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1
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
- 3권 20화
한 분기가 지나가는 것도 정말 순식간이었다.
그동안 정말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는 말을 체감할 만큼 바쁘게 움직였다.
골다 장로는 뛰어난 기술자인 만큼 적재적소에 인력을 배치하는 것부터 시작했다.
그들의 본래 목적은 이 영지의 시설 정비.
내 생각과 같은 생각을 했는지 영지의 현 상황을 들은 골다 장로는 특유의 드워프적인 센스를 발휘하며 기술자들을 배치하고 장정들을 풀었다.
물론, 그들만으론 손이 부친 게 현실이기에, 나는 작업 속도를 극한으로 끌어올려 줄 아티펙트나 연금술 도구, 혹은 인력을 아낌없이 지원했다.
그런 것들이 다 어디서 났느냐고?
영지에 모인 집단들이 대거 마탑이고 연금학파이고 신전, 상단인데, 무엇이 더 부족할까.
돈이야 한 영지가 보유하고 있는 양에 비해 너무 많기도 하고 지금도 계속해서 조금씩 뇌물 밑 작업을 하는 여러 단체 덕분에 모자랄 일은 없었다.
"여긴 이렇게 하고......."
"그쪽 방면은 좋은 수가 있소이다."
드워프들과 몇 날 며칠을 고민하며 영지의 발전에 대해 회의를 거듭한다. 시작 기준점을 높게 잡으면 잡을수록 좋았다.
누군가가 꼭 살고 싶게 만드는 그런 장소나 시설을 만들어둔다면 근처에 자리를 튼 상회들은 당연히 그에 뒤처져서 장사를 못 하는 상황을 방지하고자 자신들의 부지에도 비슷한 수준의 건물들을 세우려고 필사적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마탑이나 연금학파는?
자존심으로 똘똘 뭉친 집단이니 당연히 억지로라도 그 기준에 끼워 맞춰 수준을 올리겠지.
그저 가볍게 지부만 설립하려는 수작질을 원천에 차단해버리면서 영지의 질을 순식간에 올린다.
나름대로 제법 괜찮은 도전이었다.
물론, 그들이 내 예상대로 움직이지 않아도 상관은 없었다.
잃을 게 없으니까.
실제로 드워프들의 특수한 기술력 덕분인지 고작 판자를 덧대어 만든 간이 숙소들은 거의 철거 되고 임시적인 주택이 들어서기 시작하는 점도 있었다.
다만 문제는 다른 곳에서 벌어지기 시작했다.
바로 사람이 늘어나며 생기는 여러 문제에 대한 마찰이었다.
사람이 갑자기 늘어나면 당연히 여러 마찰이 생기기 마련.
영지민이 된 이상 차별은 있을 수 없기에 나름대로 고심해서 공정한 결론을 내려주고는 있지만 사람 사는 게 어디 계산대로만 흘러가던가.
결국 몇날 밤을 새워가면서 고생한 끝에 큰불은 껐지만 나는 이제는 자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게 되어버렸다.
"망할. 싸움이 더 편하겠네."
-지도자라는 존재는 본래 어려운 일이지.
"조선 시대 왕들이 왜 단명했는지 알 거 같다."
그리 말하면서 넓은 침대에 털썩 드러눕자 푹신한 감촉이 온몸을 감싸듯 느껴져 왔다.
연금술사 학파에서 최근에 만들어낸 인체공학적인 침대라고 했던가. 그 크기부터가 왕족답게 어마어마한 크기다.
이정도 수준이면 지구에서도 꽤 상등품의 침대나 다름없었다.
푹 쉬고 싶다.
어두운 방 안에 말없이 누워 팔로 눈을 가린 채 한숨을 내쉬고 있던 찰나였다.
"흐응......."
아무도 없어야 할 이 방안에 어째서인지 모를 작은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반사적으로 벌떡 몸을 일으킨 나는 곧 침대의 중앙 쪽 이불 속에 무언가가 웅크리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
담담하게, 그저 아무런 말도 없이 굳어버린 나는 미묘한 표정으로 꾸무럭거리는 그 작은 무언가를 한참이나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29. 자식을 낳았으면 책임을 져야지.
사람.
하지만 어른이라고 하기엔 굉장히 작은 체구라는 게 확연히 느껴질 만큼 이불 위로 솟은 굴곡은 작았다.
"내가 방을 잘못 찾았나?"
-그럴 리가.
그럴 리 없다고 여기면서도 나는 눈을 가늘게 뜨며 곧바로 마석등을 점화시켰다.
그러자 어둑하던 방이 환하게 빛나며 그 형체가 드러났다.
사람 7~8명은 누워 잘 수 있을 것 같은 침대의 중앙에 분명히 누군가가 들어가 꼬물거리고 있다!
가끔 내 방에 이렇게 쳐들어오는 이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무슨 소리냐 하면 뇌물이 꼭 돈이라는 보장은 없다는 소리였다.
이른바 성 상납.
드워프 마을에서 돌아온 후부터 약 2개월 정도가 더 흘렀다.
달의 풀 잎사귀가 한 번이 아니라 지속해서 재배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한 단체들은 나를 필요 이상의 비즈니스 파트너로 판단한 듯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이것이었다.
이놈의 왕권 체제가 뿌리 깊게 박힌 세상에선 실상 그리 희귀한 일도 아니었기에 별일도 아니라지만 내게는 달랐다.
딱히 마음이 동하지도 않는 여자를 안는 취미는 내게 없으니 말이다.
고자냐고?
회랑에서 받은 주입식 교육의 부작용이리라.
[데이비! 좆을 좆대로 놀리다간 이 회랑에서 빠져나가는 한이 있더라도 네 좆을 잡아 찢어버릴 거야. 알아들었어? 누나 한다면 하는 성녀야.]
배덕한 성녀님의 경고는 생각보다 묵직하다.
최초의 성녀라는 사람이 언어에 필터링이 그렇게 안 되어서야.
처음엔 다른 영지에서 데려온 유명한 창부들로 시작했다.
하인스 영지는 이런 부류의 사업은 거의 없는 편이었으니 말이다.
어리고 예쁜 소녀들을 침실로 밀어 넣는 그 범인은 각양각색으로, 솔직히 누가 그랬는지 구태여 캐낼 이유도 필요성도 없었다.
그저 묵묵히 돌려보냈다.
하지만 이후엔 좀 더 위치가 있는 인물, 즉, 귀족가의 자제나 마법사나 학자의 제자들이 직접 밤에 찾아오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물론, 모조리 쫓아내 버렸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매번 쉬고 싶은데 이런 식이면 곤란한 탓에 나는 결국 한 가지 결단을 내려버렸다.
한 번만 더 보내면 거래고 나발이고 다 엎어버릴 거라고.
꽤 격한 반응이지만 제법 효과는 좋았다.
그 이후부터는 찾아오는 이가 없어서 나름대로 꿀 같은 휴식시간이었는데.......
"혹시 이 양반들 내가 소아성애자라 여자들을 들이지 않는 거라고 생각한 건가?"
-후훗.
의미심장한 웃음을 띠는 그녀의 모습에 나는 생각을 멈추고 곧바로 이불을 휙 걷어 넘겨버렸다.
그러자 이불 속에 있던 무언가가 드디어 정체를 드러냈다.
"후우......."
예상대로 들어맞았다.
반짝거리는 붉은 머리카락을 가진 소녀는 외관에서부터 굉장히 앙증맞고 귀여운 소녀였다.
소녀는 말끔하고 순수한 느낌을 주는 흰 원피스를 입고 있었다.
나이는 고작 5~6살 정도 되었을까.
아직 젖살도 채 빠지지 않은 듯 통통한 볼살 하며 꼬물거리는 작은 손까지.
길을 걸으면 웬만한 이라면 한 번쯤은 귀엽다며 돌아볼 만한 그런 아찔한 귀여움과 귀티를 보유한 꼬마 소녀였다.
성인이라고 하기엔 너무 작은 체구여서 아이일 거라곤 예상했지만 이 작자들은 내가 여자를 안지 않으니 고자거나 소아성애자 정도로 착각한 모양이었다.
"으응......."
잠에 빠져 있었는지 잔뜩 웅얼거리던 소녀가 천천히 눈을 뜬다.
그러자 마치 깊은 무언가를 보는 듯한 맑고 반짝거리는 붉은 눈동자가 내 눈에 들어왔다.
"꼬마야, 넌 누구니?"
일단 어른도 아니고 아이가 무엇을 알겠는가. 나를 소아성애자로 착각한 빌어먹을 양반들은 나중에 찾아서 필히 조지리라 생각하며 내가 조심스레 물었다.
"우웅......."
조막만 한 손으로 눈을 비비며 일어난 소녀는 멍한 얼굴로 한참 동안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저 묵묵히,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모를 얼굴로 나를 올려다보던 소녀는 곧이어 나를 정확히 인지한 듯 눈을 살짝 크게 떴다.
그리고는 환하게 웃어 보였다.
"꺄핫!"
"컥!"
-심장에 좋지 않아.......
동시에 내가 비틀거렸고 페르세르크가 허공에서 흐느적거리며 내 어깨 위에 올라앉았다.
"이 빌어먹을 작자들이 아직 아무것도 모르는 순수한 애를 수청 대상으로 밀어 넣어?! 에이미!"
화가 난 내가 결국 소리치고 말았다.
분명 누구도 들이지 말라고 했을 텐데 이걸 그냥 방치했다고?
내 외침에 마치 기다렸다는 듯 문이 벌컥 열리며 에이미가 후다닥 뛰어들어왔다.
그래도 내가 돌아온 후부터는 녀석의 일거리가 줄어들어 살맛이 나는지 눈가에 있던 다크서클도 제법 사라져 있다.
"저...... 저하! 무슨 일로......."
급히 달려들어 온 에이미는 험악한 표정으로 서 있는 나와 침대 위에 있는 작은 아이를 보더니 눈을 부릅떴다.
"저, 저하, 설마!?"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내가 분명히 사람을 들이지 말라고 했을 텐데?"
내 말에 의심스런 눈동자로 나를 보던 에이미가 눈을 크게 떴다.
"드...... 들이지 않았어요! 저하께서 데려오신 게 아...... 니셨나요?"
정말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말하는 그 모습은 진실이었다.
어지간한 일은 그녀에게 모두 보고가 올라갈 텐데 그녀가 몰랐다는 건 사용인 중 누군가가 뇌물을 먹고 에이미 몰래 방안에 소녀를 데려다 놓았다는 것밖에 가능성이 없었다.
그게 아니라면 이 아이가 홀로 이곳으로 몰래 들어왔거나, 무엇이 되었건 그리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내가 너무 우습게 보였나?"
저조해진 기분에 방싯방싯 웃고 있는 소녀를 보고 있자 에이미가 사색이 된 얼굴로 후다닥 뛰어가더니 소녀를 안아 들고는 내게서 물러섰다.
"죄...... 죄송합니다 저하...... 제가 확실하게 지켰어야 했는데...... 분명 저하가 들어오시기 전까진 아무도 없어서......."
아주 찰나의 틈까지 공략했다.
나를 향해 방긋방긋 웃으며 헤실거리는 소녀는 이윽고 내게 양손을 뻗었다.
그리고는 손뼉을 짤박짤박 치며 꺄르륵 웃어 보였다.
"아부아!"
"엥?"
"엉?"
소녀의 외침에 에이미와 나, 그리고 페르세르크의 몸이 우뚝 굳어버렸다.
어눌한 억양이지만 녀석이 나를 뭐라 불렀는지 모를 만큼 바보는 아니었다.
달그락.......
이윽고 시간이 멈춘 것처럼 굳어있던 내 시선 너머 벽 쪽에 비치된 벽장이 천천히 열리며 푸른 눈동자를 가진, 이 붉은 머리 소녀와 아주 쏙 빼닮은 작은 소녀가 조심스레 고개를 쏘옥 내밀어 보였다.
"......."
내 침묵은 생각보다 오래 지속되었다.
* * *
두 개의 달이 반짝거리던 밤이 훌쩍 지나 다시금 해가 떠올랐다.
"꺄악! 아가씨! 마구 뛰시면 안 돼요!"
"꺄하하하하!"
신이 난 누군가의 웃음소리가 들려와 절로 잠에서 깨버렸다.
침대에 드러누워 멍한 얼굴로 천장을 보던 나는 곧 한 손으로 눈두덩을 감싸며 한숨을 내쉬었다.
"와, 이건 진짜 예상 못 했는데."
스스로 멍청했다고밖에 생각할 길이 없었다.
그냥 처음부터 소녀에게 정보확인 능력을 사용하면 되었을 것을.
그리하면 적어도 이렇게 정신없이 일이 흘러가진 않았을 텐데.
-글쎄, 본녀는 그것보다 그대가 양심이 콕콕 찔려줬으면 한다만.
멍하니 드러누워 있는 내 곁으로 날아온 페르세르크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했다.
"한번 지은 이름을 어떻게 바꾸라고."
내가 투덜거리듯 말하기가 무섭게 고요하던 침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붉은 머리카락을 길게 늘어뜨린 작고 앙증맞은 소녀가 뛰어들어왔다.
여전히 같은 색이지만 좀 더 고급진 디자인의 흰색의 원피스를 입고 있는 소녀는 주변을 휙휙 둘러 보더니 곧 나를 발견했다.
그리고는 심장에 좋지 않은 환한 미소를 띠며 내게 달려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