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7
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
- 4권 11화
"후웁......."
지잉.......
동시에 내 전방에 한 장, 후방에 한 장, 왼쪽에 한 장.
하나둘 내 몸을 감싸듯 늘어나는 마법진들이 보랏빛을 띠며 제 존재감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생전 처음 보는 언어...... 그게 룬어인가?
마법이 극도로 발달했던 세계. 그곳에서도 특유의 천재들만이 다룰 수 있었던 고유 마법이라 불리는 언어들.
마법진 한 장 한 장당 각기 목적을 지닌 룬어들이 새겨져 스스로 존재감을 흩뿌리고 마법진 전체를 회전시키기 시작했다.
지직...... 지지직!!
마치 모터가 돌아가듯 회전하는 마법진들이 서서히 내 몸에서 멀어지며 급기야 내 몸을 중심으로 10m 이상씩 떨어져 증식하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생성되는 마법진은 모두가 그 형태를 달리했고 특유의 마나 배열방식에 따라 회전하며 서로 간에 공명하기 시작했다.
마법이란 본디 자연적인 무형의 힘을 제어하기 위한 빗 물리학 계통의 학문.
다른 방식으로 벼락을 만들어 쏜다고 해도 임의로 벼락을 생성하고 내리꽂는 것보다 이미 만들어진 뇌운에서 벼락을 강제로 유도하는 게 훨씬 효율이 높을 수밖에 없다.
이미 만들어진 물길의 방향을 바꾸는 것과 물을 만들고 길을 만들어 물길을 재현하는 것의 차이는 큰 법이니 말이다.
경계는 내 뒤로 이어지는 모든 영역.
[범위 고정]
[경계 확장]
[구조 재배열]
굳이 퍼져있는 녀석들을 찾을 필요 없이 내 뒤로 지나가는 놈만 처리하면 될 일이다.
나를 발견하지 못하고 순식간에 영역으로 들어가는 키메라들을 바라본 내가 허공에 떠오른 홍단이를 낚아챘다.
동시에 홍단이에게서 흘러나온 대량의 마나와 내 마나가 공명하며 스위치를 올렸다.
마치 자석이 쇳조각을 끌어당기듯.
나를 지나치는 마물들의 머리 위에 특유의 룬어가 새겨진 표식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아. 이것도 한번 해보고 싶었는데."
-또 무엇을.......
"죽어라, 벌레 같은 놈들!"
불벼락이 아니라 뇌우이긴 하지만.
상관없겠지.
[자연재해 시리즈]
[날벼락 부르기]
쿠릉...... 콰아앙!!!
이윽고. 허공에 홍단이를 가볍게 긋는 것을 시작으로 하늘에서 떨어진 수백 가닥의 벼락이 표식이 새겨진 키메라들을 덮쳤다.
* * *
마치 거대한 탄막을 형성하듯, 일정 영역을 지나치는 키메라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하늘에서 떨어지는 벼락에 잿더미가 되어 사라져 버렸다.
거대한 뇌운 속에 잠들어있던 벼락들은 내가 퍼뜨린 아주 미약한 마나의 흔적에 마치 걸신들린 것처럼 낚여 들었고 그대로 표식이 새겨진 몬스터들을 향해 섭씨 2만 7천 도에 달하는 강대한 섬광을 내리꽂아 들어갔다.
어지간한 마법들은 다 보여줄 수 있지만 세상에 알려지면 절대 곱게 못 넘어갈 만큼 위험한 계통으로 선정된 마법.
지독한 집중력의 소모로 얼굴에 핏기가 빠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억지로 이를 악물고 영역을 유지했다.
멀리서 본다면 수백 가닥의 벼락이 숲 전체를 강타하는 것처럼 보이리라.
-이론상으론 가능하다지만.......
말끝을 흐린 그녀가 이제는 흡사 괴물을 보듯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게 상식적으로 인간 한 명이 감당할 수 있는 제어력인.......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말하던 그녀는 잔뜩 창백해진 내 얼굴을 보고 입을 다물었다.
-그대도 힘든 일은 본녀에게 상의해주면 좋았을 것을.......
씁쓸하게 중얼거리는 그녀의 목소리는 내 귓가에 들려오지 않았다.
영역의 유지. 1초 단위로 뇌가 타들어 가는 고통 속에선 나로서도 별수 없는 일이니까.
* * *
육체 능력은 극도로 상승해있지만 반대로 지능은 떨어졌던 것일까.
링튼이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생체 몬스터들은 마치 불로 뛰어드는 부나방처럼 내가 펼쳐둔 영역 안으로 발을 들이밀었고, 그 결과 모조리 잿더미가 되어 산화했다.
-데이비!
"하아...... 하아, 괜찮아 괜찮아."
-그대 얼굴이 지금 얼마나 창백한지 알기나 해?!
"이정도로 죽을 정도였으면 9 서클까지 올라가지도 못했어."
마나의 소모는 그리 많지 않다. 다만, 정신력의 고갈이 너무 극심했다.
숨을 헐떡거리던 내가 마지막으로 떨어진 벼락에 산화해버리는 몬스터를 끝으로 마법을 해제하려던 순간.
문득 내 시야에 기이한 것이 잡혀 들어왔다.
"우욱...... 멀미...... 돌아버리겠네. 돌아가서 쉬지 않으면 골로갈......."
겁도 없이 내가 펼쳐준 피아 구분이 안 되는 영역 속으로 들어오는 마차 때문이었다.
마차?
이런 곳에 왜 마차가 있는 것일까.
깊은 숲 속이라 해도 마차가 들어오지 못할 정도로 거친 곳은 아니기에 이해 못 할 것은 아니지만 통상적으로 이렇게 비정상적으로 벼락이 떨어지고 있으면 멈추든지 우회하든지 하는 방향을 택했을 것이다.
자살 희망자이거나, 내 벼락을 피할 방법이 있거나.
하지만 그런 생각들을 머릿속에서 털어내 버리는 데엔 많은 시간도 필요하지 않았다.
도망치듯 내달리는 마차와 그 마차를 호위하는 기사들. 그리고 그 기사들을 뒤에서부터 조금씩 조금씩 죽이며 뒤따르는 일련의 검은 무리를 발견한 탓이다.
-저건.......
나와 같이 그 마차의 존재를 깨달았던 것일까. 페르세르크가 눈을 반짝였다.
-데이비, 황족의 문양이야.
그녀의 말대로였다.
마차의 문 상단에 음각된 문장.
주로 가문이나 소속을 상징하는 문양이다. 문제는 그 문장의 색이 백금색이라는 것.
이 대륙에서 마차에 백금색의 문양을 달 수 있는 건 단 한 존재밖에 없다.
황족.
콘타스 제국은 수천 킬로미터 멀리 떨어진 서부이니 패스.
그렇다면 생각할 수 있는 제국은 단둘이다.
팔란 제국과 동대륙에 위치한 제국인 린디스 제국.
문양까지는 알아볼 수 없지만 일단 저 마차가 황족이고 그 황족이 정체 모를 암살자들을 향해 쫓기고 있다는 건 분명했다.
-데이비 무시해. 제국의 황족을 노리는 암살자들이라면 적은 보통이 아닌 게야, 그런 이들을 괜히 자극했다간 지금과는 확연히 다른 위험이.......
그녀의 걱정 어린 말에도 불구하고 내 시선은 마차에 꽂혀있었다.
마차의 창문으로 누군가가 잔뜩 경직된 듯 밖을 바라보는 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고작해야 십 대 중후반 정도 되어 보이는, 가녀린 체구, 수수한 옷과 다르게 눈부신 청록색 머리카락을 지닌 소녀는 특이하게도 얼굴 전체를 감싸는 가면을 쓰고 있었다.
그뿐만이 아니라 손에는 백색의 장갑까지. 완전히 자신의 존재를 숨기듯 가리고 있다고밖에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이상하리만치 징징 울리는 내 머리를 맑게 해주는 것 같은 이 청량한 기운은.......
음, 이 향기는 정령사의 맛이로구나.
"음......."
고민은 오래가지 않았다.
-데이비?
-키이이이잉!!!!
다시 한 번 고속으로 회전하며 공명하는 마법진들.
거의 다 사라진 뇌운의 힘을 있는 대로 끌어모은 나는 곧바로 마차를 뒤쫓는 암살자들의 위에 표식을 남겼고, 그대로 남은 마나를 모조리 끌어모아 유도 마법진을 설치했다.
콰르르릉!!!!!
동시에 이전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거대한 벼락이 낙하하며 암살자들을 덮치기 시작했다.
저들은 아마 자신들이 무엇에 죽었는지도 모를 것이고 설사 보았다고 한들.
이 말도 안 되는 자연재앙이 설마 누군가의 의도로 발생했다고 생각하진 못할 것이다.
당분간은 말이다.
"어이쿠! 손이 미끄러졌네."
-.......
"아 몰라! 나는 아무것도 못 봤다!"
그 와중에 마차에 있던 소녀의 가면 너머로 보이지 않는 그녀의 눈동자와 내가 마주친 것 같긴 하지만 큰 문제가 될 건 없어 보였다.
"페르세르크."
암살자들의 추격을 따돌리고 저 멀리 사라지는 마차를 바라보던 내가 조용히 그녀를 불렀다.
-왜 그러는.......
"조금만...... 쉬자."
-데이비!!
그 말을 끝으로 지상에 추락하듯 내려온 내 시야가 서서히 흐려지기 시작했다.
매번 큰일을 저지르고 나면 극도의 졸림이 몰려오더라니.......
애석하게도 이번엔 이전의 성마법 때처럼 마냥 경지의 상승을 기대할 순 없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가끔 자신도 멍청하다는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 * *
단적으로 말하면 정말 편안한 수면이었다.
평소에도 잘 땐 편안하게 잔 주제에 무슨 소리냐고?
아무리 그래도 기감이 좋아지다 보면 자다가 벌레 기어 다니는 소리에도 깨어날 때가 있는 법이다.
이게 참, 예리한 감각이 좋은 면도 있지만.
"후우......."
반대로 쉬고 싶을 때도 예민함 때문에 제대로 못 쉬는 웃기는 경우도 있다.
흔히 말해서 농땡이를 피우고 싶은데 몸이 먼저 반응하는 꼴이 아닐까.
피곤한 한숨을 내뱉은 뒤 천천히 고개를 들자 보인 것은 고요한 숲 속의 모습이었다.
"페르세르크?"
-아! 데이비 깨어난 게야!
멍한 얼굴로 고개를 들자 빗물을 고여둔 커다란 나뭇잎을 허공에 띄운 채 다가오던 그녀가 화색을 띠었다.
에너지체나 공생 관계인 나 이외엔 물리력을 행사할 수 없는 그녀이지만 이렇게 간간이 그녀의 힘의 근원인 마기를 이용해 폴터가이스트 현상처럼 힘을 다룰 수는 있었다.
처음엔 얇은 종이를 살짝 움직이는 정도였지만, 시간이 흐르며 그 힘이 조금 커진 건 분명해 보였다.
-일단 물이라도 마시게.
"아...... 고마워, 푹 쉬었더니 깔끔하네. 내가 얼마나 잔 거야."
-고작 두어 시간 정도지만.......
말끝을 흐린 그녀가 쓰게 웃어 보였다.
-적어도 오르뎀 영지에선 난리가 나지 않았을까.
"그러네."
담담하게 말하며 자리에서 일어난 나는 곧바로 나무를 타올라 높은 곳까지 올라갔다.
다행인지 아닌지는 몰라도 곧바로 추격대를 보내오진 않았던 모양이다.
아니, 바리스가 부재중인 현재로썬 병력을 가용하는 것도 쉽진 않았겠지.
"돌아가자. 괜히 걱정하겠다."
싱글거리는 내 말에 페르세르크는 뭔가 못마땅한 듯 나를 바라보았지만 결국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 * *
"형님!!"
조금 의외였다.
영지에 들어서자마자 나를 반긴 것은 영지민이나 영지의 근위대도 아닌 바리스 본인이었기 때문이다.
이 녀석은 내가 올 때부터 부재중이더니 언제 돌아온 건지.
"뭐냐 바리스, 언제 돌아온 거야."
"돌아온 지는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괘...... 괜찮으신 겁니까?!"
"음?"
내 말에 허둥지둥거리며 내 몸을 살피던 녀석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겉보기엔 내 모습은 확실히 몸에 묻은 핏자국을 제외하면 크게 문제가 될 만한 구석은 없었을 테니 말이다.
"다친 곳이 없어서 다행입니다. 얼마나 놀랐는지 몰라요. 윈리 녀석과 율리스 5급께서 형님이 숲 속에 숨겨진 링튼 백작의 시설에 혼자 남았다고......."
말끝을 흐린 녀석이 이를 뿌득 갈았다.
"이후에 두 사람만 탈출시키고 남으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곧바로 구조대를 꾸려서 출발하려 했습니다만......."
올 수 없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