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7
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
- 7권 6화
"수로 문제는 적당히 해결."
"상당량의 자금이 들어갔어요. 저하. 장기적으로 볼 때 이런 수익성이 없는 대형작업은 텀을 두셔야......."
"회수는 급하게 하는 게 아니야, 에이미, 알라우이 상단에서 사들인 석재들은?"
"네, 전부 근처 창고에 적재해놓았어요."
"사흘 뒤 부터 근위대 인원까지 차출해서 드워프 분들과 함께 다음 작업 시작하라고 해."
지하수로 작업이 끝났다면 이제 먼지의 근원인 흙 바닥을 포장한다!
당연히 석재로 바닥이 깔린 풍경은 큰 대도시에서나 볼 수 있는 광경이다.
영지가 깨끗해질수록, 위생 상태는 향상되고, 외관이 아름다울수록 방문자는 많아진다.
삶의 질이 올라간다는 말인즉슨, 자연스러운 인구 증가와 수익의 창출을 의미하기도 했다.
"곧바로 전하도록 할게요."
괜히 걱정스러운 점이 있긴 하지만 그걸 내가 모르는 바가 아니었던 만큼 에이미는 더 이상의 간언을 하지 않았다.
절로 배가 불러오는 기분이다.
-당장 기후와 지기를 멋대로 조절할 수 있는 이 영지에서 농업을 할 때 가장 큰 단점을 해결한 꼴인 게지.
하인스 영지는 넓다.
괜히 넓기만 한 황무지라 불린 게 아닌 만큼 말이다.
딱딱하게 마르고 갈라졌던 땅이라 해도 시간을 들이면 서서히 지기를 끌어올릴 수 있고 얼마 가지 않아 비옥한 토지로 바꿔버릴 수도 있다.
하지만 유일한 단점 또한 존재했다.
넓은 평야를 관리하면서 강우량을 조절할 순 있지만 정밀성이 떨어지는 탓에 다양성이 떨어진다는 점.
그리고.
"매번 비를 끌어다 쓰면 결국은 주변에서 피해가 생길 수밖에 없어."
그 점이 사실 제일 중요했다.
나 잘 살자고 주변을 말려 죽이는 짓은 자폭이나 다름없으니까.
"그래도 이것저것 관리하려면 역시 정령술사들이 좀 있으면 좋겠는데......."
정령술사로 가장 유명한 종족은 엘프이긴 하다만.
그들을 꼬드길 방법도 없거니와, 당장 그리 끌리는 종족은 아니었다.
"들어와."
에이미가 두고 간 서류를 읽던 내가 천천히 고개를 들며 익숙하게 부르자 언제 있었냐는 듯 검은 무복을 입은 남성이 천천히 다가오는 게 보였다.
"무슨 일이야?"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담담하게 말하는 그의 대답에 소파 한편에 늘어져 청단이와 홍단이를 끌어안고 잠들어있던 륀느가 천천히 눈을 떴다.
그리고는 나와 잭의 대치를 보고 고개를 갸웃거린다.
"그래, 할 말이 있다라......."
잭이 내게 할 말이 있으면 별 게 있겠는가.
말없이 녀석의 상태창을 활성화하자 크게 변한 것 없는 것들이 보인다.
다크 엘프. 본명은 아이나 헬리샤나.
"그전에 하나 물어보자."
"말씀하십쇼."
"혹시 동생이나 누나가 있나?"
미묘하게 분위기가 닮았는데.
"무슨 말씀이신지......."
"아니야 됐어. 그래, 그동안 해준 게 있는데 말 한번 못 들어줄까."
내 말에 그는 침묵으로 대답했다.
그동안 고생도 했으니 까짓거 한번 못 도와줄까.
"예. 그럼......."
"어? 누가 동화책을 가져다 놓은 거야."
그때 말을 끊고 책상에 놓인 작은 책을 들어 보인 내가 시큰둥하게 중얼거렸다.
"요정의 연인? 이거 요즘 수도에서 유명한 엘프 로맨스 소설 아니야?"
"그렇습니다만.......윈리님이 일부러 가져다 놓은 모양이군요."
"윈리가? 이게 뭐가 좋다고?"
"귀족 영애들 사이에선 나름대로 베스트셀러입니다. 달달하고 좋지 않습니까? 엘프라는 존재는...."
알지, 인간들 사이에선 숲속의 요정이자 평화의 상징이라고.
그런데 이걸 어쩌나.
"그래? 난, 엘프라는 종족이 싫더라."
"......."
내 말에 녀석이 움찔한다.
"당장 눈앞에 있으면 잡아다가 발가벗겨서 성문에 걸어놓고 천하의 파렴치한 종족이라고 써 갈겨놓고 싶을 정도로."
"......."
다시 침묵이 이어지며 녀석의 몸이 더 크게 움찔거렸다.
"미안해, 쓸데없이 감성적이 되었네, 하려던 말이 뭔데?"
* * *
"아하하하하! 진짜로? 진짜로 푹 빠진 거야?"
마치 놀리기라도 하듯 늘씬한 체구의 수인 여성이 깔깔댔다.
"으읏...... 그, 그만 놀려요 카트린느."
"하이고, 우리 황녀 저하, 얼굴 빨개진 거 보게? 깔깔깔!!"
늘씬한 몸매를 서슴없이 드러낸 듯한 복장인 구릿빛 피부의 여성이 호쾌하게 웃으며 에이리아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세상에, 그 어떤 작자가 대제국의 절대 황제가 끔찍이도 싸고도는 막내 황녀의 머리를 쓰다듬는단 말인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사자는 물론이거니와 근처에 있던 시녀 모두가 그 일에 이상한 점을 느끼지 않았다.
건강해 보이는 구릿빛 피부와 늘씬한 체형, 그리고 상당히 개방적인 복장은 사실 서부 대륙에선 흔히 볼 수 있다.
물론 20대 초반 정도의 섹시하고 아름다운 외모에 눈을 끄는 호박색 포니테일 형 머리카락이 눈길을 끄는 것 또한 사실이나 마냥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그녀의 정체를 알게 된다면 그리 흔한 존재가 아니라는 건 알 수 있었다.
불여우,
[카트린느 카라벨라].
불타오르는 듯한 풍성한 털을 가진 꼬리와 귀 때문에 붙은 이명이다.
겉보기엔 굉장히 경박하고 젊은 여자이지만 실상은 제국의 적이 가장 두려워하는 린디스 제국의 최대 무력 중 일각이자 제국의 대공이 바로 그녀였다.
태생적으로 순수한 수인인 카트린느는 무력 면에선 이 나라 최고의 검이라 불리는 데오르트 황제에 버금갈 정도의 강자라 할 수 있다.
그 말인즉슨 린디스 제국의 최고 마스터 급 강자 중에서도 단연 최고의 반열에 있는 이라는 소리나 다름없었다.
그런 그녀가 존재하는데도 이 나라에 수인 천대의 풍습이 남아서 질기게 버텼던 이유는 실상 간단했다.
단일 무력.
태생적으로 자유로운 그녀는 제국의 대공이지만 반대로 세력을 거의 가지지 않는 단일세력이기도 했다.
"아이구, 우리 황녀 저하, 피부 뽀얀 것 좀 봐. 이렇게 귀여운 얼굴을 어떻게 그렇게 오랫동안 숨겨온 거야."
"으읏...... 간지러워요. 그만 해요."
"으히히히. 이거 말랑말랑한 거 보게! 응? 지금 제국에 얼마나 소문이 돌고 있는지 알아? 내로라하는 귀족 영식들이 황녀 저하 얼굴 한번 보려고 아주 줄을 섰어요. 그냥! 에이 그 발정 난 놈의 자식들, 어떻게든 자빠뜨려보려고."
중년 아저씨마냥 호탕하게 웃으며 에이리아의 뺨을 희롱하던 그녀가 말없이 에이리아를 끌어안았다.
"이제 미소도 지을 수 있게 되고, 정말 다행이네요, 저하."
"걱정해주셔서 고마워요. 카트린느."
"그나저나, 정말 신기하네, 성국에서도 포기한 그 지독한 병을 고작 며칠 만에 낫게 했다는 거 아니에요."
"그...... 그렇죠?"
자신의 턱을 쓰다듬으며 고민하는 카트린느의 모습에 에이리아는 그녀에게서 살짝 떨어져 떨떠름하게 답했다.
"그만한 능력은 어디서도 보기 힘든데. 그렇게 우리 황녀 저하 마음을 쏙 빼앗아 가놓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것 마냥 휙 돌아가 버렸다라."
고민하듯 중얼거린 그녀의 모습에 에이리아는 카트린느가 심각한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 아니에요."
"응? 뭐가 아닙니까?"
"저...... 저...... 그러니까..절 치료해주셔서 그분께 빠진 게 아니라...... 그 이전에 절 구해주셨던 분이라......."
중요했다.
그녀가 데이비 올 라운이라는 왕자에게 반한 건 엄연히 제국에서의 재회보다 과거에 있었다.
"이...... 이건 중요하다구요!"
"아......."
이 귀여운 생물체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카트린느는 진지하게 이 앙큼하고 귀여운 황녀를 제 저택으로 납치해버릴까 고민되기 시작했다.
"황녀 저하, 그 왕자님이 그렇게 좋아?"
"그...... 그게......."
자신이 말하고도 당황했는지 얼굴을 빨갛게 물들이고 고개를 푹 숙인다.
그 모습에 카트린느는 오랜만에 정경을 본다며 깔깔거렸다.
"아이고, 우리 귀여운 황녀 저하 이를 어째."
"그...... 그만 해요."
"저하, 내가 조언하나 해 드릴까? 그 남자를 확 사로잡는 방법이 있지."
"그...... 그런 게 있어요?"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고개를 번쩍 드는 그녀는 중증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대체 어떤 놈이기에 우리 황녀 저하가 이렇게까지 빠진 거지?'
에이리아의 병이 나을 때 그녀는 제국의 변방시찰을 나가 있었던 만큼 그 젊은 소국의 왕자를 직접 만난 적은 없었다.
"내가 느끼기에 그 왕자는 배려심이 너무 넘치거나 고자거나 둘 중에 하나야, 어지간한 방법으론 진도 빼다가 주름 생길걸? 그 왕자도 굉장히 거침없이 떠나가버렸고, 그 딸 바보인 황제 폐하가 국혼으로 이어줄 리도 만무하고."
"그...... 그런......."
급기야 울먹거리는 그녀를 향해 카트린느가 씨익 웃었다.
"그럴 때 좋은 방법이 있지."
"마...... 말해주세요!"
뭐든 하겠다는 듯 대답하는 에이리아의 모습에 카트린느는 자신의 사상을 그대로 전해주며 품 안에서 매번 가지고 다니던 것을 꺼내 흔들어 주었다.
"거사를 치르면 돼."
"네?"
침묵이 짧게 돌았다.
"가서 잡아먹어 버리라고. 기정사실로 배 속에 아이 하나 만들면 더 좋고. 까짓거 배 안에 자기 자식이 있는데 내치기야 하겠어? 그것도 제국의 황녀를?"
"무슨?!"
"황녀 저하. 남자든 여자든 좋아하는 사람은 쟁취하는 거야. 육체를 마주하는 숭고한 행위는 모든 생명체의 궁극적 목표라고, 서로 간에 우위가 없다는 말이지, 황녀 저하에겐 이렇게 귀여운 외모가 있잖아? 나 같으면 네글리제만 입고 당장에 침실로 침투한다."
"카트린느!!"
"어디로 잡아먹을지는 본인 취향이지만 사실 어디든 기분은 끝내......."
"흐...... 흐흐아아?!"
"명심해둬, 음흉한 남자 놈들은 말이야? 예쁜 목소리에 껌뻑 죽는다고, 그런 점에서 저하의 목소리는 거의 살아 있는 무기고나 다름없......."
"그...... 그그그그...... 그만해요옷!!"
전보다 수 배는 빨개진 얼굴로 에이리아가 비명을 내질렀다.
세상에 어떤 미친 작자가 황족을 향해 이런 말을 대놓고 한단 말인가.
자유로운 사상을 가진 대공 카트린느의 조언은 에이리아가 받아들이기엔 너무 강렬한 게 문제였다.
* * *
싸늘한 침묵이 감돈다.
-정말 표정이 제대로 굳은 게지.
쿡쿡 웃으며 말하는 페르세르크의 목소리에 나는 진지하게 입을 다물었다.
'진짜야. 귀쟁이는 싫다고 했잖아.'
괜한 소리는 아니었다.
이건 녀석에게 내가 던진 시험이나 다름없었다. 그걸 눈치챈다면 결과가 나올 것이고.
-다른 이유는?
'그냥.'
전에도 한 번 언급한 적 있듯, 귀쟁이는 깐깐해서 싫어하는 편이다.
정확히 말해서 나는 엘프를 마냥 좋아하지 않는다.
그들이 채식주의자라서?
아니,
그들이 굉장히 깐깐한 종족이라서?
그것도 이유이긴 하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