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4
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
- 8권 8화
어색함에 몸서리가 처진다는 말은 여기서 나오는 모양이었다.
'아니 뭔 놈의 제국의 황녀씩이나 되는 양반들이 번갈아가면서 찾아와.'
축제 기간 동안 영지를 찾아온 타 영지의 귀족들이나 왕족들과는 대면하지 않았다.
당연했다. 그들 하나하나와 대면하고 있다간 끝도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눈앞에 있는 이 수인 소녀도 마찬가지이지만.......
그녀는 조금 케이스가 달랐다.
그녀가 이 영지에 찾아온 건 축제구경이나 그런 것이 아니라.
명확히는 정기 진단이었다.
그녀는 내게 치료를 받은 전력이 있으니 말이다.
"저......, 혹시 제가 있어서 불편하신가요?"
눈치가 빠른 지 그녀가 조심스레, 그리고 불안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아닙니다. 상황을 좀 보고 있었습니다. 병은 별문제가 없어 보이네요."
"아......, 정말 감사드려요. 그때 제대로 인사도 못 드렸었는데......."
내 대답에 대번에 안도한 듯 그녀의 얼굴이 환하게 밝아졌다.
다만 금방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푹 숙이고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보였다.
-귀까지 빨개졌어. 어찌 저리 귀여울고.
페르세르크는 당장에라도 저 아담한 황녀를 끌어안아 보고 싶은지 이리저리 날아다니며 그녀의 주변을 배회했다.
"그나저나 조금 놀랐습니다. 오신다고 연통이라도 주셨으면 준비라도 했을 텐데요."
거짓말이다.
"죄......죄송해요. 제가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거짓말 같은데. 척 봐도 옆에서 부추긴 냄새가 강렬하게 난다.
"아닙니다. 드세요. 차 향이 좋으니까요."
내 말에 조심스레 손을 뻗어 차를 음미하던 그녀가 눈을 살며시 크게 떴다.
유리아 헬리샤나가 비록 괴짜 같은 재료를 주로 사용하긴 하지만 그래도 차를 달이는 솜씨 하나만큼은 영주성에서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관록을 지니고 있다.
당연 일반적인, 괴짜 같지 않은 재료를 사용한 방법에도 상당한 조예가 깊은 편이다.
"향이 정말 향기롭네요."
"엘리실 잎을 달인 차입니다. 엘프의 숲에서만 자라는 조금 보기 힘든 약초니까요."
"아......그렇군요."
시선을 둘 곳을 찾지 못해 두리번거리던 그녀의 모습에 다시 주변이 침묵으로 감돌았다.
"아......아부아."
그런 조용한 분위기가 싫은지 홍단이가 울상을 지으며 내 옷깃을 마구 잡아당겼다.
"홍단이 이리와."
이에 그녀를 안아주자 에이리아가 귀를 쫑긋거리며 고개를 휙 들어 보였다.
그리고는 뚫어져라 홍단이를, 그리고 내 뒤에 숨어 고개만 빼꼼 내밀고 있는 청단이를 바라보았다.
"으......으우......"
당연 갑작스런 관심에 당황한 두 아이는 당연 앓는 소리를 냈다.
"저......저 두 아이가 좀 전 왕자님께 아빠라고......."
그게 궁금했던 것일까.
나름대로 용기를 내어 물어보는 그녀의 표정에는 마치 무언가를 간절히 바라는 듯한 심리가 담겨있었다.
-본녀는 뭔지 알 거 같은데.
'뭔데?'
-글쎄?
쿡쿡 웃으며 페르세르크가 놀리듯 물러났다.
"홍단이 청단이 인사해야지? 에이리아 황녀님이야."
"에...에리아."
내 말에 이름을 곱씹으며 작게 중얼거린 홍단이었다.
"귀......귀여워!"
본인도 한 귀여움을 한다는 건 아는지 모르는지 꼬물거리는 두 아이의 행동에 그녀가 눈을 반짝였다.
그리고는 눈을 크게 뜨며 용기를 얻은 얼굴로 소리쳤다.
"저...... 와,왕자님! 실례인 것은 알지만......지, 질문 하나 드려도......."
"네 됩니다."
"아, 감사합니다! 그......그게, 그러니까......혹시 두 아이는......"
그녀의 질문에 내가 침묵하자 그녀가 횡설수설하더니 어렵사리 말을 끝맺었다.
"혹, 친딸이신가요?"
친딸.
어떤 의미로는 내 손에서 태어난 아이들이 맞다.
하지만 사람이 아닌 만큼 그녀가 묻는 그 친딸이라는 개념과는 조금 다르리라.
"조금 미묘하네요. 일단 제가 키우는 아이들은 맞습니다."
담담한 대답에 그녀의 얼굴에 화색이 돋았다.
빨개졌다가 당황했다가 화색이 돋았다가.
아주 신묘할 정도로 표정변화가 다채로운 그녀였다.
"하아......"
짧게 한숨을 내쉰 그녀가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렸다.
그리고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눈동자를 굴리다가 조심스레 말했다.
"그......그러니까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싶었어요! 그, 그게 그러니까."
"그 말은 좀 전에도 하셨는데."
"아!"
금방이라도 울어버릴 것처럼 눈을 동그랗게 뜨는 그녀의 모습은.......
상당히 괴롭히고 싶게 만드는 귀여움을 지니고 있었다.
'참자, 참아.'
그녀를 괴롭혔다가 데오르트 황제가 안다면? 과묵하면서 지독한 딸 바보인 그 황제는 분명 노발대발하며 군사를 일으킬지도 모르겠다.
아무리 나라도 제국을 상대로 전쟁을 거는 피곤한 짓은 사양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나저나, 한번 정밀 진찰을 해봐야겠는데.'
"혹시 모르니까 등을 좀 보여주실래요?"
"네?"
"혹시 모르니 정밀 진찰을 해드릴 테니까요."
내 말에 놀란 듯 허둥거리던 그녀가 급히 일어났다.
내 말을 알아들은 것 같긴 하다만.
"아...... 알겠어요. 죄, 죄송하지만 잠시만 고개를"
"음?"
뭔가 잘못 알아들은 느낌이 들었다.
"옷을 벗는데 보시면 부끄러워서......."
"아......."
너무 순진한 성격이라 오히려 내가 당혹스러워지는 건 참 희귀한 경험이었다.
"옷......, 벗지 않으셔도 됩니다. 등만 돌리세요."
그제야 자신의 오해를 깨달은 듯 수치심으로 인해 그녀의 눈에 눈물까지 고이기 시작했다.
의원으로서 대할 땐 모든 사심을 버리기에 내 목소리는 언 듯 낮아진 것처럼 들렷다.
그 때문인지 그녀는 크게 움찔하며 풀이 죽은 표정을 지었다.
정말 귀여운 모습이었다.
우우우웅.......
그 이후 대화는 없었다.
미묘한 침묵 속에서 나는 말없이 그녀의 등에 손을 올리고 마나를 끌어 올렸다.
옅은 진동과 함께 우웅 거리는 공명음이 고요하게 주변으로 퍼져 나갔다.
"흐읏......흣."
마나가 한번 들어갈 때마다 들려오는 저 미묘한 소리만 없으면 참 좋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지만 페르세르크는 내가 곤욕을 치르는 모습이 정말 즐겁기라도 한지 멀찍이 안자 키득거릴 뿐이었다.
그리고.
"륀느, 매우 좋은 시각 데이터, 확보 완료. 이것을 높게 평가."
언제 다가왔는지 륀느가 창밖에서 음흉하게 웃으며 나를 바라보며 복장을 뒤집어 놓았다.
"꺅!"
갑작스런 륀느의 출현에 놀란 에이리아가 귀여운 비명을 내지르자 나는 그녀가 움직이지 못하게 어깨를 잡아 고정시켰다.
"가만히 있으세요. 움직이면 안 됩니다."
분위기는 분위기고, 어색함은 어색함이고.
결과적으로 진료 도중엔 그런 자잘한 것들은 모두 잊어야 하는 법이다.
단호한 내 말에 경직되기라도 한 듯 미묘한 자세로 굳어버린 그녀였지만 나는 아무 말 하지 않고 마나를 더욱 세밀하게 퍼뜨려 그녀의 몸 안으로 밀어 넣었다.
융해 가속 바이러스는 다른 질병과 다르게 마나로 구분하고 찾아내기가 상당히 쉬운 병이다.
그런 만큼 괜히 약으로 진단하느니 복잡한 것들을 거칠 것도 없이 그저 손을 얹어 마나로 몸을 훑은 것으로도 충분히 확인할 수 있었다.
완전히 병이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이제 와서 재발하기엔 그 병원균의 수가 너무도 작고 초라하다.
다만.
'이건 뭐지?'
그녀의 몸 안에 기묘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나로서도 처음 보는. 마치 상위의 무언가가 심어진 듯한 느낌.
보아하니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던 것 같은데. 본인은 전혀 모르고 있다.
"길어야 한 달 정도면 완치가 될 거 같네요. 그동안은 절대 무리를 하시면 안 됩니다."
담담한 내 말에 그녀가 미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푸훕....... 데이비님, 좋은 시각 데이터를 추가 확보. 이것을 유리아에게 넘길시 많은 양의 미각 데이터로 전환 가능하다고 분석."
유리아에게 이걸 보여주면 먹을 걸 많이 준다 이 말이지.
륀느의 조롱에 내 눈에서 불이 튀었다.
"너 나가 임마. 나가서 애들하고 놀아줘."
"륀느, 거절해. 금일 데이비님이 휴가를 허락. 륀느의 자유행동을 보장할 것을 요구."
"......"
휴가 줬으니 무슨 행동을 할지는 본인 자유라고 시위하는 륀느였다.
이제 와서 줬던 것을 다시 빼앗기도 뭐했던 터라 결국 백기를 선언하는 건 내 쪽이 되었다.
"다 됐습니다. 이제 돌아보셔도 됩니다."
"가......감사합니다."
빨개진 얼굴로 고개를 푹 숙인 그녀가 조심스레 나를 바라보았다.
"저......, 왕자님."
"네."
"실례가 안 된다면, 서,선물을 드려도 될까요?"
그녀의 말에 문득 의아한 생각이 든 내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그녀는 처음 나를 만날 때 가지고 왔던 작은 바구니를 양손으로 쥐고 내밀었다.
"주...... 중부대륙에서 유행하는 제과 메이커의 초코에요! 지,직접 만들었어요. 받아주세요!"
용기를 낸 그녀의 외침에 바구니를 받아든 나는 문득 이게 전생 지구에서 유행하던 발렌타인데이와 비슷하지 않은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발렌타인이라......, 아!"
그런 생각을 마친 내가 눈을 크게 떴다.
"고맙습니다. 황녀님."
그리고는 사심 없이 감사를 표했다.
"네? 아아......, 네! 저야말로!"
그녀는 다른 의미로 받아들인 듯하지만 내 머릿속엔 이미 기념일을 이용한 돈벌이로 시뮬레이션이 빠르게 돌아간 후였다.
유행이라는 것은 그런 것이다.
적당히 만들어두면 스스로 발전하면서 하나의 문화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런 문화는.
엄청난 돈이 된다!
-이 돈벌레를 어찌하면 좋을고.......
혀를 쯧쯧 차는 페르세르크의 표정엔 한심함이 가득 담겨있었다.
하지만 나는 단호하게 지금 있었던 일을 소문낼 생각으로 가득했다.
유행은 본래 입지가 높은 사람이 행동을 함으로써 퍼지는 것이니까.
지금은 몰랐다.
이 결정이 얼마나 크게 부메랑이 될지.......
* * *
"반갑습니다. 왕자님, 린디스제국의 대공 카트린느 카라벨라라고 합니다."
꽤 정중한 인사였지만 억지로 격식을 끼워 맞춘 듯한 느낌이 드는 여자였다.
"반갑습니다. 카트린느 대공. 위명은 익히 들어 알고 있습니다."
사실 몰랐지만 모른다고 대놓고 이야기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당장 숨 막혀서 터져버릴 듯한 에이리아와 나의 분위기를 개선해준 것은 다름 아닌 눈앞의 이 호박색 머리칼의 여성이었다.
지독한 침묵 속에서 갑자기 등장한 그녀는 별의별 구실을 다 대며 그녀와 나를 떨어뜨려 놓았고 내게 독대를 요청해왔다.
-카트린느 대공은 본녀가 칼디라스의 검안에 있을 때 들은 바가 있지. 린디스 제국 최강의 무투가.
페르세르크의 중얼거림에 나는 말없이 고개를 돌려 한켠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불쑥 찾아온 무례를 용서하세요. 황녀 저하께서는 안된다 말씀하셨지만 제가 고집을 부려 이리 불쑥 찾아온 것이니."
그녀의 말에 내가 웃는 낯짝으로 이를 갈았다.
네가 범인이었구나.
그러면서도 티를 내진 않았다.
"사실 저도 궁금했거든요. 우리 순진하신 황녀 저하께서 푹 빠진 왕자님이 과연 누구인지 말이죠."
"흐음......, 글쎄요. 호의를 받는 것은 감사하지만, 저 같은 변방 소국의 왕자는 황녀님의 관심이 과분할 따름입니다."
"어머나, 이리 겸손하실 줄은 몰랐는데."
키득거린 그녀가 장난기 어린 눈동자를 빛냈다.
위험하다는 느낌이 드는 미소를 지닌 여자였다.
수준이야 비교할 바 못 되지만 느낌만으로 치면 회랑에서 뒹굴거리던 싸이코 4인방 여성에 버금가는 위험 세포를 지닌 느낌이었다.
'내가 경험상 하는 말이지만 이런 여자들은 절대적으로 조심해야 돼.'
-어째서?
'내 천적이거든.'
힘도 강한 주제에 말이 안 통하고 막무가내에 상상 못 할 짓을 계속해서 저지르는 민폐 덩어리.
'그런 싸이코와는 엮이지 않는 게 최선이야. 내 장담하는데 이 여자는 그런 케이스다. 절대 엮이면 피곤한 스타일!'
내 말에 페르세르크가 고개를 갸웃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