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2
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
- 7권 11화
"......."
"불안정한 상태였다곤 하지만, 결계가 부서질 줄이야....... 네놈 짓이냐?"
"일단 부순 건 내가 맞아."
"뭐라?"
"뭐해. 데려가지 않고. 불안하면 구속해도 좋아."
양손을 모아 내밀며 내가 고개를 까딱이자 그의 얼굴에 의문이 어렸다.
"네놈은 마을에 들어가지 못한다. 네게 내려진 선택은 한가지뿐이다."
"죽는 것?"
내 말에 그가 침묵으로 긍정의 표시를 보냈다.
"너희들이 내게 주는 선택은 한가지뿐이지만 나는 두 가지를 줄게."
내 말에 엘프의 눈이 살짝 찌푸려졌다.
"다 같이 손잡고 잘 살래, 아니면 그대로 썩어서 무너질래."
내 제안에 그가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 치려던 찰나였다.
"숲 반절 이상이 오염되어있지 않아? 게다가 그 정도가 점점 심해지고 있고, 숲의 수장 아가씨는 그걸 해결해 보겠답시고 하인스 영지에까지 몰래 들어올 만큼 절박한 것 같던데."
"네놈......."
"가서 전해. 고용주 오셨다고."
이 일대 당은 하인스 영지의 소속반경이다.
너희, 월세는 내고 자리 잡았냐.
* * *
"유,유리아 님!"
"상황은 알아보셨나요?"
파들파들 떨며 겁을 먹고 있는 어린 엘프들을 도닥여주던 유리아가 침착한 표정으로 가드를 바라보았다.
다행이라면 당장 위험으로 치부되는 존재가 밀고 들어오진 않는 듯 보였다.
"적은! 인간인가?! 설마!"
"예...... 인간이었습니다. 인간이 아닌 특이한 존재도 있더군요. 정령의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것이 마치 죽은 존재 같았습니다."
정령의 기운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존재는 단둘뿐이다.
생의 법칙을 역행하는 언데드 이거나, 아니면 임의로 만들어진 존재이거나.
중요한 것은 오래도록 숨겨져 온 이 숲에 외부인이 침입해왔다는 점이었다.
그것도, 모르고 들어온 게 아닌 의도적인 접근.
게다가 정령 마법으로 펼쳐놓은 결계가 수복 불가능할 정도로 박살이 나버렸다.
"그것 보십시오!! 유리아 님!"
당연 이 상황을 그냥 넘어갈 콘대 장로가 아니었다.
그는 자기 생각이 맞았다고 말하듯 씩씩거리며 항의해왔다.
"결국 들킨 겝니다! 이를 어찌하실 겁니까! 인간은 탐욕스러운 존재입니다! 어찌 책임지실 요량이십니까!"
"콘대 장로."
"뭣들 하는가! 당장 전 가드들을 소집해 침입자를 제거해! 절대 흔적을 남겨선 아니 될 것이다!"
그리 말한 뒤 콘대 장로가 유리아를 바라보았다.
"유리아 님의 어리석은 독단으로 이런 일이 벌어졌습니다. 더 늦기 전에 이곳을 떠나야 합니다."
"콘대 장로."
처음으로 목소리가 낮아진 유리아가 그를 불렀지만 그는 분위기를 눈치채지 못한 듯 계속해서 떠벌렸다.
"오염이 걱정이십니까?! 당장 가서 세계수께 용서를 비십시오!!"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다른 엘프들도 콘대 장로에게 반박을 하지 못하고 있다.
그때, 뒤이어 합류한 엘프 가드 하나가 조심스럽게 손을 들어 보였다.
"저...... 죄송합니다만...... 인간 측에서 항복을 해왔습니다."
"뭐?"
"그리고, 유리아 님께 말씀을 전해달라고 하시더군요."
가드의 말에 점차 분위기가 싸늘하게 변해가던 유리아가 평소의 표정을 되찾았다.
"무슨 말이죠?"
"그게...... 고용주 오셨다. 라고 하면 알 거라고......."
가드의 말에 유리아의 눈이 크게 뜨여졌다.
* * *
고요한 숲.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숨 막히는 기류 속에서 륀느는 손에 구현화 시킨 무기를 사라지게 하지도 않은 채 내 앞을 막아섰다.
"륀느, 성능이 우수한 골렘. 데이비 님은 륀느가 지켜."
"네가 날 지켜야 할 상황이 오긴하겠냐."
"....데이비님의 인성을 륀느가 낮게 평가..."
"대신 넌 내가 손대지 못하는 부분을 나설 수 있어, 그걸로도 충분해. 지키는 건 내 몫이고, 넌 나를 도와주는 거다."
"분업...납득."
나는 내 손에 묶인 마치 살아 있는 듯한 나무 족쇄를 흥미롭게 바라보았다.
정령 마법.
기본적으로 정령술은 여러 종족이 사용할 수 있지만 일정 방식의 정령 마법은 오로지 엘프들만이 사용할 수 있는 특권이나 다름없다.
-그럼 그대도 못써?
'글쎄.'
종의 한계는 나도 마냥 넘을 수 없다.
하지만 그 구성 방식을 역이용한다면 가능하리라.
-그대에게 정령술을 가르친 스승이 유리아나라는 여자라고 했던가?
'그래, 인간이면서 13명의 정령왕 모두와 계약한 초유의 괴물 정령사.'
-그 외엔?
'음...... 회랑에서 둘밖에 없는 부부 출신의 영웅? 같은 대륙의 마왕 유르그가 그 여자 남편이야.'
스틱맨에 영감을 받아서 기괴한 무술을 만들어낸 마왕이 바로 내게 정령술을 가르친 정령 여제 유리아나의 남편이렷다.
물론, 4대 성격 최악의 여성들만큼은 아니지만 정령 여제 유리아나도 정상적인 성격과는 거리가 멀었던 만큼 매번 술을 마실 때면 그녀의 남편이었던 마왕 유르그는 내게 호소하듯 울먹거리더라.
[빌어먹을, 결혼은 인생의 무덤이다! 데이비! 넌 나중에 결혼해서 바가지 긁히지 마라! 여자들은 전부 내면에 괴물을 품은 여우들이다!]
기본적으로 알려진 정령의 속성은 4가지라 할 수 있다.
불, 대지, 물, 바람.
하지만 종족 특유의 힘을 가지게 된다면 추가적인 정령과의 계약 또한 가능하다.
하이 엘프가 계약하는 빛의 정령.
다크 엘프가 계약하는 어둠의 정령.
이 두 가지가 좋은 예라 할 수 있다.
"유리아 님께서 허락하셨다, 인간. 따라와라."
이윽고 경계하는 얼굴로 내게 다가온 엘프 가드 하나가 천으로 내 눈을 가렸다.
"조금이라도 허튼짓을 했다간 당장 그 미간에 화살이 박힐 것이다."
"정 못 믿겠으면 더 묶어도 좋아."
"조용히 해라!"
저들은 적이 아니다.
앞으로 영지를 위해 일해줄 소중한 일꾼이 될 것이다.
경계하는 이들을 도발해봐야 좋을 것 없었기에 나는 그저 씨익 웃어주며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실제로 이 상황에 전혀 긴장감이 느껴지지 않는지 페르세르크는 제 궁금증을 풀기에 여념이 없다.
-그러면 그 외의 정령은? 그대는 13명의 정령이라 하지 않았는가.
"음, 그러니까 환상계통, 혼돈계통, 시간, 공간. 얼음. 뭐 종류는 다양해."
"무슨 소리냐 인간!"
"아, 별거 아니니 가자고."
픽 웃으며 내가 한발 내디뎠다.
도저히 앞이 안 보이는 상황이라곤 생각할 수 없는 가벼운 발걸음이었다.
* * *
드워프 마을인 황색 바위 부족을 방문했을 때와는 완전히 다른 분위기.
그때 당시엔 인간을 경계하긴 해도 적의는 없었다.
신기하다는 감정을 내비친 게 전부였지만 엘프들은 달랐다.
엄연한 적의, 경계. 두려움.
그들은 300여 년간 스스로들의 존재를 세상에서 완전히 감추는 데 성공했다.
뛰어난 정보원이라 해도 정령 마법으로 펼쳐놓은 광범위 결계 때문에 그 이상의 접근은 하지 못했으리라.
낡은 천으로 눈을 가리긴 했지만 마을 내부 여기저기서 나를 향해 보내오는 그들의 시선이 분명히 느껴졌다.
보인다.......
"너흰 아직...... 준비가 안 됐다."
-그건 무슨 말이야.
"영지민으로서의 준비가 덜 됐어."
감히 건물주, 땅 주인이 왔는데 분노와 경계심이라니.
좀 더 깊은 경외심을 가져라 우매한 귀쟁이들아.
"그만 떠들고 빨리 이동해라, 인간."
뒤에서 내 등을 밀치며 으르렁대는 엘프로 인해 륀느가 이를 빠득 갈며 엘프를 올려다본다.
"륀느, 경고. 한 번만 더 데이비 님을 함부로 밀면, 륀느가 매우 높게 평가하는 폭력을 선사해."
"웃기는......."
"한다면 해. 반드시 해. 륀느 실천능력, 매우 높게 평가."
나와 마찬가지로 양손을 구속당하고 있는 륀느였지만 언제 꺼내 들었는지 모를 빠루가 녀석의 손에서 번뜩였다가 사라진다.
"윽......."
"륀느는 정말 한다면 하는 녀석이다. 괜히 자극하지 마. 난 싸우러 온 게 아니야. 너희들을 해치러 온 것도 아니고."
느긋하게 걸어가던 내가 그리 말하자 엘프들의 얼굴에 더욱 흉흉함이 어린다.
파장을 통한 구별법.
시선으로 보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표정이 훤히 보인다.
이런 걸 두고 심안(心眼)이라고 하던가.
감각은 감각이되 존재하는 감각이 아닌 새로운 경지.
어떤 의미로는 이기어검의 상위 경지인 심검에 이르러야 깨달을 수 있는 경지라 할 수 있다.
[기억해라, 끅! 아이고 취한다. 심검이란 그런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고. 맡을 수 없는 냄새를 맡는 거다. 정령사가 강대한 친화력을 가지면 정령을 보고 냄새를 맡게 되는 거랑 같은 것,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느끼고 인지하는 경지. 그게 심검이다.]
천마 독고준이 벽에 가로막혀 심검을 터득하기위해 고심하던 내게 해준 말이다.
[심안을 터득한 자는 세상의 흐름을 보게 되고 그 흐름에서 조금씩 엇나갈 행동력을 지니는 거다. 남들은 자신을 완벽하게 숨겼다고 생각하겠지만, 결과적으로 보면 네 눈엔 훤히 보이는 거지. 암살자들도 마찬가지 아니겠냐.]
검신 하레스 또한 같은 말을 했었다.
"데려왔습니다. 유리아 님. 인간! 무릎을 꿇어라!"
"되었습니다."
나를 다시 뒤에서 밀치려 다가오던 엘프가 소녀의 제지에 멈춰 섰다.
이후 내 눈을 가리던 안대가 풀리기가 무섭게 엘프들의 마을 내부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 수는 그리 많지 않다.
겉보기엔 100여 명이 조금 넘는 정도의 인물들이다.
하지만, 그들 모두가 동화나 판타지 로맨스 소설에서나 나올법한 엘프들이라는 사실은 절대 그냥 평범한 광경이 아니라고 부르짖었다.
엘프의 숲에는 일반적인 숲과는 다른 식물들이 자라곤 한다.
스스로 빛을 내는 식물도 있고, 거의 움직임이 없는 일반 식물과 다르게 조금만 자극해도 꽃을 만개하는 식물도 존재했다.
'이것들 잘 이용하면 전부 돈인데.'
아는 게 힘이라고 이런 식물들을 잘 재배한다면 상당히 고 효율적인 약재들을 만들 수 있지만 나는 일단 관심을 끊었다.
중요한 것은 식물이 아니라 눈앞에 있는 이 깐깐한 귀쟁이들이니 말이다.
말없이 고개를 돌려보다 엘프들의 중앙에 서 있는 하늘빛 머리카락의 소녀를 발견한 내가 싱긋 웃었다.
"휴가는 즐길 만해?"
"제 정체를 알고 계시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했었답니다."
"어째서?"
"이미 엘프의 존재를 알고 계시잖아요? 게다가."
이전에 그런 말도 하셨지요.
옅게 웃어 보이며 그녀는 내가 과거 하녀로 위장하고 있던 그녀에게 했던 말을 그대로 돌려주었다.
영지를 잘 부탁한다는 말.
"이후에 타락한 귀족이 영지에 숨어들었고, 빛의 정령으로 쫓아냈을 때...... 그때 알았답니다. 이미 알고 계신다고."
내 말에 주변의 분위기가 더욱 흉흉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