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8
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
- 9권 7화
75. 전쟁을 막으려는 자와 전쟁을 하려는 자
순간적으로 눈이 번뜩인다.
-데이비?
조건이 너무 파격적이라 솔직히 조금 놀란 감이 없잖아 있다.
'거래하나 하자고 세상을 이루는 법칙을 바꾸겠다고?'
사신수의 잠금 해제.
사신수란 4마리의 신수를 말한다.
그리고, 그 신수라는 것들은 모두가 다른 대륙에서 일찍이 인간들이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염원을 모아 만들어낸 존재이기도 하다.
당연 티오니스 대륙에선 도술의 존재도, 사신수의 존재도 존재할 수 없다만.
여기서 사신수의 잠금을 해제한다니.
다른 말로 하면 내 전생의 세상에서 갑자기 초능력이 튀어나오게끔 하겠다는 소리와 무엇이 다른가 싶었다.
섭리, 규칙 그 자체이기에 불가능하진 않겠지만. 마냥 신의 의지라고 해도 쉽게 내릴 결정은 아니었을 텐데.
-데이비?
의아한 듯 내 이름을 불러오던 페르세르크가 펑! 소리를 내며 본래의 작은 모습으로 돌아갔다.
그리고는 내게 다가오며 고개를 이리저리 갸웃거렸다.
-왜 그러는 게야?
"......아무것도 아니야."
좋다. 나쁘진 않다.
다만,
기회라면 좀 더 뜯어낼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을 하기가 무섭게 나는 눈앞이 핑 돌며 정신이 아찔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이거, 어디서 한번 겪어본 건데.
-데이비? 데이비!!
깜짝 놀란 페르세르크의 외침이 서서히 멀어지는 것을 느끼며 나는 저항 없이 그대로 의식을 놓았다.
* * *
역시나 정신을 차렸을 때 내 눈앞에 보인 것은 끝없이 펼쳐진 황혼색의 창공과 백색의 옷을 입은 수많은 기이한 존재들이었다.
백의에 백색의 거대한 날개를 입은 이들은 내 마음이 투영되어 만들어진 천사라는 존재들일 것이다.
실존하진 않지만, 실체가 없는 신이 누군가와 접촉할 땐 가장 그에게 익숙한 형태로 다가온다.
대화는 불가능하지만, 의지는 분명 존재한다.
말없이 내 머리에 손을 얹은 채 고요하게 있던 존재는 이윽고 아무것도 없던 하얀 손위에 빛을 끌어모으기 시작했고 이내 옅은 주홍빛의 돌멩이 하나를 내게 내밀었다.
그 돌멩이가 무엇인지는 알고 있었다.
이미 한 차례 받아보지 않았던가.
다시 흐려지는 시야 너머로 나는 부드러운 무언가가 내 뺨을 쓸어내리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 * *
"데이비 왕자님 소문 들었어?"
"아, 들었어요 들었어요. 의식 불명이시라면서요? 갑자기 왜 그렇게 된 거래요?"
"낸들 알겠니? 다만, 소문에 의하면......."
누군가의 소곤거림이 가까워졌다가, 서서히 멀어진다.
"이번 토벌에 단신으로 이 일의 원흉을 토벌하러 갔다고 했잖아? 아마 거기에서 상당히 무리를 한 모양이야."
"음......꽤 멀쩡해 보였었는데......."
"모를 일이지, 속은 무리로 인해 썩어 문드러졌는데 아닌 척 숨기고 있었을지."
"세상에......왜 그렇게 한 거래요?"
"성자님이라잖아, 혹시 알아? 괜히 신경 쓰이게 하기 싫어서 숨겼던 건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던 건지."
"그래도 성자님이신데, 나쁜 이유는 없지 않았을까요?"
"안 그래도 동기가 높으신 분들이 이야기하는 걸 들었는데, 괜한 부담을 주기 싫어서 아파도 안 아픈 척 속이고 계셨다는 모양이야."
"어머나......."
멋대로 예민해진 청각 때문에 멀리서 들려오는 목소리는 자장가처럼 의식을 몽롱하게 만들었다.
"이번 사태가 어디 좀 크니? 듣자 하니 데이비 왕자님 이번 일에 참전하면서 아무런 금전적인 대가도 요구하지 않았다고 해, 홀로 적진에 뛰어들어서 그만큼 큰 보상을 냈으면서도 말이야."
"정말, 대단하네요......."
몽롱하게 감겨있던 눈이 천천히 뜨여지자 눈앞의 누군가들이 화들짝 놀라는 게 보였다.
'페르세르크.'
-데이비! 깨어난 게야?
'내가 얼마나 잤나.'
-나흘.......
무리를 하긴 했었던 모양이었다.
의도하지 않은 강제 수면이라니, 웃길 노릇이다.
한번 해본 일, 두 번을 못할까.
신의 의지는 두 번째 접신을 통해 내게 무언가를 건네주었다.
생긴 것만 봐선 분명 일전에 받았던 [잔불], 여분의 생명인 그것과 비슷했지만, 그 느낌이 미묘하게 달랐다.
"끄응......"
"깨......깨어나셨군요!"
당황하는 시녀들을 발견한 나는 곧 의원을 부르겠다며 뛰어나가려는 시녀들을 제지했다.
"그만."
"하지만."
"내가 의사입니다. 내 몸은 내가 잘 알고 있으니 신경 쓰지 말고 나가보세요."
담담한 내 말에 그녀들의 얼굴에 당혹감이 어렸다.
"그래도...... 리나 성녀님께서 깨어나시면 반드시 연락을 하라고 하셔서......."
"괜찮습니다."
빙그레 웃어주자 시녀 중 하나가 얼굴을 살짝 붉게 물들였다.
"아......알겠습니다."
결국 고개를 숙이고 시녀들이 물러나자 방안은 고요함만이 남게 되었다.
"정치질 성공적."
-이 와중에도.......
"모든 여론은 시종과 시녀의 수다질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잊지 마라."
이런 여론질 하나하나 무심하게 넘겼다간 언제 한번 크게 데이는 순간이 올 거다.
무슨 계획을 짜도 다른 사람과 연관이 될 땐 모든 계열의 변수를 예상해야 한다.
누군가가 이런 상황에서 이렇게 할 거다.
막연하게 그 생각만 가지고 도박질 하다간 패가망신하는 것도 한순간이니까.
내 경우 전체적인 흐름이 조금씩 보이는 탓에 어찌 행동할지가 흘끗하게나마 보이는 편이지만, 그것만으로는 사실상 판단하기 어려웠다.
방의 한켠에 비치된 소파에는 언제 현신을 했는지 두 명의 쌍둥이 꼬마 소녀들이 서로 한 소녀를 끌어안은 채 새근새근 잠들어있었다.
그리고 그 붉은 머리와 푸른 머리 소녀의 안는 베개가 되어있던 은발의 소녀는 조용히 감고 있던 눈을 뜨며 나를 직시했다.
아주 순간, 은발의 소녀의 머리에 있던 원고리가 반짝거리며 형태가 변했다가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데이비님, 생체신호가 매우 안정적, 특이사항 없음, 전체적인 컨디션 수치, 95% 돌파라고 분석. 유례없는 만족 수치. 이것을 륀느가 높게 평가."
"륀느."
"데이비님의 회복을 륀느가 높게 평가."
안도하는 듯한 그 목소리에 나는 더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나흘이라......."
이전엔 몇 시간 정도 정신을 놓는 정도로 끝난 접신이 두 번째 만에 나흘까지 늘어났다.
횟수가 반복될수록 그 시간이 늘어나는 건지, 아니면 그 전에 내가 사용한 힘이 너무 많아서 쌓인 피로가 터진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전후자 모두가 포함되는 사항은 아닐까 싶기도 한 나였다.
-이제 괜찮은 게야?
"그래, 훨씬 개운하네."
근육을 쓰면 성장하듯, 몸의 마나를 사용하면 할수록 그 양이 무의식 속에서도 미량 늘어난다.
계속해서 적절한 운용을 해준 덕분에 마나량은 지금 이 순간도 조금씩 늘어나고 있는 게 현실이었다.
최고의 컨디션이 되어버린 몸이 제법 만족스러워져 이리저리 몸을 움직이던 나는 손에 쥐어진 익숙한 감각에 이불 밖으로 손을 꺼냈다.
-맙소사....... 이 모양은 잔불이로구나!
"조금 다른데?"
눈을 크게 뜬 페르세르크의 말과는 다르게 잔불로 추정되는 그 돌멩이의 색은 이전보다 조금 짙었다.
모를 땐 직접 보는 게 답이지.
곧바로 그녀의 권능을 빌려와 끌어다 쓰자 눈앞에 그 항목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잔불]
[변이된 신물]
[사용자의 육체 및 정신이 붕괴할 시 한 번의 재구성.]
[남은 수량 1회]
[특수 조건 - 사용 여부는 자동 발현.]
-음? 별로 달라진 게 없는데?
"아니지, 오히려 좋아졌네."
놀라웠다.
이전에 사용했던 잔불은 분명, 초월체급 이상의 적과의 싸움에서 자동 발동이었다.
하지만, 이번엔 그런 항목이 없어진 건 물론이오, 육체뿐만 아니라 정신의 붕괴도 범위에 포함이 되기 시작한 것이다.
게다가 한 번의 부활도 아닌 한 번의 재구성.
재구성이라는 단어.
내게는 제법 익숙하지 않은가.
-죽으면 환골탈태.......
"마냥 그렇게 되진 않겠지."
그에 필요한 여러 준비가 필요하겠지만.
그녀의 말대로 환골탈태를 노린다면 한 번 정도 목숨을 걸어놓고 도박을 해볼 가치는 있었다.
내 육체는 환골탈태가 거의 불가능한 기형적인 구조를 지니고 있으니 말이다.
반대로 환골탈태에 완전히 성공한다면.
이전의 불안정한 환골탈태 때처럼 어마어마한 성장 폭을 지니게 될 거라는 사실은 변함없다.
-그렇다면 당장 사용하는 게 옳지 않아? 그대는 이제 세계수와.......
"안돼."
생각을 접은 나는 곧바로 아공간을 열어 그것을 던져 넣어버렸다.
-어째서?
"불안정한 환골탈태와 완전한 환골탈태는 달라."
한번 겪어보았기에 앞으로 더 변할 시 어떻게 될지 본능적으로 알 수 있다.
이건, 내 육신을 되돌리는 회복수단, 혹은 성장의 촉진 요소가 되면서.
반대로 어마어마한 폭탄이다.
뻐근한 몸을 일으킨 내가 천천히 팔다리를 움직이고 목을 꺾은 뒤 몸을 풀었다.
그리고는 걸음을 옮기며 말했다.
"내 몸은 지금 압축된 폭탄이야. 멋대로 이걸 써서 환골탈태를 했다간, 아마 대 폭발이 날 거다."
그 범위는 아마 내가 상상하는 그 수준을 아득히 넘어갈 것이다.
* * *
신이 내건 조건인 사신수는 신의 의지라는 존재가 없는 다른 세상에서 살았던 인간들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낸 염원의 상징이다.
당연 모든 힘은 그 염원의 집합체인 사신수에게서 나오는 만큼 사신수의 존재가 존재할 수 있는가 없는가의 차이는 하늘과 땅 차이라고 할 수 있다.
덜컥.
이윽고 아직 사후문제로 정신이 없을 연합 회의장에 들어서기가 무섭게 수많은 눈동자가 내게 닿았다.
미묘한 경계, 혹은 놀라움이 담긴 시선들이다.
"데이비?"
"데이비 왕자님?"
놀란듯한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들려왔다.
-그대는 근 나흘 가까이 죽은 듯 누워있었으니까. 모두 그대가 이번 일로 굉장히 무리를 했다고 생각하는 모양이야.
'......'
-하, 웃기지도 않아, 이들은 지금 그대가 자신의 몸도 돌보지 않고 위험을 몰아냈다고 오해하고 있다고.
의도하지 않은 오해지만.......
그런 오해.
매우 좋습니다.
"제가 늦었네요."
"아......아닙니다! 몸은 괜찮으십니까?"
"제 몸 관리할 여력이 어디 있습니까. 아직 중요한 일이 남았는데."
내 말에 몇몇이 놀란 표정을 지어 보였다.
이기적이라고 생각했던 이가 의외의 책임감과 헌신을 보여주면 당연 당황스러울 거다.
"정화되어야 할 건 정화되어야겠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고, 내가 해야 하는 일이면 응당 하는 겁니다. 책임을 지기로 했으면 끝까지 합니다."
"하......하지만 아직 회복도 못 하셨는데......."
"제 몸은 제가 잘 압니다."
여기서 한번 고집을 부리듯 말한다.
내 몸은 괜찮지 않지만, 버틸 수 있다.
그 의미를 모르진 않으리라.
마음에도 없는 말을 하자 사방에서 놀란 듯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실제로는 핑핑 날아다닐 만큼 쌩쌩한 몸이지만.
까짓거, 아픈 환자 흉내 한번 못 내줄까.
"세상에......데이비 왕자님......그렇게까지 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신관분들이 장기적으로 정화를 해주시고 계십니다. 길어야 몇 년 정도면......."
"그 사이에 그곳에서 나온 미약한 사기에 노출된 이들이 질병이라도 걸리면요. 애꿎은 목숨이 이 이상 날아가는 걸 막겠다고 하는 겁니다."
"데이비 왕자님 스스로를 챙기셔야지요! 왕자님은 비록 성국의 소속은 아니지만 유일하게 성흔을 받으신 분 아닙니까."
"그렇기에 나서는 겁니다. 신의 사랑을 받은 자가 게으를 순 없습니다."
사랑? 웃기는 소리.
게으름?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거다.
이렇게까지 나설 줄은 몰랐다는 듯 살리반 황자가 중얼거린다.
한켠엔 감격이라도 한 듯 리나 성녀후보가 한 손으로 입을 가리고 눈을 크게 떴고, 다른 국가에서 온 이들도 설마 내가 그런 입장을 표명할 줄은 몰랐는지 놀란 표정들이다.
큰 효능이 있으리라곤 기대하진 않지만.
저들에겐 내가 몸 상태도 확인하지 않고 인류를 위해 헌신한 성자의 모습으로 비친 듯 보였다.
그 반면.
"......"
"......"
내 실체를 아주 잘 아는 두 사람.
일리나와 율리스는 서로 눈치를 교환하며 짧게 한숨을 내쉴 뿐이었다.
"곧바로 숲을 정화할 겁니다. 쿨럭......쿨럭......걱정 마세요. 제가 조금만 더 나서면, 모두가 안전해질 수 있습니다."
적당히 입안에 상처를 내 피가 섞인 기침을 토해내자 반응이 아주 열렬하다.
내가 이런 과도한 오버 액션을 취하는 이유는 눈앞의 이들 때문이 아니었다.
놀란 듯, 내 헌신에 감동한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각국의 하위 기사들이나, 병사, 혹은 시종 시녀들이 메인타겟.
소문이라는 건 말이다.
의외로 잘 퍼지고 빨리 퍼지며.
과장이 잘되는 법이기도 하다.
때마침 이곳은 수많은 국가의 인간군상들이 모인 장소.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고 했던가.
"데이비 왕자님! 무리하신 후 아직 몸이 회복되지 않으셨을 텐데! 애초에 금전적인 보상이나 직접적인 보상도 원치 않으셨으면서 이렇게까지 하시지 않으셔도......."
"제가 할 수 있는 일이고 해야 하는 일이지요. 이대로 두면 많은 사람들이 고통받을 겁니다. 보상보다 인간의 목숨이 중요한 겁니다 살리반 황자님."
지친 얼굴을 한 채 말하자 몇몇이 감동한 표정까지 지어 보였다.
개중 가장 감동받은 듯한 얼굴을 하는 멍청이는 다름 아닌 살리반 황자였다.
아이고, 순진한 양반들 같으니라고.
-그대 표정 연기가 너무 사실적이라는 게 저들의 잘못은 아니지.
속은 놈이 잘못인 법이다.
* * *
사박......사박......
팔란 제국의 서부.
작은 사막 지역으로 로브를 입은 인영 몇몇이 천천히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유르겐님. 이게 정말 잘된 일일까요."
"의심하지 말게, 신목의 어머니께서 말씀하신 것을 자네가 의심하면 근본부터 뒤틀린다는 것을."
"하지만......."
"엘프도 생명이 아니겠는가. 언제까지고 고고하게 살 수는 없는 법인 게지. 게다가 그 데이비라는 인간과의 싸움을 피할 수 없다면. 차라리 최대한 엘프에게 이득이 되는 방향을 찾는 수밖에."
"팔란 제국은 인간들의 국가에서도 가장 대국이라 하였죠. 그들이 데이비 왕자를 잡아들이는 데 도움을 줄까요?"
"교섭해 봐야겠지....... 인간은 욕심에 충실하니, 제국이 거부할 수 없을 만한 제안을 내놓는다면, 우리에게 조력을 해줄 거라는 게 신목의 성자께서 내리신 결단일세."
"하긴....... 제국의 입장이라면 뭐, 알지도 못하는 소국의 왕자보다는 엘프의 제안이 더 끌리긴 하겠네요."
그들은 모르고 있었다.
이 상황에 대비해 그 소국의 왕자라는 놈이 지금 무슨 정치질을 하고 있는지 말이다.
담담한 엘프 남성과 젊은 엘프 소녀의 대화는 스산하게 부는 모래바람에 묻혀 완전히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