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9
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
- 8권 23화
자신이 이룩해보지 못했기에.
그것이 정확히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기에.
모두의 시선에 닿은 그 빛의 기둥은 단순히 찬란한 빛과 같이 보였다.
쿠웅!! 쿵!!
거대한 폭음이 연달아 떨어진다.
공격계통 성마법인 신의 지팡이는 압도적인 신성력을 압축하고 또 압축한 한방을 낙하시키는 마법이다.
자체적으론 물리력을 거의 가지지 않는 마법이지만.
열화판이라 하여도 엄연히 8위계에 속하는 공격용 성마법이다.
현재 성국에서 7위계 이상의 성마법을 구현할 수 있는 자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가장 가능성이 높은 존재는 다름 아닌 선대교황으로, 현재엔 차기 교황에게 자리를 넘겨주고 은거하고 있다는 말이 나돌고 있다.
그만큼 신관이 많은 성국에서도 7위계 이상의 성마법을 사용하는 이는 적은 편이다.
그런 마당에
7위계도 아니고 8위계급 신성 마법이 펼쳐졌으니 현실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덩치가 크고 작고를 떠나서.
전장을 마구잡이로 누비고 못 누비고를 떠나서 한결같이 빛에 노출된 언데드들이 백색의 화염에 불타올라 사라지는 꼴은 퍽 장관이었다.
그 탓일까.
순식간에 정리가 되는 모습에 모든 이들의 시선은 내게서 떨어질 줄을 몰랐다.
이것은, 그래. 시선 강탈 정도로 해두자.
난장판이 되었던 전쟁터 한복판에 압도적인 존재감을 뿌렸으니 되었다.
나는 한차례 정리가 되는 언데드 군단을 보며 미련 없이 느릿느릿 움직이던 신성력을 모조리 거두어버렸다.
한번 뒤집힌 전황은 내가 더 이상 손을 쓰지 않아도 연합 측의 방어 성공으로 흘러갈 것이다.
서문은 다른 이도 아닌 성녀후보 앨리스가 직접 방어를 하던 곳으로 이렇게 내가 막아줄 만큼 그녀와 의리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녀와는 사이가 그리 좋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기에 내가 나서서 이렇게 돕는 것이기도 했다.
같은 신성력을 사용해서, 또 하필 가장 큰 대립각을 세웠던 그녀를 내가 도움으로써.
그녀가 가진 입장은 현재 지금 이 순간 완전히 아작이 났다.
척 보면 척이라고 했던가.
아무것도 노력한 것 없이 성흔만 날름 하사받은 내가 질투 나서 견딜 수 없던 그녀였을 것이다.
태어날 때부터 성녀가 되기 위해서 살아온 그녀가 했을 노력은 사실상 엄청났을 것이다.
신학을 공부하고 신성력을 다루는 힘을 기르기 위해 머리가 띵할 정도로 노력했을 것이다.
게다가 리나 성녀후보와 다르게 상당히 신성력의 성장이 빨랐을 테니 주변의 기대치는 높아지고 본인도 그 기대치를 높이기 위해 더욱 노력했을 것이다.
그렇게 노력했는데, 성흔을 받은 게 그녀가 아니라 생판 듣도 보도 못한 나였으니.
어느 누가 질투를 하지 않을까.
세상에는 성녀나 성자가 단 한 명 밖에 나오지 않는다고 알려져 있으니 말이다.
인생의 목표를 송두리째 빼앗긴 그녀의 절망을 이해 못 할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귀여운 질투 정도면 그냥 넘겨줄 수 있다만.
성녀후보 앨리스는 사태의 심각성을 조금 잘못 받아들인 경향이 없잖아 있었다.
"와아아아아아아!!"
멀어진 서문 쪽에서 병사들의 환호 소리가 울려 퍼진다.
그 환호 끝에 누구를 향한 칭송이 울려 퍼질지는 사실 생각해볼 것도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된 이상 질투에 눈이 멀어버린 그녀는 더욱더 그 감정을 불태울 것이다.
"지금 자기 상황이 시험이라는 걸 전혀 모르네. 멍청이가."
-애초에 앨리스라는 그 여자는 성녀가 되는 건 불가능했던 게 아니야?
"사람은 태어날 때마다 저마다 다른 양의 신성력을 가지고 태어나."
내성의 의료소 쪽으로 돌아오자 들것에 실려 이동하는 환자들을 보며 말없이 양손을 모아 기도를 올리고 있는 갈색빛 머리카락의 여성이 보였다.
책에서나 볼법한 성녀와 같은 아름다움은 가지지 못했다.
머리카락도 흔한 갈색이고 눈동자 또한 흔한 갈색.
딱히 군중들 사이에 있어도 시선을 끌 만한 외향은 아니었지만 적어도 그녀의 심성만큼은 이곳에 있는 그 누구보다도 밝게 빛나고 있었다.
"그리고 현재 성국에서 성녀, 혹은 성자후보로 꼽혀 오는 녀석들은 대부분 날 때부터 상상 이상의 신성력을 가지고 있고."
문제는 그 방대한 양을 가지고 있되 신이 내린 시험을 어떻게 통과해서 애정을 받아내느냐가 다르다.
[잘 들어 데이비, 한 번만 말할 테니까 귓구녕에 잘 쑤셔 박으라고, 신이라는 존재는 없어. 실존하지 않아.]
초대 성녀, 다프네가 했던 말이다.
배덕한 성녀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설마 자신이 모시는 신을 대놓고 부정할 줄은 몰랐기에 상당히 놀라기도 했었다.
[다만 단일 개체의 신이 아닌 신의 의지는 존재해. 예를 들어 이 신성력들처럼. 데이비, 신성력이 어디서 왔을....... 이 썩을 새끼가 집중 안 해?!]
데스로드 [로 아이아스]와 궁신 [아폴론]의 밀회 때문에 정신줄을 놓고 있다가 다프네에게 한 대 얻어맞은 건 굳이 숨길 것도 없는 사실이었다.
"시험을 통과하고 신의 애정을 받아서 성흔을 내려받는 건 애초에 규칙과 같아. 리나 후보나 앨리스 두 사람 다 일단 첫 번째 시험은 통과했지."
방대한 신성력을 타고 태어날 것.
다만.
"두 번째에서 극렬하게 갈렸잖아."
-신성력을 다루는 재능인가?
"틀렸어. 마음가짐."
신성력은 게을러터진 힘이다.
그리고, 그 힘은 소유자가 선할수록 더욱 게을러진다.
당연 신성력이 게을러지면 반대로 성장 속도가 빨라질 수가 없다.
어디서 비슷한 상황이 떠오르는 건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웃긴 일이 아닌가.
-그러고 보니 저 두 성녀후보 중 앨리스라는 그 성녀후보에 비해 리나라는 저 아이는 성장이 더디다고.......
"그냥 두면 이번대엔 성녀가 하나 정돈 나올 것 같은데."
마침 리나는 성녀후보급의 신성력을 가지고 태어났으면서도 성장이 더디다고 했던 것 같은데.
-그런 점에서 보면 그대는 완전히 이레귤러이군.
내가 나타나지 않았다면 한 세대의 한 명이라는 기록은 변치 않았을 것이다.
다만 이제는 변했으니 모를 일이다.
-그렇다면 결과적으로 앨리스라는 그 여자는 애초에 불가능했다는 거 아닌가? 신성력이 활발했다면 그만큼 재능이 떨어진다는 소리니까.
"사람의 근본을 보고 싶으면 권력을 쥐여주거나 힘은 상황에 내던져 보라고 했지?"
-설마.......
신은 각기 두 성녀후보에게 다른 시험 과제를 던져주었다.
한 명에겐 힘과 권력을 쥐여주었고.
나머지 한 명은 힘든 상황에 내던졌다.
-참혹한 신이군.
"그러게 말이다."
둘 중 하나는 힘든 상황 속에서도 빛을 냈고 한 명은 뭐든 할 수 있는 권력의 늪에 빠져 결국 허우적거렸다.
"스스로 느끼고 회개하기 전엔 절대 불가능해."
부족한 재능은 어차피 성흔이 채운다.
애초에 성녀후보에게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있는 신성력이나 신성력의 보유량은 의미가 없었다.
"앗! 데이비 왕자니임!"
말끝을 흐리며 나를 발견하고 뛰어오는 소녀를 보며 내가 빙그레 웃어 보였다.
"별문제 없었습니까?"
"방금 보셨어요?! 엄청난 빛의 기둥이 떨어졌는데에!"
"아 그거요."
"네! 신성력이 소름 돋을 정도로 뭉쳐져 있었어요! 신께서 강림하신 걸까요!?"
시선을 피하자 그녀가 집요하게 내 시선을 따라 눈동자를 굴렸다.
"설마....... 데이비 왕자님이 하신 건가요?"
"그냥 두면 뚫릴 것 같아서요."
쓰게 웃으며 답해주자 그녀가 기분이 좋은지 손뼉을 @짤박짤박 쳤다.
"세상에....... 혹시 데이비 왕자님이 프리아 여신님이세요오?"
엉뚱한 질문에 그녀의 머리를 콱 붙잡은 내가 빙그레 웃었다.
"리나 성녀후보님이 보시기에 제가 여자처럼 보입니까?"
"흐음....... 날카로운 눈매만 빼면......."
끝까지 엉뚱함을 보이는 그녀의 대답에 나는 픽 웃음이 나와버렸다.
* * *
수성전은 결국 연합의 일차적인 승리로 끝이 났다.
겁을 잃고 돌진을 감행하는 언데드라 해도 그만한 폭격을 맞은 이상 계속해서 싸워서 득이 될 게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거인족 리치 클레르 오르판이 언데드들을 물려버린 것이다.
덕분에 한숨 돌릴 수 있게 되자 이제는 다른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바로 자격의 문제였다.
성녀후보 앨리스는 전쟁의 효율을 찾는다면서 수많은 이들을 희생시켰다.
물론 적이 적인 만큼 희생이 없을 순 없다.
하지만, 그녀가 필요 없다며 배척한 내가 보여준 현실이 워낙에 비현실적이라 그런지 처음부터 그냥 내가 나섰으면 이 정도의 피해도 없이 끝낼 수 있었던 게 아닌가 하는 말이 나돌기 시작했다.
소문의 근원?
"고생했다. 아이나."
"잭이라 불러주십시오."
담담하게 말하는 잭, 아니 아이나 헬리샤나가 불만스레 중얼거렸다.
물밑 공작 덕분에 앨리스의 입지는 시시각각 좁혀지고 사람 목숨을 개처럼 아는 그녀의 직위를 당장 박탈하라는 외침까지 나오기 시작했다.
"나는 더 이상 이대로 싸우지 않겠소. 두 사람의 자존심 싸움에 끼어들 이유가 없어서 참았지만, 성녀후보의 고집 때문에 내 병사를 희생시킬 생각은 없소이다."
중규모 왕국의 장군 한 명이 불쾌함을 드러냈다.
그뿐만 아니었다.
"거 잘됐네, 린디스 제국도 마찬가지."
거의 완벽하다 싶을 정도의 전술을 보여 한쪽을 완벽하게 방어해낸 카트린느 대공 또한 그런 의견을 내놓았다.
지금까지 침묵하던 그녀치고는 꽤 저돌적인 의견 제시였다.
기본적으로 여러 인원들에게 상당히 골을 만들어놓았던 앨리스가 실각하는 건 그야말로 한순간이었다.
그저 멍한 얼굴로 앉아 침묵하고 있던 그녀는 거센 연합군 수뇌의 반발에 부딪혀 직위 박탈 상황에서도 아무런 반박을 하지 않았다.
유일하게 그녀를 지켜줄 우군이라고는 팔란제국의 황자 살리반이었지만.
그 또한 무리한 앨리스의 공격 명령에 단단히 화가 났는지 이번만큼은 그녀를 돕지 않았다.
"앨리스 성녀후보. 당신의 자존심 때문에 시작된 어처구니없는 싸움입니다. 당신이 책임지고 해결하십시오. 당신의 고집으로 인해 제 동생의 병사, 연합의 병사, 죄 없는 수많은 이들이 죽었습니다. 저는 이제 당신을 비호하지 않을 겁니다."
살리반 황자가 쐐기를 박아넣듯 말하자 앨리스는 그저 공허한 눈동자로 중얼거렸다.
"8위계......."
아무래도 그녀는 내가 쓴 신성 마법이 무엇인지를 깨달은 모양이었다.
"빛은......."
빛을 잃은 눈동자로 중얼거린 그녀가 시선을 돌렸다.
분명 나를 보고 있는데 그녀의 눈동자엔 내가 담겨있지 않았다.
"날 버렸어."
그 말을 끝으로 천천히 일어난 그녀가 내게 다가왔다.
"데이......."
"사과하려거든 집어치우세요."
"......"
"엎드려 절 받기를 하려고 온 게 아닙니다."
내 말에 그녀가 침묵했다.
"성국에서 재밌는 소식이 간 것 같은데, 돌아가 봐야 하지 않겠습니까?"
내 말에 평소라면 상당히 놀랐어야 할 그녀였지만 그저 담담하게 고개만 끄덕여 보였다.
-상태가 심각해 보이는데?
'그것까지는 내 알 바가 아니지.'
그 말대로였다.
정치에 몸을 담고 스스로를 수렁으로 던진 그녀다.
나를 건드린 것도 그녀이니 내가 그녀를 동정할 이유는 하등 없다.
성국도 사람 사는 세상이니 아마 이번 일을 계기로 그녀를 물고 뜯어 끌어내리려는 이들로 가득해질 것이다.
"조건이 있습니다."
이에 나는 앨리스에게서 관심을 끊고 두 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수용하겠습니다. 말씀하십시오."
"첫째......."
두 가지 의견을 내세운 나는 곧 어렵지 않게 그것을 수용하는 답변을 얻었다.
그 시각.
성국의 소환요청에 맞춰 돌아갈 준비를 하고 있던 성녀후보 앨리스는 자신을 호위하던 성기사들의 시신을 말없이 내려다보았다.
공허한 눈동자에 담긴 감정은 놀라움도, 기쁨도 아닌 단순한 허무였다.
이윽고 그녀의 시선이 천막 안의 성기사들을 죽여버린 검은 로브의 거인에게 향했다.
"타락하기 시작한 영혼. 너무도 순수하게 타락했기에 그 힘은 나를 아득히 능가한다. 내 주군께서 남기신 핵의 주인으로 적합하다."
"당신은......."
분명 척결해야 할 적이 사령부 안까지 들어와 있다는 점에 놀라워해야 할 텐데.
앨리스의 목소리는 그저 공허했다.
"날 따라오라. 신의 사랑 따위는 받지 않아도 신의 반열에 들게 해주마. 나는 그 증오스러운 인간을 죽일 수 있고. 너는 그토록 갈망하던 반신의 반열에 오를 수 있다."
그의 말에 앨리스가 고개를 숙여 보였다.
그렇게 필사적으로 부르짖었건만.
결국, 신은 자신의 기도에 어떤 화답도 해주지 않았다.
단순히 악마 같은 소년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게 했을 뿐.
왜 이런 일을 당하는 건지.
문득 그런 생각이 든 그녀의 입가에 조소가 어렸다.
"빛을 믿었고. 그에 맞춰 살아왔어."
"......"
"하지만 이제, 빛은."
담담하게 말하는 그녀의 머리 위로 앙상히 마른 로브의 소매가 올려졌다.
흘러내린 소매의 끝으로 튀어나온 것은 뼈밖에 남지 않은 손이었다.
"날 배신했다."
우웅!!
검은 기류와 함께 일순간 그녀의 눈동자 색이 새카맣게 변하기 시작했다.
"너는 이제 곧 내 염원이 될 것이다. 나는 그 악마를 이길 수 없으나. 너의 존재로 나의 주군이 부활하리라. 그 존재를 기억하라. 그 이름은 사령왕 데이안. 나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오래 살아온 분이며, 초대 성녀 다프네를 죽음으로 몰고 간 분이니라."
죽어도 스스로를 칭하는 단어는 버리지 않는 리치. 시련을 이기지 못하고 무너져 내려버린 성녀후보.
그 둘의 신형이 사령부에서 사라진 건 한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