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0
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
- 7권 9화
61. 타락하는 엘프의 숲.
신과의 유일한 대화 수단인 내 상태를 나타내는 정보확인의 권능.
실존하되 실존하지 않는 주신 프리야는 내가 내건 공약을 완수함과 동시에 내게 거래를 요청해왔다.
그 요청의 내용 중 한 가지는 이미 내가 알고 있는 부분이었다.
대숲의 오염된 정령의 정화.
실패한다 한들 페널티는 없으나, 성공할 시 보상이 있으리라.
직접 적인 계시는 없지만 다프네 식 계시 해석법으로 읽어보면 결국 이런 내용이다.
일반적인 신실한 신자들을 통해 두루뭉술하게 내려지는 계시와 다르게 나는 조금 더 그 목표가 명확하다.
-대숲이라면.......
"이전에 달의 꽃모종을 얻으러 갔던 엘프의 숲."
정령을 소환하려면 그 정도로 자연의 에너지가 짙은 곳인 만큼 후에 정령 소환에 쓰기 위해 눈여겨 봐둔 곳이기도 했다.
하지만. 오염될 대로 오염된 숲을 정화하는 건 상당히 귀찮은 일일 수밖에 없는 만큼 일단 보류해두고 있던 것도 사실이었다.
-다른 이유는?
"정화를 하게 되면 결과적으론 서로에게 좋지만 과정이 좀 과격해."
내 말에 페르세르크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귀쟁이들이 그대를 보면 난리를 피우겠군.
그 말 또한 사실이었다.
현재 내가 꺼낼 수 있는 물건은 한 개.
기본적으로 상당히 가볍게 만들어낼 수 있는 물건들은 얼마든지 꺼낼 수 있지만.
처음 내가 꺼냈던 스스로 복원되는 옷과 엘릭서, 혹은 신창 롱기누스 같은 존재 자체가 굉장한 파급력을 가져오는 것들은 이미 꺼낸 것들을 제외하곤 추가로 꺼낼 수 없다.
아공간 내부엔 분명히 존재하나, 마치 허상이 된 듯한 느낌이라고 할까.
-애초에 회랑에서 만든 아공간이 여기서도 연동이 되는 건 조금 의문인데.
"내 몸에 있는 힘들 대부분은 육체가 아니라 내 혼에 연결된 힘들이라 그렇지 않을까 예상만 했었는데."
대량의 마나와 신성력, 사령 마나가 나를 따라 회랑에서 넘어온 것도 그 이유는 아닐까 싶었다.
결과적으로 그 가설은 들어맞은 꼴이다.
다만, 이런 식으로 강제 밸런스 패치를 당할 거라곤 생각지 못했었다.
"당장 전부 꺼낼 수만 있어도 여러 가지를 시도 할 수 있는데."
밤낮없이 움직이는 대량의 노동력을 확보할 수도 있고 영지 전체에 거대한 방어막을 칠 수도 있을 것이다.
회랑에서의 내가 사용하기 번거로웠던 부분을 보조해줄 만큼 물건들의 능력이 좋은 건 분명했다.
"좋게, 좋게 생각하자."
당장 갑은 내가 아니라 신의 의지.
막말로 갑자기 너 밸런스 파괴! 아웃! 하면서 아공간을 소멸시켜버려도 나로선 따질 곳도 없다.
건물주 위에 빌어먹을 조물주라더니.
건물주에 땅주인이 되도 역시 조물주를 이길 순 없나보다.
갑질에 끝이 없네.
"당장 엘릭서로 중화하곤 있지만 이런 식이어선 이 이상의 회복은 꿈도 못 꿔."
-당장 지금만 해도 그대를 해할 존재가 있긴 한가?
"모르지, 샨드라가 분신체가 아니라 본체가 떡하니 튀어나오면 그땐 진짜 다 죽는 거야."
이 세상에 원인 없는 결과 없다고 했다.
내가 회랑에서 돌아올 수 있었다는 말은 즉, 신과의 거래 대상인 내가 이곳에서 해야 할 일이 있다는 소리.
좋은 예로 다른 세상의 환수였던 샨드라 미네아의 분신체가 떡하니 판도라 영역에 있지 않았던가.
"정화작업이라......."
곰곰이 생각하던 나는 곧 결정을 내려 아공간을 열었고 그대로 생각했던 물건을 꺼내 들었다.
미묘한 진동과 함께 청명한 기운이 손에 감돌기 시작하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혹시나 하는 상황에 부탁해서 만들어놨던 게 이렇게 도움이 된다.
-스태프...... 보고 싶었는데.......
드래곤 하트를 처박아 넣은 스태프가 그리 궁금했는지 입을 삐쭉이는 그녀다.
"나중에 보여줄 테니 참아."
미묘하게 아쉬워하는 그녀를 달래주자 그녀가 입을 삐쭉였다.
연둣빛이 감도는 구슬.
정령왕의 정수를 뭉쳐놓은 정령왕의 구슬이라는 물건이다.
물건이야 어느 것이든 좋은 것들이니 막상 욕심 가는 대로 꺼내는 것보다 상황에 맞게 적절하게 꺼내는 게 이로우리라.
* * *
조용한 집무실은 어떤 의미로는 륀느와 홍단이, 그리고 청단이의 놀이터나 다름없다.
괜히 바깥을 싸돌아다니면 여기저기 사고나 치고 다니는 사고뭉치 녀석들인 만큼 적어도 눈에 보이는 곳에 두는 게 나로서도 안심인 상황이다.
"륀느, 생체장갑이 늘어진다고 분석. 그만해주길 권고."
무표정한 얼굴로 불만을 토로하는 륀느, 하지만 청단이는 상관없다는 듯 해맑게 웃으며 꺄르륵 댔다.
"헤헤헤! 링느! 말랑~말랑!"
"조...... 조금만 더 만져도 된다고 판...... 단......."
문제는 두 아이의 미소가 가져오는 파급력이 생체 골렘인 녀석도 견디기 힘들다는 점.
"네가 가만히 있으니까 더 좋아하는 거 같은데?"
"륀느, 기동 시 상당한 생체 에너지를 소모. 추가적인 보급이 필요. 필요 없는 움직임은 지양해야 한다고 판단."
"네가 입에 밀어 넣고 있는 그 쿠키들은 뭔데."
"륀느, 매우 고 효율적인 에너지 비축능력 보유. 그러니 추가보급을 요구."
뻔뻔하게 쿠키를 더 요구하는 녀석이었다.
그러면서도 쿠키를 집어 먹는 손은 멈추질 않는다.
저 작은 몸에 저만한 것들이 다 어디로 들어가는 건지.
쿠키라 하면 사족을 못 쓰는 두 쌍둥이 검보다 더 먹을 것을 밝히는 것을 보면 골렘 특성인지, 아니면 녀석이 가진 성격의 문제인지 심각하게 고려해볼 필요가 있어 보였다.
"흐응...... 홍다니 졸려어......."
"적절한 수면 매우 좋은 효과."
륀느 녀석은 가만히 두면 두 쌍둥이와 곧 잘 놀아주곤 했기에 적당히 맞장구를 쳐주는 것으로 아이들의 관심을 독차지했다.
이윽고 계속해서 놀다 보니 슬슬 지치기라도 한 것일까.
결국 홍단이가 륀느를 끌어안은 채 새근새근 잠들어버리자 청단이도 수마가 전염된 듯 내 품에 안겨 들어와 잠들었다.
그 앙증맞은 모습에 녀석을 끌어안고는 등을 토닥여주자 기분 좋은 웃음소리를 내며 녀석이 더욱 파고든다.
"저하, 베르닐 시종장입니다."
그때 조용한 집무실 내부에 노크 소리가 들려오며 베르닐 시종장이 인기척을 냈다.
"베르닐 시종장? 이 시간에 무슨 일로?"
"저하, 외람되오나 한 가지 간언을 드려도 될는지요."
"뭐, 말해봐."
내 말에 그가 조용히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내게 작은 종이판을 내밀었다.
"현재 영지에서 일하고 있는 이들의 명단입니다."
"흐음......."
"다들 쉬지 않고 열심히 일 해온 이들입니다. 이참에 휴가를 한 번씩 보내주시는 건 어떨 런지요.."
그의 제안에 건성 건성으로 고개를 끄덕이던 내가 눈을 부릅떴다.
"그러네, 그동안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움직였을 텐데."
슥...... 슥슥슥!
생각이 닿았으면 곧바로 행동으로.
순식간에 영지에서 일하는 이들의 명단을 체크하며 내가 말했다.
"좋다, 이 녀석들 전부 휴가 보내. 그리고 나머지는 먼저 휴가 갔던 이들이 돌아오면 순차적으로 보내고, 결과적으로 전부 휴가를 갔다 올 수 있게."
"받잡겠사옵니다."
"가는 길에 노잣돈도 두둑하게 챙겨주고."
클린한 기업을 추구하는 내 입장에서 일하는 이들의 휴가도 챙기지 않고 있었다니.
나름대로 상당한 불찰이다.
걸리기만 해라.
모조리 휴가 보내 주마.
이것이 인크레더블 사장님 마인드!
"음? 저하. 이 아이들은......."
그때, 명단을 체크하던 베르닐 시종장이 의아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유리를 포함한 몇몇 하녀들은 영지 사용인으로 채택된 지 얼마 안 된 아이들입니다만 굳이 먼저 휴가 길에 올려 보내시는 이유가 있으신지요."
그의 말대로 내가 체크한 인원 중 3분의 1은 사용인이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이들이었다.
"전부 타지에서 온 녀석들이잖아. 적어도 잘 적응하고 있다는 말은 해줘야 할 거 아니야. 나머지 인원들에겐 미안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배려는 해줬으면 한다고 전해."
거짓말이다.
"그, 그렇군요!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뭔가 감동이라도 받은 얼굴을 하는 이 노 집사의 모습에 괜히 찔리는 느낌이 들었다.
사실 진짜 그런 이유로 신입 사용인들을 먼저 휴가 길에 올려 보낸 건 아니지만.
좋은 게 좋은 것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누이 좋고 매부 좋은 결과라면 까짓거 못 해줄 것도 없었다.
-그 엘프 아가씨를 돌려보낸 게야?
'그래, 손님이 찾아갔는데 집주인이 없으면 쓰나.'
기왕 해야 하는 일이라도 '아' 다르고, '어' 다른 법이다.
결정권자가 있어야 탈탈 털어먹지.
내 속내를 알 수 없는 베르닐 시종장은 그저 내가 배려심이 깊어서 그렇구나 하는 얼굴로 만족스레 허허 웃어 보일 뿐이었다.
* * *
신입 사용인들을 먼저 돌려보낸 뒤 약 이틀 정도.
나는 기다렸다는 듯 륀느와 메가트론만을 대동한 채 영주성을 벗어났다.
목적지는 처음부터 정해져 있었다.
다름 아닌 하인스 영지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자리한 대숲.
보통은 몬스터의 출현지라 불리는 데다 진입하는 숲의 지형이 험난한 탓에 어지간한 사람의 발걸음이 없다시피 한 곳이기도 했다.
단순히 소풍을 위해서?
그럴 리가.
내가 원하는 건 이 숲에 있으니 이곳으로 올 필요가 있었을 뿐이었다.
신입 하녀들 중에 유리를 신경 써서 돌려보낸 것도 사실상은 그 이유이기도 했다.
고작 16살의 신입 하녀 유리.
여기만 보면 딱히 특이할 점이 없는 신입 하녀일 뿐이지만. 정보 확인의 권능을 사용하면 그녀가 일반적인 하녀가 아니라는 것쯤은 금방 알 수 있었다.
정보 확인의 권능에 나타난 그녀의 본명은 유리아 헬리샤나.
바로, 내가 영지에 믿고 숨겨둔 뱀파이어 대책 최후의 방어선이었다.
"아이고 머리야."
겉보기엔 전혀 변화가 없지만 정령 친화도가 민감했던 탓일까.
인상을 잔뜩 찌푸린 채 주변을 둘러보니 미묘한 변화가 보이기 시작했다.
"전보다 더 심해졌는데?"
익숙하지만 미묘하게 다른 풍경.
마치 무언가가 썩은 듯한 지독한 악취가 스멀스멀 올라와 견디기가 힘든 수준이었다.
"의문, 륀느, 아무런 후각적인 자극이 없다고 판단. 데이비 님 후각에 이상을 보고."
"정령 친화도가 없는 너는 모르는 게 당연하지."
애초에 그냥 냄새가 아니라 정령을 보고 만질 수 있는 수준에 이른 이들만 느낄 수 있는 악취거든.
내 설명에 륀느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엘프, 귀쟁이족, 깐깐한 종족. 그렇게 분석 중."
"맞아. 잘 알고 있네."
"륀느, 연산 기억능력 매우 우수, 데이비 님보다 우수하다고 자부."
"웃긴다."
"데이비 님, 륀느와의 [올드] 전적 75전 32승 43패."
"..."
"푸훕, 데이비님 무려 43패, 이것을 륀느가 낮게 평가."
보통 인간의 수백 수천만 배의 연산을 아무렇지도 않게 하는 컴퓨터 같은 녀석을 무슨 수로 이기나.
그나마 이긴 32승도 녀석을 속이고 또 속여서 겨우 얻어낸 전적일 뿐이다.
"......."
"륀느, 매우 우수. 이것을 높게 평가."
나를 통해 정보 일부를 받아들인 탓일까.
륀느가 가지고 있는 엘프족에 대한 이미지는 상당히 내 주관적인 이미지에 영향을 많이 받았다.
결국 엘프들은 본 적도 없는 이 위대한 발명품인 생체 골렘에게 시작부터 깐깐하고 융통성 없는 종족으로 낙인 찍혀버린 꼴이다.
"여기다."
한참 동안 주변을 둘러본 뒤 나는 엘프의 숲으로 향하는 결계를 다시 찾아내는 데에 성공했다.
매번 결계의 형태나 위치를 바꿈으로써 마을을 지켜오는 방식이야 엘프들의 전유물이나 다름없다.
퉁퉁.......
마치 수면 위로 파문이 퍼지듯 내 손등에 닿아 퍼지는 엘프의 결계를 보며 내가 조용히 주먹을 말아 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