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8
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
- 4권 12화
하늘에서 수백 개의 벼락이 떨어지기 시작한 숲에 잘못 발을 들이밀었다간 어찌 될지 그로서도 판단하기 힘들었을 테니까.
바리스의 성격상 3시간 정도를 참은 것도 용한 일이다.
뒤이어 달려 나온 것은 율리스와 윈리였다.
"오라버니!!"
놀란 얼굴로 후다닥 뛰어온 윈리는 잔뜩 창백해진 얼굴로 달려와 그대로 내 품에 안겼다.
워낙에 아담한 체구이다 보니 내가 평범한 체격이라 해도 포옥 안기는 꼴이다.
물론, 말이 평범한 체격이지, 180이 넘는 우월한 키에 다부진 근육을 가지고는 있다만.
"오라버니...... 다친 덴 없으신가요?! 얼마나 걱정했는지 아셔요?!"
문제는 비교 대상들이 하나같이 190대, 혹은 거구의 체격을 가지고 있다는 게 문제다. 그나마 좀 왜소한 체격의 남성도 어지간해선 180대 수준이니 평범하다 할 수밖에.
"야! 내가 나오지 말라고 했지!"
"웃기지 마! 오라버니가 안 돌아오고 계시는데 내가 어떻게 맘 편하게 쉰다는 거야!"
바리스의 타박에 빼액 소리친 그녀가 울먹거리며 내 뺨을 쓸어내렸다.
"오라버니! 어디 다치신 곳은 없으신가요? 멀쩡하신 거죠? 그쵸?!"
"그래, 멀쩡해 이 녀석아."
픽 웃으며 늘 하듯 머리를 꾹꾹 눌러 쓰다듬자 윈리의 눈에 눈물이 핑 돌고 말았다.
"먼저 돌아온 후 별일은 없었습니까?"
"아...... 예, 데이비 님이 아주 작살을 내놓고 가셨더군요."
약간 질린 얼굴로 율리스가 쓰게 웃어 보였다.
"사실 처음부터 했었어야 했던 말인데."
그의 모습에 나는 떠오르는 감상을 그대로 그에게 털어놓았다.
"제 못난 동생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은혜는 절대 잊지 않겠습니다."
비록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해도.
그는 제 목숨 아까운 줄 모르고 윈리를 찾아 시설까지 찾아간 인물이었다.
만난 지 고작 며칠밖에 안 된 사이인데도 말이다.
"저는 한 것이 없습니다. 그저 데이비 님이 없었다면 큰일 날뻔했다는 것만 알고 있지요."
"......."
"오히려 윈리 님을 곁에서 지켜드리지도 못했지요. 마탑 장로직을 달고 부끄러운 실태입니다. 게다가...... 치료제도......."
"아 그거 말입니까?"
픽 웃은 내가 품 안에서 주머니를 꺼내 들고는 가볍게 흔들었다.
"링튼 그 양반, 그래도 아깝긴 했는지 대부분 깔끔하게 보관하고 있었습니다."
내 말에 그제야 안도감이 들었는지 그가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윈리와 율리스 두 사람은 일단 들어가서 치료부터 받게 해줘. 일단 간단한 치료 정도는 해놨다만, 그래도 혹시 모를 일이니."
그냥 쉬게 해주고 싶었다.
내 말에 바리스는 변론은 받지 않겠다는 듯 그대로 두 사람의 등을 떠밀었고 불만 어린 표정을 짓고 있던 윈리도 결국은 한숨을 내쉬며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율리스 5급 저 양반은 언제 봤다고 윈리 님이랍니까? 형님, 혹시 저 양반 윈리에게 흑심 품은 거 아닙니까?"
동생 바보 어디 가는 게 아닌 모양이다.
율리스가 가기 무섭게 경계의 털을 세우는 녀석의 모습에 나는 절로 픽 웃음을 흘려버렸다.
그리고, 매우 진지하게 답했다.
"아무래도 그 반대인 거 같다......."
"예? 에이...... 말도 안 되죠. 윈리 그 왈가닥이......."
"......."
"진짜요?"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로 녀석이 나를 바라본다.
"형님이 그리 말씀하신다면 그게 맞을 거 같긴 한데......."
바리스는 현 상황이 말도 안 된다고 생각이 들었는지 연신 허탈한 한숨을 내쉬었다.
다만, 이런 숙연한 분위기 속에서 장난기가 돋았는지 페르세르크가 돌연 내 뺨을 마구잡이로 잡아당기기 시작했다.
'아야, 왜 이래 또.'
-그대는 정말 머저리가 따로 없어!
'뭐가 문제인데.'
-......평소엔 머리가 그렇게 잘 돌아가는 녀석이 어찌 상황이 반대로 돌아가는 것도 모르는 겐지.......
얘가 지금 뭐라는 건지.
한숨을 푹푹 내쉬는 그녀였다.
'아니, 그럼 윈리가 아니라 율리스 저 양반이 윈리에게 반한 거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지. 그럼 윈리의 그 태도는 뭔데.'
처음 율리스와 만났을 때 빨개진 얼굴. 그리고 오르뎀 영지에 왔을 때도 그랬다. 두 사람만 있던 자리에 내가 들어서기가 무섭게 마치 무언가를 숨기는 아이처럼 화들짝 놀라 부끄러운 감정을 애써 누르던 모습까지.
-본녀는 그런 거 몰라! 평생 모르고 살아 그냥!
'거참.......'
이상하리만치 틱틱대고는 돌아서 버리는 그녀를 보며 나는 어처구니가 없어 어깨만 으쓱여 보였다.
* * *
이후 바리스를 따라 영주성으로 들어온 나는 바리스로부터 이 사태의 전말의 일부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역시나 링튼 백작이 야적들을 이용해 영지에 의도적으로 병을 퍼뜨렸다는 것을 말이다.
새삼스러울 것도 없어 하고 있지만 녀석은 아직도 분이 풀리지 않았는지 씩씩거리는 모습을 감추지 못했다.
완전히 강도가 남의 집에 쳐들어와서 집주인 노릇 하다가 걸린 꼴이니 얼마나 꼴이 우스운 건지.
웃긴 점은 이 사태의 전말에 대한 힌트를 고르네오 남작에게 들었다는 점이었다.
처음 고르네오 남작은 내가 이 영지에서 무언가를 하는 것을 상당히 격하게 반대했었다.
어쩌면, 쓸데없이 깊게 휘말리다 피 보지 말고 빨리 피하라는 무언의 호소는 아니었을까.
"눈치는 정말 빠르시네요."
역시나 그 생각은 맞았던 모양이었다.
-진실인 게야.
그의 심리에 드러난 표면적인 의식을 확인하며 페르세르크가 곁에서 속삭여왔다.
"사실 링튼 그자가 위험하다는 건 알고 있었습니다만. 증거도 없거니와 겉으로 드러난 게 없어서 저로서도 어쩔 수 없었습니다. 다만 지금 같은 일이 일어난 이상 이 일로 데이비 왕자님께 문제가 생기진 않겠지요."
내가 건네준 약을 받아 환자들에게 투약하며 고르네오 남작이 설명했다.
"말도 안 되는 일이죠. 그걸로 항의한다면, 제국의 폭거입니다."
바리스의 말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세상일이라는 게 웃깁니다. 거기서 누가 꼬투리를 잡아도 약소국은 입을 다물 수밖에 없지요. 다만......."
말끝을 흐린 그가 단호하게 답했다.
"이번 일은 제가 절대로 문제가 생기게 하지 않겠습니다. 왕자님의 업적은 절대 이런 일에 휩쓸려서 유야무야 묻혀도 될 만큼 가벼운 게 아닙니다."
비록 의회원 중 가장 힘이 약한 부류였지만 절대 타협하지 않겠다는 그의 결연한 의지는 여전히 돋보일 정도였다.
* * *
만들어둔 치료제를 복제하고 보급하기 시작하자 영지의 상태가 눈에 띄게 좋아지기 시작했다.
물론 여기서 끝이 아니다. 기본적으로 한번 완치되고 나면 그래도 다시 이 병에 노출될 걱정이 없는 만큼 나는 바리스를 시켜 영지 전체에 예방접종 시스템을 도입시키게 만들었다.
새로 태어나는 아이에겐 항체가 있을 순 없으니까. 주기적으로 접종을 시도해 영지의 문제를 근절시켜버리는 게 최우선이었다.
그뿐일까.
영지에 출입하는 용병들이 많은 오르뎀 영지인 만큼 그 용병들에게조차 접종을 시행하게 만들어 남아 있는 융해 가속바이러스의 뿌리를 뽑아버리게 만들었다.
아직 영지에 균이 남아 있는 경우까진 어떻게 할 수 없으니 말이다.
"이번 일로 오르뎀 영지의 인원 중 사망자가 총 300명이 넘습니다."
"그나마 적게 죽었네."
"아무렇지도 않으신 겁니까?"
이제는 제법 찾아와서 말을 걸 줄도 아네.
자리에 앉아 말없이 몸 안에 든 마나를 이리저리 굴리며 내가 물었다.
기왕지사 이렇게 된 거 간단한 잡담이나 나누자.
"그럼, 이만한 병이 날뛰었는데 그 정도로 그친 게 다행이지. 오르뎀 영지의 영지민이 몇 명이라고 생각하는 거냐."
"그것은......."
"의학에서 가장 상책은 예방이야. 그렇다면 중책은 뭘까."
내 질문에 잭, 아니 아이나 헬리샤나는 스스로 떠오르는 답안을 내어놓았다.
"빠른...... 치유와 사후 예방이겠지요."
"하책은?"
"격리...... 수용......."
"이놈의 질병이라는 건 말이야, 지성체와 협상을 할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는 정신 나간 침략자야. 인간은 그런 침략자와 오랜 전쟁을 해왔고. 앞으로도 계속할 거다."
내 말에 잭이 침묵했다.
"왕자님께서는 그 병에 대해 알고 계셨지요."
"그렇지."
"어디까지 알고 계셨습니까?"
"흐음...... 이것도 계산에 포함되나?"
"저도 정보상입니다. 계산 똑바로 하고 있습니다. 포인트제로 말이죠."
엉뚱한 대답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나중에 포인트 쌓였으니 장기 내놓으라고 하는 거 아닌가 모르겠네."
"저도 목숨은 소중해서......."
"의술을 행하는 사람 입장에서 이 빌어먹을 침략자는 고작 이정도에서 그친 게 다행이라 여길 만큼 위험한 병이라는 소리다."
내 말에 잭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타 대륙에서 수억 명을 죽인 병. 의사이기에 그 위험성이 얼마나 높은지 잘 알기에, 수백 명에서 그친 것이 다행이라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이미 죽은 이들에겐 미안한 일이지만 말이다.
내가 없었고 만약 이 병이 영지를 벗어나 여기저기 퍼졌다면, 오르뎀 영지를 시작으로 동대륙의 반이 날아갔겠지.
아니, 어쩌면 중부대륙까지 퍼져서 티오니스 대륙이 아주 난장판이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점에서 링튼은 정말 겁이 없는 자였다.
조금만 잘못되어도 전 대륙으로 이 개막장 바이러스가 증식해나갔을 테니 말이다.
"왕자님은 정말 특이하신 분이십니다."
"그러니까 말하라고, 슬슬 이쯤 되면 원하는 게 나올 때가 되었다고 생각하는데."
"포인트 아직 더 모아야 합니다. 빼도 박도 못하게 헌신해드리지요."
"뭘 부탁하려고 이렇게까지 헌신하나 몰라, 그냥 내 밑으로 들어오지?"
"받아주실 겁니까?"
녀석의 질문에 내가 픽 웃었다.
"미쳤다고 받아주겠냐?"
네가 어디 소속이고 과거가 어땠는지는 관심 없는데 적어도 받아달라 말하고 싶으면 그 껍데기부터 벗고 와라.
내 시선에 무엇을 느꼈는지는 몰라도 잭, 아니 아이나 헬리샤나는 끝끝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 * *
덜커덩!!! 쾅!!
격하게 달리던 마차는 숲의 영역을 빠져나오고 나서도 쉬이 속도를 줄이지 않았다.
"벨로스 경! 추적자들이 더 이상 따라오지 않습니다!"
"이대로 계속 달리면 말이 버티질 못합니다!"
"후우...... 속도를 줄인다! 발터! 락! 사주경계를 풀지 말고 기습에 대비해 경계를 철저히 해라!"
마차를 호위하는 기사는 총 일곱 정도로 본래엔 그보다 훨씬 많은 숫자였었다.
"젠장, 빌어먹을 암살자 놈들!"
격분한 노기사 하나가 이를 부득부득 갈며 분노를 표출했다.
제아무리 소드마스터라도 이렇게 밤낮으로 두서없이 암살자들이 쳐들어오면 피해가 없을 순 없다.
그렇지 않은 경우의 괴물이 하나 이 대륙에 살고 있긴 하지만 그 사실을 그들이 알진 못했다.
"황녀 저하, 벨로스입니다! 다친 곳은 없으십니까!"
다급한 노기사의 외침과 함께 고요하게 멈춘 마차 안에서 누군가가 콜록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괘...... 괜찮아요......."
그리고 곧이어 부드러운 소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