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3
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
- 7권 2화
"너무 쉽게 풀려서 오히려 김이 샐 지경입니다. 이게 최선입니까?"
"언젠가는 이리될 일이었지요. 그 승자가 제가 아니라 당신이 된 것뿐."
그리 말하며 그가 품 안에서 작은 무언가를 꺼내 올려놓았다.
은빛을 띠는 작은 단검이었다.
"폐하께선 너무 위험한 길을 가고자 하셨소. 그랬기에 내가 나서서 폐하를 제지한 것이고, 이 나라를 지켜왔소이다."
"지켜왔다라......."
"규칙이 붕괴된 국가는 언제고 망할 수밖에 없는 운명. 폐하께서는 귀족과 평민 사이에 있는 절대적인 벽의 높이를 낮추려 드셨지."
과거, 크리아네스 국왕은 능력 있는 평민들도 귀족의 반열에 들 수 있게 하는 정책을 펼쳤었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 있는 데이비였다.
"왕자, 당신은 이 세상을 몰라. 귀족이 왜 귀족이고 평민이 왜 평민으로 태어났는지."
"뭐?"
"신이라는 존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계급 체제가 생겨나고 유지되어온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
기도 안 차는 이론에 데이비가 싸늘하게 웃었다.
이후 일순간 표정을 지운 채 입을 열었다.
"몬미더."
"예! 저하!"
"세 사람을 끌고 가. 지하 감방에 처넣고 철저하게 감시해라. 날이 밝는 대로 후발대에 넘겨 왕궁으로 압송한다."
정할 것도 없는 처분.
바닥에서 기고 있는 칼루스, 한편에 서서 침묵한 채 벌벌 떨고 있는 베네디트. 마지막으로 담담하게 앉아있는 바리에타 공작.
데이비는 심드렁하게 세 사람을 쳐다보다 몸을 돌렸다.
"왕정체제의 시작은 어떤 의미로는 선민사상이 맞지만, 그게 도가 지나치면 미친놈일 뿐이야 이 히틀러 같은 양반아."
공작이 그 지독한 독재자를 알 리는 없다만.
그들의 몰락은 조용했고, 신속했으며. 차갑기 그지없었다.
* * *
나라를 수년간은 뒤흔들 것 같던 거대한 반란이었다.
외세의 힘이 없는 상태에서 힘이 비등비등하다면 엎치락뒤치락하며 절로 시간이 길어질 수밖에 없고, 그에 따른 엄청난 인적, 물적 피해가 예상되기도 했었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단 한 명의 이례적인 존재의 등장.
그 한 명은 전쟁을 의도적으로 일으켰고, 그것도 모자라 판도를 멋대로 조종하고 있다.
그 탓일까.
앞뒤 모조리 틀어 막혀 보급로까지 차단당한 반란군의 잔당은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에 처박히고 말았다.
그들이 가진 것은 남은 병력이 입고 먹을 최소한의 보급품과 무기, 그리고 갓 점령한 요새가 전부였다.
"이걸 어찌할 겝니까!"
"이제 끝이야...... 이제 끝이라고!! 항복...... 항복합시다! 항복이 답이에요!"
"항보그 남작! 입 조심하시오! 군사기를 떨어뜨린다면 당장 목을 쳐 드리리다!"
"입을 조심하라고요?! 어설트 백작! 지금 장난하십니까?! 전황 파악이 안 돼요?! 당장 여기서 뭘 어찌할 겁니까?! 본대에서 보내 주는 보급품이 없으면 이만한 병력이 유지될 거 같습니까?! 병사들은 공작이 잡혔다는 소식을 들으면 뒤도 보지 않고 무더기로 탈영해댈 겝니다!"
"그렇다고 항복하면 저 괴물 같은 데이비 왕자가 살려줄 것 같소?!"
당장에라도 칼부림 날 것같이 날카로워진 분위기.
대부분 반란에 가담했던 고관대작 귀족들이 대부분 이곳에 속해있다.
반란의 중점인 바리에타 공작과 두 왕자는 아직 본대에 남아있지만 이곳에 있는 이들은 어서 왕성을 점령하고 공을 독차지하겠다는 일념으로 전선에 올랐다.
그런데 그 결과가 이것이다.
"크...... 큰일 났습니다!!"
"또 뭔가!"
어설트 백작이 눈을 부라리며 소리치자 다급하게 들어온 기사가 숨을 헐떡이며 소리쳤다.
"데...... 데이비 왕자...... 데이비 왕자가 벌써 도착했습니다! 그 괴물 같은 500명의 병사와 함께요!!"
아직 다수의 병사가 있지만 그 어떤 이도 승리를 장담할 수가 없었다.
본대가 빠졌다고 해도 그 단기간에 정면으로 치고 들어와서 단 하나의 사망자도 없이 크고 작은 상처로 전쟁을 마무리 짓는 괴물이 어디 있단 말인가!
"젠장...... 그 괴물 같은 병사들은 창칼이 거의 먹히지 않았답니다!"
"뿐입니까?! 강철도 뭉텅뭉텅 베어내는 그 신식 드워프 무기조차 그들의 무기를 베지 못했어요!"
격한 혼란에 어찌할 바를 몰라 당황하고 있던 찰나.
그들의 귀로 너무도 선명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아. 아아...... 이게 되나? 목소리 테스트 하나둘, 하나둘.
이 목소리의 주인을 어찌 잊을까.
귀족들은 마치 자신의 귓가에 직통으로 들려오는 듯한 그 목소리에 침을 꿀꺽 삼켰다.
그리고, 자신들의 상황을 극도로 악화시킨 원흉, 데이비의 목소리가 느긋하게 들려왔다.
-너희들은 포위됐다. 여기서 버텨봐야 너희 하루도 못 버텨, 집에 부모님이 기다리고 계시니. 애먼 짓 하지 말고 광명들 찾자고.
고작 500명으로.
만 명이 넘는 병사들을 포위한 이의 목소리는 마치 인질범을 향한 위병들의 선고처럼 너무도 담담했다.
* * *
반란이 일어난 후의 왕성은 고요했다.
갑작스러운 데이비의 돌발 진격 전까지만 해도 상당한 귀족들과 장군들이 남아있던 왕성이었지만.
현재엔 세 소드마스터 중 남은 장군과 최소 수비병력만이 남아있었다.
스릉.......
옅은 검을 뽑는 소리.
말없이 방안으로 들어선 남성은 새하얗고 하늘하늘한 침의를 입고 있었다.
"드디어 오신 겝니까."
방의 상태는 도저히 왕족이 살만한 풍경은 아니었다.
여기저기 갈라진 벽면, 색이 벗겨진 기둥. 반쯤 깨진 병이나 허름한 가구들이 대부분이다.
왕족을 유폐하는 장소인 외궁의 탑.
그곳이 바로 이곳이었다.
그리고, 방안에서 말없이 침대 위에 걸터앉아 창밖을 바라보던 이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왕국에서 가장 고귀한 퍼스트레이디였으며, 그 뒤에 왕국 최고의 권력을 지닌 이가 버티고 있던 절대 권력의 상징.
리네스 바리에타 왕비였다.
"왕비."
"어쩜, 이리 배려가 넘치실까."
담담하게 중얼거린 그녀가 달빛을 받은 눈동자로 말없이 그를 응시했다.
"나는......."
"그만, 더는 듣고 싶지 않습니다."
"왕비."
"당신에게만큼은 듣고 싶지 않아요."
담담하게 말하며 그녀가 말을 이었다.
"이리될 줄 알았다면, 당신을 사모하지 않았을 겁니다."
"미안하오......."
조용히 말한 사내, 크리아네스 국왕은 잔뜩 피곤한 얼굴로 손에 들고 있던 롱소드를 그녀의 목에 올렸다.
"데이비는 끝내 당신을 나락 끝까지 끌어내릴 거요, 나는 그걸 막을 자격이 없어...... 그러니, 같이 갑시다. 가서, 알리샤에게 사죄합시다."
"사죄요? 하!"
코웃음을 친 그녀가 표독스레 크리아네스를 노려본다.
"아직도 모르시겠습니까? 제게 당신과 알리샤 두 사람은 증오 그 자체입니다."
"왕비......."
"알리샤가 제 눈앞에서 독약을 들이켜면 이 분노를 잠재울 줄 아셨습니까? 그렇다면 묻지요. 폐하, 제 분노와 원한은 누구에게 풀어야 합니까? 저를 배신하고 멋대로 죽어버린 알리샤에게? 아니면 이 나라의 지존이신 폐하께? 그것도 아니면!!!"
"......."
"나를 이렇게 만드는데 일조한 제 아버지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는 그를 향해 리네스 바리에타는 마치 실성한 것처럼 웃으며 천천히 일어났다.
산발이 된 머리카락을 정돈하지 않은 채 다가온 그녀는 크리아네스 국왕이 겨누고 있던 검을 맨손으로 잡아 제 목에 걸었다.
"저는 모두가 밉습니다. 저를 배신한 당신과 알리샤, 그리고 제 어미를 제 눈앞에서 무참하게 살해했던 제 아버지도 말입니다. 우린 너무 멀리 돌아왔어요."
제게 남은 건 아들뿐이었지요.
그녀에게 남은 것은 두 아들뿐이었다.
그렇기에 그녀의 아들에 대한 과한 집착은 상상을 초월했다.
전 왕비 레니 알리샤드를 향한 증오는 그녀의 아들 데이비에게 향했다.
"알리샤가 차라리 독을 마시지 않았다면, 갈 곳을 잃어버린 증오가 대상을 찾지 못해 방황하지 않았다면."
아주.
우리 모두의 삶은 아주, 조금 정도는 달랐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푸욱!!
이윽고 검날이 손바닥에 파고든다.
손에서 흐르던 피가 더욱 극심해지자 그녀가 싸늘하게 웃으며 선고하듯 말했다.
"사과요...... 하! 거절하겠습니다. 이 세상은 이미 내게 지옥이었고, 유일한 희망조차 이제는 잃어버리겠지요. 이 모든 것이 당신의 죄요, 업보이니, 나는 스스로 지옥으로 떨어져 당신을 기다리겠나이다."
당신은. 아직 지옥에 올 자격조차 없으니.
촤아악!!
그 말을 끝으로 스스로 목을 그어 무너져 내리는 그녀.
반사적으로 검을 떨어뜨린 국왕 크리아네스는 힘없이 쓰러진 리네스 바리에타를 보며 이를 악물었다.
그리고는 아주 천천히 무릎을 꿇고 그녀의 시신을 끌어안았다.
"아...... 아아......."
아무도 없는 고요한 외궁의 탑 끝.
그곳에서 크리아네스 국왕은 끝끝내 눈물 한 방울 떨어뜨리지 못한 채 쓰디쓴 울음소리만 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 * *
반란은 모조리 진압되었다.
아주 뒤흔들 작정으로 바람 마법을 이용해 일대에 목소리를 전한 선전 효과가 상당했던 건지.
상황을 깨달은 강제 징집된 병사들은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무기를 버리고 사방으로 흩어졌다.
그들을 잡기엔 그 수가 너무 많았던 탓일까.
아니면 그들을 통제해야 할 기사들마저 이 황당하고도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무너져내려 버렸기 때문일까.
결국 반란군 본대와의 전투는 벌어지지 않았다.
그저. 대부분의 귀족들이 성난 민중에게 잡혀 몰매를 맞고 포박되어 압송되는 게 전부였다.
"많이도 해 먹었네. 이걸 위해서 얼마나 많은 왕국민들을 수탈해온 건지."
말없이 의자에 앉아 서류를 훑어보다 보니 절로 그런 말이 나왔다.
"데이비 왕자 저하."
"페일트리스 후작."
"예."
"나는 말입니다. 복수에 성공하면 기쁠 줄 알았습니다."
"왕자 저하......."
숙연한 말투에 페일트리스 후작이 씁쓸하게 그를 불렀다.
"기쁘네요."
하지만 뒤이어진 데이비의 말은 그의 얼을 쏙 빼놓았다.
"뭐, 제가 복수는 다 부질없었구나 할 줄 아셨습니까?"
어림도 없지.
회랑에 떨어지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생존왕 헤라클래스의 수련을 받으면서도 지독하게 버틴 것은 그 이유 때문이지 않았던가.
아직 해결하지 못한 일이 있다고.
정말로 힘을 얻는 게 가능하다면, 만약 그것을 가지고 살아서 돌아갈 수 있다면.
이까짓 훈련은 버텨주리라.
물론 이후의 훈련과 시간은 내 상상을 뛰어넘는 정신 나간 시간들이었지만, 내 초기의 마음가짐은 그러했다.
한이 서린 복수는 죽어서도 잊지 못한다고 하던가.
사실 나는 그 말을 조금 회의적으로 여기는 편이다.
천 년 가까이 살다 보니 다른 게 자연스레 눈에 들어오더라.
그 시간은 인간이 겪기엔 너무도 긴 시간이다.
-그 점이 그대가 복수를 마치고서도 큰 변화가 없는 이유이겠지.
고요한 국정 회의장, 전후 문제로 한참을 정신없었던 페일트리스 후작은 약 일주일이 되어서야 반란군 수괴들의 처분에 관련한 회의에 참석할 수 있었다.
"저하......."
"압니다, 알아요. 이것도 마냥 옳은 일은 아니라는 거."
"하지만, 저하께서 하신 판단은 옳으셨습니다. 결과적으로 그들은 선을 넘었고, 그들의 악행은 이 나라를 십수 년간 뒤흔들었으니까요. 그 누구도 왕자 저하의 결단을 비난할 수 없을 겁니다."
이성적으로 생각하길 포기했던 일인 만큼 나로서도 꽤 무식한 짓을 저지른 꼴이다.
"폐하께서 드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