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2
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
- 3권 21화
"꺄하하핫! 아부아!"
"그, 그래......."
어색하게 웃으며 소녀를 안아 든 내가 이를 악물고 억지로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침부터 뭐가 그리 기분이 좋은 거야."
"에헤헤헤! 아부아! 아부아!"
설마 검이 인간형으로 실체화하는 권능까지 가지고 있을 줄 누가 알았는가.
신검 칼디라스가 제 자아를 형상화 시켜 누군가에게 보일 힘을 지니고 있다고는 알고 있지만 검 자체가 거대한 에너지 덩어리가 되어 인간의 형태로 변하는 건 상식 밖의 일이었다.
명칭 : 홍단이
상태 : 제작 완료.
형태 : 검날이 넓은 양날형 환두대도.
길이 : 88센티.
너비 : 6센티.
계약자 : 데이비 올 라운
완성도 : 100%
세부사항. :
-자아가 각성함.
-모종의 이유로 자아가 일찍이 각성한 탓에 자아의 의식이 상당히 어려져 있음.
-제작자는 다르지만 혼신의 힘을 다해 마무리작업을 마친 제작자 데이비 올 라운을 부모로 여김.
-시간이 흐르면 자아가 조금씩 성장함.
-매우 귀여우니 취급 주의.
"......."
-보...... 본녀의 의지는 아니야!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소리치는 페르세르크의 말에 내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별의별 일을 다 겪어봤다 자부하는 편이었다.
극한의 오지에 맨몸으로 던져져 살아남은 적도 있고 당장 목이 날아가도 이상하지 않을 수많은 전투에서도 살아남았다.
고대저주를 이용해 이롭게 만들어보기도 했고 영지를 순식간에 발전시키는 기반도 만들어봤다.
하지만.
내가 만든 검이 인간의 형태가 되어 나를 부모로 여긴다는 건 결단코 예상해 본 적도, 겪어본 적도 없다.
"흐헤. 흐헤헤헤."
품에 안겨 꼬무락대며 좋아라 하는 이 작은 소녀의 모습에 나는 고개를 들어 숨을 헐떡거리는 에이미를 바라보았다.
"하아...... 하아...... 죄송해요 저하...... 아가씨께서...... 하아...... 너무 활발하셔서......."
조그마한 게 누가 신검 급 검이 아니랄까 봐 기본적인 체력이 어마어마하게 좋다는 것을 척 봐도 알 수 있었다.
외향은 아이지만 그녀의 내부는 수천 년간 쌓여온 기의 덩어리, 그러니까 엄청난 에너지 덩어리일 테니 말이다.
"아침부터 고생 많다......."
"아...... 아니에요."
떨떠름하게 나와 홍단이를 바라보던 에이미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조용히 물러났다.
어지간한 일로는 나를 의심하지 않는 에이미가 저렇게 볼 정도면 다른 이들도 황당함에 입을 다물지 못할 거다.
내게 안겨 재롱을 피워대는 이 붉은 머리 소녀의 행동 때문일까.
문득 소매를 당기는 작은 힘에 고개를 돌려보니 미묘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며 손을 뻗고 있는 푸른 머리칼의 작은 소녀도 보였다.
"처...... 청단아."
"아...... 아부아."
이 녀석은 또 언제 들어온 것인가.
억양이 어눌한 건 홍단이와 같았다.
아니, 쌍둥이답게 두 녀석의 외관은 푸른색과 붉은색의 눈동자와 머리카락을 가진 것을 빼면 구분이 힘들 만큼 쏙 빼닮았다.
유일하게 알아볼 수 있는 것이라면 목소리와 느낌 정도일까.
그래도 녀석들을 만든 게 나인 덕분인지 똑같이 생겨도 구분할 수 있는 미묘한 상황이었다.
정말 부모라도 된 건지.
절로 흘러나오는 한숨을 억지로 누른 채 청단이를 안아 들자 꺄륵 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대놓고 기뻐하는 홍단이와 부끄러워하면서도 발그레해진 얼굴로 내게 꼭 안겨있는 청단이.
여전히 심장에 좋지 않다.
"아가씨, 아직 머리의 정돈이 다 되지 않았어요."
"시이러!"
에이미를 향해 혀를 쏙 내밀며 내게 파고드는 녀석들의 모습에 그녀가 구원을 요청하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홍단아. 말 잘 듣고 그래야지."
일단은 내 말은 잘 듣는 편이니 적당히 타일러주자 녀석이 입을 삐쭉이더니 내게서 훌쩍 빠져나가 에이미의 손을 꼬옥 잡았다.
"하아......."
그러자 좀 전까지만 해도 숨을 몰아쉬던 그녀가 얼굴을 발그레하게 붉히며 어쩔 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어 보였다.
"저...... 저하, 아가씨들이 너무 귀여워요! 도대체 어디서 데려오신 건가요?"
아무리 그래도 내가 낳았다고 판단하진 않아서 다행이다.
정확히는 내 손을 타고 태어난 녀석들이 맞긴 하다만.
"이 녀석들에 대해서 누가 알고 있어?"
내 말에 그녀가 조용히 손가락을 까딱이더니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일단은 영주성 내부에 있는 사용인 몇몇만이 알고 있어요. 홍단이 아가씨께서 너무 활발하신 바람에......."
결국 밤새 조용하다가 아침이 되기가 무섭게 요리조리 뛰어다니면서 보였다는 소리다.
"아직 나와 관련되었는지는 모르지?"
"네? 아아...... 네."
"그럼 됐어. 일단 내 머릿속이 정리가 될 때까지만 이 일은 함구해. 입단속 잘 시키고."
내 말에 그녀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면서도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이 녀석들이 평범한 아이였다면 이렇게 고민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벌써 위가 쓰려 오는 기분에 나는 억지웃음을 지으며 조용히 말했다.
"일단 하고 싶은 건 다 하게 해줘. 밖에 나가는 것만 빼고."
그 말에 에이미가 맡겨만 달라는 듯 잔뜩 흥분한 얼굴로 고개를 연신 주억거렸다.
* * *
"자. 그럼 확인부터 해보자."
비장한 내 말에 침대 위에 털썩 주저앉은 두 명의 꼬마 소녀가 눈을 반짝거리며 빛낸다.
"우선 이것부터 한번 먹어볼래? 쿠키라고 하는 거야."
"쿠우키이?"
"그래, 쿠키. 맛있는데 한번 먹어볼래?"
"꺄핫!"
"아우!"
내가 손에 쥐고 있던 작은 쿠키를 하나씩 건네주자 홍단이와 청단이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냄새를 킁킁 맡아보더니 눈을 반짝거리며 그대로 입안에 홀라당 집어 넣어버렸다.
검이 어떻게 음식까지 먹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일단 섭취 행동은 가능하다는 건 확실한 듯 보였다.
페르세르크의 정보확인 능력은 단편적인 정보는 알려주지만 이런 자세한 내막은 직접 확인해야 하는 불편한 점이 있다.
-검이 취식도 가능하다니.
"잠도 자고 먹을 것도 먹고. 에고니까 감정이 있는 건 안다만......."
작은 입을 쉴 새 없이 오물거리는 아이들은 벌써 쿠키를 다 먹었는지 우물쭈물하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음?"
"아부아......."
"쿠우키이."
더 달라는 뜻인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작은 아이들을 가르치는 느낌이라 기분이 묘하기 짝이 없다.
"안 돼. 너무 많이 먹으면 이가 썩는다."
"우우......."
내 말에 대놓고 실망하는 홍단이와 말은 못해도 서운하다는 듯한 시선을 보내는 청단이였다.
"흑...... 흐흑."
급기야 아이들의 최고 무기인 눈물까지 그렁그렁 매달며 나를 올려다보기 시작했다.
"안 돼."
"으으......."
"아...... 안 돼."
"흐끅...... 흑......."
"안 돼...... 안 돼...... 돼...... 돼...... 그래, 선심 썼다! 하나만 더 먹자!"
아, 이거 벌써부터 교육이 쉽지 않다.
"꺄앗!"
그 말에 신이 난 듯 두 녀석은 곧장 내게 안겨와 방긋방긋 웃어댔다.
"젠장......."
당연히 아이들이 보지 못하게 쓴 표정이 지어질 수밖에 없었다.
-너무 오냐오냐하면 버릇이 나빠질 텐데.
'검인데 설마 그럴라고.'
-지금 보아하니 이 아이들은 말 그대로 어린아이와 흡사해, 그대가 어떻게 교육하냐에 따라서 성격이 바뀔 수도 있겠지.
"흐음......."
-푸훕, 웃기지 않은가. 어떻게 교육했냐에 따라 성검도 마검도 될 수 있다니.
뭐, 애초에 성검 마검을 구분하는 기준점은 검이 아니라 사용하는 인간이겠지만 말이다.
페르세르크의 말은 확실히 일리가 있었다.
"그럼, 제일 중요한 걸 확인해 보자고."
결과적으로 이상하게 느낄 만한 점은 찾을 수 없다. 마냥 아이들처럼 내버려두면 정말 순수한 아이라고 여겨도 문제는 없어 보였다.
"자 그럼, 홍단이하고 청단이. 본래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겠어?"
일단 말은 잘 알아듣는다.
이상하게 발음이 어눌하긴 하지만 그건 실체화한 지 얼마 안 돼서 그런 거겠거니 하는 나였다.
내 말에 고개를 갸웃거리던 두 꼬마는 곧이어 말뜻을 이해하기라도 한 듯 나를 포옥 안았다.
따스하고 폭신한 기분에 절로 미소가 피어오르기를 잠시.
곧 온몸에 빛을 내뿜은 녀석들의 형체가 서서히 흐려지기 시작하더니 이내 완전히 사라지며 두 자루의 검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붉은 머리칼의 앙증맞은 홍단이는 붉은 검으로 변했고 수줍은 표정을 짓고 있던 청단이는 곧 푸른 검으로 변했다.
그래도 본체는 검이라 이건가, 검으로 변하는 것에 큰 거부감 같은 것을 느끼진 않는 듯 보인다.
"흐음......."
완전히 변한 것을 확인하고 난 후에야 나는 검을 가볍게 휘둘러 보았다.
다행이라고 할까, 자아가 각성하면서 검의 성능이 떨어지거나 하진 않는 듯 보였다.
아니, 오히려 내부에 잠긴 그 힘의 밀도가 좀 더 짙어졌다고 봐도 무방했다.
형태변화도 자연스럽고.
마치 아이가 스스로 배밀이와 뒤집기를 하듯.
녀석들은 제 모습을 변형시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끼듯 상당히 익숙하게 해냈다.
"됐다. 이제 돌아와도 돼."
내가 쿠키를 꺼내 들며 말하자 언제 검이었냐는 듯 다시 자그마한 소녀의 모습으로 돌아온 녀석들은 신이 난 얼굴로 나를 향해 손을 뻗어왔다.
"아부아!"
"쿠...... 쿠키이 주...... 주세여!"
아주 그냥 발음이 새는 것도 잊고 말을 하려고 필사적이다.
절로 흘러나오는 웃음을 숨기지 못한 채 과자를 쥐여주자 녀석들이 한껏 진지한 표정으로 쿠키를 조금씩 부숴 먹기 시작했다.
아껴먹으려는 심산이다.
"그냥 둘 순 없으니 일단 내가 보호한다고 공표는 해놔야겠네."
-오히려 그대의 딸이 아닌가, 양녀가 맞겠지.
"누구 혼삿길 다 막을 일 있냐?"
-애초에 그럴 생각 아니었나?
페르세르크의 물음에 짧게 혀를 찬 내가 녀석들을 바라보았다.
그냥 다른 관계였다면 내가 보호하는 아이들 정도로 넘길 수 있지만 검이라 해도 자아가 생긴 내 첫 작품들이 아닌가.
나를 아빠라 여기고 있는 녀석들의 기대에 어느 정도 부응하는 것도 나쁘진 않아 보인다.
일단은 내 손에 의해 태어난 아이들이니 책임을 지는 건 맞다만.
-왕족은 입양에 관해서도 신중해야 함이지.
"그렇겠지."
그것도 아직 결혼조차 하지 않은 남자가 혈통도 알 수 없는 아이를 두 명이나 입양한다 하면 아주 난리가 날 것이다.
이미지의 추락부터 해서 별 같잖은 소문까지 나돌겠지.
정작 본인은 신경도 쓰지 않는데 주변에서 난리가 날 것이다. 좋은 예로 오지랖이 아주 망망대해 수준인 이 나라 귀족들이 있다.
"됐어, 뒤에서 씹어대고 싶으면 씹어대라지. 안 그래도 할 일도 많은데 그런 것까지 신경 쓸까."
영지를 만들고, 힘을 회복하고.
실상 천 년에 가까운 세월을 회랑에서 보내다가 뜬금없이 돌아온 내게 뚜렷한 목적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유일하게 생각나는 것이라면 살아간다는 키워드 하나뿐.
전생 현생 합쳐서 오래 살아보지 못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