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1
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
- 4권 5화
"히터 마법 정도면 관리하기 쉬울 거다. 지금 온도를 계속해서 유지해줘. 나는 잠깐 치료가 잘되고 있는지 보러 갈 테니."
내 말에 윈리는 맡겨달라는 듯 힘차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 * *
고르네오 남작을 뒤따라 천막을 나서자 미묘하게 어색한 분위기가 천막 내부에 감돌았다.
"윈리 왕녀님은 정말 데이비 왕자님을 좋아하시는군요."
적탑의 마법을 익힌 두 사람에게 간단한 온도 변화마법 정도는 어렵지 않았다.
익숙하게 마나를 끌어올려 가열되고 있는 열기를 관리하던 율리스가 부드럽게 웃으며 묻자 윈리의 얼굴이 금방 풀어지며 헤실헤실 웃음을 흘려 보였다.
"그렇죠? 오라버니는 예전부터 정말 멋진 분이셨어요."
"예전이라......."
"친어머니가 다른데도 언제나 가족이라며 다정하고, 따스하게 저와 바리스의 곁에 있어 주었답니다. 조금 혈기가 넘치시긴 하셨지만...... 저와 바리스 둘 다 오라버니가 보여주셨던 그 온기를 잊지 못할 거예요."
언제였는지 사실상 기억도 잘 나지 않았다.
빨갛게 물들인 뺨을 문지르며 그녀가 헤실헤실 웃어 보였다.
"그래서 저는 오라버니를 정말로 좋아해요. 아직도 기억하는 걸요, 어릴 적에 오라버니께서 들려주신 해와 달이라는 옛날이야기."
"부럽네요."
한 치의 거짓 없이 중얼거린 율리스가 부드러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럼 윈리 왕녀님, 제가 만약......."
웅...... 우우웅...... 웅.......
마치 진동이 울리듯.
말을 꺼내던 도중 율리스는 자신의 품에서 울리는 진동에 말을 거두고 품 안에서 작은 도구를 꺼내 들었다.
"연락용 아티펙트?"
"아...... 죄송합니다. 잠시만 자리를 비울게요."
급히 자리에서 일어난 율리스가 사색이 된 얼굴로 자리를 비우자 윈리는 그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헤헤. 오라버니께 맛있는 쿠키를 조금 구워드릴까."
영지의 사달이 끝나고 질병 관리단이 떠나면 무엇부터 할까.
기왕 온 김에 영지에 활성화된 명물들을 보여주고 자신이 그동안 공부해온 제빵기술을 이용해 맛있는 것들을 해주고.
여러 가지 행복한 상상을 하자 절로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누가 보면 정말 이성으로써 좋아하는 게 아니냐고 물어도 이상하지 않을 법했지만 애석하게도 윈리는 극성 브라콤 기질을 가지고 있었다.
저벅...... 저벅.......
"아, 벌써 오셨나요?"
율리스가 나간 지 약 5분 정도 되었을까.
뒤에서 들려오는 발소리에 손가락으로 마나를 피워 올리던 윈리는 뒤에서 느껴지는 기척에 빙그레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아니, 돌리려 했다.
퍽!
갑자기 그녀의 뒷목을 후려치는 무언가만 없었다면 말이다.
"아...... 아?"
저항하지 못한 채 쓰러진 그녀의 흐린 시야 너머에 보인 것은 붉은 제복에 후드 대신 스카프를 두르고 있는 노년의 기사였다.
* * *
"스승님."
"그래, 갔던 일은 잘되었더냐."
"예, 데이비 왕자님은 정말 대단하신 분이더군요. 설마 의학의 지식까지 조예가 깊으실 줄은 몰랐습니다."
"그렇단 말이더냐?"
"무엇보다 놀라운 건 왕자님의 자신감이더군요."
"호오, 자신감이라?"
희끗희끗한 수염을 쓸어내리며 만족스레 묻는 스승의 질문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라고 할까요. 굉장히 많은 경험을 한 자만이 보일 수 있는 자신감이었습니다. 그런 나이에 저만한 자신감을 쌓았다는 건 제가 모르는 무언가가 또 있을 수 있다는 거겠지요."
"네가 그렇게 느꼈다면 그게 맞는 것이겠지."
"예, 스승님의 판단대로 데이비 왕자님은 곁에서 지켜보면 배울 점이 많습니다. 다만 그보다도 사실 개인적인 욕심이 듭니다."
"욕심?"
"예, 그 사람이라면 어쩌면 연령이나 집단의 이해관계를 떠나서 그저 편한 친우 관계가 될 수 있지 않을까 하고요."
능력적인 면 이외에도 그는 미묘하게 이상하면서도 따듯한 사람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계획대로 살아가는 왕족이나 귀족들과는 미묘하게 다른.
굳이 표현하자면 자유로운 사람이라고 할까.
"껄껄껄! 네 아주 좋은 이를 만났구나, 세상엔 나이로 판단할 수 없는 것들이 많다. 고작 세 살배기 아이에게도 배울 점은 있는 법이다. 명심하거라."
"예, 스승님."
만족스럽다는 듯 그가 수염을 쓸어내렸다.
"그리고, 네가 말한 것들을 조금 알아보았다."
"아...... 뭔가 나온 게 있습니까?"
"그래, 질병 관리단의 특별 프로젝트를 담당하고 있던 고르네오 남작과 링튼 백작. 대부분의 정보가 소실되어 있었다만 어찌어찌 알아보긴 했구나."
짧게 한숨을 내쉰 그가 입을 열었다.
"그래, 고르네오 남작은 제법 괜찮은 사내가 맞다. 요즘 시대에 잘 보기 힘든 헌신하는 선의이지. 한데...... 같이 있는 그 링튼이라는 자는 좀 다르다."
이어지는 제 스승의 말을 듣던 율리스는 이야기가 길어질수록 얼굴이 굳는다는 사실도 잊은 채 그 말을 경청했다.
그리고, 그 이야기가 끝이 났을 때.
퍼어엉!!!!
묵직한 폭발음과 함께, 자신이 조금 전까지 있었던 데이비의 치료제가 준비됐던 천막이 모조리 불탄 것을 보고 눈을 부릅떴다.
"아...... 안 돼!!!"
평소의 부드러운 미소도 잃어버린 율리스의 얼굴에 다급함이 어렸다.
비명에 가까운 외침이었다.
* * *
"윈리 왕녀님!"
비명을 지르며 뛰어온 율리스는 불타고 있는 천막을 허망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좀 전까지만 해도 그와 윈리가 남아 데이비가 맡겨두고 간 치료제를 관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자신이 자리를 잠깐 비운 사이에 이게 무슨 일이란 말인가.
[공명하라! 소통하라!]
[워터 사이클론!]
반사적으로 마나를 끌어올린 그의 손에서 튀어나온 스태프가 빛을 발했다.
동시에 아무것도 없던 허공이 일렁이며 대량의 물이 튀어나와 거대한 회오리를 만들며 불타는 천막을 일소해 버렸다.
치이이이익.......
"위...... 윈리 왕녀님!!"
반사적으로 사용한 4 서클 후반의 마법.
서클도 서클이고 갑작스레 마법을 사용한 탓에 상당한 마나가 소실되었다.
순식간에 피가 싸늘하게 식는 느낌을 무시한 채 달려든 율리스는 제 로브가 엉망이 되는 것도 모른 채 천막의 잔해를 뒤졌다.
하지만. 그의 눈에 보인 것은 완전히 박살이 나버린 치료제뿐이었다.
윈리가 없다.
"이게 무슨......."
잔뜩 굳은 얼굴로 중얼거리던 그는 문득 떠오른 한 가지 사실에 눈을 부릅떴다.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지만 제 스승이 방금 해준 말은 그 가능성을 충분히 암시시켜주었다.
아무리 과거가 보통이 아닌 인간이라지만 여기서 일을 칠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
안색이 창백하게 질린 율리스는 더 생각할 것도 없다는 듯 몸을 띄웠다.
'데이비 왕자는 뛰어난 의료지식과 성흔을 가지고 있지만 무력은 없는 사람이다. 데이비 왕자까지 휘말리게 해선 안 돼. 그렇다면.......'
여기서 나설 수 있는 건 자신뿐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그는 더 볼 것도 없다는 듯 5 서클 플라이 마법을 사용했고 흔적을 따라 빠르게 날아가기 시작했다.
본명 링튼 보르니티아드.
과거 동대륙에 존재했다가 후에 동대륙 최대강국인 린디스 제국에 복속된 의료왕국, 류티스 왕국의 출신으로 어릴 적부터 상당히 의료지식에 두각을 드러낸 천재.
하지만 그 심성이 너무 기괴했던 터라. 그는 류티스 왕국 내에서도 징계를 먹고 의료활동을 금지당한 사례가 있었다.
병의 치료제를 개발해야 하는데 워낙에 희귀한 병이라 발병자가 적다.
이에 당시 15살이던 링튼 백작은 제 영지민 200여 명을 납치하여 강제로 병원균을 투약시켰고 그들을 가둬놓고 수만 가지 실험을 자행했다.
이후 병의 치료제를 개발하는 데에는 성공했지만...... 그가 실험을 끝냈을 땐 200여 명의 영지민 중 고작 열 명이 살아남았다고 한다.
그것도 반 불구가 된 채로 말이다.
그리고, 그 열 명 모두가 채 3달을 살지 못하고 사망했으니 결국 그는 제 목적을 위해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는 인간이었다.
한 명을 죽인 이는 살인자, 열 명을 죽인 자는 연쇄 살인마. 100여 명을 죽인 이는 학살자. 10,000명을 죽인 이는 영웅이라고 불린다.
다만, 링튼의 기괴한 사상은 아무리 봐도 10,000명을 죽인 악마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무사하셔야 합니다!!"
이를 뿌득 갈며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 * *
같은 시각.
고르네오 남작을 따라 치료소에 있는 환자들을 확인하고 치료활동을 하던 데이비는 자신들을 포위하고 검을 뽑아 들고 있는 붉은 제복의 기사들을 보며 눈살을 찌푸리고 있었다.
"이봐요, 고르네오 남작님."
"예?"
"뭐, 문제 있습니까?"
데이비의 질문에, 고르네오 남작이 고개를 강하게 저었다.
"아닙니다! 이보게들, 뭣들 하는 짓인가! 신성한 치료소에서 검을 뽑다니!!"
그는 엄연히 기사단의 상사. 그렇기에 기사단은 그의 명령을 따라야 한다.
하지만, 그 누구도 고르네오 남작의 말에 따라 검을 거두는 이들은 없었다.
눈구멍만 뚫린 기괴한 후드를 덮어쓴 기사들은 하나같이 익스퍼트 이상의 힘을 자랑하듯 검 끝에 오러를 피워올렸고 마치 선언하듯 말했다.
"원한은 없습니다만. 명령은 명령입니다."
"명령?"
"링튼 백작님의 명에 따라 고르네오 남작님께선 여기서 죽어주셔야겠습니다. 그리고 왕자님은 저희를 따라오십시오."
단호한 그 말에 고르네오 남작의 눈에 불이 튀었다.
"그자가 왜 이런 짓을 저지른단 말인가!!"
물론, 그의 외침은 들리지 않았다.
"저항하지 마십시오. 저항하면 더욱 고통스러울 뿐이니."
그 말을 끝으로 기사 중 하나가 고르네오 남작을 향해 손에 쥐고 있던 검을 내질렀다.
카앙!!!
"아 그래?"
동시에 날아든 흰 손이 검의 끝을 가볍게 낚아채 버렸다.
검날을 아무렇지도 않게 말이다.
33. 추격.
"읏......."
일반인이, 그것도 이제 노쇠해 가는 노인이 현역, 게다가 익스퍼트 이상급 되는 기사의 일검을 막을 확률이 얼마나 될까.
당연히 고르네오 남작은 자신을 습격한 기사들의 검에 자신의 목이 잘려나갈 것을 의심하지 않았다.
곁에 젊은이인 데이비 왕자가 있지만 그도 불안정한 성흔을 받았다고 들었을 뿐 무력이 있다는 이야기는 듣지 못했다.
결국 자신은 그 검에 죽을 수밖에 없으리라.
그런데.
이건 어떻게 된 일일까.
카각...... 카가가각!
바들바들 떨리는 검 끝을 손에 잡힌 채 부들부들 떨고 있는 기사.
그리고 맨손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검을 잡고 복잡한 표정을 짓고 있는 데이비 왕자.
그리고 그 상황을 지켜보는 자신까지.
"데...... 데이비 왕자님?"
"다친 덴 없습니까?"
"아...... 아아 예."
"크윽!"
그 말과 함께 신음한 기사가 검을 빼내기 위해 다시 힘을 주지만 데이비의 손에 잡힌 검은 마치 단단히 달라붙은 것처럼 빠지지 않았다.
"링튼이 보냈다고 했나?"
"......."
"뭐, 그 정치가 양반이 조금 걸리긴 했는데, 그래도 머리가 있으면 설마 이런 일을 저지를 거라곤 생각 못 했단 말이야."
담담하게 말한 데이비의 눈이 위험하게 빛났다.
동시에 검을 잡고 있던 데이비의 손이 까딱거리며 그대로 검을 자신의 품으로 잡아당겼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일어난 상황에 그대로 검을 잡고 있던 기사가 그의 품 안으로 끌려들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