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8
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
- 4권 2화
"라운 왕국도 국가 연합의 소속이지요. 해서 자칫 이 일에 항거하면 3 제국을 적으로 돌리는 것은 물론이고, 국가 연합의 국가들. 게다가 자국의 반역으로까지 몰릴 수 있습니다."
쉽게 말해서 잘못 자극하면 핵폭탄이 터진다는 소리다.
"하지만 영지민들이 두려워하고 있어요."
"일단 그들이 도착한 건 오래되지 않았으니까요. 지금으로썬 그저 기다리는 수밖에...... 데이비 왕자님?"
문득 내가 침묵하고 있자 율리스가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불렀다.
"아. 예."
이에 상념에 빠져 있던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이곳을 지키고 있는 기사단은 멸재 기사단으로, 파견된 기사단장은 콜리오 백작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콜리오 백작이요? 그...... 동부 대륙 최강 제국인 린디스 제국의......."
"예, 황실 기사단장 중 하나이죠. 몇 년 전부터 은퇴했다고 들었는데. 이곳에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리 말한 그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일단은...... 맡겨보는 것도 나쁘진 않아 보입니다만......."
일단은 최고 의료단체이니 맡겨는 보지만 불안함은 쉬이 가지 않는 모양이었다.
"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이 위험한 곳에 두 분을 데려오지 않았을 텐데......."
자책하는 윈리의 모습에 나는 묵묵히 녀석을 끌어안고 등을 토닥여주었다.
"오라...... 버니?"
"걱정 마라, 잘 해결될 거다."
"네......."
적어도, 첫 단추는 끼웠다. 과정을 설명해본들 의미는 없는 일이니 지금부터가 중요하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내 목소리에 안도감을 찾은 듯 녀석의 떨림이 잦아들었다.
약속은 지키리라. 적어도 윈리는 내게 웃음을 주는 소중한 동생이다.
그런 녀석을 슬퍼하게 둘 생각은 없었다.
"그나저나, 나는 그렇다 치고 율리스 5급께는 완전히 민폐를 끼쳤네요."
내 말에 그가 손사래를 치며 하하 웃어 보였다.
"아닙니다. 말하는 걸 깜빡했는데, 실은 그 포트나라는 마법사분이 다름 아닌 적탑의 소속이더군요."
"아...... 네."
"저희 적탑 소속 마법사가 그런 중병에 걸려있는 상황이니 장로로서 상황을 지켜보는 건 당연한 일이지요."
일단은 성실한 성품의 사내이니 그렇다고는 생각한다. 실제로 정보확인을 사용해봐도 그가 진심으로 돕고 싶어 한다는 글귀가 적혀있다.
그런데, 어째서 다른 이유도 있어 보이는 것인지.
-정보확인 권능을 맹신하지 말아.
아무리 신의 힘 중 일부가 떨어져 나온 권능이라 해도 완벽할 순 없다고 한다.
* * *
-왜 그곳에 남아서 치료를 하지 않은 게야?
"거기 있어 봐야 아무 도움도 안 돼."
쿨한 내 대답에 페르세르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확실히 환자가 있다. 그리고 나는 그 병을 알고 있다.
그런데, 망설임 없이 내가 그들을 놔두고 돌아와 버렸으니 그녀로선 의아했던 모양이었다.
-게다가 이상한 진액만 챙겨왔군.
"이게 키포인트거든."
시험관 안에 든 액체를 가볍게 흔들며 내가 쓰게 웃어 보였다.
"바이러스라고 했잖아. 당장 치료할 순 있어, 직접 칼 대고 몸을 찢어서 질병의 근원을 찢어내는 거야."
-그럼 그렇게 하면.......
"확률은 반반, 목숨줄 붙이든가, 그 자리에서 죽든가. 침술로도 어느 정도 가능하긴 한데, 그건 다른 경우에만 해당하고."
그런 극단적인 선택은 현재로썬 옳지 않다.
"최소한 죽어 나가는 영지민들을 질병 관리단이 최대한 억제해주고 있다면 지금 시간이 있을 때 만들어놔야 해."
내가 하려고 하는 것은 간단했다.
항바이러스.
즉, 바이러스의 항체를 만드는 것.
이 세계에 존재하지 않던 병이다.
그렇다고 인간의 몸에 들어가서 자연 치유가 될 만큼 무른 바이러스도 아니다.
즉, 약을 만들기 위해선 이 수단이 전부라는 소리이기도 했다.
이 병을 치료했던 신의 히포크리아도 항체를 만드는 과정에서 수많은 희생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고 말한 바가 있었다.
지독한 병은 치료방법이 개발되기까지의 과정이 험난하기 짝이 없다.
의학의 역사는. 단적으로 말해서 피로 물들여져 있다.
그렇기에 의원은 의술을 배우는 과정에서 생명의 무게를 알아야 한다.
직접 그 피에 물든 역사를 보지 않은 나라고 해도 그 무게감은 절절히 느끼고 있기도 했다.
-항체라.......
"인간의 몸은 나쁜 물질이 들어오면 그걸 쫓아내려는 물질을 분비하게 돼. 그리고 한번 막아낸 물질의 정보를 기억해서 항체를 만들고."
내 말뜻을 이해한 그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항원과 항체. 생명의 몸은 신비하기 그지없다.
"의학에선 사실상 흔한 이야기잖아?"
질병 관리단에서도 항체를 만들기 위해 여러 가지 시도를 했을 것이다.
물론, 이놈의 항체 제작방법이 상식을 벗어나는 시도라 성공하진 못했겠지만.
-그런데...... 그것만 가지고 항체를 어찌 만들려는 게야?
그녀의 말에 말없이 시험관을 들여다보던 내가 고개를 들었다.
"왔으면 들어와, 계속 눈치 보지 말고."
분명 내부에 있는 건 나와 허공에 떠 있는 페르세르크뿐이었지만 방금 던진 말은 엄밀히 다른 이를 향한 것이었다.
스르륵.......
그리고, 내 말이 신호가 된 듯 기척이 일변했다.
좀 전까지만 해도 아무것도 없던 허공이 일그러지더니 누군가의 형체가 서서히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
"......."
묘하게 놀란 얼굴로 나를 바라보는 그는 여전히 검은 무복에 눈밖에 보이지 않는 복면을 쓰고 있었지만 표정 자체를 유추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눈은 표정의 반을 먹고 들어가거든.
이번엔 나름대로 긴장해서 숨은 것 같은데, 암살자로서의 소양이 가지는 깊이는 못 해도 내가 곱절은 넘을 거다.
천 년에 가까운 시간은 어지간한 생명에겐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영역이니까.
종착점까지 도달하지 못했던 회랑의 영웅들조차 끝을 보게 해버린 것은 시간이라는 답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또 찾아내셨군요."
"보이니까 찾아내는 거지."
"그게 말이......."
"돼."
주름도 상대를 봐가면서 잡아야지.
내 육체는 쌓아온 업이 그리 많지 않지만 내부는 다르다.
그대로 말을 끊어먹고 대답해버리자 뭐 이딴 놈이 다 있냐는 시선이 따갑게 날아와 꽂혔다.
그리고는 천천히 다가왔다.
"찾으셨던 정보입니다."
"그래. 수고했어. 여전히 대가를 받을 생각은?"
"아직 없습니다. 그리고, 이걸 받으십시오."
담담하게 말하며 내게 두 종류의 서류뭉치가 담긴 캡슐을 건네주는 잭이었다.
아니, 본명은 아이나 헬리샤나라는 다크 엘프지만.
"이건?"
"필요하신 정보라 생각되어서 챙겼습니다."
"그렇게 자선사업 하다간 잘릴 텐데?"
"상관없습니다. 계산, 다 합니다."
아무래도 거대 정보 길드 메아리의 의도는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주는 거니 일단 받아 챙기며 서류를 읽어내려가던 내가 눈을 가늘게 떴다.
"흐음...... 이 정보 확실해?"
내 질문에 그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정보상에게 신용은 목숨. 거짓은 없으리라.
"그럼 됐어. 미안하지만 하나만 더 부탁하자고."
내 말에 그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여기 적어놓은 품목들을 대량으로 구해야 해. 대금은...... 중앙 질병 관리단으로 달아놔 버려."
"그렇게 해도 되겠습니까?"
"어차피 이곳에 질병 관리단이 있는 걸 아는데 문제 될 게 뭐가 있어. 고르네오 남작이 시켰다고 해. 이른 시일 내에 구해와야 해. 하루가 늦을 때마다 얼마나 죽을지 모른다."
"그건......."
"아무리 인간 목숨 파리 같은 암흑가 소속이라도 멀쩡한 인간이 죽는 게 마냥 좋은 사이코패스는 아닐 거 아니야. 좋은 일 한다 생각하고 최대한 빠르게 움직여 줘."
내 말에 그가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상부상조한다면 서로 좋은 것이다.
"약초의 물량은 각 품목당 마차 한 대 이상의 분량으로. 용병들에게 맡기는 것보단 정확하고 빠르게 구해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최대한 이른 시일 내에......."
짧게, 묵례를 취한 뒤 사라지는 그를 보며 나는 손에 쥔 시험관을 말없이 흔들어 보였다.
* * *
날이 밝기가 무섭게 나는 질병 관리단의 의원들과 관리들이 회의를 하고 있는 대책본부로 향했다.
본래라면 내 입장을 막아야 하는 기사들이었지만 무슨 언질을 받았는지 그들은 내 입장을 가로막지 않았다.
"아! 오셨군요, 데이비 왕자님."
"고생이 많으십니다."
내 말에 링튼 백작이 허허롭게 웃어 보였다.
"허허, 고생이라고 할 게 무에 있습니까. 오히려 고생은 데이비 왕자님께서 다 하신 것을요."
"흐음......."
"들었습니다. 전날 치료소에서 위급상황에 처한 환자를 살리셨다지요."
"의도하지 않았지만 일단은 그렇게 되었습니다."
"하하하!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설마 데이비 왕자님께서 의술에 대해 조예가 있으신 줄은 몰랐군요."
"자랑할 수준은 못 됩니다."
내 말에 그가 세차게 고개를 가로저었다.
"자랑할 수준이 아니라니요! 데이비 왕자님이 어제 시술하신 방법은 저희 모두에게도 새롭고 과감했던 방식이지요. 그렇지 않소, 고르네오 남작?"
"......."
링튼의 말에 고르네오 남작이 침묵한 채 고개를 숙여 보였다.
"전날 도움을 주신 점은 감사드립니다. 하지만......."
"인사치레는 그만두지요."
그의 말을 끊은 내가 링튼을 바라보았다.
"영지의 상황이 더욱 악화되지 않게 막아주신 점은 감사드립니다.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내 말에 링튼이 손사래를 쳤다.
"당연한 일이지요."
"다만, 두 분을 못 믿는 건 아니지만 병이 병인 만큼 시간을 허비할 수가 없겠습니다."
"그 말인즉슨......."
"제가 치료합니다. 그러니 치료활동 참가에 허가권을 양도해주세요."
벌컥!!
내 말에 고르네오 남작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안 됩니다!"
"안 된다?"
"이 상황이 장난으로 보이십니까! 원하는 대로 5일이고 6일이고 남에게 덜컥 맡겨도 그들이 멀쩡한 줄 아시냔 말입니다!!"
그의 외침에 내 눈이 가늘게 뜨여졌다.
"그 환자, 2~3분만 늦었어도 죽은 건 압니까?"
내 질문에 그가 움찔거렸다.
보통 같으면 당근에 채찍을 적당히 휘두르겠지만 지금 상황에선 그럴 생각도, 여유도 없다.
당장 준비하는 대로 치료가 되어야 할 테니 말이다.
"또 묻겠습니다. 두 분은 이 병을 치료할 수단을 가지고 계십니까?"
"그...... 그럼! 왕자님께서는 치료방법을 가지고 계신다 이 말씀이십니까?!"
"하다못해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붙잡으셔야지요."
"......."
"나는 지금 두 분과 밥그릇 싸움을 하는 게 아닙니다. 여긴 제가 있는 왕국의 영지이고 이곳은 제 동생의 영지입니다."
부들부들 떨리는 주먹을 꽉 쥔 그가 나를 노려보자 주변의 분위기가 극도로 험악해지기 시작했다.
"괜찮지 않습니까?"
다만, 그런 분위기를 볼 생각이 없었는지 링튼은 느긋하게 제 식은땀을 닦아내며 날카로운 눈매를 돋보이게 하는 안경을 고쳐 썼다.
"링튼 백작!"
"현실을 봐야지요. 오르뎀 영지에서 악마의 피가 발병한 건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다행히 대응도 빨라서 영지민 전원이 발병하는 참사는 벌어지지 않았지요. 다만."
말끝을 흐린 그가 조용히 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