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78
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
- 8권 2화
이번 건 그저 단순한 맛보기일 뿐이고, 앞으로도 널 이용해 먹을테니 잘 좀 부탁한다고.
뇌물이라는 단어에 김이 새버린 것일까.
놀란 얼굴로 어렵게 입을 열던 그녀는 곧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피식 웃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는 목걸이를 쥔 채 내게 다시 내밀며 물었다.
"뭐해? 안 걸어줘?"
"그런 건 네 연인에게나 부탁해."
내 대답에 그녀가 환하게 웃어 보였다.
"개수작 부리지 마! 데이비. 연인에게 다른 남자가 준 목걸이를 걸어달라고 한다고?"
"듣고 보니 그러네."
결국, 그녀가 다시 건네준 목걸이를 받아 펼친 나는 곧 그녀에게 손을 까딱였다.
"가까이 와."
"이상하게 무드가 있어야 할 상황인데 왜 이리 허탈한 것인지......."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녀는 저항하지 않고 내게 다가왔고 옅은 미소를 지으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그런 그녀의 미소에 나는 말없이 그녀의 목을 끌어안듯 팔을 감아 그대로 그녀의 목에 천천히 목걸이를 걸어 주었다.
그리고는 꿀이 흐르는 듯 찬란한 그녀의 금발을 들어 가볍게 정리했다.
푸른 빛이 영롱하게 빛나는 목걸이가 목에 걸린 탓일까.
즐거워 보이는 그녀의 미소는 한결 더 환해 보였다.
"싸이코같은 짓만 안 한다면 넌 정말 좋은 신랑감일 텐데 말이야."
"난 너 같은 왈가닥은 취향이 아니야."
취향만 따지면 린디스 제국의 그 소동물 같은 황녀님이나 내 옆에 있는 페르세르크정도가 있다.
"나도 너 같은 싸이코는 취향이 아니네요. 안 그래도 요즘 황실에서 혼처를 구한다고 난리인데 넌 절대로 반대야."
"신경 써줘서 고마울 따름입니다. 황녀님."
키득거리면서 서로 주먹을 내밀어 가볍게 부딪힌다.
유리아의 말마따나 남녀 사이에 친구는 없다고 한다.
하지만 연인으로 보기엔 일리나와 나의 관계는 조금 미묘한 구석이 있다고 생각하는 나였다.
서로 간에 연심이 없는데 연애관계라고 주변에서 밀어붙여 봐야 본인들에겐 민폐일 뿐이니 말이다.
"그래도......"
그때, 가만히 나를 올려다보던 일리나가 고개를 푹 숙였다.
희미한 미소와 함께 시선을 내리깐 그녀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말이야, 데이비. 만약에......"
횡설수설하는 그녀가 시선을 이리저리 돌렸다.
"만약에, 정말 좋은 혼처가 없다면......네......네가......"
고민하듯 아랫입술을 꽈악 깨문 그녀가 무언가 말하려던 찰나였다.
우우우우웅!!!
"꺄악?!"
갑작스런 공명 소리에 일리나는 하던 말도 집어 던진 채 제 나잇대의 소녀와 같은 귀여운 비명을 내지르고 그대로 주저앉아버렸다.
소리의 근원은 다름 아닌 그녀의 반지였다.
"하아......깜짝 놀랐네."
짜증스레 중얼거린 그녀가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본국에서 연락이 왔어. 미안해 데이비......"
"가봐."
"응?"
"먼저 가보라고. 마침 나도 볼일이 생겼으니까."
내 말에 그녀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가봐."
단호한 내 말에 그녀는 의아한 표정을 지으면서도 이내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미안해. 축제는 며칠 동안 되니까. 내일은 윈리와 같이 나오자!"
결국, 그녀는 내 말을 듣기로 결정했는지 짧게 한숨을 내쉬며 내게서 등을 돌렸다.
좀 전부터 기감에 아주 미약하게 익숙한 기류가 잡히기 시작했다.
거리는 멀지 않았다.
이 독특하게 차가운 기류를 가진 이는 내가 아는 한에선 단 하나뿐이다.
정보길드 메아리에서 개인적으로 내 의뢰를 맡고 있는 정보원 잭.
본래의 정체는 다크엘프 아이나 헬리샤나.
그녀가 영지 외곽에서 누군가와 대치한 채 살기를 풀고 있다.
"이것들이 이 좋은 날에 아주 산통을 깨는구만."
괜스레 짜증이 밀려왔다. 습격이고 나발이고 때와 장소를 구분할 줄 알아야지.
그런 기본적인 예의조차 지키지 못하는 놈이라면.......
"세계수라도 모근을 다 뽑아버리든지 해야지."
혼이 나야지 별수 있겠는가.
* * *
푸른 제복을 입은 엘프가 네다섯.
모두가 신목에서 뛰어난 힘을 지닌 에이션트 가드들이다.
하나같이 마스터급 궁술 실력을 보유하고 있으면서 중급 이상의 정령과 계약을 한 실력가들이다.
그들은 모두 자신들의 존재도 눈치채지 못하고 축제를 즐기고 있을 하인스 영지로 향하고 있었다.
세계수의 명에 따라 그들은 지금부터 하인스 영지를 습격.
자신들에게 검을 들이민 겁 없는 인간을 단죄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하지만, 그들의 그런 은밀한 침투는 영지에 들어서기도 전에 한 남성에 의해 막혔다.
"살기를 죽였어야지. 이 이상은 못 간다."
담담한 사내의 말에 에이션트 가드들이 침묵한 채 무기를 들고 그를 포위하듯 에워쌌다.
"불필요한 살생은 원치 않는다, 비켜라. 인간."
고요한 남성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검은 무복을 입은 사내, 잭은 한결같은 자세로 그들을 막아선 채 자신의 애병이자 그의 목숨을 지금껏 지켜주었던 유려한 곡선을 지닌 단검을 가볍게 빙그르르 돌렸다.
"거절하지. 이 이상 들어가겠다면 죽일 수밖에 없다."
감정이 느껴지지 않는 잭의 경고에 침입자들의 기세가 더욱 흉흉해졌다.
"우리는 우리의 명을 이행한다. 그걸 막는다면......"
말끝을 흐린 한 침입자가 화살을 시위에 걸었다.
"애석하지만 자연의 품으로 돌려주는 수밖에."
피잉!!
공기가 찢기는 소리와 함께 날아든 날카로운 화살이 순식간에 잭의 신형을 향해 쏟아지기 시작했다.
* * *
'에이션트 가드'
잭, 아니 아이나 헬리샤나는 전신에 흐르는 식은땀을 애써 숨긴 채 긴장한 얼굴로 날아드는 화살을 쳐내고 기민하게 몸을 움직였다.
한번 한번 한 끗발 모자라면 당장에라도 몸을 꿰뚫어버릴 법한 위험한 공격이 쉴 새 없이 날아든다.
대륙 최고 정보길드라 불리는 메아리에서도 최상위 정보원으로 존재하는 그녀였다.
그녀의 암살 실력은 마스터급에 이르렀고 전 에이션트 가드 출신이었던 만큼 그녀의 정령술 실력 또한 상당한 편이었다.
그렇기에 긴장을 풀 수 없었다.
상대는 과거의 그녀와 같은 에이션트 가드.
그것도 수가 다섯.
모두가 자신을 노리고 있다.
게다가 무엇보다 그녀의 신경을 집중시키고 있는 이는.......
다름 아닌 에이션트 가드들이 보호하듯 감싸고 있는 저 하늘하늘한 복장의 여성이었다.
"흐읍!"
쌔앵!!! 푸훅!!
아주 잠깐 신경을 다른 곳에 쏟기가 무섭게 날카로운 화살촉이 그녀의 허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반사적으로 치명상을 피해내긴 했지만 아릿한 통증이 그녀를 엄습하기 시작하자 절로 표정이 찡그려졌다.
그리고 그 짧은 틈은 아이나의 뒤를 잡히게 만들었다.
"......"
순식간에 미간으로 들이밀어 진 화살촉을 보며 그녀가 깜짝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상대 엘프가 손을 놓기만 하면 저 화살촉이 사정없이 아이나의 미간을 헤집어 놓으리라.
피하기엔 늦었다.
다른 곳에 신경을 쓰다 얻어걸려버린 피해는 생각보다 막심했다.
[그만, 그만하거라.]
그때, 가만히 있던 여성이 처음으로 입을 열며 상황을 잠시 중단시켰다.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다는 듯 느긋한 미소를 짓고 있는 여성은 굉장히 개방적인 복장에 아름다운 미모를 지니고 있었다.
액면가의 나이는 대략 20대 중후반.
무기도 없고, 근육도 별로 없는 가녀린 여성이었다.
방어구도 없이 손으로 잡아 찢어도 찢어질 것만 같은 나풀거리는 얇은 옷을 입고 있는 탓에 그녀를 걱정할 요소는 분명 없다.
아니, 없어야 했다.
하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겉보기로 상대를 판단하고 안 하고를 떠나서 아이나 헬리샤나는 저 여성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세계수.
이그드라실.
태초의 의지에 하사받은 유일한 이름이다.
본체는 아니지만, 분명히 그 힘의 일부를 사용할 수 있는 화신체이리라.
세계수의 화신이라면 손가락 하나 까딱이는 것으로도 그녀 자신을 제압할 수 있었다.
결국, 그녀는 지금 바람 앞의 등불 같은 상황이라는 소리였다.
반사적으로 몸을 일으켜 거리를 벌리는 아이나를 보며 그녀는 평시의 자애로운 미소를 더욱 진하게 지었다.
[호오, 집 나간 못된 딸자식이 어디를 갔나 했더니 여기에 있었구나.]
"난 인간이다. 엘프가 아니야."
[인간이라......제법 흥미로운 소리를 하는구나. 아이나]
"......"
[설마 그런 조잡한 아티펙트로 모습을 감춘다고 여가 자식을 못 알아볼 거라 생각했더냐?]
"빌어먹을......"
숨기는 건 의미가 없었던 모양이다.
[너희 자매는 어찌하여 여의 마음을 이리도 아프게 하는 것인지 모르겠구나.]
"그걸 자초한 건 당신이야. 이중적이고 역겨운 가면은 집어치워. 당신과 신목의 성자 때문에 나는 내 동생에게 죽은 이가 되었고 그 앞에 모습을 드러낼 수도 없게 되었어."
아이나 헬리샤나는 긴장감에 전신이 압축되는 기분이 들었다.
그녀를.
세계수와 에이션트 가드를 데이비에게 보내선 안 된다.
에이션트 가드야 전혀 문제 될 게 없지만 세계수의 화신체는 이야기가 달랐다.
세계수는 의지 한 번에 지형을 바꾸는 초월급 존재.
비록 화신체라 해도 그 힘은 기본적인 규칙을 벗어나 있다.
단순한 경지의 차이로 마냥 채워 넣을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소리였다.
불합리할 정도로 상위차원의 존재.
세계수는 그러했다.
존재 자체가 거대한 힘인 세계수라면 제아무리 데이비라도 힘들 것이라 생각하는 아이나였다.
'정령왕급의 간섭력으로 세계수를 막지 않으면 상대하는 것조차 불가능해.......'
정작 데이비가 엘프의 숲에 들어갔고 세계수와 척을 졌다는 소식만 알 뿐 그 안에서 무엇을 했는지는 전혀 모르는 그녀였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이나가 하인스 영지로 돌아온 것은 조금 전이었으니 말이다.
사실 세계수와 에이션트 가드의 습격을 찾아내 이렇게 막아선 것도 반쯤은 우연에 가까웠다.
영지로 돌아오던 길에 익숙하면서도 섬뜩한 기류를 느끼고 발걸음을 옮긴 결과가 바로 이것이었다.
"어째서 당신이 여기 있는 겁니까."
아이나의 싸늘한 질문에 세계수가 자애로운 미소를 지어 보였다.
[여의 자식을 둘이나 빼앗아간 인간에게 흥미를 느낀게지. 오늘은 여의 기분이 좋다. 하니, 물러나거라. 비록 내 품을 떠났다 하여도 아이나 넌 다른 이들과 같은 숲의 자식이다. 얼마나 죽던 상관 없는 인간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치게 두고 싶진 않구나.]
마치 결정이라도 난 것처럼 말하는 세계수, 이그드라실의 말에 아이나가 이를 까득 깨물었다.
화신체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는 알 수 없지만 절대 데이비와 마주쳐서 좋을 게 없다.
어려운 고민이었다.
막아서면 자신은 죽는다.
길을 열면 데이비가 죽을 것이다.
데이비를 목숨 바쳐 지킬 정도로 그를 따르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가 아니라면 그녀의 염원을 해결해줄 존재가 없는 것도 사실이었다.
무엇보다.
아이나 헬리샤나에게 세계수는 증오스러운 존재 중 하나일 뿐이었다.
애초에 기울 것도 없이 한쪽으로 치우친 천칭이 아니던가.
결정은 생각보다 빨랐다.
"거절하지. 당신이 그에게 위해를 가하게 둘 순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