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6
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
- 8권 10화
* * *
섭선은 무기라고 하기엔 조금 모호한 구석이 있는 도구였다.
애초에 더위를 날리는 용도로 사용하는 생활도구이지 누군가를 해치는 용도가 아니라는 소리였다.
하지만, 그것 또한 쓰기 나름.
단단한 오크목으로 만들어진 나무 뼈대에 몬스터의 가죽을 빳빳하게 이어붙인 섭선은 내구성만 따지면 생각 이상으로 제법인 수준이다.
"부채? 부채로 싸우신단 말입니까?"
의아한 듯 질문을 던져오는 율리스의 질문에 나는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
"호오...... 이건 또 정말 신기한 구경거리로군요."
"세상에...... 저걸로 어떻게 싸운다는 거죠?"
윈리 또한 의문을 쉽게 떨쳐낼 수 없었는지 의아하게 나를 쳐다보았다.
묵직함도 없고, 날카로움도 없다.
그렇다고 검이나 창처럼 긴 것도 아니거니와 구조상 내구성이 좋아봐야 한계가 있는 게 다름 아닌 섭선이었다.
당장 느낌만 본다면 카트린느의 주먹 한 방에 박살 나버릴 것 같은 모습이었지만 정작 그녀 본인은 더욱 짙게 미소만 지어 보였다.
보통 같으면 자신을 무시한다고 화를 내도 이상하지 않을 법한 상황이다.
하지만 그녀는 화를 내기보다는 오히려 호승심을 불태워 올렸다.
촤락!!
이윽고 부채를 펼쳤다가 접은 내가 뒷짐 지듯 한 손을 뒤로 보내고 부채의 뼈대를 내 가슴에 톡톡 두드렸다.
"섭선은 애초에 배우는 게 쉽지 않은 무기죠."
그래서 나도 섭선을 사용하는 전투법을 익힐 때 스승의 방식보다는 내가 스스로 만들어낸 것들이 많았다.
이미 마나를 다룰 줄 알기에 조합할 수 있는 방법.
그것이 현재 내가 가진 부채술이었다.
"그럼. 선공은 이쪽에서 가죠."
얼굴에서 미소를 지운 카트린느 카라벨라가 너클조차 끼지 않은 맨손을 바닥에 짚었다.
그리고는 크라우칭 스타트라도 하는 듯한 자세로 나를 정확히 노려보았다.
동시에 그녀의 엉덩이 위로 달려 삐져나온 꼬리가 마치 내게 혼란을 주듯 살랑살랑 움직였다.
마치 신호라도 재듯.
고요한 침묵 속에서 나를 바라보던 카트린느의 꼬리가 일순간 멈췄다.
그것은 그녀가 일순간 내보인 공격 신호였다.
알아도 피할 수 없는 섬광과도 같은 속력과 파괴력을 지닌 무투가.
단일 무력이 군단에 버금간다는 괴물 같은 수인족 전사가 바로 그녀였다.
비록 주무기 격인 너클 하나 끼지 않은 맨손이지만.
뛰어난 피스트 마스터의 일격은 너클 하나 없다고 가감될 수준이 아니다.
투쾅!!!!
그리고 이어진 광경은 모두를 놀랍게 만들었다.
* * *
"마......말려야 하는 데......."
불안한 얼굴로 중얼거리는 에이리아 알 린디스의 표정은 그야말로 귀신을 만난 것처럼 사색이 되어있었다.
불여우 카트린느 카라벨라가 방금 보인 자세는 꽤 유명했다.
그녀에게 불여우라는 이명을 붙여준 자세였으니 말이다.
언 듯 보기엔 우스꽝스러워 보이지만 압도적인 탄력을 이용한 순간 가속능력으로 파고드는 공격은 절대 우습게 볼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 반응도 못 하고 나가떨어지는 마스터급 기사들도 있을 만큼 강하지 않던가.
애초에 대공 카트린느의 무력은 단일 세력이라 불릴 만큼 강한 것 또한 사실이었다.
"저......저, 죄송하지만 말려야 하지 않을까요?"
불안한 기분을 숨기지 못한 채 에이리아가 불안스레 에이미를 보며 물었다.
그러자 곁에 있던 륀느가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리고, 그 뒤를 따라 율리스가 빙그레 웃으며 말했다.
"데이비님을 걱정하기보단 카트린느 대공을 걱정해야 하지 않을까요."
"네?"
도리어 놀란 에이리아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중얼거렸다.
"와......왕자님이 마법 실력이 뛰어난 건 알고 있어요. 하지만 마법은 상당히 준비시간이 길어야 하지 않나요? 게다가 거리도 좁고, 마법사는 마법사용을 보조해주는 도구가 있어야......."
걱정스레 중얼거리던 그녀는 곧 카트린느의 꼬리가 순간적으로 멈춘 것을 보고 눈을 부릅떴다.
충돌한다!
그녀의 버릇을 일면 본적이 있기에 걱정을 떨쳐내지 못했던 에이리아가 급히 소리치려던 찰나였다.
투쾅!!
거대한 폭음과 함께 무언가가 지면에 처박히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야야......이게 무슨......."
주변에 헛숨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세상에......"
"방금 무슨 일이."
바닥에 처박힌 것은 다름 아닌 카트린느였다.
분명 선공을 때린 건 그녀였다.
언제든 파고들 수 있게 자세를 잡고 있던 것 또한 그녀였다.
반대로 데이비는 그저 부채를 살랑거릴 뿐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어째서 카트린느가 바닥에 처박혀있는 것일까.
그 순간적인 모습을 캐치해 낸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저 움찔거리며 슬쩍 움직인 카트린느가 갑자기 땅에 처박혔다는 사실만이 모두의 시야에 보였을 뿐이었다.
"세상에......방금 무슨 일이......."
매번 보면서도 놀라지만 이번엔 조금 그 수준이 심했다는 듯 율리스가 중얼거렸다.
뒤이어 그와 같이 연무장을 바라보던 윈리도 신기하다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하나도 안 보였어요. 분명 오라버니가 무언가를 하신 것 같은데......."
사정없이 바닥에 내다 꽂힌 것처럼 지면을 일면 부수고 처박힌 그녀는 신음을 흘리며 천천히 일어났다.
그리고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데이비를 바라보았다.
"다시 갈게요."
장난기가 완전히 사라진 그녀가 이번엔 몸을 살짝만 숙였다.
긴장감이 가득한 얼굴로 그녀가 다시 움직인다.
한번 당한 것에 두 번 당하지 않겠다는 진지함이 묻어났다.
투쾅!!!!
다시 이어진 거대한 폭음.
연무장을 바라보던 모든 이들은 또다시 카트린느가 스스로 날아가 바닥에 처박힌 것 같은 모습에 입을 쩍 벌렸다.
"대체 무슨 일이......."
믿을 수 없는 대련의 모습에 모두가 침묵하고 있던 순간.
바닥에 처박혀있던 카트린느가 기습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투쾅!!
그리고.
그녀의 신형은 또다시 인지도 못 한 채 바닥에 처박혀버렸다.
68. 그놈은 그냥 재수가 없었을 뿐이야.
"아야야......"
짧게 신음하며 일어난 카트린느가 표정을 관리하지 못하고 잔뜩 찌푸렸다.
좀 전까지 보이던 호승심 가득하던 표정은 온데간데없고 이제 그녀의 얼굴에 남은 것은 당혹스러움뿐이었다.
"도대체......무슨 일이......."
대련 자체는 그들이 생각했던 것과는 완전히 다르게 흘러갔다.
공격을 한 것은 대공 카트린느 카라벨라였지만, 공격에 당한 것 또한 그녀였다.
카트린느 카라벨라가 누구이던가.
소드마스터와 대마법사의 보유수가 대륙 최강급이라 알려진 동대륙의 가장 강력한 제국이 바로 린디스 제국이었다.
그리고, 그 제국 내에서도 내로라하는 실력가들이 모두 인정하고 있는 단일 세력.
사병이나 휘하 마법사, 혹은 기사단을 거느리지 않았으면서 무력에 한해서 단일 세력 중 일각을 차지할 만큼 그녀의 무력은 강대하기로 유명했다.
격투술을 주로 사용하는 그녀의 주먹은 작정하고 후려치면 두꺼운 성문도 일격에 박살 내버린다고 알려져 있었다.
우스운 점은 그녀의 장점이 파괴력이 아닌 속도에 있다는 점.
그녀의 돌파력은 대인전에 한해서 어지간한 마스터도 반응하기 어려울 만큼 강하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 그녀가.
아무런 공격도 하지 못한 채 가만히 서 있기만 하는 내게 닿지 못하고 있으니 황당하게 보일 수밖에.
다만, 나와 오랜 시간을 같이 해온 이들은 내가 저지른 것들을 직접 봐왔던 이들이었기에 크게 혼란을 느끼거나 하는 모습들은 아니었다.
흡사 그들의 표정은 마치.
[그러면 그렇지.]
라는 표정이었다.
다만 직접 당한 본인은 다른 것에 경악한 듯 보였다.
"방금 그거......, 마나를 사용하지 않았죠."
순간적으로 자신이 무언가를 당했다는 것을 깨달은 그녀가 마치 나를 파악하듯 물어왔다.
"눈썰미가 좋으시네요."
"육체 능력도 아니었어요. 아무리 빨라도 내가 전혀 눈치도 못 챌 정도의 속도가 나올 순 없어."
도핑이라는 존재를 생각한다면 가능하긴 하지만, 굳이 그 사실을 꼬집을 이유는 없어 보였다.
긴장한 얼굴로 그녀가 스산하게 웃어 보였다.
투쾅!!
기습적으로 파고들던 그녀가 또다시 지면에 처박혔다.
충격파의 힘이 보통이 아닌지 단단한 석재 바닥의 일부가 또 박살이 났다.
"아야야......."
인상을 찌푸리며 일어난 그녀는 제 손을 내려다보고는 침묵한 채 일정 거리를 더욱 벌렸다.
뛰어난 실력을 가진 이답게 그녀는 자신을 습격하는 이 정체 모를 공격이 무엇인지 대강 감을 잡은 듯 보였다.
"마나는 분명 아닌데......, 정말 신기하네."
"신기해요? 궁금해요?"
"궁금하지 않다면 거짓말이겠죠."
"계속해서 궁금해하셔도 됩니다."
담담한 내 말에 그녀의 얼굴에서 얼이 빠져나갔다.
펼쳐진 부채를 탁! 소리 나게 접은 내가 부채의 끝을 가볍게 뻗었다.
"계속 받기만 해선 의미가 없으니 이쪽에서 가보겠습니다."
"흐읏?!"
투쾅!!
허공이 튕기는 소리와 함께 눈을 부릅뜬 그녀가 옆으로 몸을 던졌다.
동시에 그녀가 서 있던 장소가 일순간 일렁이며 단단한 석재 바닥이 그대로 박살이 났다.
조금 궤도가 다른 능력인 만큼 직접 부딪혀보고 어디까지 통용이 되는지 확인해볼 필요가 있다.
"느낄 수가 없으니 대처를 할 수가......."
그럴 수밖에.
사령마나건, 신성력이건, 마나였건 이 세계에 속하는 모든 힘은 방출된 순간 감지가 가능하다.
아무리 은밀한 흑마법이라도 시전하는 순간만큼은 아주 미약하더라도 흔적이 남는다는 소리였다.
하지만.
이 세계에 속하지 않는 힘은?
섭선을 통해 구현화한 힘은 그런 부류였다.
내 혼에 저장된 혼을 담금질하며 만들어낸 잔재가 쌓아 올려졌다.
다른 어떤 존재도 사용하지 못하는, 영혼의 색이 짙은 회색을 지니는 인간만이 다룰 수 있는 인간에게만 허락된 능력.
도술.
한껏 진지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던 그녀가 이내 숨을 짧게 들이쉬었다.
"이건 좀 상상 이상인데....... 아무래도 제가 왕자님께 너무 무례했나 봅니다."
"주변 신경 쓰지 말고 최선을 다해서 들어와 주세요."
동시에 그녀의 전신으로 붉은 마나가 폭포처럼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당장 대련이기에 힘을 아낀다고 숨기고 있던 모양인데, 상대가 생각했던 것을 아득히 넘어서는 모습에 저도 모르게 리미트를 풀어버린 듯한 모양새였다.
"자, 잠깐! 카트린느!!"
그 모습을 보던 이들 중 가장 이변을 빨리 눈치챈 건 다름 아닌 린디스의 막내 황녀, 에이리아 알 린디스였다.
"그만둬요! 카트린느! 대련에 사용하긴 너무 과하시잖아요!"
다급한 얼굴로 소리치는 그녀였지만 그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오지 않는지 카트린느는 꼬리를 가지런히 늘어뜨린 채 눈동자를 붉게 번뜩였다.
"마...... 말려야!"
다급하게 벌떡 일어난 에이리아가 평소의 소심하고 조심스러운 모습도 잊은 채 연무장으로 뛰어들려 했다.
파악!!
하지만 그녀가 움직이기도 전에 나는 접어 둔 부채를 뻗어 그녀를 제지했다.
들어오지 마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