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6
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
- 3권 25화
츠츠츠츳!!
츠팡!!
거대한 스파크와 함께 고요한 영지의 광장 위로 빛무리가 생겨났고 이후 주변이 보이기 시작했다.
오르뎀 영지.
하인스 영지와는 상당한 거리에 있는 곳이며 소속국가 없이 초원과 숲을 누비며 약탈을 일삼는 화적떼 부족이 활동하기 시작한 지역이다.
철광산과 곡창지대가 있던 나름대로 유서 깊은 백작가의 가문이 있는 곳이기도 했다.
최근 들어 화적떼가 기승을 부리기 시작하면서 영지의 재정이 휘청이고는 있지만 그래도 제법 크고 발전한 영지라는 사실은 변치 않았다.
물론,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는 분위기가 상당히 침체되어있었지만 말이다.
"하하...... 꼴이 말이 아니죠, 오라버니?"
"그새 또 습격이 있었나?"
감각을 증폭시키자 순식간에 고약한 살 타는 냄새가 풍겨온다.
특유의 단백질 타는 냄새는 사람을 태우는 냄새와 아주 흡사했다.
겉보기엔 그저 조용한 영지이지만 미묘하게 분위기가 가라앉아 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잘도 이렇게 밝게 자라준 게 기특할 지경이었다.
내 말에 미묘한 표정을 지은 윈리가 눈을 살짝 찌푸렸다.
"그럴 리가...... 화적떼는 당분간 습격이 없을 텐데......."
무슨 일이 있었는지 또 대량의 사람을 화장한다고 판단했는지 윈리가 혼란스레 중얼거렸다.
"분쟁으로 인해 사망한 게 아닌 이상 사람을 이렇게 다수 태우는 경우는 딱 하나밖에 없는데."
착 가라앉은 눈으로 내가 한편을 가리켰다.
그곳에는 붉은 갑옷 안으로 전신을 감싼 붉은 천을 덮어쓴 인물들이 시신으로 보이는 영지민들을 수레에 담아 옮기고 있는 모습이었다.
"이...... 이게 도대체......."
명백히 그녀가 알던 상황과는 확연히 달랐던 모양일까.
덜덜 떨리는 동공을 주체하지 못한 채 그녀가 중얼거렸다.
"이거, 이거 윈리 왕녀님이 아니십니까, 돌아오셨군요."
그때였다.
기사들 사이에서 외알 안경을 쓴 한 사내가 천천히 걸어 나와 고개를 숙여 보인 것이다.
"중앙 질병 관리단에서 파견되어 나왔습니다. 링튼 백작이라 합니다."
그 미소는 한없이 선해 보였지만 어째서일까, 미묘하게 어긋난 느낌이 든다.
"듣던 것보다 훨씬 아름다우시군요. 역시 소문은 으레 과소평가 되는 경향도 있는 모양입니다."
"죄송하지만 현재 다급한 사안이 있습니다. 담소는 후에 나눠야 할 거 같네요."
"하하, 저도 그리하고 싶지만 애석하게도 상황이 상황인지라."
어색하게 웃어 보인 그가 사람 좋아 보이는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의 외견상의 이미지는 고풍스러운 학자 같은 느낌이었다.
"우선...... 영지에 이리 말없이 찾아와 기사단원을 활보하게 한 점에 대해선 사과드리겠습니다."
"......."
복잡한 시선으로 침묵하고 있는 윈리를 바라보던 그가 눈을 가늘게 떴다.
"우선, 드시지요. 왕녀님께서 거처하실 왕성은 성국의 마법 아티펙트로 현재 방역처리가 끝난 참입니다."
그의 말에 윈리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 * *
바리스는 영지에 있지 않았다.
무슨 일인지 자리를 비웠다는 소리였다.
결국 주인 없는 영주성에 그들이 멋대로 들어와 점거하고 있는 꼴이다.
무슨 말이냐고?
아주 개 같은 상황이라는 소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윈리가 이 이상 정식으로 항의하지 못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후우, 불편하시더라도 이해해주십시오. 몸에 좋은 약재를 달여놓은 차입니다."
"......저는 영주의 권한을 링튼 백작님께 넘겨드린 적이 없는 거로 아는데요."
"하하......."
"오르뎀 영지의 영주는 바리스입니다. 하지만 바리스가 부재중이라면 그 권한은 제게 있어요."
또박또박 당당하게 제 의사를 표현하는 윈리의 얼굴엔 불쾌함이 가득했다.
"알고 있습니다. 이렇게 찾아와 저희가 멋대로 요구하는 건 뻔뻔한 일이지요."
그야말로 집주인이 집에 들어왔는데 강도가 집주인인 척하는 꼴이랑 무엇이 다를까.
"하지만 좀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저희는 중앙 질병 관리단에서 나왔습니다."
"......."
중앙 질병 관리단.
이름 정도는 들어본 바 있었다.
대륙을 제패하고 있는 3 제국 황제의 직인을 받아 특별 권한을 가진 특수한 다국적 집단이다.
"확실히, 중앙 질병 관리단의 주목적은 대륙에 퍼져 무상 의료활동을 하는 취지였지요. 현명하신 3 황제 폐하께서 선의의 목적으로 창단하신 단체입니다."
"익히 들어 알고 있어요, 다만, 그 질병 관리단 분들이 영지에서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계신 거죠?"
윈리의 질문이었다.
그녀는 좀 전부터 미묘하게 느껴지는 불안함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었다.
-정보확인 권능도 쓰지 않고 어떻게 아는 게야?
'윈리는 불안할 때마다 오른손으로 치맛자락을 꽉 쥐는 버릇이 있거든.'
-그 정도면 여동생 사랑도 병이네, 병.
'내 동생 귀엽다고 아끼겠다는데 무슨 상관이래.'
윈리는 확실히 외향적으로만 봐도 외모 점수가 높은 다른 귀족 중에서도 상당한 편에 속한다.
동글동글하고 큼지막한 눈동자와 오밀조밀한 이목구비는 라운 왕국의 다른 귀족 영식들의 호감을 익히 사고 있었던 바 있었으니 말이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국제 행사 때문에 찾아왔던 다른 국가의 왕자가 그녀에게 반해 혼담을 넣었다가 거절당했다는 말도 들은 바 있었다.
이유는 나도 알 길이 없지만 말이다.
-쯧쯧.
내 설명에 페르세르크가 한심하다는 듯 쳐다보았지만 가볍게 무시해 넘겼다.
"왕녀님도 알고 계시겠지만 현재 이 영지엔 악랄한 병이 나돌고 있습니다. 현재 저희 질병 관리단에서는 그 병을 악마의 피라 부르고 있지요."
"악마의...... 피."
"예, 발명자의 온몸에 검푸른 반점이 돋아나기 시작하며 종래엔 피를 토하고 죽는 악질적인 병입니다. 게다가 전염성도 어마어마하기로 유명한 아주 악랄한 병입니다."
그의 설명에 윈리의 낯빛이 창백하게 질렸다. 그도 그럴 것이 그녀가 내게 살려달라 부탁했던 호위기사 포트나의 증상이 바로 악마의 피라는 병과 같았으니 말이다.
"이...... 이럴 때가 아니에요! 오라버니! 빨리 포트나를!"
다급해진 윈리가 울상을 지으며 내게 도움을 요청했다.
"이런, 데이비 왕자님께 인사가 늦었군요. 소문은 들고 한 번쯤 뵙고 싶었습니다. 성흔을 발현하시고 영지에서 달의 풀 잎사귀를 재배하는데 성공하셨다구요."
"어쩌다 보니 여건이 되어서 말이죠."
담담한 내 대답에 그가 과하게 허허 웃어 보였다.
"세상에 원인 없는 결과는 없는 법이지요. 다 왕자님께서 뛰어나셔서 그런 거겠지만서도요. 허허 이제 보니 대륙에서 뛰어난 초신성 분들이 다 모이신 것 같군요."
"링튼 백작님, 죄송하지만 일단 급한 일이 있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야 할 것 같네요. 린디!"
이윽고 그녀가 급히 소리쳤지만 그녀의 시녀로 추정되는 린디라는 여성은 나타나지 않았다.
"죄송합니다. 영주성의 사용인들은 물론 기사들도 현재 특별 격리 중입니다."
"뭐라고요?"
쌍심지를 켜고 분노하는 그녀의 말에 링튼이 손수건으로 땀을 닦아냈다.
"어쩔 수 없는 처사였습니다. 악마의 피는 전염성이 빠른 병입니다. 관리를 잘해준다면 피할 수 있지만 혹여라도 미량 감염되었다면 걷잡을 수 없는 사태가 벌어집니다. 부디 이해해주시길."
고개 숙이는 그의 행동에 윈리가 창백해진 얼굴로 우물쭈물했다.
"하...... 하지만 이건 엄연히 월권행위로......."
"알고 있습니다. 뻔뻔한 것 또한 사실이지요. 하지만 왕녀님. 이것은 국가 연합의 조약에 따라 행동한 사안이라는 점을 이해해주시길 바랍니다. 위급상황 시 영지의 권한을 위임받는 건 과거부터 있었던 전례입니다."
"그리고, 애석하지만 이 병은 신성력의 고하를 떠나서 치료가 불가능합니다. 아예 먹혀들지 않아요."
"그럴...... 수가......."
"해서 저희들이 나선 것입니다. 그러니 부디 맡겨주십시오. 반드시 차도가 있는 의술을 행하여 좋은 소식을 전해드릴 테니."
그의 말투는 마치 거짓으로 헌신하는 선의와 같았다.
* * *
대화를 나누는 그와 이야기해 본들 확인할 수 있는 건 없다.
직접 확인을 해야 하니까.
적당히 핑계를 둘러대어 치료소에 들어서자 퀴퀴한 냄새가 내 코를 찔러왔다.
"으으......."
"아...... 아파......."
치료소의 모습은 처참했다.
끔찍한 신음, 여기저기서 들려오는 흐느낌.
이미 병을 견디지 못하고 죽어버린 영지민들까지.
처음엔 윈리의 호위기사 포트나 한 명이었지만 고작 며칠 사이에 수많은 영지민들이 같은 병을 앓기 시작했다.
붉은 제목을 머리끝까지 덮어쓴 병사들은 죽은 영지민들을 들것에 실어 밖으로 날랐고 모두 한자리에 모아 쉴 새 없이 화장하고 있었다.
-시체 타는 냄새는 너무 역해. 머리가 지끈거려.
'나도 그래.'
담담하게 말하며 내가 내부로 걸음을 옮겼다.
본래라면 내가 출입하는 건 불가능하지만 신성 마법을 사용할 줄 알고 윈리의 간곡한 요청에 허가된 일이기도 했다.
치료소는 수많은 천을 덧대어 만든 밀폐공간이었는데 각 증상이 다른 영지민들을 따로 격리하여 치료활동을 하고 있었다.
아니, 이건 치료활동보다는.
'최악의 상황을 막기 위한 격리에 가깝네.'
참혹하긴 하다만 어떤 의미로는 현실적인 대안이다.
-.......
내 중얼거림에 페르세르크는 입을 틀어막은 채 질린 표정으로 주변을 둘러본다.
-본녀의 생전에도 이런 끔찍한 병은 없었거늘.......
"원래 있으면 안 되는 병이야."
-그건 무슨 소린가? 게다가 좀 전부터 이상한 냄새가 풍겨오는군.
그녀의 중얼거림에 내가 포트나가 누워있는 특수 격리소에 들어섰다.
지독하던 기묘한 향이 더욱 짙어진다.
-윽.......
절로 인상을 찌푸린 그녀와 다르게 담담하게, 또는 굳은 표정으로 걸어 들어간 나는 곧 침대에 결박되어 시체처럼 누워있는 한 여성을 발견할 수 있었다.
포트나.
바로 윈리가 살려달라 애원하던 그 호위기사였다.
"말푸름 비엽꽃 냄새."
이윽고 침묵하던 내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말푸...... 뭐?
"말푸름 비엽꽃, 이 세계에서는 아마 토르타트 꽃이라고 불릴 거다."
-처음 들어보는 꽃이군.
"극지방에서만 자라는 희귀 꽃이야 보통은 거의 보기 힘들기도 하고."
미묘하게 불쾌하면서도 미묘하게 중독성이 있는 향이었다.
"토르타트 꽃은 극독의 꽃이거든."
꽃에서 채취한 액의 한 방울이면 수백 명을 죽일 수 있는 맹독이다.
어쌔신들이 좋아할 만한 꽃이긴 하지만 이렇게 재배하기도 어렵고 구하기도 힘든 독이면 아무리 효능이 좋아도 사용하지 못한다.
말없이 다가간 내가 천천히 그녀의 손목에 손을 올려 맥을 짚었다.
둥...... 둥둥...... 둥둥둥. 둥.......
아주 미약한 맥이 제멋대로 뛰는 게 손끝을 타고 빠르게 퍼져왔다.
이어서 나는 마나까지 끌어올려 그녀의 전신을 파악하듯 퍼뜨렸다.
CT나 MRI 같은 고급 성능의 장비가 없으니 마나를 이용해서 확인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것도 보통 마나 컨트롤로는 어림도 없는 행동이지만, 내가 누구이던가.
그래도 마법사의 신이라 불리던 오딘의 지식을 모조리 배운 몸이다.
죽은 게 아닌가 싶을 만큼 창백하지만 살아는 있다는 듯 맥박이 제 존재감을 여지없이 드러냈다.
영지민들보다 훨씬 빨리 병에 노출된 것으로 알려진 그녀지만 다른 이들이 죽어 나가는 이 순간에도 그녀는 살아있었다.
"39.7도. 당장 뇌세포 다 익어버리겠네."
그녀의 피부는 시체처럼 차가웠다.
하지만 그녀의 장기는 극도로 뜨거워져 있는 언벨런스한 상태였다.
살아있는 게 신기할 정도로 상황은 좋지 않았다.
참혹한 증상, 경위, 그리고 사망방식.
처음 윈리에게 상황을 들었을 때도 예상은 했던 일이지만 미묘하게 착잡한 한숨이 나올 지경이었다.
아마 그녀가 일반인이었다면, 내가 도착했을 땐 이미 사망했으리라.
"이해할 수가 없네, 이 병이 이 세계에 있을 리가 없는데......."
-그건 무슨 말인 게야? 본녀도 좀 알려주어.
"다른 세계에서 성행했던 병이라고, 특수한 상황에서 만들어진 바이러스이기 때문에 감기나 암, 백혈병 흑사병 같은 그런 케이스의 병이 아니야."
이 병은 엄연히 유전자 조작으로 만들어진 바이러스다. 그러니까 자연 질병이 아니라 생화학 테러라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병이라는 소리다.
정작 이 바이러스를 만든 작자들도 전부 이 병으로 뒈져버렸지만.
-만들어졌다고?
"Melting Acceleration Virus"
-메...... 멜팅...... 뭐?
"융해 가속바이러스, 사망과정도 악랄한데 전염성도 상당해. 경력상으론 한 번 발병해서 짧은 시간에 수백만을 죽인 균이야. 그리고......."
짧게 일축한 내가 눈을 감았다.
"치료제를 개발하는 데 10년이 걸린 병이고. 그동안 희생된 사람이 총 2억8천 명. 치료제가 개발되고 나서 살린 사람이 1,800만 명. 아무래도 빨리 항체를 만들어야 할 거 같다."
곧바로 근처에 있는 작은 날붙이와 관, 그리고 유리 시험관을 챙겨 들고는 날붙이에 신성력을 부여했다.
소독은 중요한 일이니까.
그때였다.
"뭐 하는 겁니까!!"
누군가의 경계 어린 목소리가 나를 막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