 기다렸다.
그리고, 만족스런 수준까지 그 온도가 올랐을 때.
나는 미련 없이 준비해뒀던 금속을 그대로 집어넣어 시뻘겋게 달군 후 끄집어냈다.
그리고는 익숙하게 모루 위에 올려둔 뒤 여러 집게를 이용해 고정했다.
사이즈가 작으면 직접 잡고라도 하겠다만, 기본 원판이 되는 크기가 상당한 물건이라.
"뭐하는 겐가! 카드륨강과 미스릴의 합금은 해선 안 될 짓이다! 기본 상식이란 말이다!"
"빌어먹을 역시 인간을 들이는 게 아니었어!!"
아주 잠깐 무언가를 기대한 자신들이 바보였다.
드워프들은 그렇게 생각하며 나를 향해 거침없는 불쾌감을 표출했다.
하지만 그들의 그런 격한 분노는 곧 찬물이라도 끼얹은 것처럼 고요해졌다.
"상식 이외의 방식을 도용하면 안 된다고 누가 그랬나."
탕!
속이 빈 무언가를 두드리는 듯한 청명한 소리가 그들의 귓가를 때린 것이다.
"선조 드워프들이? 아니면 천일야장이?"
탕!!
보통 투박한 망치와 달궈진 쇠를 두드렸을 때 난다고 보기엔 이상한 소리가 공방 내부에 시원시원하게 울려 퍼졌다.
"당신들은 그저 당신들이 생각하는 대로 규칙을 짜 넣은 것뿐 아닙니까?"
망치가 한번 닿을 때마다 변화는 계속되었다.
마치 거대한 수면 파장이 퍼져나가듯.
망치가 한번 닿을 때마다 푸른색의 파장이 금속 전체를 얇게 감쌌다가 부서지듯 흩어지기 시작했다.
상식 따윈 없다. 모든 것은 어떻게 다루냐에 따라서 달라질 수 있다.
하지만 공정 방식에 따라 얼마든지 섞을 수 있다. 드워프들이 사도라고 일컫는 방식을 응용해서 말이다.
먼저 합금에 절대 사용해선 안 된다는 시약들을 투여한다.
그리고 일정 온도에 마나를 품게 한 화염으로 그것을 빠르게 스며들게 만든 뒤 결을 뒤튼다.
실상 작업 중에 해선 안 되는 짓이라고 못 박힌 것들 사이사이에 이런 새로운 방식이 존재한다. 관점의 차이라고 할까.
그나저나 미스릴은 꽤 비싼 금속인데.
이정도면 완전히 브루주아 작업실이 따로 없다.
탕! 탕!!
한번 두드릴 때마다 푸른색의 파장이 마치 나이테처럼 퍼져나가며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한번 두드릴 때마다 변하는 결을 순식간에 찾아내어 때리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챘다면 아마 꽤 놀랄 것이리라.
보통 장인은 일반 철의 결을 찾아 때리는 것도 쉽지 않으니까.
순식간에 형태가 변하기 시작하는 금속 때문인지, 아니면 오랜만에 잡는 망치 때문인지.
나도 모르게 제법 열중했던 모양이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는 내 눈앞에 놓인 거대한 검이 어느 정도 형태를 잡고 난 후였다.
완전한 형태를 이루기엔 아직 한참 멀었다는 느낌이 들 만큼 투박하고 엉성했지만 그 안에서 느껴지는 마나의 파장은 드워프들이 필사적으로 매달리던 물건과 비슷했다.
아니, 좀 더 힘이 짙게 느껴진다.
그래야지, 누구 제자 실력인데.
'음, 너무 열중했나?'
제법 시간이 흘렀다는 사실을 깨달았지만 그 누구도 나를 말리는 이는 없었다.
그 때문에 더욱 열중한 것이라는 사실을 애써 부정할 필요는 없는 듯 보였다.
모루 위에 놓인, 반쯤 형태가 잡힌 검면을 띤 금속을 톡톡 두드리자 옅은 빛이 파장을 흘리듯 주변으로 스멀스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내가 배열을 짜듯 깔아놓은 마나들이 서서히 상호작용을 일으키며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심신의 안정을 정해주는 듯한 그 은은한 파장 너머로 고개를 돌린 나는 곧 경악한 얼굴로 나를 보고 있는 그들을 향해 제작 중이던 물건 일부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어때요, 참 쉽죠?"
내가 생각해도 이 말은 개소리에 가까웠다.
* * *
일반적인 마법 검은 기본적으로 만들어진 검 위에 구현화 된 마법진을 그리고 새겨넣은 뒤 마법사의 도움을 받거나 마나석을 심어 넣어 그것을 만들어낸다.
하지만 의지를 담아 넣는 것은 그러한 작업으로 만들 수 없었다.
"이...... 이게 어떻게......."
제 상식들을 죄다 박살 내버리는 물건이 눈앞에서 뚝딱 만들어지기 시작하자 드워프들의 얼굴엔 경악이 잔뜩 어렸다.
누구도 그가 이런 것을 보여주리라곤 예상치 못했다.
라운 왕국에서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소년이었다.
인간의 기준으론 성인의 나이라고 하니 소년이라고 하기엔 조금 어폐가 있지만 드워프들의 기준에선 저 때의 나이면 어린아이나 다름없었다.
무엇을 요구하고 싶었는지 라운 왕국 국왕의 권한까지 빌려 마을 내부까지 들어온 소년은 처음엔 아무런 목적도 내비치지 않았다.
드워프들은 당연히 그를 무시했다.
인간과의 약속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 그는 연통 없이 찾아온 불청객이었고 자신들은 바빴으니 말이다.
8 장로 골다의 경우 인간치곤 제법 드워프의 예의를 알고 싹싹한 소년이라 신경 써주긴 했지만 다른 드워프들에게는 완전히 관심 밖의 인물이었다.
그런데.
"어, 어떻게. 마나석도 없이 검이......."
할 말을 잃은 6 장로 페르돔이 믿을 수 없다는 듯 눈동자를 덜덜 떨었다.
비단 그뿐만 아니라 대부분이 같은 생각을 했을 것이다.
마법 검이 무엇이던가. 마나석과 연동되어 정밀하게 자아올린 물건이 마나석의 마나와 연동되어 몇 가지 마나를 만들어내는 게 아니던가.
문제는 마나석을 이용하는 마법 검이란 사용횟수가 존재하기에 드워프의 신물인 태초의 섬광이나 신검처럼 계속해서 마나를 생성하지 못한다.
그렇기에 고대 기술을 대부분 유실한 드워프들도 두손 두발 다 들고 있던 찰나였다.
같은 힘을 끌어내더라도 스스로 힘을 회복하는 것과 횟수의 제한을 가지는 건 의미부터가 달랐으니까.
이를테면 마나석의 아득한 상위의 위치에 있는 마정석과 흡사하다.
그들에게 태초의 섬광은 대부분 장인으로서의 기술만 가지고 만들어낸 궁극적 표상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눈앞에서 이제는 만들지 못할 것이라 여겼던 마나석이 없는 마법 아티펙트가 만들어졌다.
오로지 장인의 망치와 모루만 가지고.
마치 모든 것을 잊고 집중하듯 망치를 두드리는 데이비라는 이름의 저 인간 소년을 바라보던 드워프들은 곧 그가 여유롭게 거대한 검의 일부를 보여주자 입을 쩍 벌리고 말았다.
"어때요, 이쯤 하면 알겠어요?"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가 없는 일이 벌어지고 있는데 알 리가 있나.
* * *
-뭔가 망치질 한 번에 마나가 얇게 퍼지는 건 보았지만.......
'마나를 까는 건 마나석의 힘으로도 충분해. 내가 보라고 한 건 결이야.'
-결?
'검 스스로 마나를 빨아들이...... 뭐 그냥 간단히 말해서 마나를 스스로 순환시키는 기술이라고.'
"골고다 장로님."
"으...... 음?!"
내 말에 화들짝 놀란 골고다가 눈을 부릅뜨며 헐레벌떡 내게 뛰어왔다.
"제가 한 게 뭔지 아시겠습니까?"
"그...... 그것이......."
설명을 못 하고 전전긍긍하는 그 모습에 망치를 들어 형태가 잡힌 검의 면을 가볍게 두드려 보였다.
탕! 탕!
맑고 청명한 소리. 분명 속이 빈 것 같은데 어째서인지 견고하기 이를 데가 없다.
"마나석을 사용하지 않고 금속만으로 핵을 만들어내 스스로 힘을 회복하는 물건은 신검부터 극소수로 존재하죠."
"그...... 그렇지."
"대부분의 마법 아티펙트는 마나석에 저장된 마나가 동나면 수명이 다합니다. 그렇기에 태초의 섬광처럼 무수한 시간을 견디며 강한 힘을 내뿜으려면 물건 스스로 마나를 순환시킬 수 있어야 해요."
기본적인 마나 배열과 마법진을 이용하면 자체적으로 마나를 순환시킬 순 있다.
하지만 이들은 장인. 마법이 주가 되는 물건을 만드는 마법사가 아니다.
"결이 보이십니까?"
"결?"
"예, 태초의 섬광이든 신검이든 스스로 마나, 혹은 사령 마나, 신성력을 끌어옵니다. 그 주체는 달라도 요지는 망치를 두드려서 만들어낸 물건 자체가 스스로 마법진의 형태가 되어야 한다는 거죠."
"하...... 하지만 그렇게 했다간 무기가 될 수 없네! 마법진의 형태는......."
당황한 듯 소리치는 그 말에 내가 빙그레 웃어 보였다.
"그래서 금속 내부의 결을 바꾸는 겁니다. 아주 미세하게 수십, 수백 겹의 결을 만들어서 형태를 마법진처럼 바꾸는 거예요."
내가 아는 한에서 수명을 잃어버리고 쉬지 않고 마나석, 아니 마정석 이상으로 힘을 축적하고 방출해대는 건 딱 하나뿐이다.
팔란 제국의 황녀, 일리나 데 팔란이 주인으로서 가지고 있는 신검 칼디라스.
처음 칼디라스를 봤을 땐 터무니없는 기술력의 집합체에 분석해볼 용기조차 안 날 지경이었었다.
"그런...... 하지만 자네 말대로 내부의 결을 멋대로 바꾸면 검의 내구도가 버티질 못하네, 자그마한 충격에도 깨져버릴 게야."
속이 비면 내구야 당연히 약해지지.
"그래서 장인 스스로 아티펙트든 본신의 힘이건 마나를 얇게 깔아 완충지대를 만드는 겁니다. 그게 마나 가공법의 핵심이고요."
"완충지대?"
-그런 것치고 그대는 본녀와 칼디라스를 처음 보았을 때 아무런 감흥도 없다는 얼굴이었지.
'예쁜 여자 봤다고 헤벌쭉하는 남자보단 그래도 표정관리 하는 남자가 인기 있는 법이지.'
-본녀는 취향에만 맞으면 헤벌레하건 무표정이건 다 좋음이야.
'그럼 나는?'
-그대는 너무 비리비리해, 근육을 좀 더 키우는 게 어떠한가?
이정도면 꽤 다부진 체격인데.
그동안 놀고 있었던 건 아닌 만큼 먹고 운동한 게 많아서 비리비리하던 육체는 이제 없다.
내 투덜거림에 쿡쿡 웃는 페르세르크였다.
"대부분의 기술은 시간이 흐르면서 사장되었죠. 종족의 명운을 건 전쟁에서 인간 사이의 전쟁으로 바뀌다 보니 자연스레 기술력이 퇴화할 수밖에 없었을 겁니다."
모든 인간이 힘을 합쳐야 했던 그 시기와 비교하는 건 사실상 무례에 가깝다.
"질문하나 할게요. 현재의 드워프들은 과거에 비해서 실력이 떨어집니까?"
"그것은...... 후우, 그렇지, 선조들에 비하면 우리의 기술력은 변변찮을 뿐이지."
"태생적으로 불가능해요?"
"그건 결코 아닐세!!"
격한 외침에 내가 고개를 돌려 다른 드워프들을 바라보았다.
좀 전까지 보이던 적의는 이미 사라진 후였다. 마치 새로운 무언가를 발견한 이들처럼 눈동자에 생기가 가득했다.
마치 희망을 찾은 것처럼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