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0
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
- 4권 14화
"솔직히 다른 건 다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유유히 웃으며 그가 특유의 부드러운 인상을 부각하는 뿔테안경을 천천히 걸쳐 올렸다.
"솔직히 무영창은 도저히 보고도 믿기지 않아서요. 게다가...... 데이비 님, 겉으로 보기엔 일반인보다 비슷하거나 그 아래의 마나밖에 느껴지지 않거든요."
무영창은 이론상으론 불가능한 시스템이니까. 그게 가장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다행이라면 숲에 떨어졌던 수백 가닥의 뇌우까지는 내가 만들었다고 생각지 않는다는 점이다.
솔직히 그건 궤를 달리하는 수준의 힘이니 말이다.
"흐음......."
짧게 신음하며 잔에 들어 찰랑거리는 붉은 와인을 바라보던 나는 짧게 피식 웃어 보였다.
"노력했습니다."
내 대답에 세 사람의 얼굴이 벙쪘다.
"예?"
"죽자고 노력했어요. 그 짧은 시간에."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어 보이는 그들에게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짧았다.
사실 천 년이라는 시간도 내가 수련을 모두 쌓아 이해하는 데엔 너무도 부족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쉬지 않고 훈련에 임했고, 자다가 깨서도 수련의 성취에 대해 생각했다.
그렇게 영웅들이 굴려대는 것에 학을 떼었던 주제에 나 스스로가 그렇게 노력했다니 지나가던 고블린이 웃을 일이다.
다만 내 말을 이 세 사람은 전혀 다르게 해석한 듯 보였다.
"아...... 하하! 아무리 그래도 1년도 안 되는 시간 안에 그걸 이뤘다는 건......."
녀석들은 내가 혼수상태에서 깨어나고부터 노력해서 여기까지 쌓아 올린 줄 아는 모양이었다.
"세상엔 아직 증명 안 된 일이 많다 바리스."
"형님......."
"그리고 나는 1년 안에 그걸 해냈다고 한마디도 한 적이 없어."
내 말에 바리스가 침묵했다. 진지하게 답해준다는 것을 눈칫밥으로 깨달은 것이다.
이래서 눈치 빠른 꼬맹이들이란!
-그 눈치 빠른 꼬맹이가 그대가 진정 믿어 주는 몇 안 되는 동생이다만?
'조용.'
회랑에 대한 것은 이야기해줄 수 없다.
다른 이들이 믿을 수 없다 소리를 질러도 나는 그저 내가 노력했다는 사실만 전해주는 게 현재로썬 전부였다.
설사, 그게 내 배우자가 될지라도 말이다.
내 진실에 대해 유일하게 아는 것은.......
-흐아아암.......
내 무릎을 침대 삼아 누워 하품하는 이 귀여운 사저(師姐)뿐일 것이다.
"실제로 네가 보기에 나는 일반인이나 그 이하 수준의 마나밖에 느껴지지 않을 거다."
"네."
"그런데 어떻게 고밀도의 오러 블레이드를 뽑아내는 것일까."
"그건......."
"언젠가 가능해지면 그때엔 전부 말해주마."
"형님이 그렇다면 그런 거겠지요."
이윽고 바리스는 머릿속의 복잡함을 정리했는지 시원하게 웃어 보였다.
"하하. 율리스 5급께는 죄송하지만 형님이 그리 말씀하신다면 저는 그렇게 믿을 생각입니다."
"뭐, 저도 굳이 데이비 님이 말하기 힘든 사실을 캐물을 이유는 없습니다. 그럴 자격도 없지요."
"배려 감사드리지요."
"하지만 하나만 알려주실 수 없겠습니까?"
율리스의 눈에 의욕이 깃들었다.
동시에 그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깨달은 윈리도 잔을 내려놓고 나를 바라보았다.
"저도...... 무영창을 할 수 있을까요."
마법사에게 무영창은 그야말로 꿈과 같은 경지. 그런데 그게 초 고서클의 대마법사가 아닌 같은 경지의 마법사가 사용한다면.
남이 쌓아 올리고 이룩한 것을 물어보는 건 어디까지나 무례였다.
하지만 율리스는 그런 무례를 저질러서라도 힌트를 얻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에겐 빚도 있으니, 어느 정도 알려주는 것도 나쁘진 않으리라.
적어도 회랑과 관련된 것이 아니니.
"지금 당장 율리스 님이 가진 마나 서클을 전부 버릴 자신이 있다면요."
"......."
"확률은 10퍼센트 정도. 실패하면 반동이 올 겁니다."
"반동이요?"
"뇌가 타요. 새카맣게."
직접 본 사례는 없다. 이것을 만들어낸 네 명의 여자가 내린 결론이니 그저 그렇게 믿을 뿐.
"이런......."
"숙제를 하나 드릴게요. 당장 사용하실 수 있는 버프 마법. 스트랭스를 5중 영창으로 동시에 중첩해보세요."
내 말에 그의 안색이 파리하게 변했다.
"그건...... 좀 힘들겠네요."
"그게 가능할 경우에 10분의 1입니다."
적어도 8 중첩 이상은 할 줄 알아야 시도할 엄두를 낼 터.
-어떤 미친놈이 마법을 8중 영창을 해, 그대가 비정상인 거라니까.
내 말에 그가 빙그레 웃었다.
쉽진 않을 거다. 처음 마나 서클을 만들 때도 생각했던 것이지만 현재 내 몸에 적용되어있는 마나 서클은 오히려 9 서클의 마나 고리를 만드는 것보다 난도가 높다.
"역시 세상에 공짜는 없나 봅니다."
아무리 그래도 목숨은 소중한 법이다.
* * *
하나가 해결되면 또 하나가 문제라고 하던가.
"흥!"
잔뜩 삐진 목소리에 절로 쓴웃음이 나왔다.
"홍단이 아직도 삐졌어?"
"뿌우!!"
입으로 뿌우 거리며 자기가 화났다는 티를 팍팍 내는 이 적발의 앙증맞은 꼬맹이는 다름 아닌 홍단이였다.
안 그래도 귀여운데 잔뜩 삐진 얼굴에 뺨을 통통하게 부풀리고 있으니 마음 같아선.......
"홍단이 도리도리 까꿍?"
"꺄핫!...... 흐, 흥!"
이미지 관리 때문에 실제로 시행하진 못했다만.
신검 칼디라스 때에도 그랬지만 스스로 마나를 품는 에고 무기들은 그 힘이 급속도로 빨려 나갈 때 상당한 탈력감을 느끼게 된다.
오랜 시간 에고가 자라고 강화되어온 칼디라스는 몰라도 이제 태어난 지 한 달도 되지 않은 홍단이가 버티기엔 그 정도의 마나 소모도 상당히 큰 탈력감을 준 모양이었다.
"우웅......."
홍단이를 뒤에서 끌어안은 채 머리를 비벼대는 청단이가 그러지 말라는 듯 앓는 소리를 냈지만 홍단이의 고집은 요지부동이었다.
"엄청 맛있는데, 안 먹을 거야?"
내가 조용히 쿠키를 눈앞에서 흔들자 눈을 감고 고개를 돌린 녀석이 실눈을 뜨고 쿠키를 흘끗 보고는 다시 고개를 홱 돌려버렸다.
그리고 다시 천천히 실눈을 뜨고 쿠키를 보고는 고개를 홱 돌려버린다.
자신이 삐졌음을 어필하는 아이다운 발상이었다.
쿠키는 먹고 싶지만 나는 화가 나 있으니 먹지 않겠다.
두 가지 갈등에서 쉬이 헤어나오지 못하는 모습 속에 숨겨진 치명적인 귀여움에 정신이 멍해진다.
문제는 내가 아이를 달래는 법을 잘 모른다는 점.
나는 손에 쥐고 있던 것을 가볍게 흔들며 환하게 웃어주었다.
"안 먹으면 내가 다 먹어버려야겠네?"
"우...... 으으."
예상대로 억지 외면을 하고 있던 홍단이의 눈에 쿠키를 향한 열망이 강렬하게 새겨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홍단이의 고집은 보통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우...... 우우......."
어찌할 바를 몰라 우물쭈물하던 홍단이는 결국 내가 밉고 서러웠는지 그대로.......
"으아아아아앙!!!"
터져버렸다.
-이 멍청이, 아이를 상대로 뭐하는 게야.
"이런......."
결국 보다 못한 페르세르크가 홍단이를 끌어안고 어르고 달래주자 한참 동안 움찔움찔하던 홍단이는 더욱 서럽다는 듯 서럽게 울어댔다.
평소의 나긋나긋한 표정으로 그녀가 나를 곱게 흘겼다.
"너......."
그 모습에 내가 멍청한 표정을 지어 보이자 그녀가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노려본다.
"몸을 키우는 걸 할 수 있었냐?"
내 의문은 그것이었다.
홍단이를 끌어안고 있는 페르세르크의 크기는 평소대로 내 머리나 어깨에 앉을 수 있는 작은 형태가 아니었다.
키는 작고 체격도 굉장히 왜소했지만 엄연히 평범한 소녀의 모습이었다.
-형체도 없이 마기로 이뤄진 몸 따위 키우는 게 무에 어려울까.
에너지체끼리는 서로 간섭이 가능한 건지.
홍단이도 엄밀히 에너지 덩어리로 이루어진 육신인 덕분인지 페르세르크의 모습을 보고 말을 들을 수 있는 듯했다.
-착하지?
홍단이의 등을 쓸어내며 부드럽게 어르는 그녀를 올려다보며 홍단이가 울먹거렸다.
"엄므아......."
-어...... 엄마?!
기겁한 얼굴로 소리치는 페르세르크를 놓아주지 않겠다는 듯 홍단이가 그녀를 부등켜 안자 옅은 빛이 사방으로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우아아앙!! 엄므아! 엄므아! 아부아 미어!"
다시 터져버린 울음 때문일까.
아이는 울음이 전염된다고 하던데, 청단이도 결국 울음을 터뜨리며 페르세르크에게 안겨든다.
"우아아앙!!"
"흐아아앙!"
"울렸네."
내 장난스런 말에 그녀가 나긋나긋한 눈초리로 나를 흘겨보았다.
-괘...... 괜찮아! 어, 엄마는 여기 있으니, 걱정 말거라!
페르세르크는 영리한 전(前) 마왕...... 눈치가 제법이렷다.
현 대륙에서 마족이라는 존재는 고서에나 남아 거대한 악으로 알려져 있지만.
솔직히 생명체가 감정을 가지고 있으면 무조건 악하고 무조건 선하다는 말이 얼마나 터무니없는지 정도는 알 수 있다.
"하...... 하하...... 쿠키 더 있는데."
"흥!"
-데이비, 그대는 가끔 그 멸망을 부르는 주둥아리를 닥쳐버리면 정말 멋질 듯한데.
데무룩.......
괜히 할 말이 없어지자 입안에 감돌던 고소한 쿠키 향이 더없이 쓰게만 느껴졌다.
37. 보이지 않는 곳에서.
으리으리한 궁.
어지간한 왕국은 명함도 못 내밀만큼 화려하고, 웅장하며 거대한 궁의 이름은 용의 궁이라 불리는 곳이다.
다름 아닌 동부 대륙 최대의 국가. 린디스 제국의 황성 중 황제가 머무는 궁이기도 했다.
티오니스 대륙에는 3개의 거대 제국과 한 개의 성국이 존재한다.
서부 대륙의 가장 큰 대륙이자 세 개의 꼬리를 지닌 전갈을 문양으로 삼은 콘타스 제국.
그리고, 대륙 최대강국이자 검신의 후예가 세워 올린 무구한 역사를 지닌 팔란 제국.
마지막으로 동부 대륙에 존재하는 주신 프리아를 모시는 성국 발샤스와 쌍두룡의 문양을 지닌 제국 린디스 제국.
실제로 현재 대륙의 정세는 이 4개의 국가가 쥐고 흔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게다가 린디스 제국은 실질적으로 동부 대륙에 존재하는 국가들을 규합하는 거대한 연합의 단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그 린디스 제국의 현재 황제인 데오르트 알 린디스는 황족들만이 출입할 수 있는 내궁의 정원에서 말없이 활을 들어 쏘고 있었다.
쌔애애앵 파아악!!
거리가 수백 미터는 되어 보이는 타깃이었지만 그는 묵묵히 활시위를 당겼고 그가 손을 놓을 때마다 바람을 뚫어버릴 듯 날아든 화살이 어김없이 두꺼운 목제 타깃을 꿰뚫었다.
"폐하, 몸이 상하시옵니다. 이쯤 하시는 게 어떠하실는지요."
곁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활대를 잠시 내려놓은 린디스 황제, 데오르트는 제 곁으로 다가온 남성을 향해 차갑게 웃어 보였다.
"시합을 해보겠느냐."
"하하, 폐하와 궁술 시합을 하면 자괴감에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할 겁니다."
"차기 황제로서 린디스 제국을 이끌어나가야 할 놈이 엄살이 심하구나."
담담하게 대화하는 데오르트 황제의 얼굴엔 지독한 권태와 피로가 몰려있었다.
그의 풍채는 70 정도를 넘긴 노인의 모습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체격은 오랜 시간 근육을 단련해온 이처럼 단단하고 크기 그지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