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8
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
- 4권 22화
"일단 네가 무엇을 놓쳤는지 천천히 다시 보여줄게."
그리 말하며 나는 망설임 없이 여유분의 목검을 들어 강하게 바닥을 향해 내리그었다.
한 치의 어긋남 없는 강대한 힘이 섞인 무거운 일검.
쿠웅!!
압도적인 중량이 담긴 일격이 일부 지면을 으스러뜨리고는 사라진다.
그녀가 사용하던 파괴력에 모든 것을 담아 넣은 검신의 검인 중검의 기본 베기였다.
이후 나는 다시 한 번 검을 들어 휘둘렀다. 다만 이번엔 전처럼 파괴력이 극도로 증가한 게 아닌 아주 가볍고 자유로운 일검이었다.
공기의 흐름만 보아도 파괴력의 차이는 분명했다.
물론, 이렇게 끝날 것이라면 번거롭게 예시를 들어 알려주지도 않았을 것이다.
부드럽게 낙하하던 검이 일정 위치에 도달했을 때.
손목이 살짝 떨리며 검 끝으로 아주 순간, 폭발적인 중량이 가해졌다.
쿠우우웅!!!
이전과 똑같은 강대한 충격파가 터지며 좀 전과 똑같이 거대한 상흔을 땅에 남기고는 사라졌다.
첫 번째와 두 번째 모두 똑같은 파괴력이다.
"방금 두 번의 베기에 차이가 보여?"
내 말에 그녀의 얼굴에 경악이 어렸다.
어느새 서로 간에 말을 놓는 상황까지 왔지만 그녀나 나나 그 부분을 신경 쓰진 않았다.
나름대로 진지하게 어드바이스를 하고 있는 입장이니 말이다.
"어떻게 파괴력이...... 같을 수가 있는 거야?"
그녀가 알고 있는 중검은 파괴력과 범위를 중시한 무게중심의 검술이다.
가벼운 종 베기, 횡 베기, 올려 베기 등등.
"말도 안 돼! 검신의 검술이 유실되었어도 중량을 한계까지 가해 파괴력을 끌어올리는 검술이라는 건 나도 알아! 그렇게 부드러운 검로가 나올 수는 없다고!"
그녀의 말대로 확실히 검신의 중검은 내가 방금 보여준 흐르는듯한 검술이 일반적으로 나올 수 없는 구조로 이어진다.
"기교를 버리고 파괴력에 모든 것을 담는 검술이 중검 아니야?! 그런데 저렇게 느리고 부드러운 검술이 같은 파괴력을 가진다는 게!......."
그녀의 말대로였다.
기교를 버리기에 나올 수 있는 파괴력인 만큼 그 힘은 일반적으로 끌어낼 수 없다.
당연히 그런 희생을 하고 얻어내는 파괴력인 만큼 상식적으로 기교까지 챙기는 검술이 그것을 챙기기엔 욕심이 지나쳤다.
"흐음, 제로백이라고 해야 하나, 속도가 최대속도까지 올라가는 시간이라는 건데."
"제로...... 백?"
"마차가 전속력이 되는 데까지 걸리는 시간 정도로 타협하자. 일단 대충 이해했지?"
"......."
내 말에 그녀가 무언가를 깨달은 듯 고개를 끄덕였다.
자동차가 시속 100km에 이르기까지의 시간.
그게 제로백이라는 용어의 뜻이다. 비록 자동차가 없는 이곳에선 마차로 비유하긴 했다만.
"무게가 만들어내는 충격력은 시간이 흐르면 한계까지 강해지는 건 알고 있겠지?"
"그게 중검의 방식이니까."
그저 단순한 베기에 압도적인 중량을 가해 폭발적인 위력을 끌어낸다.
"그렇다면 그 중량이 최대치까지 올라가는 속도를 조절해보려는 시도는 해봤나?"
"그게 무슨......."
"중검에 사용되는 중량은 중력과 비슷하지만 마나를 극도로 뭉쳐 무게를 흉내 내는 거지 절대 중력이 아니야."
중력이라 여기는 건 그저 이미지적인 부분일 뿐이다.
내 말에 그녀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중검에서 다루는 파괴력을 끌어오는 중량은 어디까지나 마나로 만들어진 임의적인 힘이지 중력이 아니다.
중검이 가지는 제로백의 딜레이는 물리법칙과는 관계가 없다.
그 말인즉슨. 숙련도에 따라 제로백의 속도는 얼마든지 바뀔 수 있다는 말.
영특한 소녀답게 내가 한 말의 뜻을 깨달은 것이다.
손에 쥐고 있던 목검을 망설임 없이 던져버린다.
"중검의 장점은 파괴력, 분쇄력에 있지만 약점도 분명히 있지, 숙련도가 떨어지면 파괴력에만 치중한 극도로 불안정한 검이 된다는 것. 그럼 여기서 힌트를 줄게."
내 말에 그녀의 놀란 시선이 내리꽂혔다.
"검신 하레스는 무지막지한 중력이 가해지는 와중에도 방향을 틀어버릴 만큼 무식했던 작자이니 예외로 치고, 왜 이 검술이 갑자기 유실되듯 끊어졌을까."
당연하지, 검신이 보여주는 검을 그저 흉내 내듯 따라 하니 그 기본 구조를 눈치채지 못한 채 세대가 넘어갈 수밖에.
단순히 파괴력만큼은 최강인 검술이니 그래도 최고의 검술이라 불리며 따라왔을 것이다.
멍한 표정으로 앉아있는 그녀는 아직 내 말뜻을 완전히 이해하진 못한 듯했다.
아마도 그걸 이해하고 일부나마 깨닫는다면 마스터의 벽을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기본기...... 어쩌면 뭔가 잡힐 것 같아. 고마워......."
이윽고 머릿속이 일면 정리되었는지 그녀가 눈물이 그렁그렁한 얼굴을 푹 숙인 채 조심스레 말했다.
단 한 번의 어드바이스지만 그게 얼마나 큰 비중을 차지하는지는 본능적으로 느낀 모양이었다.
-그대는 의외의 부분에서 세심한 편이야.
'거참...... 한 게 뭐가 있다고.'
내가 침묵한 채 아무런 말도 하고 있지 않자 그녀가 천천히 내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칼디라스를 쥐고 있던 손에 힘을 꽉 주며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그나저나 상당히 급해 보이는데."
"아......."
"내가 볼 때, 황녀님은 지금 뭐에 쫓기는 듯 급해 보이거든."
"그, 그런 건 없어!"
"뭐, 듣는다고 어디 닳는 것도 아니고, 기회 줄 때 말하는 것도 현명한 방법이라고 본다."
내 말에 그녀의 눈동자가 혼란으로 흔들렸다.
하지만 곧 결정을 내린 듯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당신...... 정말 따뜻한 사람이구나......."
"듣는다고 귀 닳는 것도 아니고 일단은 들어만 주는 거다."
"그럼...... 혹시 말이야, 내 파트너가 되어줄 수 있어?"
그녀의 말뜻은 어떻게 이해하냐에 따라서 굉장히 큰 오해를 불러올 법한 발언이었다.
* * *
"당신의 힘이 필요해."
조용히 말한 그녀가 내게 다가왔다.
"최대강국의 황녀님이 힘이 부족하다는 건 말이 안 될 텐데. 말 한마디면 움직여줄 소드마스터가 어디 한둘인가?"
"그들의 힘을 빌릴 순 없어...... 가용할 수 있는 인원은 20세 미만, 그렇기에 다른 이들은 규정에 어긋나."
이후 그녀는 스스로 꼭꼭 숨기던 이야기를 조금씩 털어놓았다.
팔란 제국의 황녀인 그녀는 어떠한 단체의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시험의 방식은 일정 목표를 두고 2명의 파트너로 된 여러 팀이 서로 경쟁하듯 목표를 달성하는 것.
문제는 그녀를 포함해 파트너까지 두 명이 힘을 합쳐 시험을 치러야 하는데 그녀의 파트너가 모종의 이유로 행방불명 상태라는 점이었다.
"그래서, 시험을 같이 치는 파트너가 행방불명인 탓에 도와줄 이가 필요하다?"
"필사적으로 찾아 헤맸지만 마치 증발해버린 것처럼 사라졌어...... 그래서 내가 강해질 수 없다면 차라리 도와줄 사람이라도 있어야 해."
"흐음...... 다른 시험을 치는 이들에게 도움을...... 아, 아니다. 척 봐도 모략 냄새가 풀풀 나네."
"자세한 건 몰라. 다만 시험을 치르기 위해선 파트너가 반드시 필요해."
그녀의 말에 나는 곰곰이 생각했다.
그녀는 자신이 속한 단체를 숨겼다.
확실히 어지간한 중규모 국가의 왕족이나 심지어 제국의 황족조차도 모를 법한 이름의 집단이지만 정보 확인 권능으로 그녀가 말한 집단이 무엇인지 정도는 분석할 수 있었다.
라스트 위스프(Last Wisp).
최후의 조각.
뭐 여러 가지 이름이 있지만 그녀의 상태창에 나타나 있던 이 명칭은 내게도 익숙한 이름이었다.
다른 작자도 아니고 어지간해선 옛날이야기를 해주지 않던 궁신 아폴론에게서 들은 이야기라 더 오래 기억에 남는 것일지도 모를 일이다.
여느 때와 같이 좋은 술을 구했다며 나와 대작을 벌이고는 뻗어버린 다프네를 찾아왔던 아폴론이 쓸데없는 감상에 젖어드는 바람에 우연히 들었던 이야기였다.
[뭐? 옛날이야기? 뭐, 좋아, 가끔 해주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하나 물어보자, 백성을 지키는 건 누구일 것 같아.]
'자경단? 근위대? 아니면 기사나.......'
[그렇지, 지성을 가진 생명체는 자연스럽게 집단을 이루고 필연적으로 국가가 탄생하니까, 그건 인간이든 엘프든 드워프든 모두 같아. 그렇다면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위협에서 대륙을 지켜내는 건 누구일까?]
처음 들을 당시엔 이게 무슨 헛소리인가 싶기도 했다.
하지만 금방 이해할 수 있었다.
출현하는 것만으로도 세상에 혼란을 가져올 만한 재해나 위협은 가급적 은밀하게 처리되어야 했을 터다.
[거기서 창설된 게 라스트 위스프. 최후의 조각이라는 연합 기사단이야. 뭐 말이 기사단이지 검을 쓰는 이는 생각보다 적지만.]
의외로 차분하게 이야기해주는 그의 이야기에 평소의 거북함도 잊은 채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다.
[서로 각기 다른 이름을 지니곤 있지만 그들은 라스트 위스프라는 거대한 유대 아래에서 자신들끼리 교류를 해왔고, 암암리에 대륙에 위협이 되는 것들을 처리해 왔어. 검신 영감이 마왕을 베어버리고 나서 이상할 정도로 대륙은 평화로웠잖아, 그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지.]
'뭐야 그게.'
[간단히 표현하자면...... 뭐라고 할까, 재능있는 이들을 데려가서 키우는 영웅, 혹은 용사의 씨앗을 키워내는 기사단이라고 할 수 있겠네.]
혼란 자체는 오래가지 않았다.
슬슬 이야기의 톱니가 맞춰지자 답이 나온 것이다.
어느 정도 자신의 위세를 가지고 있는 강자는 함부로 얽힐 수 없다. 게다가 주 타깃층은 미래를 짊어질 젊은 세대.
일리나는 그런 비밀 기사단의 일원 중 하나로서 배우고 힘을 기르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녀가 왜 그런 위험하고 명예조차 얻지 못하는 단체에 속했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적어도 흥미로운 이야기라는 건 사실이었다.
"웃기지? 이 이야기는 잊어버려도 돼. 당신 덕분에 나는 오늘 큰 걸 배웠어."
우물쭈물하며 자리에서 일어난 그녀가 짧은 치마를 툭툭 털어냈다.
"그럼 들어가자. 은혜는 잊지 않을게."
"가만."
그녀의 요구는 깊게 생각해보면 사실 고민할 가치도 없었다.
비밀 기사단이 하는 일은 비록 아직 완전한 기사단원이 아니라 해도 위험하긴 매한가지일 테니 말이다.
물론 그녀가 정말로 소중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도와줄 수도 있겠지만 적어도 그녀와 나는 말을 튼 지 고작 며칠밖에 되지 않았다.
그 사실을 그녀도 잘 알기에 그저 던지듯 한 말인 듯싶었다.
다만, 이런 평상적인 생각 외로 나는 다른 쪽으로 가능성이 엿보인 듯한 느낌을 받았다.
-그대가 말한 대로의 그 조직이 맞는다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은 위험과 맞서는 일을 하는 게 분명해, 위험도가 극도로 증가하겠지. 이건 말도 안 되는.......
'가만...... 이야, 이거 좋은데?'
내 의지를 들은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뜨여졌다.
-데...... 데이비?
"하자."
"뭐?"
"하자고, 그 시험, 얼마든지 도와주마."
너무 흔쾌히 대답해버리자 오히려 놀란 건 일리나였다.
그녀는 당황한 얼굴로 나를 보고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