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5
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
- 9권 4화
74. 돌아서서 후회하지 않으리다.
마지막 남은 목숨을 허무하게 날릴 것인가.
아니면 지금까지 숨겨둔 무언가를 꺼내 들 것인가.
놈은 제 목숨을 깎는 한이 있어도 내가 일정 장소에는 절대 가지 못하게 하고 있다는 사실은 분명했다.
이유?
지금까지 그가 부활한 장소 어디에서도 그가 데려간 성녀후보 앨리스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으니 말이다.
"어디 보자......."
말끝을 흐리며 마법을 다시 발현시킨 나는 곧 출력되기 시작하는 놈의 위치를 따라 다시 워프 마법을 발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곧 변하는 좌표의 이상에 미련 없이 손을 흩어 마법을 정지시켜버렸다.
-데이비?
"끊어졌네. 직접 끊은 게 아니야. 마나가 너무 불규칙해."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한번 보면 답이 나오리라.
나는 혼란스러운 흔적을 적당히 조합해 주변을 뒤져 보고는 근처 안전한 장소의 좌표를 특정해냈다.
-이게 가능해?
"가능해."
기가 막힌다는 표정을 무시한 채 그대로 공간을 뛰어넘은 나는 곧 완전히 죽어버린 대숲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여긴.......
"놈이 봉인되어있던 장소."
지금껏 놈의 발언이나 행동거지를 보면 이곳은 일대를 포함하여 거대한 무언가가 존재했던 장소라는 건 분명했다.
그리고 그 주체는 다름 아닌 놈이 불멸자라 부르며 절대적인 존재로 신앙을 보내고 있는 사령왕 데이안을 말하는 것일 터다.
"느낌이 확 달라지네."
전신에 돋는 소름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제대로 깨어나면 난리 나겠다."
이건 좀 상상 이상의 존재가 아닌가.
놀라울 정도로 짙은 죽음의 기운은 확실히 클레르 오르판과는 급이 다른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들어가지 마라. 이건 좀 위험해 보이는데.
"빙빙 돌아서 결국 도망친 곳이 여긴가?"
마지막 남은 목숨인 만큼 놈도 이제는 이판사판이라는 식으로 몰아붙이고 있다는 걸 분명 느낄 수 있었다.
여기서 놈의 의도대로 이곳에 단신으로 들어가는 것이야 어렵지 않다만.
과연 이 안에 무엇이 들어있기에 이렇게까지 피부가 따끔거리는 것인지 새삼 의문이 들었다.
"가자."
말없이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숙인 나는 마치 전신을 제어하듯 온몸의 기척을 죽이기 시작했다.
이곳에 퍼져있는 언데드의 수가 바깥에서 날뛰고 있는 수와 비슷하거나 그 이상이라면 목적지까지 도달하는 데에 시간이 상당히 소모되리라.
그렇다면.
"잠입 위장 액션이지."
-......다 죽이고 본 사람이 없다고 암살이라 우기려고?
"틀린 말도 아니잖아. 그리고, 이번엔 진짜 잠입할 거다."
심장 소리부터 체향, 발소리.
모든 부분의 소리와 기척을 죽인 나는 존재감을 드러내던 두 쌍둥이검을 아공간에 밀어 넣은 뒤 빈손으로 천천히 숲 안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 * *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잠입 자체는 어렵지 않았다.
나를 신경 쓸 여력이 없는 건지, 아니면 이번에야말로 자신이 있다는 것인지.
일정한 규칙성만 가진 채 배회하는 언데드들을 무시하고 지나친 내가 도착한 곳은 지하로 이어진 거대한 유적이었다.
거인족 리치인 클레르 오르판이 봉인되어있다가 깨어난 유적.
이번 일의 시초가 되는 진원지라 할 수 있었다.
끼기긱...... 끼긱!
유적의 내부로 걸어 들어갈수록 더욱더 많고 강력한 언데드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엄연히 클레르 오르판이 다룰 수 있는 역량 이상급의 언데드들도 보였다.
무엇보다 거슬리는 것은.
"......"
마나의 흐름이 엉망이라는 점이었다.
마법의 발현은 기본적으로 체내의 마나를 운용, 일대의 마나를 제어해 한가지의 현상을 만들어내는 방식을 가진다.
그런데 마나의 흐름이 이처럼 엉망진창이라면?
당연 마법이 똑바로 발현될 리 없다.
마법이 사용되지 않는 것은 양반이오, 자칫하면 충돌이 생긴 마나가 거대한 폭발을 일으켜도 할 말이 없을 만큼 환경 조건이 최악 그 자체였다.
쿠웅!!
이윽고 거대한 공동의 입구에 도달한 나는 숨기고 있던 기척을 모조리 풀어내고는 홍단이를 들어 단단한 석벽을 베어버렸다.
콰아앙!!
묵직한 충격음과 함께 단단하게 닫혀있던 석재문이 무너져 내리자 그 안의 기괴한 모습이 보이기 시작했다.
"비.......빌어먹을 놈! 결국, 여기까지 쫓아왔구나!"
가장 먼저 보인 것은 거대한 홀의 중앙에서 숨을 헐떡이며 몸을 재구성하고 있는 거인족 리치.
클레르 오르판의 모습이었다.
"이 앞으로는 더는 못 간다."
"나를 막을 생각이었으면 마지막까지 여길 들키진 말았어야지."
물론, 그가 숨긴다고 한들 내가 이곳까지 밀고 들어온다는 사실은 변함없지만 말이다.
내 도발에 아무 말 없이 안광을 빛내던 그가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 행동은.
죽음을 앞둔 이라고 보기엔 어폐가 있을 만큼 저돌적이었다.
여분의 스태프를 휘두르며 죽음의 기운을 흩뿌리는 놈은 남은 생명에 담긴 모든 것을 쥐어짜 내겠다는 의지가 엿보이기라도 하듯 강렬한 공격을 쉬지 않고 내보냈다.
피할 방법도, 파훼할 방법도 많다.
하지만.
내가 가진 출력의 한계로는 모두 막아내기 어려웠다.
눈은 따라가는데 몸이 따라오지 않는 느낌이라는 소리였다.
"왜 그러나! 그리 쉽게 대처하기가 어려운가?! 크흐흐흐흐흐!"
기괴한 광소를 흘리며 소리치는 그의 말대로 쉴 새 없이 날아드는 공격들은 하나하나가 직격하면 상당한 타격이 올법한 공격이었다.
자신의 목숨을 담보로 제힘을 과도하게 증폭시킨 놈은 라이프 베슬이 줄어들면서 모여든 힘과 제 생명을 불태워 나를 끊임없이 압박해 들어왔다.
조금만 긴장을 놓아도 그대로 직격당할 만한 위력적인 공격이 파고들어 오자 나는 홍단이를 허공에 던진 뒤 빈손에 마나를 끌어모았다.
[8서클 마법]
[폭염계]
[프로메테우스.]
화륵.
아주 순간,
푸른 화염이 손끝에서 번뜩이자 나는 미련 없이 그대로 손가락 끝에 각각 머금어진 다섯 개의 아주 작은 불덩어리를 허공에 던졌다.
콰아아앙!!!
그리고, 그 순간 터져 나온 거대한 폭음이 일순간 일대를 뒤집어엎었다.
천장을 가득 메우며 파고드는 공격 속에서 나는 아주 잠깐의 틈을 찾아 헤맸다.
그리고, 그 틈이 보인 순간.
"홍단이. 가자."
허공에 뛰어두었던 홍단이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스스로 움직이며 붉은색의 섬광을 만들어냈다.
콰작!!!
순식간에 파고든 홍단이의 검 끝은 결국 놈의 몸을 꿰뚫고 벽에 처박아버렸다.
거기에 멈추지 않고 나는 청단이를 얼굴 높이 까지 들어 올린 후 뒤로 당겼다.
[중검]
[초 신속 발검]
[대지진]
이 아래에 뭘 숨기고 있는지는 모르겠다만.
그렇게 필사적으로 내 발걸음을 막겠다면 밀고 나가는 수밖에.
순간적으로 청단이를 쥐고 있던 팔의 근육이 꿈틀거리기가 무섭게 새파란 기류가 넘실거리며 주변을 장악하고.
일순간 청단이의 검신이 세로 360도로 회전하며 지면을 갈랐다.
그리고 반월 형태로 빚어진 초고밀도의 검기가 압도적인 중량을 심은 채 지면을 파괴하며 그의 몸을 향해 날아들었다.
쿠웅!!!!
작정하고 베어버리고자 마음먹은 만큼.
이번 공격은 지금까지 놈과의 싸움에서 보여주었던 어떤 공격보다도 묵직하고, 파괴적이었다.
* * *
일순간 고요해진 공동.
결국, 싸움의 결과는 정해져 있었다.
청단이와 홍단이가 없었다면 이렇게 쉬운 싸움이 될 수 있었을까.
단연코 나는 고개를 저을 자신이 있었다.
물리 법칙을 베어내는 검과 비물리 법칙을 베어내는 검이 있기에 그를 이토록 쥐고 흔든 것이지. 평균적인 방법으론 상당히 곤욕을 치렀으리라.
"크흐......크흐흐흐......."
주변을 가득 메운 먼지 구름 속에서 천천히 걸음을 옮기던 나는 문득 들려오는 기괴한 웃음소리에 소리의 지원지로 천천히 걸어 들어갔다.
그곳에는.......
반쯤 몸이 증발해버린 리치, 클레르 오르판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네놈의 존재를 저주한다."
"네 저주를 내가 품어주마."
담담하게 말하며 놈의 두개골을 짓밟은 나는 녀석의 가슴에 꽂혀있던 홍단이를 뽑아 들었다.
단번에 죽지 않은 것으로 보아 청단이의 검기를 가까스로 피한 듯한 모양새였다.
물론, 완전히 피하지는 못했는지 그의 생명 자체는 꺼져가고 있었다.
"이렇게 해서 남는 게 뭔데."
사실 조금 궁금했었다.
사령마나는 조금 흉폭한 성정을 지니고 있지만, 결과적으로는 사용자의 심성에 따라 그 효율이 정해진다.
사령마나가 어둡고 칙칙하다 해도 이것으로 얼마든지 수많은 사람을 살릴 수 있고, 또 지킬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오랜 시간 유적에서 깨어나기가 무섭게 주변의 모든 것을 파괴했다.
"남는 것이라......그래, 결국 내게는 남는 게 없군."
담담하게 말한 그가 끌끌 웃어 보였다. 서서히 죽어가는 마당이니 굳이 목숨줄을 끊어줄 필요는 없어 보였다.
"하지만 내 주군께 맹세한 나의 맹세는 남았음이니."
그의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번뜩였다.
끼이이이이이익.......
그리고, 아주 거슬릴 정도로 크고, 고요한 울림소리가 울려 퍼져왔다.
오랜 시간 기름을 칠하지 않은 거대한 목재 문의 경첩에서 나는 듯한 소리였다.
푸욱!
그리고.
아주 순간적으로 나는 내 가슴을 뚫고 지나간 무언가에 눈을 살짝 찌푸렸다.
"......"
"마침내......마침내 그분께서 깨어나셨으니! 모든 것은 그분의 발아래 놓이리라! 추악하고 추악한 인간을 멸하고 모든 것은 본래의 길을 되찾으리니!!"
죽어가는 클레르 오르판의 외침과 함께 완전히 무너진 공동의 바닥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아주 순간적으로 일어난 폭발 속에서 무형의 기운이 내 몸을 강타하며 나를 수 미터 가량 밀어냈다.
저벅......저벅......
공동이 무너질 법한 거대한 굉음과 진동 속에서 말없이 내 가슴을 내려다보던 나는 아주 작은 발걸음 소리를 감지하고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그곳에는 무표정한 표정으로 걸어오고 있는 검은 복장의 여성이 있었다.
창백한 피부.
이마에 돋아난 푸른색의 보석.
분명 면식이 있는 여자였다.
하지만, 그녀는 저토록 강대한 힘을 내뿜은 적도, 저렇게 마에 물들지도 않았었다.
"미쳤습니까?"
담담한 내 질문에 여성은 그저 무표정한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질문을 바꿀까요? 앨리스 성녀후보, 돌았습니까?"
이어지는 내 질문에 여성은 발치에 쓰러진 해골, 클레르 오르판을 향해 천천히 손을 뻗었다.
"오오.......주군이시여.......나의 주군 사령왕 데이안이시여! 당신의 부활을 꾀하여 이날을 기다려 왔나이다! 비록 완전한 부활을 이뤄드리지 못한 불충한 자에게 벌을 내려주소서!!"
신을 부르짖는 광신도처럼 꽥꽥 소리 질러 대는 그를 바라보던 여성이 천천히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나를 바라보고는 끝을 알 수 없는 깊이의 눈동자를 번뜩였다.
푸욱!!
섬뜩한 파육음은 거침없이 들려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