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6
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
- 5권 26화
"괴로우십니까?"
부드러운 어조로 말한 그가 그녀에게 다가왔다.
만났다.
제 얼굴을 가릴 생각도 못 한 채 소년을 올려다보던 그녀는 곧 자신의 몰골을 떠올리곤 허둥지둥 손을 뻗어 가면으로 얼굴을 가리려 했다.
하지만, 가면을 집은 그녀의 손은 금방 날아든 소년의 손에 잡혀 멈춰졌다.
"그렇게 도망치고 싶습니까?"
"놔, 놔주세요...... 저는......."
"계속해서 피해도 됩니까?"
"이렇게 만났는데...... 결국 이렇게 쉽게 만났는데......."
고개를 숙여 남은 손으로 얼굴을 가린 그녀의 목소리에 처절한 흐느낌이 어렸다.
"당신께는...... 당신에게만은 이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어요!!! 적어도 당신에게만은......."
처절한 그녀의 호소에 소년이 빙그레 웃었다.
그에게만큼은 그녀의 본연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이런 흉측하게 일그러진 모습이 아니라, 미래가 기대된다던 말까지 듣던 어릴 적의 그 뽀얗고 잡티 하나 없던 본래의 모습으로 말이다.
하지만 신은 처절하게 그녀의 바람을 외면했다.
어째서 그와 만난 순간, 흉측한 민얼굴을 드러내 보이고 말았는가.
왜 그녀가 바란 소박한 소망까지 앗아갔는가.
그런 그녀를 바라보던 붉은 눈동자의 소년은 여태껏 보여준 적 없는, 혐오감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따스한 시선으로 조용히 말했다.
"그 지옥 같은 병. 치료하게 내가 도와줄게요."
"아......."
"밑져야 본전인데, 한번 믿어볼래요?"
빙그레 웃는 소년의 모습에 그녀는 한참 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 * *
"흉측한...... 모습을 보여드려서 죄송해요......."
소심하기 짝이 없는 사과를 하는 그녀를 둔 채 나는 손끝으로 마나를 가볍게 응축시켰다가 펼치며 형태를 고정하는 연습을 했다.
"에이리아 황녀님."
"예...... 예?!"
"저는 황녀님보다 더 끔찍한 몰골에 처해 있던 사람을 수도 없이 봤습니다."
"......."
"그리 놀랄 것도 아니죠. 사실. 운이 좋았다고 생각하세요. 보통이면 그 정도 증상이면 이미 피를 토하고 사망했을 테니."
환자에게 안심을 시키는 건 그 환자를 치료하는 의사의 몫이다.
본래는 그녀를 치료하기 위해 이곳으로 왔을 고르네오 남작의 몫이라지만, 그녀의 상태가 이래서야 그로서도 별수는 없었을 것이다.
정령사의 기운과 그녀 특유의 체질. 마지막으로 오랜 시간 체류 된 바이러스의 변질.
이런 경우는 약으론 치료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내가 잘 알고 있었다.
[딱 한 명. 약으로 치료를 못 한 사람이 있어, 내가 사랑했던 사람이고, 결과적으로 나는 그를 살리지 못했지. 대신 그의 죽음을 발판삼아 수억 명을 살렸어.]
내게 이 병의 소재를 가르쳐주던 신의(神醫) 히포크리아가 자조 섞인 미소를 지으며 해준 말이었다.
[이미 죽은 사람이지만 한때엔 계속해서 망령에 시달렸나 봐. 그가 죽고 나서도 나는 끝없이 치료 방법을 연구하는 데에 미쳐있었거든.]
사람은 완벽하지 못하다.
그건 그녀 또한 마찬가지였다.
물론, 그 덕에 내가 다른 방식의 치료법을 배운 건 사실이니 말이다.
가면을 벗기고 몸을 조이고 있던 목 부분과 소매를 풀어내고 장갑을 벗기자 얼굴처럼 일그러진 그녀의 피부가 보였다.
거침없는 내 행동에 그녀가 움찔거리며 어떻게든 몸을 가리려 애쓰지만 나는 그녀의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안심시켰다.
"아마 황녀님은 한번 치료에 실패해서 믿기 힘들 겁니다."
"......."
"치료는 이틀에서 사흘 정도 걸릴 겁니다. 그동안 황녀님께선 나을 수 있다는 믿음을 절대 잃지 마세요."
"정말...... 정말 치료할 수 있나요?!"
절박한 외침에 내가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황녀님이 끝까지 믿는다면 반드시 나을 수 있을 겁니다."
"......."
어째서 또 안심을 하는 건지. 그녀는 말없이 나를 바라보다 천천히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나를 믿어보겠습니까?"
"믿을게요. 저는 당신을 믿어요."
"그럼, 이틀간 좋은 꿈 꾸세요. 황녀님."
굳은 결심을 보이는 그녀를 보며 씨익 웃은 나는 그녀의 수혈을 짚어 강제로 수면에 빠지게 했다.
그리고 조용히 그녀의 목에 검지와 중지를 올려 맥을 재기 시작했다.
덜컹!!
"에이리아!!"
동시에 다급한 노인의 목소리가 들려오며 누군가가 방안으로 급히 뛰어들어왔다.
우르르르!!
동시에 근위 기사로 보이는 이들이 일제히 그의 뒤를 따라 들어오며 나를 포위하듯 감쌌다.
"륀느, 경고. 더는 접근하지 마."
그리고, 말없이 나를 올려다보던 륀느가 무표정한 얼굴로 내 앞을 막아서며 기사들을 향해 위협하듯 경고를 내뱉었다.
"이게...... 이게 어찌 된 일이냐!"
갑작스런 사고 소식을 돋고 급히 찾아온 모양새였다.
노령의 사내는 내가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사내였지만 그가 쓰고 있는 제왕의 관과 황제의 의상만 봐도 정체를 알 수 있었다.
"환자에게 절대안정은 가장 우선시 됩니다. 폐하. 무례한 요청입니다만. 기사들을 물려주십시오."
"황녀님께 손을 떼시오!!"
"쯧, 소리 지르지 말라니까."
내 말을 들을 생각도 하지 않은 듯 기사 중 나이가 지긋해 보이는 이가 나서서 검기를 피워올렸다.
역시 소드마스터가 득실득실한 제국답다.
절제된 오러 블레이드를 무시한 채 눈을 감고 에이리아의 맥박을 재던 내가 조용히 다시 요청했다.
"폐하."
"......근위 기사는 모두 물러가라."
"하...... 하오나 폐하!"
"에이리아가 잠들어있다. 더는 소란을 피우지 말고 물러가도록."
반론은 듣지 않겠다는 듯 말하는 그 모습에 기사들은 근심이 섞인 얼굴로 린디스 황제 데오르트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리고는 조용히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일사불란하게 방을 나섰다.
"제국의 쌍두룡께 무궁한 영광을, 이렇게 인사를 드리는 점은 죄송하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만, 환자의 안정은 절대적이니 이해를 부탁드리지요."
"그대는 누구인가."
"데이비 올 라운이라고 합니다."
"데이비...... 라운 왕국에서 악마의 피를 치료했다던 것이 자네인가?"
"부족하나마 그렇게 되었습니다. 폐하의 은덕으로 연회에 참가했다가 사고를 목격하여 부득이하게 나서게 되었습니다."
담담하게 말한 내가 손가락을 떼어냈다.
그리고는 에이리아의 드레스를 손가락으로 집어 든 뒤 오러를 피워 그대로 잘라내 버렸다.
"네 이놈!!"
동시에 린디스 황제의 노호성이 들려왔지만 륀느가 그를 막아섰다.
"륀느, 경고. 한 번 더 접근하면 륀느, 공격 모드 이행."
"그만해 륀느. 물러나."
"......."
내 말에 미묘하게 마음에 안 든다는 듯한 무표정을 지으며 그녀가 물러났다.
그러니까, 무표정인데 어떻게 감정이 엿보이는 건지.
"고르네오 남작께서는 아마 이 병을 치료하지 못했겠지요."
"그 말대로다. 자신만만하던 대답과는 다르게 결국 에이리아의 병을 치료하지 못했다."
"그의 잘못은 아닙니다. 황녀님의 체질이 특수한 경우이니."
내 말에 그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그 말인즉슨 그대는 에이리아의 병을 치료할 수 있다?"
"대신 한 가지 조건을 걸도록 하지요."
상대가 제국의 황제라고?
괜히 입을 잘 못 놀렸다고 목이 달아날지도 모른다고?
틀린 말은 아니다만.
내 어투에는 한 치의 변함이 없었다.
"이틀 내로 황녀님의 병을 치료해 드리겠습니다. 대신 명일 치러질 경매 물품 중 한 가지를 제게 넘겨주십시오."
내 말에 그의 얼굴에 미묘한 혼란이 어렸다.
"실패한다면 뭐, 까짓거 목이라도 드리지요."
당당하게 말하며 내가 그를 직시했다.
"어쩌시겠습니까, 폐하. 결정을 내려주시지요."
-황제의 면전에 대놓고 딸의 목숨으로 거래를 하다니.......
나도 원하는 양상은 아니지만, 그녀를 치료하기 시작한다면, 경매에 참여할 수 없으니까.
챙길 것까지 놓쳐가면서 치료하기엔 미묘하게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
한 치의 물러섬 없는 내 제안에 그는 오래가지 않아 결정을 내렸다.
"좋다. 반드시 살려라. 아니, 반드시 살려다오, 에이리아가 가면을 벗을 수 있다면, 짐은 그대에게 대륙 그 누구도 함부로 못 할 절대적인 우방이 되어주겠노라."
그 양반, 소드마스터와는 비교도 안 되는 실력자답게 참 화끈하시네.
* * *
갑작스런 섬광에 중단되었던 연회는 제국의 단호한 대처를 보여주겠다는 듯 다시 개최되었다.
그리고, 귀족들 사이에서 한 가지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다.
동대륙 소국의 왕자 중 하나가 에이리아 황녀의 병을 치유하기 위해 나섰다는 이야기였다.
그녀의 병에 대한 소문은 이미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흉측하게 변해버린 그녀의 모습을 감추기 위해 가면을 쓰고 있다는 건 모를 수가 없으니 말이다.
"폐하! 에이리아가 이틀째 식사 한 번 못하고 치료인지 뭔지 모를 행위를 하고 있습니다! 이대로 두셔선 안 됩니다!"
황제와 마찬가지로 지독하게 에이리아를 아끼는 황태자, 알버스가 강력하게 주장했다.
아직 이 사실을 아는 이들은 극도로 적지만 알버스만큼은 전날 밤에 있었던 사태를 알고 있었다.
"그의 무엇을 믿고 맡긴단 말입니까! 고르네오 남작도 실패했지요! 치료 과정은 보셨습니까?! 그자는 에이리아의 몸에 기이한 침을 꽂아넣고 있었습니다!"
"알버스."
"폐하!"
"짐의 결정엔 변함이 없다."
"......."
단호한 그의 말에 알버스는 더는 설득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나마 치료하고 있는 본인이 이 빌어먹을 병의 치료법을 한 번 개발한 적이 있던 이라 참는 것이지 그게 아니었다면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았으리라.
"그보다 알아보았느냐."
"증거는 없습니다만...... 아무래도 보수파가 관련이 있는 듯하여."
룩샤크 공작. 다름 아닌 린디스 제국의 수인 천대 사상을 극도로 지지하는 보수파 귀족이다.
"감히 겁도 없이 에이리아를 이용하려 들어?"
"어찌할까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이 오만방자한 사태를 일으킨 장본인을 찾아내. 그의 입에서 모두 털어놓게 만들어라. 감히 대 린디스 제국의 황제를 능멸한 죄는 9족을 멸해도 시원찮음이니."
"철저히 처리하겠습니다. 그리고...... 전날 있었던 연회 홀의 사고는......."
"마법 아티펙트가 문제를 일으켰다고 공표하라.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나 단체로 강렬한 빛에 휩싸였다고 했지."
"예. 혹시라도 테러의 가능성에 대비한......."
"아니, 그 부분은 되었다."
싸늘하게 말하는 데오르트가 침묵했다.
모두가 그 젊은 소년이 말했던 대로였다.
아주 잠깐 벌어진 사건만으로 그 젊은 왕자는 린디스 제국의 실태를 눈치챘다.
수인 천대 사상이 남아 있는 제국.
그리고 보수파와 진보파의 충돌.
이번 사태가 보수파의 수작으로 보이며 각국 사절들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에이리아의 모습을 보임으로써 수인에 대한 이미지를 깎아내리고 그녀에 대한 여론을 좁힐 작정이다.
"웃긴 노릇이군."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이 정도면 눈치가 좀 빠른 수준이 아니다. 그는 마치 이번 사태의 원인과 그것을 노린 이들이 누구인지 모두 알고 있는 모양새였다.
정작 본인은 에이리아가 잠들어있는 침실에서 한시도 빠져나오지 않고 기괴한 치료를 하고 있지만 말이다.
"알버스."
"예, 폐하."
갑작스레 자신을 부른 호명에 알버스가 움찔하며 데오르트를 바라보았다.
"그 데이비라는 왕자를 보고 무엇을 느꼈더냐."
"그게 무슨 말씀이시온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였느냐."
"송구합니다. 폐하......."
이 사태의 전말에 대한 추리는 스치듯 던진 그 소년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그리고 그게 사실이었고. 다만 그런 책사형 인물은 제국에 적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데오르트 황제가 데이비라는 이를 극도로 신경 쓰는 이유는 다른 곳에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