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4
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
- 4권 18화
"저쪽은 중요한 일을 하고 있으니 잠시 내버려 두지요."
당연히 친우의 재회를 방해할 생각이 없었기에 나는 나대로 일리나를 제지하며 빙그레 웃어 보였다.
칼디라스가 페르세르크에 관해 이야기를 하지 않은 건 어쩌면 잘한 일인지도 모른다.
뱀파이어를 극도로 증오하는 면모를 보여주었던 그녀였으니 전(前) 마왕이라는 사실을 알면 괜히 불똥이 튈 수도 있는 법이다.
"......알겠어요."
사정은 알 수 없지만 일단은 알겠다는 듯 그녀가 미심쩍은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럼 이제 우리 이야기를 좀 하죠."
"흐음......."
"사실 묻고 싶은 게 너무 많아요. 하지만 왕자님은 그걸 답해주실 만큼 친절한 성격은 아니시죠."
딱히 그런 것도 아니지만 애써 나는 티를 내지 않았다.
"뭐, 저도 찔리는 건 있으니 성심성의껏 대답해드리지요."
"당신은 도대체 누구시죠?"
"라운 왕국의 1 왕자, 레니 알리샤드 왕비의 적자인 데이비 올 라운이라고 합니다."
"제가 묻는 건......."
그녀가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제대로 물었다면 답해줬을 텐데.
비실비실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머금은 채 내가 그녀를 바라보자 뭐가 분한지 그녀가 이를 악물고는 분한 듯 나를 바라보았다.
"후우...... 뭐, 좋아요."
그리고는 곧 다른 생각이 미쳤는지 차가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미묘하게 처음 만났을 때의 그 절제되고 우아하던 모양새와는 뭔가 다르다.
"시간은 많으니...... 천천히 쥐어짤 거야."
담담하게 중얼거린 그녀는 곧 이곳에 들어올 때 한 손으로 들고 있었던 천 더미를 천천히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때의 검입니까?"
그녀가 사용하던 거검.
일반인은 들고 휘두르는 것조차 힘들지만 검신, 하레스의 중검을 사용하기 위해선 이만한 중량의 검이 필요했다.
어지간한 수준 이상으로 올라버린 나는 중량을 다른 면으로 메꿔서 사용하고 있지만 말이다.
"조금 달라요. 이건 제가 평소에 사용하던 검이니까요."
담담하게 말한 그녀가 나와 눈을 마주쳤다. 올곧은 눈동자가 한 치의 흔들림 없이 나를 직시해 왔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가르쳐주세요. 검신의 중검."
그녀의 얼굴에는 무언가를 향한 갈망이 어려있었다.
"거절해도 됩니까?"
"계속 요청할 거에요."
"계속 거절하면요?"
"도망 못 가게 하는 방법이 있는데."
그녀가 화사하게 웃어 보였다. 그리고는 품 안에서 작은 서류뭉치를 꺼내 놓았다.
"이건......."
그 내용을 슬쩍 훑은 내가 눈을 찌푸리자 그녀의 입가에 스산한 미소가 어렸다.
"약혼 제의서. 왕자님은 몰라도 왕실은 다르겠죠? 나 지금 체면이고 뭐고 다 던지고 온 거라 단단히 각오했어요, 나 끝까지 유치하게 갈 자신 있어요. 해볼래요?"
-......그대, 순간 흔들렸지.
'기분 탓이야.'
-사기 치지 말아.
'.......'
일리나 황녀는 지독한 집념을 보여주며 선언하듯 말했다.
내가 미묘하게 비틀려 있듯 그녀 또한 검에 상당히 집착하고 있다.
"자꾸 저를 피하시면 이걸 라운 왕국 왕실에 정식으로 보낼 거에요. 아바마마께선 제가 원하는 상대라면 상대가 노예 출신이라 하여도 허락하겠다고 약조하셨어요. 하물며, 동대륙에서 떠오르는 하인스 영지의 영주라면."
그녀의 말에는 한 치의 거짓도 없었다.
내가 그녀를 계속 피한다면 진짜로 약혼 제의서를 왕실에 들이밀어 버리겠다는 듯한 태도였다.
"그러다가 이쪽에서 덜컥 받아들이면요? 자신에 대해 너무 애정이 없는 것 같은데."
내가 쓰게 웃자 그녀는 화사한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나를 바라보았다.
미소 자체는 정말 귀엽고 아름다운 소녀였다.
"어머, 왕자님 정도의 실력가에 재력, 능력이 있는 사람이면 저도 나쁘진 않아요."
반사적으로 말이 안 통하는 여자라는 느낌이 확 와 닿기 시작했다.
"쯧."
짧게 혀를 찬 내가 손가락으로 창문을 가리켰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지 말도록 하죠. 그럼 다음에는 좀 생산적인 대화로 봅시다."
담담하게 축객령을 내리자 그녀가 입을 꼭 다물고 나를 노려보았다.
그리고는 쾅! 소리를 내며 테이블을 짚고 일어서더니 내게 성큼성큼 다가왔다.
"아니, 나 포기 안 해요."
그리고는 집념이 가득한 시선을 보내왔다.
중증이다 싶을 정도의 집념에 절로 혀를 내둘렀다.
"나 정말 성격 더럽고 고집 강해요. 그래서 다른 여자들처럼 뒤에서 숨어서 눈치 보는 성격 아니야."
순식간에 낚아채듯 내 옷깃을 잡아당긴 그녀가 환하게 웃어 보였다.
"어디, 누구 고집이 더 센지 해봐요."
39. 디셉티콘 편대 프로토타입, 메가트론.
고집불통. 막무가내.
뭐라 설명할 것들은 많지만 눈앞의 이 소녀는 그 모든 것을 충족시키고도 남을 만큼의 독종이었다.
반대로 대놓고 제 목적을 드러내며 선전포고하는 꼴이 퍽 우스워 하고 싶은대로 하게 내버려 두는 점도 없잖아 있다.
"안 바쁘십니까?"
영지 내에서 벌어진 자잘한 일을 처리한 후 한 가지 실험을 위해 몇 가지 계산식을 작성하던 나는 곧장 눈앞에서 느긋하게 차를 마시며 작은 서류뭉치를 작성해 마법 가방 안에 넣고 있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꿀을 바른 것 같이 화사하고 찰랑거리는 머리카락이 풍성하게 흩날리며 향긋한 향기가 방안에 가볍게 풍겨왔다.
검을 배운 것치고는 여성스러운 가녀린 체구에 반짝거리는 눈동자로 익숙하게 서류들을 정리하는 그 모습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바빠요, 그러니 여기서 이러고 있잖아요? 뭐든 몸이 가까워야 마음도 가까워진다니까."
너무 당당한 대답에 내가 허! 하고 헛숨을 내뱉었다.
"아니 그게 말이 돼요?! 세상에 어느 누가 일거리를 들고 와서 외간남자의 집무실에서 처리해요?"
당황한 듯한 윈리의 질문이 허공을 공허하게 맴돌았다.
"어머, 윈리 왕녀님. 외간남자라니요. 친우끼리는 이런 것도 자주 한다고 들었는데. 실제로 제국의 재상이신 오르바 공작께선 친우이신 페르둠 백작저로 자주 찾아뵈시는 걸요."
"이익! 오라버니가 언제부터 황녀님의 친우가 된 건지 저는 이해를 못 하겠어요!"
마치 제 장난감을 빼앗길 위기에 처한 아이처럼 불안해하는 윈리의 외침이 귀여웠던 탓일까, 일리나는 정신없이 서명하던 서류들을 모두 마법 가방에 담은 뒤 찻잔을 들어 음미하듯 홀짝였다.
"그러네요. 이런 시시콜콜한 서류작업은 그만하도록 하죠."
"이익!"
말이 안 통한다는 사실을 깨달은 윈리가 황당하다는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으음......."
"그보다 저는 왜 율리스 5급께서 여기 계신지 더 궁금한데요?"
마치 타박하듯 조용히 물어오는 일리나의 질문에 율리스가 빙그레 웃어 보였다.
마치 투정부리는 동생을 바라보는 시선이다.
"글쎄요. 저야 데이비 님과는 친구 사이니 별문제가 되진 않겠지요."
"언제부터요?"
"음...... 글쎄요, 언제부터일까요."
담담한 대답에 일리나의 시선이 순식간에 내게 꽂혔다.
"이러면서 나랑은 엮이기도 싫어한 거예요? 내가 뭘 잘못했길래?"
"음...... 황녀님과 함부로 친해졌다간 여러 사람 적으로 돌릴 거 같아서 말입니다."
"이익! 내가 괜찮아요! 우리 친구 해요! 말도 놓고!"
거의 3파전...... 아니 4파전.
일리나를 향해 한껏 경계한 고양이처럼 털을 세우는 윈리.
마냥 이 상황이 재밌다는 듯 쿡쿡거리고 있는 적탑 최연소 장로, 율리스.
그리고 자신만 빼놓고 치사하다며 불만을 토로하는 일리나 황녀.
그녀의 접근방식은 막무가내 그 자체였지만 그녀의 심성 자체는 제법 마음에 드는 편이었다.
그녀가 조금이라도 비뚤어진 인간상이었다면 애초에 이렇게 만나주지도 않았겠지만 말이다.
그녀가 팔란 제국의 황제라 할지라도.
어느 정도 힘을 되찾고 난 뒤부터 나는 의외로 막무가내식으로 살고 있다.
그리고, 그 사실을 나 또한 잘 인지하고 있다.
-잘 알고 있는 녀석이 그리해?
내 어깨에 앉아 하품을 쩍쩍하며 늘어져 있던 페르세르크가 귓불을 잡아당기며 키득거렸다.
-응? 말해보아, 안 그러면 그대의 귓구멍에 팔을 집어넣을 게야.
'섬뜩하니까 꿈에서라도 그런 짓 하지 마라.'
"그러고 보니 황녀님과 율리스 님은 제법 친해 보이시는데. 면식이 있는 사이였습니까?"
"모르셨어요? 두 분에 관한 이야기는 꽤 유명한 이야기인데."
윈리의 말에 아주 잠깐 흥미가 일었다.
저렇게 왈가닥이라도 일단 윈리는 왕녀, 제대로 데뷔하기 전부터 제법 많은 비공식 사교의 장에 나간 경험이 있다.
제법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 정도는 빠삭한 편이라는 소리였다.
"약혼내정으로 꽤 이야기가 많이 나오지 않았나요? 저도 이런저런 풍문은 익히 들어 알고 있어요."
"그렇군, 어쩐지 윈리가 처음부터 날을 세우더라니."
자신이 좋아하는 남자와 약혼내정이라는 소문이 돌고 있는 여자.
경계할 만도 하다.
-멍청하긴.......
[엥? 쟤 바보 아니야?]
조용한 내 중얼거림을 들은 페르세르크와 발칙한 신검의 대화 소리가 들려왔지만 가볍게 무시했다.
두 사람의 모습은 그야말로 느긋한 불여우와 천적을 만나 하악질을 하는 작은 고양이가 따로 없었다.
"윈리는 그렇다 치고, 율리스 님도 적탑 지부에 볼일이 있지 않습니까?"
"뭐, 사실상 제가 할 일은 없으니까요. 오히려 지금에 와서는 데이비 님에게 더 볼일이 있습니다만. 이를테면 마법에 관련해서 말이죠."
말이 좀 미묘하긴 하지만 아무래도 율리스는 내가 보여주었던 이해 못 할 마법들 중에서도 무영창이라는 것에 굉장히 큰 관심을 가지고 있는 듯한 모양새였다.
한마디 까딱 잘못했다가 그 탐구욕 강한 미치광이 마법사들의 관심을 일제히 받는 건 절대 사양이다.
물론, 그 여파를 잘 알고 있는지 본인도 상당히 입을 무겁게 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생각 이상으로 생각이 깊고 상대를 배려해줄 줄 아는 그 모습에 어느 정도 고마움을 느끼고 있던 찰나이기도 했다.
똑똑.
"저하, 말씀하신 것들은 전부 구비해서 지하 창고에 옮겨놓았어요."
"아, 드디어 왔나? 수고했어."
조심스레 고개를 내밀어 보고를 올리는 에이미의 등장에 으르렁거리던 윈리와 일리나, 그리고 율리스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에게 향했다.
에이미는 이제 제대로 영지의 대리 관리 업무를 맡기 시작했지만 어째서인지 아직도 시녀복을 벗지 않았다.
물론, 그 차이를 보이기 위해 옷감의 색이나 재질, 혹은 장식 등이 달라붙긴 했지만 말이다.
합리성을 추구하고 깐깐한 베르닐 시종장이 어째서 저런 복장을 허용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만.
"시녀...... 는 아닌가?"
일리나의 존재를 확인하고 화들짝 놀라 조심스레 사라지는 에이미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일리나가 조심스레 중얼거렸다.
"에이미는 오라버니의 전속 시녀니까요."
"이젠 영지 대리 관리인이지. 남작 작위도 받았다."
"정말요?"
놀랍다는 듯 윈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 대륙의 상식으로 여성이 작위를 받는 건 남성의 경우에 비해 수십, 수백 배는 번거롭기 짝이 없으니 말이다.
"대단하네요."
"지금 왕성은 혼란스러우니까, 그런 일 하나하나 신경 쓰기 어렵겠지."
페일트리스 후작을 필두로 한 왕족파와 바리에타 공작을 필두로 한 귀족파의 정계 싸움이 극으로 치닫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