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2
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
- 8권 16화
70. 의료소의 기적을 불러오는 왕자(王子)와 피를 부르는 유적의 사자(死者).
언데드에겐 협상이 통하지 않는다.
군단에 속한 통제되지 못한 하위 사자(死者)라는 존재가 가진 것은 상위 개체를 통해 내려오는 우선적인 명령권, 그리고. 지독한 원념이 전부라 할 수 있다.
결국 협상이 통하지 않는 적과 남은 것은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 전부이리라.
시시각각 산성을 위협해 팔란제국의 수도로 향하려는 언데드들의 진군은 멈추지 않을 것이고.
결국 그들이 모조리 죽거나, 그들을 통솔하여 끌어모으고 그들의 원념을 각성시킨 존재가 사라질 때까지 싸움은 계속되리라.
그런 만큼 회의 내용이 결정되자마자 각국의 연합군은 곧장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 산성으로 향하는 출정 길에 올랐다.
각자 서로 간의 자존심 싸움이라도 하듯 병사들의 제식은 칼같이 날카로웠고 서로를 바라보는 눈매는 당장에라도 찢어 죽일 적을 눈앞에 둔 것처럼 흉흉했다.
그러면서도 절제가 보인다.
퍽 웃긴 일이다.
싸워야 할 적은 다른 곳에 있는데 이곳에 모인 이들끼리 기 싸움이라니.
그들로선 당연한 일일 것이다.
이만한 전력이 모였으니 적은 언제고 토벌될 것이고, 그에 따른 사후 보상문제는 각 국가에게 민감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그 적이 단순히 토벌한다고 토벌이 될 괴물이 아니라는 게 문제겠지.
회의 도중에 느껴졌던 섬뜩하고 싸늘한 공기.
그건 분명 상위 네크로맨서가 내뿜는 능력인 데스 피어.
데스 피어라는 힘은 다름 아닌 네크로맨서가 언데드를 부릴 때 사용하는 페로몬과 같다.
그리고, 그 능력의 영향에 따라서 그 범위와 농도가 짙어지고 커진다는 소리였다.
문제는 이곳에서 한참 떨어진 곳에서 벌어지는 싸움에서조차 느껴질 정도로 짙은 농도의 데스 피어라면 내가 아는 한에선 한가지 경지밖에 없다.
그리고, 그 경지가 확실하다면.
놈이 제대로 움직이는 순간 그들은 토벌을 하는 게 아니라 토벌을 당하리라.
"음......."
외성의 첨탑에 앉아 위풍당당하게 요새의 문을 빠져나가는 병사들을 내려다보던 나는 문득 느껴지는 시선에 느긋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고풍스러운 전투용 법의를 입은 채 말에 올라 나를 바라보고 있는 한 여성이 보였다.
나잇대는 대략 20대 초반 정도.
현재 성국이 보유하고 있는 성흔을 받을 수 있는 인물이다.
그녀는 멀찍이 떨어져 어지간해선 보이지 않을 거리에 있음에도 나를 말없이 지켜보았다.
"질투심은 사람을 추하게 만든다더니."
그녀가 내게 가진 감정은 멍청이가 아닌 이상 알 수 있었다.
신의 사랑을 받았다는 것에 대한 질투심.
다만 그녀가 내비치는 감정은 거기서 끝이었다.
그래도 자신에 대한 컨트롤을 못할 멍청한 인물은 아니었다.
이윽고 그녀는 자신의 얼굴을 가리는 베일을 가볍게 내린 뒤 내게서 관심을 끊고 말을 타고 위풍당당하게 성문을 빠져나갔다.
그녀를 포함한 성기사단을 시작으로 수많은 병사와 기사들이 움직이는 꼴을 보던 나는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그대치고는 너무 짧게 경고하고 끝난 것 같은데.
성 밖을 바라보던 내게 페르세르크의 질문이 왔다.
"아, 우선순위를 조금 바꿔야 할 것 같아서."
-우선순위?
그녀의 말에 나는 말없이 상태창을 활성화 시켰다.
-질병으로 고통받는 자의 구원. 0/20000
거래가, 도착했다.
문제는.......
-2......2만명? 수가 너무 많은 것 같은데.......
'쉽진 않겠다만. 조건이 조금 허술해. 충분히 가능하다.'
주신 프리아 여신은 이번 토벌, 아니 전쟁의 한정이 아닌, 질병으로 고통받는 자라는 두루뭉술한 조건을 내걸었다.
칼 같은 조건을 내건다고 해서 내가 마냥 따라주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기 때문일까.
모로 가든 선택을 존중하겠다는 듯한 거래였다.
* * *
고대의 괴물이 내뿜는 죽음의 기운은 언데드의 시독 이외에도 수많은 질병의 근원을 변이시키고 강화시킨다고 한다.
"으으......으으."
"아파......아파."
그 탓일까.
사령부에 후송되어 온 병사들 중 멀쩡히 간이침대에 누워 신음하고 있는 이들은 시독으로 인한 병에 걸린 이들보다 통상적인 질병에 걸린 이들이 대부분이었다.
"거기! 페인킬러 더 가져와!!"
"여기 수술이 필요해! 수술 도구의 소독은 아직 멀었나?! 빨리빨리 움직이지 못해?!"
"눈을 떠! 젠장! 제발 눈을 뜨라고!"
넓게 퍼진 의료시설은 그야말로 다른 의미의 지옥이었다.
생전 보도 못 한 끔찍한 악취가 사방을 찔렀고 각기 증상을 호소하는 병사들이 가득해 보였다.
병사와 병에 노출된 제국 시민들의 수가 수백은 넘어 보였다.
'그래, 이곳은 창칼이 난무하는 전장과는 또 다른 전장이다.
"어이! 멍때리지 말고 빨리 안 움직여?! 죽고 싶어?!"
"죄......죄송합니다!"
격한 언사가 난무하는 이 병실은 누군가가 소리를 질러도 금방 묻힐 만큼 수많은 신음소리로 가득했다.
-병동은 언제 봐도 참혹하기 그지없어.
"어떤 의미로는 이곳도 전쟁터니까."
사람을 죽이는 전쟁이 아닌.
죽어가는 이들을 얼마나 빠른 시간 안에 많이 살리는가.
하는 의사들의 전쟁이다.
대충 어림잡아 본 환자의 수는 이백여 명.
하지만 이 와중에도 질병에 견디지 못하고 급사하여 들것에 실려 나가는 이들이 가득해 보였다.
-저 복장은 분명...... 중앙 질병 관리단이군.
'그래. 처치도 제법인 수준이고. 확실히 대륙급 의료집단다운데......'
-솔직히 믿음이 잘 안 가는 게야.
쿡쿡 웃으며 그녀가 현실을 집어냈다.
이래서 신용이 중요하다.
과거 링튼 백작의 그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한번 본 바 있는 나와 페르세르크였다.
백날 잘해도 한번 삐끗하면 타격이 크다고 했던가.
고르네오 남작 같은 인물도 있었지만 링튼이 저지른 짓이 워낙에 컸던 탓에 그의 헌신도 신용에 큰 효용성을 보여주진 못했다.
그 탓일까.
사실 질병 관리단이라는 집단에 대한 믿음이 상당히 약한 것도 사실이었다.
"이보시오! 뉘신데 여기 들어와 계시는 겁니까! 다들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데 길 틀어막지 말고 비켜 주십시오!"
겉보기에도 적당히 귀티 나는 복장에 고생 한 번 안 한 것 같은 말끔한 얼굴을 보면 상대의 직위를 유추할 수 있다.
실제로 내가 수련을 거칠게 해온 건 회랑이었고.
당시엔 영혼의 상태였으니 실제 육체에 흉터가 남는다거나 하는 일은 전혀 없다는 소리였다.
언 듯 보기에도 귀족, 혹은 왕족으로 보이는 나를 향해 저렇게 말할 정도라면 아직 질병 관리단의 위신이 죽진 않았기 때문이리라.
그것도 아니라면.
정말 다급한 이 상황을 잘 인지하고 내가 누가 되었건 환자가 우선이라고 생각하는 진짜 의원이거나.
방금 내게 소리치고는 급히 뛰어가는 사내는 후자의 경우로 보였다.
의원으로서 가져야 할 최소한의 마음가짐은 훌륭하다.
링튼의 경우가 특이하게 보일 정도로 이들은 환자를 살리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다만.
"제일 중요한 메뉴얼이 부족해. 이런 식이면 열에 일곱은 죽어 나간다."
치료의 실패, 병의 악화.
방법이야 가지가지이지만, 가장 심각한 것은 이곳에 온 환자 중 세균에 감염되거나 질병에 걸린 이들은 모두가 하나같이 죽음의 기운에 의해 변질된 병을 앓고 있다는 점이다.
기존의 병과 비슷하면서 미묘하게 다른 병에 원래의 치료 방법을 도입했다간 까딱 사망하기 십상이다.
질병 관리단은 거대한 단체였다.
그런 만큼 경험 많은 의료진들을 다수 포함하고 있기도 했다.
문제는 환자 하나를 치료하는 데에 드는 시간과 계속해서 후송되어오는 병사의 수가 끝도 없이 증가하고 있다는 점.
아무리 경험이 많은 의료진이라도 동시에 수십 명을 진료할 순 없는 법이다.
그리고.
그런 아주 작은 틈이 벌어지며 서서히 상황은 점차 악화되고 있었다.
"젠장!! 눈을 뜨라고!"
쿵!! 쿵!!
심장이 정지했는지 차갑게 굳어버린 사내의 가슴을 내리치며 억지로 심폐 소생을 개시해보지만 이미 죽어버린 이들은 싸늘하게 움직이지 않을 뿐이었다.
"안돼! 안돼 죽으면 안 된다고 이 자식아!"
전우의 죽음에 절규하는 병사.
그리고 간단한 병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환자를 살리지 못했다는 자괴감에 괴로워하는 의원들까지.
-데이비. 마냥 구경할 때가 아닌 것 같아.
페르세르크의 말에 나는 신의 히포크리아에게 의술을 배울 때 했던 맹세 중 하나를 곱씹었다.
누구도 내 앞에서 함부로 죽으려 들지 마라. 죽더라도 필사적으로 부상이나 질병에 버텨내라.
싸우다 죽어라.
모두 되살려버리면 그만이니.
의원과 환자. 그 두 가지 존재의 사이에서 나올 상관관계는 생각보다 뻔했다.
"아...... 안돼! 이렇게 죽으면 안 돼! 조금만 더 버티라고! 살 수 있단 말이다!"
벌써 저렇게 죽음을 선고받은 병사 서너 명이 들것에 실려 나가고 있었다.
"비켜."
"어...... 어어?!"
복잡한 생각을 할 것도 없이 머릿속을 빠르게 정리한 나는 숨을 쉬지 않고 굳어버린 환자를 향해 절규를 터뜨리는 의원 하나를 밀어냈다.
심정지.
부상에 변질된 균이 스며들면서 손 쓸 새도 없이 과다출혈과 몸의 밸런스를 무너뜨리는 병을 견디지 못한 것이리라.
본래 이렇게까지 빠르게 사망할 리는 없지만.
역시 죽음의 기운에 의해 변질된 질병은 내 생각과 똑같은 대로 흘러갔다.
-질병을 변질시키는 사기는 정말 저질적이군.
의회원 수준은 아니지만, 평상의 의원 계급에 있는 질병 관리단 소속의 사내였다.
"당신 뭐야!"
갑작스런 내 행동에 좌절하던 사내가 쌍심지를 켜고 소리를 질러댔다.
당장 멱살을 틀어쥐고 소리를 지르려는 그를 무시한 채 손을 뻗어 손가락 끝을 이미 죽어버린 환자의 몸에다 올린 나는 망설일 것 없이 마나를 끌어 올린 뒤 아주 간단한 마법을 발현했다.
[쇼크]
콰지직!!!
순간적으로 새파란 빛이 주변을 한번 휘감았다.
덜컹!!
죽어있던 사내의 몸이 마치 공처럼 튕겨 나가며 격동했다.
하지만 나는 멈추지 않고 다시 쇼크 마법을 발현했다.
[쇼크]
콰직!!
의술의 신 히포크리아는 마법을 사용하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마법을 가지고 있다.
그녀의 의술은 뛰어나지만, 그녀와 나의 상황이 다르듯.
치료에 동원하는 수단을 따를 이유는 없었다.
콰직!!
또 한차례 섬광이 주변에 일자 멍하니 상황을 지켜보던 이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처음엔 나를 말리려던 질병 관리단의 의원들이었지만 몇 차례 계속되는 섬광에 이제는 다른 곳의 의원들이나 정신을 차리고 있는 환자들도 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이래도 안 살아나?
크게 반응이 없는 사내의 목울대에 손을 올린 뒤 나는 방법을 바꾸었다.
분명한 말이지만, 나는 의원이지만 내 스승과 다르다.
[7위계 성마법]
[생츄어리]
투웅!!
거대한 성역이 선포되기 시작하며 의료소 내부에 감돌던 죽음의 기운이 일순간 찢겨 나갔다.
압도적인 신성력의 양이지만 그걸 알아보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데이비!! 움직였어! 심장이 움직였음이야!
권능을 발현했는지 눈을 반짝이던 페르세르크의 외침에 나는 망설임 없이 인벤토리를 열고 작은 가죽 홀더를 뽑아냈다.
회랑에서 돌아온 이후로 정말 오랜만에 꺼내지 않는가.
사람의 팔뚝만 한 긴 장침을 꺼내 든 나는 주변에서 말릴 것도 없이 환자의 몸 곳곳에 침들을 꽂아넣기 시작했다.
"이봐!! 뭐 하는 거야!"
그제야 정신을 차린 의원이 격하게 달려들어 내 멱살을 틀어쥐었지만, 내 시선은 오로지 환자에게 꽂혀있었다.
'3......2......1......'
그리고는 짧게 시간을 센 후 손을 뻗어 환자의 복부를 압박하며 말했다.
"얼음 가져와. 최대한 많이. 그리고 그쪽 두 사람은 끓는 물에 천을 최대한 많이 삶아오도록 하고. 이쪽은 내가 말하는 증상을 보이는 환자에게만 페인킬러를 놔주도록 해."
빠른 지시에 얼이 빠져 멍하니 나를 보던 의원들을 보며 내 눈이 찌푸려졌다.
그래, 갑자기 대뜸 나타나서 지시하면 믿기 힘들겠지.
그렇다면 계급에 의한 갑질로 밀고 가는 수밖에.
팍!
품 안에서 꺼낸 미스릴 패를 근처에 있는 한 사내에게 던진 내가 인상을 험악하게 일그러뜨렸다.
"뭣들 하나, 빨리 안 움직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