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89
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
- 4권 13화
끼익.......
"저...... 저하! 아직 나오시면!"
"괜찮아요. 콜록...... 콜록."
빠르게 내달린 탓에 어지럼증이 상당했는지 문이 열리며 모습을 드러낸 소녀가 작게 비틀거렸다.
"저하!"
동시에 마차 안에서 시녀로 보이는 여성들이 급히 다가와 그녀를 부축했다.
"괜찮아...... 마리."
소녀는 작은 체구를 가지고 있었다.
평균연령대보다 작은 키, 그리고, 왜소한 체구. 뚜렷하면서도 부드러운 선을 지닌 소녀는 조금이라도 세게 쥐면 부서질 듯 가녀리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그녀는 인간과 달랐다.
모자를 벗은 그녀의 환한 청록빛 포니테일 형 머리카락의 위엔 수인족 특유의 긴 귀가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상당히 지친 건지 울적한 건지 추욱 처져 있는 게 보는 사람이 안쓰러워 보일 지경이었다.
종은 여우.
하지만 미묘하게 끝이 뾰족뾰족했다.
꼬리의 여부는 커다란 이브닝드레스의 존재로 드러나지 않았지만 그녀의 존재가 일반 인간인 기사들과 다르게 여우계통의 수인족이라는 건 분명 알 수 있었다.
그녀의 특이점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그녀의 얼굴은 특이하게 생긴 백색의 가면으로 완전히 가려져 있었다.
알 수 있는 건 그녀가 아직 어린 소녀라는 것, 그리고 수인족이라는 것뿐이다.
손부터 발끝까지, 그녀는 제 맨살을 단 한 곳도 드러내지 않았다.
"다친 곳은 없나요?"
가면으로 눈조차 보이지 않을 텐데도 그녀는 정확히 기사들을 향해 시선을 옮겼다.
조용한 그녀의 질문에 기사들이 일제히 그녀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저하, 저희들은 저하의 신변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목숨을 내걸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할루스 경이 보이지 않네요, 룩사경도, 히베나경도......."
작은 중얼거림에 기사들의 몸이 움찔거렸다.
"그렇겠죠...... 습격은......."
말을 하던 작은 소녀가 울컥한 듯 고개를 푹 숙였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여러분...... 저 같은 수인족 때문에......."
가면으로 가려진 얼굴이라 표정이 보이진 않았지만 잔뜩 잠긴 그녀의 목소리는 그녀가 상당히 우울해져 있다는 게 확연히 보일 정도였다.
"화...... 황녀 저하!"
그녀의 곁에 있던 시녀들이 기겁하며 그녀에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저하! 아뢰옵기 황공하오나! 눈물을 거두어 주시옵소서!"
"수인족이기 때문이라니요! 천부당만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그렇습니다! 그 누가 황녀 저하의 존재를 비천하다 하오리까!"
그리고 기사들이 일제히 도열해 그녀에게 무릎을 꿇었다.
"신들의 힘이 부족하여...... 저하에게 상심을 끼쳤나이다! 죽여주시옵소서!"
"그만 하세요! 저는...... 저는 더 이상 저로 인해 여러분들이 다치는 걸 원치 않아요."
그녀의 목소리가 더욱 울음기에 잠겼다.
"그래요...... 아바마마...... 아니 황제 폐하를 위해서도 힘을 내야겠지요."
"감히, 동방의 대제국인 린디스 제국의 황족에게 검을 들이민 괘씸한 암살자들입니다. 저하, 이 일은 반드시 철저하게 수사하여 이 같은 일을 저지른 이들을 뿌리 끝까지 뽑아버리겠사옵니다!"
"벨로스 경......."
단호하게 말하는 노기사의 모습에 소녀가 잠긴 목소리를 냈다.
"황실 소드마스터, 귀운검(鬼雲劍) 벨로스의 이름으로 약조하겠나이다. 반드시...... 억울하게 죽어간 저하의 수하들이 겪은 억울한 죽음에 대한 복수를 이뤄내겠나이다."
소녀는 절대적인 이타주의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욕심이 많은 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사들이 한결같이 그녀를 따르는 이유.
그녀는 제 사람에게만큼은 제 모든 것을 드러내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그렇기에 그녀는 수인 혼혈이면서도, 뒷세력이 거의 없이 제 형제자매들 사이에서 치이는 입장이어도 가신들에게만큼은 철저하게 사랑을 받아왔다.
그렇기에 벨로스는 소드마스터라는 뛰어난 직위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고작 수가 20명도 채 되지 않는 그녀만의 기사단원이 되었었다.
"고마워요...... 고마워요 벨로스경......."
"죄송합니다 저하...... 힘드시겠지만 이제 곧 제국의 국경입니다. 조금만, 조금만 더 참아주십시오."
울음을 그쳤는지 주저앉아 오열하던 소녀는 곧 가녀리게 떨리던 어깨를 진정시키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시녀들의 부축을 받아 조용히 마차에 앉았다.
미묘하지만 그녀의 앙증맞은 귀가 까딱거렸다.
"한데, 벨로스 경, 그 벼락은 도대체 뭐였던 걸까요."
"그건...... 죄송합니다. 실은 소신도 판단하기 어려웠던지라."
"아니에요. 그냥......."
"다만, 아무리 생각해도 자연벼락이라고 보긴 어려웠지요. 하늘에서 수백 가닥의 벼락이 떨어지는 자연현상은 듣도 보도 못했습니다."
"그럼 누군가가 일으킨 것이라면요?"
"대륙의 현자가 전부 모이면 시도라도 해볼 수 있지 않을까 합니다."
다시금 마차가 출발하기 시작하며 기사들의 수군거림이 들리기 시작했다.
급히 내달리던 마차, 그리고 마차를 호위하던 기사들 모두가 본 사실이었다.
당장 길거리 노점이나 선술집에 뛰어가 술안주 삼아 이야기해도 헛소리하지 말고 술이나 더 퍼먹으라는 소리를 들어 이상하지 않을 법한 소리이기도 했다.
"단장님, 그건 진짜 뭐였던 걸까요.
"정확한 건 알 수 없지. 다만......."
말을 끊은 노기사, 벨로스의 목소리가 조용히 들려왔다.
"그 벼락은 마치 암살자들을 노리고 떨어진 것 같았네."
"실제로 혼비백산해 도망가던 놈 하나를 추격하는 벼락이 놈을 잿더미로 만들어버렸지요. 벼락이 사람을 잿더미로 만드는 건 살면서 처음 봤습니다. 명백히 비정상이에요."
"중요한 건 살아남았다는 거겠지. 이래저래 생각할 것이 많다만 상식적으로 이해할 순 없어. 만약 인간이 그것을 만들어낸 것이 사실이라면......."
말을 끊은 그가 조용히 눈을 감았다.
"아마 대륙에 알려진 위대한 마법사의 서열이 하루아침에 뒤바뀌지 않을까 싶네. 뭐, 그럴 리는 없겠지만."
"그렇지요. 그런 말도 안 되는 재앙을 일으킬 수 있다면 그건 인간이 아니라 동화에 나오는 마법의 종주, 드래곤들일 겁니다."
아주 미약하지만 긴장을 풀려는 듯한 기사들의 대화는 그로부터 아주 잠깐 더 이어졌다.
"하아......."
그리고, 기사들의 대화를 듣고 있던 소녀는 마차의 폭신한 소파에 앉아 짧고 힘겨운 숨을 내뱉었다.
다른 이들은 모두 보지 못한 듯했다.
하지만, 유일하게 인간 이상의, 수인족 중에서도 유별날 정도로 시력과 후각, 청력이 좋은 그녀는 스치듯 볼 수 있었다.
'......그분은 검은 머리였어.......'
하늘에 떠 있는 한 남자와 그의 주변에 떠 있는 보랏빛의 수많은 마법진들을 말이다.
'그리고...... 굳이 우릴 구해주셨어.'
순간적으로 눈이 마주친 것도 사실이었다.
물론 그녀는 가면을 쓰고 있었지만, 어째서인지 그 남자는 자신의 시선을 정확히 마주한 듯한 느낌이었다.
아주 잠깐의 마주침.
그렇지만, 그녀의 뇌리에 그 남자가 강하게 각인되는 건 한순간이었다.
이후 벼락이 사라진 뒤 예리한 그녀의 후각에 아주 잠깐, 그 사내의 체향이 스치듯 남았다.
'연하지만 수수한, 그리고 듬직한...... 산수유의 향.......'
절대 잊지 않겠다는 듯 그녀는 제 손을 꼬옥 쥔 뒤 방금 빠져나왔던 뇌우의 숲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36. 언젠가는 알려질 것들.
"데이비 님. 한잔하시겠습니까?
어디서 구해오는 건지 모를 귀한 술을 또 가지고 오며 빙그레 웃는 율리스를 보며 내가 짜게 식은 눈을 했다.
이 양반, 의외로 술을 참 좋아한다.
전날에도 부어라 마셔라 들이킨 것 같은데 또?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지.
그렇게 생각하며 나는 단호하게 답했다.
"당연하지요. 누추하지만 어서 들어오시지요."
쓰지 않고 적당히 깊은 맛이 나는 술 앞에서 결국 나는 한없이 약한 남자로구나.
-사리분별 못 하고 꽐라가 되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이라 여겨야 할 게야.
그렇게 된다면 본녀가 걷어차서 깨워 줄 테니.
뒷말을 중얼거리는 페르세르크를 애써 무시한 채 그를 들이자 뒤에서 눈치를 보고 있던 윈리와 바리스도 헤실거리며 고개를 들이밀었다.
그동안 영지의 사후문제로 꽤 바빴던 모양인데 그제야 정신을 차리고 모습을 드러낸 꼴이다.
"고르네오 남작은?"
"그는 이런 자리가 조금 불편한 모양입니다. 이번 일은 명백히 그가 소속된 질병 관리단의 책임이니 어느 정도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지요."
바리스의 말에 나는 더는 묻지 않았다.
본인이 그러겠다면 그리하는 게 맞겠지.
실상 죄 없는 제 영지민 300명 이상을 죽인 범인이나 다름없는 질병 관리단의 남은 이들을 수용하고 있는 것도 바리스의 큰 결단이나 다름없다.
"그 사람들도 피해자이니까요. 그리고, 저는 고르네오 남작의 헌신에 제법 흥미를 두고 있을 뿐입니다."
담담하게 말하는 바리스의 모습에 윈리가 헹! 하며 웃어 보였다.
"헹! 사람이 그렇게 순해 빠져서 어떻게 하게?"
"그러는 지는? 그냥 넌 좀 입을 다물면 좋겠다."
"뭐? 야!!"
빼액 소리를 지른 윈리가 율리스와 나를 의식하고는 고개를 푹 숙여 보였다. 그리고는 시선을 피하며 손에 쥔 와인잔을 조심스레 들이켰다.
그래도 이제 성인이랍시고 막 마시는구나.
"너희도 이제 성년인데, 이번 생일엔 왕실로 들어가겠네."
"지금 수도 돌아가는 꼬라지를 보면 당분간은 침묵하고 싶지만요."
시시덕거리며 웃어 보인 바리스의 시선이 내게 꽂혀왔다.
"형님."
"그래."
"질문드려도 되겠습니까?"
궁금증을 어떻게든 해소하고 싶어 하는 얼굴들이다.
그동안 너무 유야무야 넘기긴 했다. 내가 뭐라도 하고 있었던 인간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구나 하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 세 사람의 머리로는 이해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오러 블레이드를 뽑아내는 소드마스터.
거기에 검을 버리고 소드마스터와 정면으로 치고받을 정도의 격투술. 그뿐만 아닌 성흔의 보유에 어디서 배워왔는지 모를 의학지식.
마지막으로 율리스와 윈리를 영지로 날려버린 5 서클 이상의 마법까지.
이게 고작 20세도 안 된 이가 가질 수 있는 무력일까.
내 입장에서도 단연코 'NO' 라고 답할 수 있다. 나는 한 번 그런 경로를 쌓아보았으니까.
나와 같은 시간이 뒤틀린 천 년을 보낸 게 아니면 힘들다.
글을 배울 적부터 검을 배워왔다는 희대의 천재 황녀.
일리나조차 17살의 나이에 이르고도 아직 소드마스터의 벽을 두드리지 못하고 있다.
대륙 최고의 천재 신동이라 불리던 율리스도 30줄에 다 달아서야 마스터의 벽을 조금씩 두드리고 있는 이 상황에 고작 17살 된, 그것도 인생의 3분의 1을 혼수상태로 보낸 이가 가볍게 넘어선다니.
내가 아닌 다른 괴물이 내 껍데기를 쓰고 있는 게 아니냐 물어도 이상하진 않으리라.
"흐음......."
"그만해 멍청아! 오라버니께 무례잖아. 무슨 취조하는 거야?"
"야! 그러는 지도 궁금해했으면서."
윈리도 말은 그렇게 할 뿐 사실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사실 저도...... 폐가 되지 않는다면 물어도 될까요. 데이비 님."
율리스가 빙그레 웃으며 나를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