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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127화 (127/1,559)

# 127

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

- 5권 27화

'소드마스터 이상의 존재가 봐도 끝을 알 수 없는 깊이...... 함부로 알아내려 들었다간 다시는 빠져나올 수 없는 나락까지 빠져들 것 같이 깊고 무거운 경지.'

과거 그는 딱 한 번 이런 경험을 해본 적이 있었다.

처음 검을 쥐고 마나를 느끼기 시작했을 무렵.

마나에 대한 민감도가 뛰어나던 그에게 검을 가르치던 제국 최고의 소드마스터를 봤을 때와 완전히 같은 느낌.

이제 와서 그 소드마스터를 다시 본다고 같은 감정을 느낄 순 없다.

오히려 과거와 다르게 그는 어지간한 소드마스터를 넘어설 만큼 높은 경지에 이르렀으니 말이다.

그런 그가.

처음 검을 쥐고 마나를 느꼈을 당시 제 검 스승에게 느꼈었던 끝도 없는 깊이의 무언가를 그 젊은 소년에게서 느꼈다?

그 말이 뜻하는 바는 간단했다.

20세도 되지 않은 그 젊은 소년이.

대륙 최고 소드마스터 중 하나라 불리는 그의 수준으로도 가늠할 수 없을 만큼 높은 경지에 있다는 소리.

그게 사실이라면 전날 연회장에서 터진 정체 모를 거대한 빛은 그가 일으킨 것일 확률이 높다.

이유 자체는 간단했다. 에이리아가 곤경에 처하는 상황을 막기 위해서일 터.

제법 마음에 들지 않은가.

"어쩌면 조금 지켜볼 필요가 있겠군."

어쩌면 정말로 치료를 해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그의 손이 닿기가 무섭게 몰려오던 수면 욕구.

꿈조차 꾸지 않은 채 잠들어있던 에이리아는 붕대를 뚫고 들어오는 따사한 햇볕과 새소리에 천천히 잠에서 깨어났다.

그동안 얼마나 시간이 흐른 것일까.

그녀는 잠에 빠져 들어있는 그 순간에도 한 가지만은 계속해서 기억했다.

누군가의 이야기였다.

누구의 이야기인지는 알 수 없지만 미묘하게 아련하면서, 미묘하게 즐거워 보였던 한 사람에 관한 이야기였다.

꿈을 꾸고 있는데 어째서 기억이 생생한지는 알 수 없지만.

그 목소리와 이야기가 들려올 때면 그녀는 아주 편안한 기분을 느끼며 꿈속을 유영했다.

"읏......."

상쾌한 기분을 숨기지 못한 채 그녀가 천천히 상체를 일으켰다.

뭔가 바뀌었다.

오랜 시간 몸을 짓누르던 무언가가 사라진 것처럼 상쾌한 기분에 저도 모르게 미소가 지어진 그녀는 곧 눈을 가리고 있는 붕대를 가볍게 손으로 만지작거렸다.

"이건......."

"앗! 황녀 저하! 깨어나셨군요!"

이윽고 시녀 중 하나가 들어오며 깜짝 놀란 듯 소리치자 에이리아는 반사적으로 붕대를 더듬던 손을 얼굴을 가렸다.

"흣?!"

정말 어지간한 인물들에겐 보이고 싶지 않은 얼굴이라는 건 그녀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에 반사적으로 얼굴을 가렸지만 이미 보일 사람에겐 모두 보였다는 사실이 씁쓸한 그녀였다.

"가...가면!"

"괜찮아요 황녀저하!"

"에렌...... 다?"

"네, 저에요! 에렌다에요 황녀 저하!"

"나...... 얼마나 누워있었던 거야?"

조금 갈라지는 목소리로 그녀가 조용히 묻자 에렌다라 불린 소녀가 울상 어린 목소리로 조용히 답해왔다.

"이틀...... 간 내리 주무셨어요."

"이틀?"

이틀간 그녀는 잠에 빠져 있었다. 먹지도 마시지도 못하고 계속 잠들어있었다는 소리다.

그런데, 왜 이렇게 상쾌한 것일까.

도저히 영양을 섭취하지 못한 몸이라곤 생각되지 않는 느낌이라 그녀는 차라리 아주 잠깐의 착각이라도 이 느낌이 유지되었으면 싶었다.

"일어나실 수 있으시겠어요?"

"응...... 몸이 가벼워."

"헤헤...... 그 왕자님은 정말 대단하신 것 같아요.."

"왕자님?"

에렌다의 말에 에이리아의 고개가 갸웃거렸다.

"네, 황녀 저하의 곁에서 치료해주신 분이요. 데이비 왕자님이래요. 라운 왕국의 1 왕자님이신 데이비 올 라운 왕자님."

"데이비...... 올...... 라운......."

떨떠름하게 그 이름을 머금은 그녀는 얼굴을 가린 손을 천천히 내려놓으며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렇구나...... 그분의 이름이 데이비 님이셨구나......."

잊을 수가 없었다. 자신의 처량한 처지에 비관해 자살까지 결심했던 그녀를 막아섰던 남자, 은은한 산수유의 향이 느껴지는 포근하던 사람.

한눈에 담고 강렬하게 남은 사람이 자신의 병의 치료법을 개발해낸 사람이다.

또 곤란한 상황에 처한 그녀를 두 번이나 구해주었다.

어떻게 이런 우연이 있을까.

"에렌다, 몸을 일으켜주겠니?"

"네 황녀 저하."

헤헤 웃으며 그녀의 손을 잡고 부축해 일으킨 에렌다의 도움으로 몸을 일으킨 그녀는 마치 주변을 파악하듯 고개를 돌렸다.

"정말...... 황녀 저하께서 이리도 아름다우실 줄은 정말 몰랐어요."

"아름...... 다워? 내가?"

아름답다.

몇 년간 끔찍한 병에 시달려온 그녀에게 그 말만큼 괴리감이 들고 어색한 단어도 없을 것이다.

그녀의 외형은 흉측했고, 괴물이라 불려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였었다.

"그럼요! 대륙 5대 미녀라 불리던 분들도 황녀 저하껜 안 될 거랍니다! 정말이지, 붕대를 갈아드릴 때 보고 정말 넋을 놓고 있었는걸요."

발랄한 목소리로 답해주는 그 모습에 에이리아는 쓴웃음을 지었다.

그랬지, 에렌다는 보기 드물게 착한 시녀이니까.

솔직히 아름답다고는 해도.

그녀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할 수 없었다.

"실은 데이비 왕자님께서 편지를 두고 가셨어요."

"편지?"

"네, 왕자님이 황녀저하께서 깨어나시면 꼭 직접 전해드리라고 하셨어요."

뭐가 그리 좋은지 꺅꺅거리며 말하는 그 모습에 에이리아는 반사적으로 입가에 호선을 그렸다.

'그렇구나......'

자신의 비참한 처지에 비관해 자살하려던 그녀를 막아선 붉은 눈동자의 남자.

그리고 자신을 다독이며 괜찮다고 몇 번이고 말해주던, 포근한 산수유의 향을 풍기던 사람.

마지막으로, 잠들어있던 그녀에게 동화를 읽어주듯 계속해서 말을 걸어주던 사람.

조금은 믿고, 희망을 걸어보고 싶었다.

"에렌다...... 이 붕대...... 풀 수 있을까?"

"네! 깨어나시면 풀어도 된다고 하고 가셨으니 제가 풀어드릴게요."

"떨려...."

"괜찮아요! 정말 아름다우신걸요!"

씁쓸한 감정이 돋았다. 제대로 치료가 된 것일까. 혹시라도 치료가 되지 않았는데 자신이 그저 곧이곧대로 듣고 있는 게 아닐까.

한 치의 불안함이 어렸다.

"거울을 보시면, 정말 깜짝 놀라실 거에요. 헤헤!"

기분이 좋아 보이는 에렌다의 말과 다르게 에이리아는 반사적으로 몸을 떨며 불안함을 떨쳐내지 못했다.

조심스러운 손길과 함께 그녀의 눈을 가리고 있던 붕대가 조금씩 풀려나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두껍게 감싸진 붕대가 천천히 모두 풀어지며 천천히 눈을 감고 있던 에이리아의 눈이 아주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레 뜨여졌다.

여전히 흉측하면 어떻게 하지, 크게 변한 게 없으면 어떻게 하지. 정말로 자신이 병을 치료한 게 맞을까.

그런 끊임없는 고민 때문일까.

그녀가 눈을 뜨는 속도는 아주 느리기 그지없었다.

오랫동안 빛을 받지 못했던 시야 너머로 빛이 들어오며 눈동자를 찡그리고 있던 에이리아는 이윽고 거울 속에 드러난 제 모습을 천천히 확인할 수 있었다.

그리고.

"아......."

반사적으로 손에 들고 있던 붕대를 떨어뜨렸다.

"편지. 읽어드릴까요?"

말이 없는 에이리아의 모습에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이던 에렌다는 말없이 손에 쥐어진 작은 쪽지를 들고 내용을 그녀의 귀에 들려주었다.

-선물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부디 오늘 밤의 연회는 꼭 참석해주세요.

그의 미소가 연상되는 짧은 전언에 그녀의 투명하고 맑은 눈에서 눈물이 뚝뚝 흘러내리기 시작했다.

"읏...흐윽...흐윽!!"

정말 구슬퍼 보이는 그 눈물과 다르게.

그녀의 입가에는 어쩔 줄 몰라 하는 미소가 어려있었다.

* * *

"오라버니, 무슨 기분 좋으신 일이 있으신가 봐요?"

헤실헤실 웃으며 물어오는 윈리의 질문에 나는 침묵한 채 픽 웃어 보였다.

"그동안 뭘 하고 다닌 거야? 너 이곳에 온 이유는 어제 있었던 경매 때문 아니야? 뭐...... 레드문은 결국 나오지 않았지만."

정작 내가 이곳에 온 주 이유인 경매까지 불참해버린 탓인지 일리나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을 여지없이 내게 보여주었다.

"그거 이제 상관없어."

내 말에 그녀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동안 내가 뭘 했는지 궁금하다고?"

"네! 네! 오라버니, 무슨 일이 있으셨기에 그렇게 기분이 좋으신지."

요 며칠 사이에 내가 계속 자리를 비우고 자세한 설명을 해주지 않은 탓에 눈앞의 세 사람은 현 상황이 굉장히 궁금한 모양이었다.

-슬슬 시간이 되었겠군.

"그런 일이 있어, 기왕 이렇게 된 거. 좋은 걸 보여줄게."

"좋은 거요?"

고개를 갸웃거리는 윈리의 모습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선물을 주겠다고 했는데, 약속은 지켜야지.

속으로 그 말을 숨긴 채 천천히 무리에서 빠져나온 나는 입가에 걸린 미소를 지우지 않은 채 연회장의 한편에 비치된 거대한 그랜드 피아노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잠시, 피아노를 좀 빌려도 되겠나?"

"예? 아...... 예 왕자님?"

"어느 정도는 다룰 줄 아니까 걱정하진 말고."

잔잔하며 끊이지 않는 곡을 연주하던 악사는 갑작스런 내 난입에 당황스러워하면서도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의 입장에선 고위귀족이나 왕족이 갑자기 헛바람이 불어서 괴짜 같은 행동을 보여도 뭐라 할 수 없는 위치였으니 말이다.

속된 말로 까라면 까는 위치.

비록 이 연회를 빛내는 악단으로써 초청되어온 이들이지만 이렇게 대놓고 요구하면 멈추지 않고는 못 배기는 법이다.

피아노 소리가 끊어짐과 동시에 오케스트라를 연주하던 이들도 멈추자 연회장 곳곳의 시선이 내 쪽으로 향하는 게 보였다.

잔잔하게 깔리던 음악이 갑자기 멈추니 관심이 몰린 것이다.

그런 그들의 시선을 무시한 채 말없이 그랜드 피아노의 중앙에 위치해 앉은 나는 말없이 건반을 스윽 쓸어넘겼다.

제국 클라스 답게 홀을 장식하는 피아노는 관리부터 철저하게 받았는지 보통 품질이 아니었다.

-그대. 음악도 연주할 줄 아는가?

'노래 빼고는.'

내가 가창력만큼은 지옥의 세레나데거든.

속으로 가볍게 웃으며 건반을 소리 나지 않게 몇 번 두드린 뒤 고개를 돌렸다.

갑작스런 내 행동에 놀란 듯 나를 쳐다보는 세 사람에게 조용히 고개만 끄덕여 준 뒤 나는 익숙하고 부드럽게.

조용히 건반을 누르기 시작했다.

동시에 짧고 울림이 짙은 음색이 퍼지기 시작한다.

음악은 사람의 마음을 평안하게 한다고 한다.

그리고.......

"에이리아 알 린디스 황녀 저하께서 드십니다!"

지금부터 내가 문을 통해 들어오는 소녀에게 전해주려는 선물은.

이 세계에선 존재하지 않는.

또 이곳에선 처음으로 펼치는 나름의 신비한 마법이 될 것이다.

선곡은.......

음, 캐논 변주곡으로 가보자.

템포는 약간 빠르게.

덜컹.

이윽고 내가 천천히 건반을 누름과 동시에, 문이 천천히 열리며 푸른 빛의 드레스를 입은 소녀가 천천히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런 소녀의 모습은 다른 사람들의 생각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마치 알을 깨고 나온 것처럼.

그녀의 얼굴에 자리하던 가면은 사라져 있었고, 그녀를 꽁꽁 싸매던 옷은 아름다운 드레스로 바뀌어있었다.

동시에 여기저기서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려왔다.

"자, 악몽에서 깰 시간이다, 공주님."

오글거리긴 해도.

나쁘진 않은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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