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12
만렙 영웅님께서 귀환하신다!
- 9권 11화
가늘고 거대한 포효가 일대 숲 전체를 뒤덮었다.
동시에 불닭이의 의지를 대변하듯 타오르는 불길은 더욱 거세지며 일대를 거대한 화염의 파도를 만들었다.
불닭이는 말 그대로 신이 났다.
그리고 맹렬하게 분노했다.
자신을 향해 먼저 공격을 가한 존재들에 대한 분노가 맹렬하게 타올랐고.
분노를 참지 않고 신나게 지를 수 있는 기회가 왔기에 기뻐했다.
이곳에 있는 그 어떤 것도 자신을 막을 수 없다!
그러니 자신은 약하게 태어난 것이 아니다!
자신은 위풍당당한 신수이며! 영험하고 영리한 존재!
끼이이익!!
거대한 화염 날개를 펄럭이며 제 존재감을 다시금 드러낸 불닭이는 자신의 앞을 막아서는 물방울로 이루어진 생명체를 짓밟은 채 숨을 헐떡이고 있는 두 남녀를 바라보았다.
산소가 타들어 가 숨을 쉬는 것조차 힘들 만큼 주변의 상황은 안 좋다.
하지만 불닭이에겐 이것만큼 좋은 상황도 없었다.
불닭이는 불의 사신수인 주작.
당연 불이 많으면 많을수록 그 환경이 불닭이에게 유리해질 수밖에 없다.
"괴......괴물 같으니."
지친 음성으로 긴 귀를 가진 인간이 중얼거리자 불닭이가 심드렁하게 숨을 뱉어냈다.
그리고는 날개를 펄럭이며 그 거대한 몸을 가볍게 띄워 올렸고 이내 부리를 벌리며 입안에 초고열의 에너지 덩어리를 모으기 시작했다.
찌잉!!
광선이 쏘아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순식간에 에너지 덩어리가 지면을 훑고 지나가며 두 사람을 노리자 광선이 닿았던 지면부터 새빨갛게 변색되며 이내 고열의 화염이 일어났다.
강렬한 한방을 버티지 못한 지면이 녹아내릴 만큼 강렬하다.
반사적으로 이것은 위험하다라고 판단한 긴 귀의 남성이 여성을 낚아채 몸을 던졌다.
찌잉!!
물론, 브레스를 한번 쓴다고 두 번 쓰지 말라는 법은 없다.
또다시 고열의 광선이 날아들며 마치 광선으로 만들어진 검을 훑은 것처럼 나무들이 서걱서걱 잘려나갔다.
"유......유르겐님!"
"빌어먹을 상급 물의 정령조차 손을 못 쓸 정도라니!"
"위험해요. 일단 도망쳐요."
"안 된다! 우리 임무를 잊지 마라. 인간의 제국인 팔란 제국으로 가서 신목의 어머니께 저주를 퍼부은 그 인간을 제압해 가야 한다!"
사내의 외침에 불닭이의 눈이 가늘어졌다.
말을 알아듣긴 하지만 솔직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알 수 없었다.
무엇보다.
관심이 없다.
알게 뭔가! 중요한 건 놈들이 자신의 성질을 건드렸다는 것인데!
아 몰라, 다 태워버려!
-끼이이이이이익!!
거대한 포효가 다시 한 번 주변에 쩌렁쩌렁하게 울려 퍼졌다.
"하지만 놈이 너무 강해요!"
"망할!"
그리 외치며 소녀 쪽에서 지팡이를 꺼내 들었다.
"일단 여길 벗어나세요! 상대가 너무 강하잖아요!"
다급하게 소리친 소녀의 지팡이에서 특유의 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동시에 미묘한 이상함을 눈치챈 불닭이가 다시 브레스를 머금었다.
그리고는 광선을 한 차례 강렬하게 방출한 뒤 새빨간 화염을 터뜨리며 날아올랐다.
그리고는 전광석화처럼 날아들어 두 인간 중 하나의 뒷덜미를 물어 챘다.
"에밀리아!!"
기겁한 남성의 외침에 불닭이는 옷깃을 물어 허공에 들어 올린 작은 소녀를 사정없이 흔들어 기절시켜버린 뒤 그대로 남성을 짓밟아버렸다.
죄 없는 인간은 죽이면 안 된다고?
자신을 공격한 놈인데?
일단 태워버려!
입에는 긴 귀의 인간 여자가 물려있으니 브레스는 쏠 수 없다.
물론, 브레스가 없다고 아무것도 못 할 자신이 아니다!
불닭이는 허공에 날아오르면서 그대로 날개를 펄럭였다.
쿠르릉.......
동시에 좁은 지역의 하늘에 뜬 구름들이 새카맣게 변하기 시작하더니 그곳에서 불덩어리들이 낙하하기 시작했다.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의 비주얼이 담긴 공격에 유르겐이라 불린 사내가 허탈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세상에......어디서 저런 괴물이......."
하늘에서 쏟아지는 불의 비를 보며 허망하게 손을 뻗어 불닭이의 주둥이에 로브 자락을 물려 대롱대롱 흔들리는 소녀를 가리키던 그는 곧 쏟아져 제 몸을 완전히 불태울 화염을 무시한 채 한 발 내디뎠다.
그리고
푸쉬이이이익!!
갑작스레 주변을 불의 지옥으로 바꾸던 화염이 일순간 모조리 사라졌다.
불닭이의 얼굴이 한 차례 굳었다.
딱히 신호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단순히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지금 당장 돌아가지 않으면 아주 큰 일 난다는 것을 말이다.
반사적으로 몸을 돌린 불닭이는 제 입에 누가 물려 대롱대롱 흔들리고 있는지도 잊은 채 맹렬한 속도로 방향을 틀어 날기 시작했다.
* * *
"성질 죽이려고 했더니 산책 보내기가 무섭게 그걸 풀고 있네."
-동물이건 신수건 자유로운 존재들이야, 언제까지고 그 본능을 억압할 수 있다고 생각했나?"
"......그렇긴 하지. 특히 불닭이는 아직 어리니까."
다 자란 성체와 비교해도 육체적인 크기는 거의 차이가 없다.
하지만, 반대로 정신은 아직 많이 어린 녀석이다.
마냥 옥죄면 후환이 클 거라는 사실은 이미 알고 있었다.
그래서 보냈다.
분노의 신수인 만큼 적당히 그 분노를 풀어줄 방법은 필요했다.
성장한 후에는 스스로 그것을 컨트롤하고 분노를 마냥 발산하지 않을 수 있지만, 아직 어린아이에게 그런 것까지 바라기엔 너무 큰 것을 바라는 꼴일 테니 말이다.
저 멀리서 새빨간 존재감을 드러내며 허겁지겁 날아오는 녀석을 보며 나는 빙그레 웃고는 손을 들어 까딱였다.
후웅!!
그리고.
내 앞에 도착한 불닭이는 이내 떨리는 눈으로 나를 보더니 입에 물고 있던 것을 바닥에 휙 던져버리고는 내게 달려와 부리를 들이밀었다.
매를 맞을 거로 생각했는지 맞기 전에 애교를 부려 무마시켜보겠다는 마음가짐이 훤히 보였다.
-귀......귀여워.......
그 행동거지를 먼저 이해한 전(前)마왕님은 그런 불닭이의 행동이 잔망스러운지 키득거렸고 륀느는 묘하게 뾰로통해진 표정을 지어 보였다.
신수를 상대로 질투하지 말라고 말하고는 싶다만, 어서 부리를 쓰다듬어 달라고 저돌적으로 돌진하는 녀석이 우선이었다.
"그래, 우리 불닭이."
내가 직접 녀석을 불러주자 아주 미약하지만 떨림이 느껴졌다.
공포 자체는 확실히 새겨진 듯한데.
"잘 놀다 왔어?"
-끼.끼잉.......
약한 소리를 내며 스스로 내 손에 부리를 비벼대는 녀석의 모습에 퍽 웃음이 나왔다.
성질만 다들 죽이면 제법 마음에 드는 신수들이다.
왼손으로 턱을 받치고 오른손으로 부리의 등을 살살 쓸어주자 녀석의 눈에 안도감과 나른함이 동시에 서리기 시작했다.
"그런데, 말이다?"
그때였다.
내 입에서 작은 중얼거림이 흘러나오자 녀석의 몸이 움찔거렸다.
"저 숯검댕이는 뭐냐."
내 말에 불닭이의 행동이 딱 멈춰버렸다.
겉보기엔 숯검댕이다.
하지만 정령마나가 미약하게 남아 저 숯덩어리를 덮어쓰고 있는 이를 보호하고 있는 게 훤히 보였다.
"내가 분명 인간은 아무나 막 공격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삐익!! 삐이이이익!!
미소가 사라진 내 입에서 흘러나온 목소리 때문일까.
불닭이는 미친 듯 소리 지르며 날개를 펄럭였다.
그러더니 이제는 급기야 몸을 돌려 바닥에 등을 깔고 배를 보이며 아양을 부리듯 몸을 이리저리 비틀어댔다.
-쿡쿡.......
"......"
이미 돌이킬 수 없다면 최대한 애교를 부린다는 마음가짐인지.
신수의 자존심이고 뭐고 다 버리고 애교를 피워대는 녀석을 보고 있자니 마냥 겁을 주는 것도 입맛이 동하지 않을 지경이었다.
결국, 녀석의 목 부분을 살살 긁어준 뒤 나는 미련 없이 천천히 다가갔다.
그리고는 로브를 스윽 들춰보고는 미소를 완전히 지워버렸다.
"......"
-데이비? 뭘 봤길....... 프리아님 맙소사.
의아한 듯 쪼르르 날아와 로브를 벗긴 존재를 확인한 그녀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뒤이어 불닭이의 애교를 보며 얼굴을 붉히고 있던 일리나 또한 천천히 다가왔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엘프......?
"엘프가 왜 여기 있어."
조금 황당한 기분을 지울 수가 없었다.
이에 나는 기절해버린 소녀의 뒷덜미를 낚아챈 뒤 중얼거렸다.
엘프라면 그 누구보다 잘 아는 이가 하인스 영지에 하나 있다.
"잠시 하인스로 돌아가야겠다."
내 말에 눈을 번뜩인 륀느가 급히 달려와 내 다리에 찰싹 달라붙었다.
"하인스 영지로 돌아간다고? 여기서? 어떻게?"
"이렇게."
우웅!!
내 말과 함께 거대한 풍압이 일어나며 마법진이 형성되자 일리나는 그러면 그렇지 라는 표정으로 한발 물러났다.
"그래....... 내가 상식을 요구할 놈에게 요구해야지....... 다녀와. 나는 이제 돌아가 볼 테니까."
미련 없이 돌아서는 그녀를 둔 채 나는 공간을 넘어섰다.
* * *
"어머! 은공?"
오랜만이라면 오랜만이라고 할까.
조용한 자연 친화적인 방 내부에서 말없이 차를 음미하고 있던 유리아 헬리샤나가 두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나를 바라보았다.
분명 그녀가 거주하고 있는 곳은 엘프들의 주거지가 모인 곳에서 가장 중심부에 위치한 아담하고 아름다운 나무집이었다.
말이 나무집이지 겉면의 강도가 거의 금속 급으로 단단해지는 엘프 특유의 건축기술이 섞인 곳이기도 했다.
자연 친화적인 종족답게 그들은 그들만의 문화를 잘 유지하고 있었다.
"가셨던 일은 잘되셨나요?"
"뭐, 적당히 해결됐어. 식량 가격이 당장 치솟는 건 어쩔 수 없다만, 더 좋은 걸 얻었거든."
섭선과 방울가지를 꺼낼 수 있게 되었고.
주신 프리아 여신과의 다툼 속에서 신수의 존재를 허락받았다.
신수라는 건 단순 소환수 개념을 넘어선다.
주작은 불을 관장하는 만큼 내가 주작과 계약상태라면 주작이 강해지는 만큼 내 불 관련 주술이나 도술이 강해지고 다양해진다.
청룡이라면 뇌 속성 풍속성 관련 주술이나 도술이 강해지고.
현무는 물.
백호는 땅.
간단한 예시이지만 사신수의 잠금 해제는 그런 의미도 지니고 있는 것이다.
"갑자기 찾아와서 미안해. 의논할 일이 있어서."
갑작스레 자신의 집으로 들이닥쳐 불쾌할 만한데도 유리아는 잘되었다는 듯 옆에 놓인 찻잔을 들어 내게 건네주었다.
"마침 잘되었네요. 은공께 보여드리고 싶은 신품 차가 있답니다."
"재료는?"
"헤헤."
빙그레 웃으며 말끝을 흐린다.
"네가 먹는 걸 보니 맛 자체는 준수하겠네."
그리 말하며 그대로 벌컥벌컥 들이키자 지금까지와는 다른 은은한 향이 입안 가득히 감돌았다.
"뭘 넣은 거야."
"박하 개미의 껍질을 조금 잘라 우려냈답니다."
"갈수록 기괴해지는구나."
헛웃음을 흘리자 그녀가 키득거렸다.
"왜 아무도 제 입맛을 알아주지 않는 걸까요. 뮤우도 그렇고. 딱히 외관적으로 이상한 차도 아닌데."
"그러고 보니 녀석은?"
"쿡쿡, 도망갔답니다. 횡설수설하면서 뒷걸음질 치는 게 어찌나 귀엽던지."
보아하니 차를 마시기 싫다고 잽싸게 튀어나간 모양이다.
현재 뮤우는 유리아가 데리고 살고 있는 모양이니 말이다.
이윽고 나는 그녀와의 잡담을 뒤로 한 채 손에 쥐어진 기절한 작은 소녀를 그녀의 앞에 툭 던졌다.
"어머나."
"혹시 아는 인물인가?"
내 질문에 그녀가 침묵했다.
"삼조관......에밀리아......그럴 리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그녀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고는 급히 달려가 그녀의 상태를 확인하곤 나를 올려다보았다.
"이......이게 어떻게 된 거죠?!"
당황한 그 외침에 내 눈이 가늘어졌다.
"아는 인물?"
"전대......신목의 성녀......분명 과거 신목이 잠들면서 같이 신목과 함께 잠들었다고 들었는데......."
"삼조관 에밀리아?"
"...맞아요. 이마에 있는 표식은 신목과 생을 함께하는 엘프들에게 주어지는 흔적이니까."
반쯤 옅어진 흔적을 가리키는 유리아의 말대로 소녀의 이마에는 반쯤 흐려진 그믐달의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처음 신목의 성녀가 되면 초승달 형태를 지니고 있어요. 그게 점점 커져서 상현달, 만월 하현달...그믐 순으로 변한답니다. 삼조관 에밀리아님은 전대 세계수의 의지께서 수명을 다하기 직전이었기에 그믐달이랍니다."
엘프의 수명은 평균적으로 200여년 특수한 경우를 거치면 500년 까지도 간다.
정말 특이한 케이스 인데 삼조관 에밀리아라는 이 소녀는 그러한 케이스 라는 모양이었다.
당연 이번 세대의 엘프들에게 전대 세계수의 의지는 그저 역사에나 나올법한 존재였지만.
삼조관 에밀리아의 모습은 어릴 때부터 신목의 보고에 존재하는 수정안에 잠든 그녀의 모습을 봐왔기에 그리 놀라울 것도 없었다.
"어떻게, 에밀리아님이 바깥에 계신거죠? 게다가...."
"나도 몰라. 불닭이가 잡아왔는데.. .그러니까 결론은 이거잖아. 이 에밀리아라는 꼬맹이는 신목의 엘프라고."
"엄밀히 말하자면 그렇죠."
"좋아, 그렇다면 인질이다."
내 말에 그녀가 키득거렸다.
"정말 막무가내시네요. 하지만 저는 은공을 따르겠어요. 가능하면 제가 곁에서 이분을 감시하고 보살피겠습니다. 저는 태어나서 단 한번도 이분이 눈을 뜨고 계신걸 본적이 없었지만요."
그녀의 말에 나는 미련없이 고개를 돌렸다.
"그래, 깨어나면 연락 수정구로 연락해."
"네. 살펴 가세요 은공."
"혹시 불편한 점은?"
"드워프 분들이 많은 것을 도와주셨어요. 그렇게 서로를 반목하는 사이였지만... 뭐 이것도 나쁘진 않네요."