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06
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
- 5권 6화
"일단 시작 신호가 울리면 넌 내가 말하는 대로 달려."
"달리라고?"
"방해하는 녀석들에게 잡혀서 시간 끌지 말고 무작정 달리면 돼. 그냥 영역 넓히는 데만 신경 써."
내 의견에 그녀는 당연하다는 듯 반론을 제시해왔다.
"그렇게 한다고 해도 나 혼자 차지할 수 있는 영역은 그리 많지 않아. 반대로 내가 간다고 했을 때 나머지가 우리 영역을 먹기 시작하면 아무 소용이 없잖아? 그런 와중에 내가 발이라도 묶이면......."
일리나의 논리 정연한 말에 내가 픽 웃었다.
"네 상황에 잠이 오냐?"
"뭐 인마?"
그녀의 얼굴이 한껏 불량하게 일그러졌다.
"좀 전에 오는 길에 들었다. 이곳 사람들의 시야에 비치는 나는 어디까지나 판단이 애매한 신입이야."
"그건 그렇지. 네가 그 취검인지 만취검인지를 쓴 것 때문에."
"그런 나를 선생들이 실전 시험에 투입할 거 같아?"
내 말에 그녀의 눈이 동그랗게 뜨여졌다.
"그럼......."
"그래, 내가 내 앞가림은 물론, 뛰어난 무언가가 있다고 여기게 하지 않으면 넌 수프 만들어서 개 주는 꼴이라고."
"......."
뿌드득 이가 갈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다행이라면 그녀는 목표를 향한 집착이 아주 강한 편이다.
비록 성실함으로 똘똘 뭉치고 무장한 모범생이라 해도 공부해온 것들을 써먹지도 못하고 탈락한다면 그녀로서도 절대 반기지는 않을 터.
"방법이 있겠지? 정 안되면 검을 드는 게 어때?"
"난 데이터를 수집하러 온 거지, 힘자랑하러 온 게 아니야. 그리고 하나 말하는 걸 잊었는데."
여기선 골렘만 가지고도 사실 충분하고. 기계라는 건 쓰기 나름인 법이다.
그녀의 불만을 무시한 채 메가트론을 활성화 시킨 나는 높은 바위 위로 올라가며 공간 확장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조그마한 주머니 몇 개.......
그리고 망원경 하나.
그리고 특이하게 생긴 마스크였다.
"망원경은 내가 챙기고, 나머지는 다 가지고 가. 특히 마스크는 지금 쓰고."
"이런 상황일수록 연금술사가 최적의 효율을 뽑는 사기계통이라는 걸 잊지 마."
-훈련을 시작한다!
동시에 기다렸다는 듯 보리스의 시작 신호가 급작스레 울려 퍼졌다.
콰아앙!!
그리고, 마치 준비했다는 듯 숲 곳곳에서 폭음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2인 파트너로 총 8팀.
8팀이 이 숲 안에서 제 영역을 펼치기 위해 난전을 펼칠 것이다.
상황판단, 후방 기습, 혹은 정면에서 밀고 들어오는 방해.
여러 요소를 고려해서 치러지는 이 훈련은 소수 정예를 키우는 데에는 제법 효율이 높아 보인다.
"아 몰라! 믿으면 되는 거지?!"
파앙!!
이윽고 일리나도 두고 볼 순 없다고 여겼는지 내가 가리킨 방향으로 빠르게 쏘아져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녀의 신검인 칼디라스는 훈련 중 사용이 금지되어있으니 전력을 크게 기대할 수 없다.
실력이 뛰어난 건 사실이나 이곳의 견습생들 하나하나 또한 재능이 있는 녀석들이니까.
"잘 들려?"
[그래!]
미리 그녀의 몸에 붙여둔 마나를 활성화 시켜 의지를 전달하자 그녀의 대답이 머릿속으로 징징 울려왔다.
의지전송 마법감도 양호가 확인되자 미련 없이 망원경을 들어 올렸다.
"내가 준 붉은 주머니 안에 작은 구슬이 들어있을 거다. 적당히 보고 하나씩 흩뿌려 놔."
[이게 뭔데?]
"눈알."
[꺅!!]
비명이 들려오지만 가볍게 무시해 넘겼다. 단순히 망원경 하나로는 이 숲 전체를 파악할 수 없다.
[너! 돌아가서 봐.]
잔뜩 뿔이 난 목소리를 들으며 고개를 까딱이던 나는 곧 시야에 비치기 시작하는 숲의 모습들을 보며 메가트론을 향해 첫 명령을 내렸다.
"메가트론, 장거리 포격 모드."
[명령 인수.]
들어는 보았는가, 이른바 시즈모드!
철컹!! 철커덕!!
땅따먹기의 진수인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건 화력 지원.
그리고, 나는 지금 메가트론으로 짱짱한 화력 지원을 할 생각이었다.
무작정 들이박고 싸워야 하는 일반적인 케이스와 다르게 준비를 빡세게 해온 연금술사들이 어떻게 싸우는지 보여주리라.
기이이잉!!
이윽고 양 주먹을 땅에 박아넣고 거대한 포탑이 되듯 자세를 잡은 메가트론의 등 뒤로 변화가 일어났다.
다만 이전에 전개해 본 적 있던 요격 모드와 다르게 출력을 담당하는 마정석들이 한군데에 모여 한 개의 긴 포대처럼 변해있었다.
철컥!
이윽고 미련 없이 포구에 붙어있던 마정석을 분리한 뒤 미리 준비해둔 다른 마정석을 꽂아넣었다.
"좌표 입력, 643.312.889. 출력 3레벨."
[명령 인수.]
[데이비! 비살상을 잊지 마!]
"탄환 바꿨으니까 걱정 마. 기껏해야 거품 정도 물 거다."
[아아...... 진짜!]
아직까지 조정이 완전히 되지 못해 완성품이라고 하기엔 극도로 불안정한 골렘이지만. 기능 자체는 내 욕망에 따라 이것저것 추가된 것 또한 사실이다.
마스터 급엔 소용없을지라도, 방심하고 있는 견습 병아리들에겐, 아니 어지간히 연금술사들과 싸워본 경험이 없는 이들에겐.......
"5단계 CS멀미탄, 전탄 발사."
재앙이 될 거라 확신한다.
목표는 반신반의하는 선생들에게 저력을 보여주는 것.
과학의 힘은 화려하진 않지만 실용적이고 집요하다.
지잉...... 투두두두둥!!
견제는 내가 한다.
함정도 내가 구상한다.
그리고 육체 능력이 뛰어나다 말해둔 일리나의 임무는 영역을 넓히며 내가 준 함정을 뿌리는 땅개!
그녀가 들었다면 당장 멱살을 잡을 생각이지만 망설임 없이 일을 저질렀다.
쿠웅!! 푸쉬이이이익!!!
보랏빛 광탄이 하늘을 수놓고 숲 저편을 강타하며 흰색의 연막을 퍼뜨리기 시작했다.
효능은 최루 성분에 멀미 유도 성분 정도.
"다 보인다 이것들아."
갑작스런 포격에 놀라 기겁하며 몸을 피하는 견습생들을 망원경으로 보고 있자니 절로 웃음이 비실비실 흘러나왔다.
일리나와 메가트론은 체스 말이요. 상대 견습생들 또한 적대 세력의 체스 말일 뿐이다.
굳이 꼽자면...... 두 사람은 룩과 퀸 정도.
진정한 전투 연금술사는 멀리서 지켜본다는 사실을 머릿속에다 쑤셔 박아주리라.
자, 게임을 시작하자.
* * *
"꺄악!! 이게 뭐야!"
비명을 내지르며 소녀 하나가 바닥에 달라붙은 정체불명의 끈끈이에 달라붙어 허우적거렸다.
"펜디르!! 젠장 이게 뭐야?!"
"리...... 린시 도와줘!"
"기다려봐! 이거 너무 끈끈해서!......."
콰앙!! 푸쉬이이익!!
필사적으로 바닥에 달라붙은 끈끈이를 뜯어내던 소녀가 저 멀리 하늘에서 떨어지는 보랏빛 마포탄에 맞고 그대로 튕겨 나갔다.
"리...... 린...... 웁! 우욱! 꺄아아악!! 내 눈! 내 누우우운!!"
순식간에 눈물 콧물을 쥐어짜고 머리를 지잉 울리게 만드는 연기에 노출된 펜디르가 바닥에 쓰러져 버둥거렸다.
극심한 멀미를 유발하고 숨 막히고 눈물 콧물 다 흘러내리게 만드는 연기라니!
후각, 시각, 청각, 방향감각이 모조리 뒤틀리고 날아가는 느낌이다!
마나를 조금만 능숙하게 활용한다면 끈끈이를 재빨리 털어내고 이 지독한 연기에서 빠져나갔을 테지만...... 갑작스레 감각의 대부분을 빼앗겨버리니 패닉이 올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두 사람의 패닉은 곧 미리 준비하고 습격하는 일리나에 의해 무참히 무너져 내렸다.
순식간에 영역 대부분을 빼앗기고 자신들은 여자로서의 이미지 관리도 잃어버린 채 엉엉 울며 눈물 콧물 다 쏟고 바닥을 뒹군다.
지독한 연기!
빠져나가려 하면 철저하게 발걸음을 막는 정체불명의 함정들!
정령을 이용하거나 마나를 풀어 연기를 막으면 귀신같이 폭발력이 강한 마포탄이 날아든다.
마치, 누군가가 짜놓은 게임판 위에서 놀아나는 장난감이 된 기분이 드는 그녀였다.
"이런 짓을 할 인간은......."
그녀가 아는 한에서 견습생 동기들 중엔 이런 치졸한 방법을 쓰는 이가 없다.
치졸하다고 하긴 뭣하지만 실상 압도적으로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도구를 이용한 제압.
그렇다면 생각할 수 있는 범인은 단 한 명뿐이다.
"일리나!!!"
일리나 데 팔란, 그리고 그녀가 데려온 신입 견습생.
이를 부득부득 갈며 일어난 펜디르는 억지로 연기 속까지 파고들어 와 그녀를 낚아채 가는 린시를 보며 보기 흉하게 울상을 지었다.
"콜록! 콜록! 린시...... 우욱...... 나 머리가 핑핑......."
"방금 마포탄, 아무래도 특수한 타입의 공격 같은...... 꺄아아악!! 또 온다!"
그래도 재능있는 녀석들답게 금방 눈치챈 듯 보이지만.
퇴로를 차단하고 CS멀미탄을 꽂아버리면 노력해봐야 손바닥 안이라는 사실이 서글플 따름이었다.
슈슈슈슈슉!!
잔뜩 질린 얼굴로 주저앉아버린 그녀는 멍한 얼굴로 하늘을 수놓으며 저 멀리 날아드는 보랏빛 포탄들을 보며 입을 쩍 벌렸다.
"이건...... 사기야......."
정말 그 말밖에 나오지 않았다.
* * *
[너 진짜 성격 나쁘다. 어떻게 애들을 상대로 이런 짓을 해?]
한 치의 사심없는 일리나의 통신에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응수했다.
"실전 훈련에 치사하고 자시고가 어딨어. 억울하면 강해지든가."
[네에, 정말 대단하시네요.]
이제는 황당해하는 것도 지친다는 듯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무리 생각해도 안 되겠어, 그 골렘. 이번 훈련이 끝나면 부숴버리든지 해야지. 세상에 나와선 안 되는 위험요소야.]
"그럼 우리 계약도 끝이고."
담담하게 그녀와의 통신을 끊어버린 나는 익숙하게 외 알 안경을 낀 채 품 안에서 자그마한 차트를 꺼내 들고는 이것저것 체크하고 써 내렸다.
다른 팀은 모두 죽자사자 뛰어다니고 있지만 결국 뛰어봐야 데이비 님 손바닥이니라.
아마 포탄을 피해 필사적으로 달리고 있는 아이들이 내가 이러고 있다는 것을 알면 거품을 물지 않을까.
-빗맞은 게 총 32발. 직격이 45발. 15분간 쉬지도 않고 쏘아 보낸 것치고는 느린 편이지.
"사속이야 그렇다 치고 집탄률이 생각보다 별로인데?"
-거리가 멀어질수록 함량된 마나의 소모가 너무 극심해져. 화력이 약해서 타격을 기대할 순 없으니 상태 이상을 유도하는 건 기발하지만, 이래서야 피아 구분도 글러 먹은 게지.
"마정석이 아무리 마나 탱크라 해도 이 이상 출력은 무리수야. 차라리 장갑을 조금 더 뜯어내서 기동성에 부하를 적게...... 좌표 443.382.721. 오차범위 4m 이내. 발사."
[명령 수락. 발사.]
극도로 희귀한 마정석 7개.
실제로 출력을 내는 마정석은 3개 정도에 하나는 포대로 쓰고 있지만 나머지 마정석이 놀고 있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바로 돈지랄, 기술 지랄의 정점!
데이비의 과학력은 세계 제일!
애초에 베이스 중 60%는 내가 만든 게 아닌 고대의 유산이지만.
괜히 세상에 못 내놓아서 숨기고 있는 게 아니었다.
-마정석도 한계는 있어, 데이비, 차라리 잉여 전력을 충전하는 식으로.......
페르세르크는 내가 놓치는 부분을 여지없이 집어내며 의견을 제시해왔다.
"일단 생각은 해보자, 323.142.506 영역. 오차범위 3m 이내. CS멀미탄 2발 충격탄 1발, 발사."
[발사.]
지이잉 투쾅!!
페르세르크의 의논을 하면서도 일리나가 퍼뜨려둔 감시 장비와 망원경을 통해 끊임없이 주변을 장악한다.
벌써 시야에 보이는 영역은 다른 녀석들 영역의 수배는 될 만큼 거대해 보였다.
반격할 틈을 주지 않으니 상대 입장에선 아주 복장이 뒤집힐 것이다.
"멍청이들, 아무리 경쟁 훈련이라도 상대가 너무 강하다 싶으면 서로 손을 잡을 줄도 알아야지. 자존심들만 높아선."
혀를 쯧쯧 차며 한 손으로 뒷짐을 진 나는 결국 급히 훈련종료를 외치는 보리스의 말이 들릴 때까지 느긋한 표정을 지우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