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146화 (146/1,559)

# 146

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

- 6권 19화

고요한 왕의 궁.

집무를 마치고 침소에 들었는지 조용하기 짝이 없는 궁 내부엔 내 발소리와 자박자박하는 륀느의 맨발이 바닥에 닿는 소리 말곤 들려오지 않았다.

아무리 발바닥이 튼튼하다곤 해도 신발을 기피하는 건 참 특이한 녀석이다.

발을 보호하는 건 둘째치고 상당히 더러워질 텐데 녀석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래도 일리나가 거의 반 하소연하다시피 한 탓에 치마 아래에 검은 스타킹을 신겨두긴 했지만, 그것마저도 발목까지 덮는 게 전부라 녀석의 발은 새하얀 살구색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다.

"헙! 데...... 데이비 왕자 저하!"

"문 열어."

익숙하게 걸음을 옮겨 왕의 궁 침소로 들어선 나는 입구를 지키며 서 있는 시종과 시녀를 향해 조용히 말했다.

"하...... 하오나 저하! 이 시간에 아무런 연통도 없이는......."

"문."

반사적으로 인상이 찌푸려지며 목소리 톤이 더욱 싸늘해진다.

"......."

"열라고."

아직 완전히 몸에 익지 않은 힘 때문인지 절로 살기가 흘러나가 버리자 그들의 얼굴이 창백하게 질렸다.

애초에 그들의 잘못이 아니지만 지금의 나로서도 조절이 조금 어려운 건 사실이다.

영혼은 익숙한데 몸이 익숙하지 않은 상황이라고 할까.

처음 혼수상태에서 깨어났을 때 몇 달간 재활훈련을 하면서 익숙해졌던 것과는 다르게 이번엔 조금 그 속도가 빨랐다.

어찌할 바를 몰라 서로의 눈치를 살피는 시녀와 시종의 모습에 절로 한숨이 나오려던 찰나.

"되었다, 들라 하라."

침소 내부에서 노쇠한 목소리가 천천히 들려왔다.

국왕 크리아네스의 목소리였다.

시간이 꽤 깊었을 텐데 아직 깨어있었던 모양이었다.

고요하게 경첩이 움직이며 커다란 문이 열리자 내부로 보이는 고풍스러운 방의 전경이 눈에 담겨 들어왔다.

"오랜만이구나, 데이비."

"왕국의 태양께 무궁한 영광이 있으시길. 무례를 용서하십시오."

"되었다. 이런 사석에서까지 그런 딱딱한 인사를 받고 싶진 않구나. 게다가 아들이 아비를 찾아오는게 그리 무례는 아닌게지."

"폐하, 신하 된 도리로써 폐하께 예를 올리는 건."

"아비와 아들의 관계는 그런 게 필요하지 않다."

아직도 고집을 못 버리셨습니까.

한쪽 무릎을 꿇은 채 말하는 내게 다가와 내 손을 꼬옥 붙잡고 옅게 웃어주는 크리아네스 국왕은 처음 재회했을 때보다 더욱 지쳐 보였다.

"그래, 이번에 린디스 제국에 갔었다고."

"예, 린디스 제국의 막내 황녀, 에이리아 알 린디스 황녀의 성년식에 초대되었습니다."

"칼루스도 만났겠구나."

"부정하진 않겠습니다."

"쯧쯧...... 그 녀석도 어서 현실을 깨닫고 철이 들었으면 좋았을 것을."

그리 말하면서도 이상하리만치 그의 목소리엔 애정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굳이 꼽자면 애증에 가까운 느낌이었다.

"폐하, 제가 왜 이 야심한 밤에 무례하게 찾아뵈었는지 모르시진 않으시겠지요."

내 말에 그의 눈가에 골이 짙어졌다.

"데이비, 그만둘 순 없겠느냐."

"송구합니다, 폐하."

"나는 이제 오래 살지 못한다. 아비의 마지막 부탁이라 생각하고 들어주면 아니 되겠느냐."

마지막 부탁?

누구 마음대로.

절로 헛웃음이 나왔다.

"폐하. 제가 한 말씀 드리겠습니다."

"말해 보거라."

"폐하께선 아직 죗값을 다 치르시지도 못하셨지요."

"......."

내 말에 그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제 허락 없이 죽으려 하지 마십시오. 죽어도 제가 살려낼 겁니다."

"데이비."

"폐하께서는 이 나라를 이 지경으로 만들고 어머니를 죽게 만들었으며, 저를 방치했고, 귀족파가 날뛰게 하셨습니다. 그런 것들을 해놓고 그저 도망치겠다 이 말씀이십니까?"

적어도 그걸 다 처리하기 전엔 절대 죽지 못합니다. 당신은, 죽더라도 내가 살려낼 생각이니까.

그렇게 모든 것을 다 해결했을 때.

그때 바리스에게 왕위를 물려줘야 할 겁니다. 그 후에 제 손에 죽으시든 살아남으시든 마음대로 하십시오.

"린디스 제국에서의 이야기는 들었다. 너는 이 못난 아비가 지켜주지 못했음에도 너무 훌륭하게 성장했어. 뛰어난 판단력과 군주로서 가져야 할 과감한 결단력 또한, 갖추었지."

그는 쉬지 않고 말을 이어나가며 천천히 일어나 내게 다가왔다.

그리고는 내 손을 잡고는 호소하듯 말했다.

"그것뿐만이 아니다. 성국에서도 인정하게 한 네 성흔과, 뛰어난 의학지식으로 막내 황녀의 병을 고쳐 린디스 제국에 네 이름을 알릴 만큼 뛰어난 업적을 일궈내고 네 우방세력을 만들었다."

그리 말하며 그가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원한다면 이 자리는 네 것이다. 하지만 국왕의 패도를 걷는 자는 모든 것을 사사로이 결정지을 수 없다. 그것은 이 아비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건 변명이십니다."

"국왕은......."

애끓는 표정으로 씹어뱉듯 그가 말을 이어나간다.

"지켜야 할 이가 너무도 많다. 데이비, 이 나라의 국민이 몇 명인지 아느냐. 자그마치 500만 명이다. 하나둘 수십도 아닌 500만이란 말이다. 그 말뜻을 알겠느냐? 왕의 결정 한마디에 500만 명이 살수도, 죽을 수도 있다는 소리이다."

그렇기에 왕은 함부로 모든 것을 결정하지 못하고, 알면서도 무시해야 하는 일들이 있다.

그의 말에 나는 입가에 걸려있던 싸늘한 미소를 지운 채 담담하게 그를 바라보았다.

"그러니...... 네 원한은 그저 내게 모두 풀거라. 네가 장성한 국왕이 될 수 있다면 나는 네 검에 맞아 죽어도 웃으면서 떠나갈 수 있으니."

"폐하. 제가 처음부터 말씀드렸지요."

"데이비."

"조사관의 직위를 내려주십시오. 귀족파는 제가 정리하겠습니다."

내 말에 그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데이비!!"

"아직 잘 모르시나 봅니다만...... 바리에타 공작가는 오래전부터 뱀파이어와 손을 잡고 이 나라 백성을 잡아 제물로 바쳐왔습니다. 이건 아셨습니까?"

내 말에 그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그 무슨......."

"처음엔 리네스 왕비 저하였지요. 왕비 저하는 그 사실을 몰랐지만 뒤에서 그들의 힘이 되어준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힘을 주어 악센트를 끊듯 씹어뱉었다.

"칼루스 그 빌어먹을 놈은 그 사실을 알면서도 일을 저지르고 있지요. 그런데 지켜보십니까? 그게 국왕의 길입니까? 500만 명을 살리기 위해 수백 수천 명이 죽어 나자빠져도 무시하는 게 국왕입니까?"

신랄한 비난에 그는 충격을 받은 듯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저는 제 동생 바리스가 물려받을 이 국가에 그런 무분별한 놈들이 설치는 꼴은 죽어도 못 봅니다. 결정이 나셨다면 연통을 내려주십시오. 이 일에 폐하는 더 이상 간섭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들이 날고 기어도 저는 짓밟을 겁니다."

감정적이 된 성격 때문에 말이 점점 거칠어진다.

"다른 생각을 하십니까? 린디스 제국의 우방을 이용해서 귀족파를 찍어눌러 강제로 상황을 종식하시려고요?"

그리되면 아마 놈들은 기회를 엿보며 몸을 낮추고 숨길테지.

"......."

"제가 그 꼴을 지켜볼 것 같습니까? 원하신다면 반역도 일으켜 드리지요."

"데이비!"

"못할 것 같습니까? 한다면 합니다. 폐하의 아들이었던 데이비 올 라운은 그런 놈입니다."

막타는 국왕 크리아네스도, 귀족파의 위세를 깎아오던 페일트리스 후작도 아니다.

바로 내가 될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급하게 되찾은 힘이니까.

* * *

내 고집을 꺾을 수 없다고 판단한 것일까.

총괄 조사관의 직위는 결국 내려왔다.

과거 어머니와 국왕 크리아네스, 그리고 왕비 리네스의 관계가 무엇이었건, 귀족파는 선을 넘었다는 사실을 안 이상, 내가 정말로 극단적인 방법을 쓸지도 모르는 이상 그로서도 방법은 없었을 것이다.

다만 내게서 들은 것들이 사실이라면, 이것은 그 어떤 핑계를 대더라도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중죄이기도 하다.

당연히 내가 조사관의 직위를 내려받는 것에 반대가 있긴 했겠지만. 예전만큼 입지가 강하지 않은 탓과 격노한 크리아네스 국왕의 강경한 추진 덕분에 문제는 없었다.

그리고, 영지에서 국왕의 칙령을 받아 정식으로 조사관이라는 직위를 배정받은 내가 가장 먼저 한 것은 바로 왕실에서 총괄 조사관의 권한으로 소집할 수 있는 기사들을 동원하는 것이었다.

비록 익스퍼트 급이지만. 손을 거드는 정도면 이정도도 충분하다.

그리고, 총괄 조사관의 직위를 받은 내가 가장 먼저 한 일은.

소문을 퍼뜨리는 것.

그리고. 나를 수행하기 위해 차출된 기사단원 50여 명을 두고 명령을 내리는 것이었다.

"지금부터 우리는 해충의 집을 박살 낸다. 걱정 마라, 해충이 위험하다해도 내가 있으니 너희들은 걱정 말고 해충 놈들의 집을 부수면 된다."

"명심하겠습니다!"

"명심해라. 너희 또한 소중한 라운 왕국의 기사들이다. 나는 너희에게 죽음을 허락하지 않겠다."

이글거리듯 내 손에서 화염이 한번 불타올랐다가 사라진다.

영 익숙하지 않은 마나가 내 감정에 반응하며 뜨거운 화염으로 방출될 정도라니 상태가 많이 심각하다.

그렇다곤 해도.

해충 구제엔 역시 불이 최고인데.

* * *

"데이비 올 라운이다."

"허업! 와...... 왕자 저하를 뵙습니다!"

잔뜩 긴장한 채 몸을 납작 숙여 머리를 조아리는 사내를 보며 나는 뒤편에 있는 비어있는 창고를 흘끗 바라보았다.

"여기는 폐창고인가?"

"아...... 예 그렇습니다요. 본래는 공작가 본 영지에서 온 물자들을 보관하는 곳이었습니다만...... 언제부터인가 물자 지원이 끊어진 터라......."

거미가 집을 치고 속은 텅텅 비어있다.

겉보기엔 정말 아무것도 없는 폐창고의 모습이라 나를 따라온 기사 다섯의 얼굴에 의아함이 어린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예...... 그러믄입죠...... 한데 무슨 일로. 이런 작은 영지까지......."

엎드린 채로 고개만 살짝 들어 묻는 그에게 내가 픽 웃어 보인다.

"왜 왔을 거 같나."

쓰읍.

그 말과 함께 숨을 짧게 들이켠 내가 청단이를 번뜩였다.

맨손으로 해제할 수도 있다지만 뭐하러 번거롭게 그렇게까지 하는가.

그저 이렇게.

쩌적...... 쩌저적!

"히...... 히익?!"

청단이로 그어주기만 해도 결계가 박살이 나는데.

마치 공간이 일그러지듯 부서지자 창고 내부의 모습이 완전히 변하기 시작했다.

아무것도 없던 땅이 꺼지며 아래로 진입하는 길이 드러난 것이다.

"꼴에 결계에 신경 좀 쓰신 모양인데. 상대가 누군지는 파악하고 있으셨어야지."

그리 말하며 나는 느긋하게 신성력을 끌어올린다.

[홀리 코팅]

[디펜시브 아머]

[디바인 실드]

적당한 수준의 성마법들이지만 효과는 아주 효율적일 거다.

순식간에 몸에 새겨진 신성 마법에 놀란 듯 제 몸을 내려다보던 기사들은 곧 내가 성흔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듯 눈을 부릅뜨고 빠르게 폐창고의 지하로 진입하기 시작했다.

"넌 어떻게 할까."

이후 홀로 남은 내가 창고를 관리하던 사내를 보며 느긋하게 묻자 그의 얼굴이 창백해진다.

그는 이곳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었는지 알면서도 함구했을 것이다.

"주...... 죽여주시옵소서!"

"그럼 그렇게 하자."

"예?"

푸확!

죽여달라는데 죽여드려야지 별수 있나. 이런 일이 벌어지는 걸 알면서도 묵인했으면 그 죄는 참형으로도 모자라다.

비명 한번 지르지 못한 채 눈을 부릅뜨고 쓰러진 시체를 넘어 내가 홍단이의 검신 위로 신성력을 코팅하고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