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7
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
- 4권 21화
"그나저나, 이 늦은 시간엔 무슨 일로?"
"그냥...... 대화나 하자고 왔어요."
-거짓말이군. 초조한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있어.
졸린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던 페르세르크가 조용히 읊조렸다.
내 눈에 보인 그녀의 정보 확인 창에도 그녀가 다른 이유로 이곳에 왔다는 것을 알 수 있을 정도이니 그녀의 머릿속엔 현재 그 생각으로 가득한 모양이었다.
삐릭.
-성명 : 일리나 데 팔란.
-나이 : 17
-칭호 : 신검의 주인, 5대 미녀 중 일 화(華)
-특이사항 :
신검의 계약자.
팔란 제국의 금지옥엽
Last Wisp(마지막 조각)의 일원.
-현재 심리 :
혼란, 고민
평범한, 아주 평범한 상태창. 하지만 한 가지가 눈에 밟혔다.
'Last Wisp(마지막 조각)이라.......'
뭔가 흥미로운 이야깃거리를 가져왔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
"뭐, 이야기 정도야 뭐 어려울까요. 차라도 내올 테니 잠시 앉아 계세요."
아무도 남지 않은 조용한 공방 내부로 내 발걸음 소리만 조용히 울려 퍼졌다.
* * *
"저 골렘...... 세상에 알려진다면 아주 난리가 나겠네요."
난리뿐일까. 위험 병기 취급당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다행일 것이다.
복합명령 수행에 고등급 전투 수행이 가능한 골렘은 그야말로 폭탄이나 다름없다.
고요한 공방의 한쪽에서 스스로 몸의 구성 부분을 움직이고 있는 프로토타입 메가트론을 보던 그녀가 쓰게 웃어 보였다.
"그렇게 노력했는데...... 결국 골렘 하나도 이기지 못했네요."
"저게 괴물 같은 거지 일리나 님이 약한 건 아닙니다."
거짓은 없었다.
메가트론을 구성하는 핵은 마나석과는 차원이 다른 다량의 마정석.
게다가 기본 골자에는 고대 마법사가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특이한 석재가 원재료로 사용되었다.
기본적으로 포진되어있던 마도 골렘 놈들도 잘못 모이면 마스터급 이상의 효율을 보여주는데 마스터도 되지 않은 익스퍼트급 검사가 버틴 것도 용한 일이다.
하지만 그녀에겐 패배가 상당히 큰 굴욕이었던 모양이었다.
팔이 잘리면 그 고통에 제대로 된 싸움을 하지 못하는 인간과 다르게 메가트론은 고통을 느끼지 못하는 골렘.
당연한 일이었다.
메가트론도 여러 가지 데이터가 필요한 시점이지만 내가 볼 땐 이 여자도 마찬가지.
"경험이 중요한 겁니다. 이럴 게 아니라 나가죠."
"어...... 딜요?"
약간 풀이 죽어있는 그녀를 향해 나는 쓸데없이 오지랖을 한번 부리고 싶어졌다.
"밤 산책하기 좋은 날씨니까요."
내 말에 그녀가 멍하니 나를 따라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검술은 가르쳐주지 않겠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저 대련이니 신경 안 써도 됩니다. 마냥 꿍하게 있는 것도 보기 싫고. 혹시 싫습니까?"
"아...... 아뇨! 좋아요!"
화들짝 놀라며 손사래를 친 그녀가 두근두근하는지 진정되지 않는 눈빛으로 검을 내려다보았다.
백은빛의 거검.
신검 칼디라스는 은은하게 그 휘광을 발휘하고 있다.
그녀가 신검을 들고 있는 것에 반해 내가 들고 있는 건 그저 목검 한 자루.
말도 안 되는 오기 부리지 말라고 주변에서 소리쳐도 이상할 게 없는 페널티였지만 내게는 상관이 없었다.
"목검이 아닌 진검을 들라고 해본들...... 사실상 어처구니없는 오만이겠죠."
그녀는 현실적으로 그녀 자신과 나의 차이를 깨달았다.
-그대는 의외로 친절하단 말이지. 아닌척하면서 도와주고.
'귀찮아지기 전에 선을 긋는 것뿐이야.'
필요 없는 도움이었다곤 해도 그녀의 호의를 받은 적이 있기에 그저 갚는 것일 뿐이다.
픽 웃으며 페르세르크에게 타박을 주며 목검을 내리 세운 내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선공 드리겠습니다. 들어오세요."
"네, 그럼...... 잘 부탁해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그녀의 표정이 한없이 진지해졌다.
스스슷.......
동시에 그녀의 전신으로 푸른 기류가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어지간한 익스퍼트라면 그 묵직한 마나의 흐름에 숨부터 막혔을 것이다.
투쾅!!!
그리고, 곧이어 그녀의 몸이 포탄처럼 쏘아져 들어왔다.
그야말로 섬광과도 같은 속도,
묵직한 찌르기에 나는 그대로 목검과 몸을 마치 물 흐르듯 부드럽게 움직이며 정면으로 파고들었다.
압도적인 중량이 담긴 일검과 물처럼 부드럽게 움직이는 내 일검의 파괴력 차이는 명확하다.
그렇게 판단한 그녀의 검에 더욱 강렬한 기세가 어리지만 나는 그 기세를 피하지 않고 강하게 진각을 밟으며 스위치를 올리듯 순간적으로 검을 가속했다.
카앙!!!
묵직한 충격음이 사방에 울려 퍼진다.
반사적으로 몸을 틀며 칼디라스로 막아낸 그녀의 신형이 공처럼 튕겨 나와 거리를 벌렸다.
"무슨 힘이......."
그리고는 아주 미약하게 움찔하며 제 옆구리를 쓸어내렸다.
재능이 어디 가는 건 아닌지 초인적인 반사신경을 보여주긴 했다만, 추가타를 완전히 막지는 못한 모양이다.
"중검치고는 생각 이상으로 가벼운데."
내 도발에 그녀의 표정이 한껏 가라앉았다.
동시에 그녀의 몸 전체에 흘러나오던 기류가 격렬하게 흔들리는 것을 기준으로 그녀의 맹공이 시작되었다.
마치 산사태가 덮쳐오듯 그녀의 검이 한번 휘둘러 질 때마다 흉포하게 날뛰던 마나가 재차 덮쳐온다.
한 번 한 번 들어가는 공격을 피한다면 피할 수 없게 틈을 막아버리겠다는 의도가 분명히 엿보였다.
콰앙!! 쾅!!
도저히 신검과 목검 사이에서 나온 것이라곤 생각할 수 없는 충격음이 연달아 터지며 근처의 지면을 닥치는 대로 박살 냈다.
익스퍼트 최상급의 오러와 그 수준에 맞게 뽑아낸 오러의 충돌이라 해도 그 위력은 기본적인 수준을 아득히 상회하고 있다.
쾅!! 쾅!!
거대한 힘을 담은 베기라는 의미를 지닌 검신의 중검의 무게중심을 자유자재로 다뤄내며 맹공을 퍼붓는 그녀의 공격은 한 방 한 방이 묵직하기 짝이 없을 정도였다.
쾅!!
내가 서 있던 지면이 그녀의 일검에 완전히 반파되며 무너져 내렸다.
확실히 신검을 쓰는 그녀와 쓰지 않은 그녀의 무력차이는 배 이상으로 차이가 심했다.
'이 정도면, 메가트론으론 오래 버티지도 못하겠네.'
신검이 아닌 일반 검이었으니 이긴 것이지 그녀가 신검을 사용했었더라면 메가트론은 벌써 조각조각이 나버렸을 것이다.
내가 그녀에게 보여주는 건 처음부터 한 가지였다. 그녀가 검신의 검술인 중검으로 밀어붙인다면 나 또한 같은 중검으로 응수하는 수밖에.
[초 중검, 바위 쳐내기]
목검을 부드럽게 움직여 그녀의 검에 닿을 즈음 다시 폭발적으로 가속한다.
상대의 검을 흘리는 건 내 장기 중에 하나, 재능있다 해도 마스터도 되지 못한 소녀가 반응하기엔 무리가 있다.
동시에 일리나의 검을 쳐낸 내 목검이 바닥을 한번 가르듯 360도로 회전하며 그녀의 옆구리를 다시 한 번 후려갈겼다.
동시에 내 목검의 궤적을 따라 잔디 바닥이 강렬하게 헤집어졌다.
"아윽!!"
"포기?"
"이 정도로 포기할 거면 이렇게 찾아오지도 않았어!!"
꽤 타격이 컸을 텐데도 독기를 품으며 재차 공격해 들어오는 그녀의 맹공이 더욱 거세졌다.
그녀가 만들어낸 여파는 사방을 닥치는 대로 부숴버렸지만 정작 그녀의 표정은 오히려 점점 어두워져만 갔다.
뭔가 유효타를 먹일 만하면 마치 물 흐르듯 움직인 검이 그녀의 검을 차단하고 반격을 가한다.
올곧고 파괴적인 그녀의 검술은 내가 휘두르는 한없이 부드러운 검술에 완전히 차단당했다.
마치 농락이라도 당하듯, 상황이 기묘하게 흘러가자 그녀의 얼굴에 초조함이 더욱 짙어졌다.
카앙!!
이윽고 그녀의 검을 쳐낸 내가 거리를 벌려 자리를 벗어나려 하자 그녀의 몸이 마치 포탄처럼 쏘아져 나와 내 앞을 가로막았다.
동시에 튕기듯 회전하는 칼디라스를 역수로 틀어잡은 그녀가 한 치의 망설임 없이 파고들어 왔다.
그리고는 조금 놀랄법한 공격을 해왔다.
[초 중검 태산 쪼개기.]
'오.'
절로 감탄이 나오는 선택.
분명 그녀가 내 틈을 타고 들어와 내다 꽂은 공격은 펠리스티 공국에서 뱀파이어 시녀, 샤리를 베어버릴 때 썼던 검술이었다.
위력 자체는 비교할 건더기도 없는 수준이지만 말이다.
지금까지 일어났던 여파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거대한 파장이 사방을 뒤엎고 나서야 그녀는 바닥에 칼디라스를 역으로 꽂아넣은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이쯤 하면...... 뭐라도......."
"오케이, 여기까지."
하지만, 그녀의 바람은 목검으로 그녀의 뒤편에 선 채 옆구리를 톡톡 두드리는 내 모습에 완전히 무너져 내렸다.
내 시원한 미소에 그녀의 얼굴이 참혹하게 일그러졌다.
-방금 종 베기, 분명 그대가 사용했던 그 검술이군. 설마 한 번 보고 그걸 익힌 게야?
"미친 재능, 실화냐."
-그대가 할 말은 아니다만.......
'나는 배울 수 있는 범위가 넓은 거지 저렇게 한 번 본다고 그걸 그대로 실전에 써먹을 만큼 막돼먹진 않았어.'
나는 저 검술의 원형을 흉내 내는 데에 10년이 걸렸다.
필사의 일격까지 너무 허무하게 막힌 탓일까.
그녀는 분한 감정을 참지 못한 채 방울진 눈물을 뚝뚝 흘리며 이를 악물었다.
"어떻게 잡은 기회인데...... 아무것도 못 하고 끝내긴 싫어!"
그녀의 발작적인 외침에 나는 그녀가 가진 고민이나 걱정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결론이 나기가 무섭게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그녀를 향해 파고들었다.
반응도 못 한 그녀가 뒤늦게 눈을 부릅뜬 그 순간.
물처럼 부드럽게 움직이던 목검을 아주 일순간 폭발적으로 가속해 그녀의 머리 바로 위로 베어내며 작게 중얼거렸다.
"놓치지 말고, 잘 봐."
"뭣? 꺄악!"
[신검합일]
[초중검 거목참수]
쩌억!!
순간적으로 가속한 파괴력은 상상 이상이었다.
자잘하게 파괴하던 여파와는 다르게 일검에 수십 미터가 거대한 갈퀴로 할퀸 듯 날아가 버렸다.
"자, 느낀 점은?"
"흐르는듯한 검술...... 전혀 방비를 못 했어, 같은 부분에 몇 차례고 계속......."
그녀는 지금 제가 익히고 있는 검술의 약점이 너무 명확하게 드러난 탓인지 혼란스러워 보였다.
자신도 그렇게 느끼고는 있지만 중검이 가진 이름값에 기대어 아니라고 계속해서 부정하고 있었을 것이다.
"당신은...... 중검이 약점이 가득한 검술이라 말하고 싶었던 거야?"
혼란스런 표정으로 소리치는 그녀의 말이 주변을 울렸다.
처절한 자괴감과 슬픔이 어린 울음기 섞인 목소리였다.
"중검은 이제 오래된 쓸모없는 검술이라고 말하고 싶은 거냐고......."
확실히 모르는 이가 보면 마치 그녀가 사용하는 중검에 최악의 상성을 지닌 검술로 농락한 것처럼 보일만도 했다.
그녀의 검이 가져온 유효타는 완전히 제로였으니 말이다.
"상성이 최악인 검술을 골랐다라......."
절로 한숨이 나와 그녀에게 다가가자 그녀는 억울하다는 듯 눈물을 뚝뚝 흘려댔다.
"내가 잘 보라고 했지."
따악!!
"꺅?!"
갑작스레 내가 그녀의 이마에 딱밤을 놓자 비명을 지른 그녀가 눈을 부릅떴다.
"모든 이에게 완벽하게 맞아들어가는 검술 같은 건 없어."
"뭐?"
"그건 검신의 검술도 마찬가지고."
쌍둥이도 제각각 다를 만큼 사람은 다양한데 그들을 모두 만족하게 하는 검술 같은 건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